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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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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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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영성과 영성신학
유해룡 교수
물질적이고 증거주의적인 현대문명의 흐름은 비물질적이고 초월적인 세계에 대한 경험의 필요성을 인식시키기가 어려운 시대로 만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좀 더 심도있고 신뢰할 만한 영적생활을 하고자 하는 욕구로 날로 더해 가고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이니 뉴에이지 운동이니 하는 움직임이 이런 영적 기갈증에 대한 또 다른 표현으로 해석되어진다. 그러나 신학자들은 그동안 이러한 문제를 공적인 주제로 가루기를 조심스러워 했다. 영성운동이 한 이름하에 메살리안니즘(Messalianism)이나 거짓 영지주의(Pseudgnosticism)등의 오류에 빠질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메살리안니즘이란 현실로부터 도피하여 내세주의로 기울려지는 경향을 말하고, 거짓 영지주의란 신적인 경험을 인간의 감정이나 정서적인 현상으로 환원시키려는 위험성을 말한다. 영성에 대한 이러한 선입감 때문에 영성을 신학의 중심 주제로 다루기를 꺼린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영성이란 주제가 신학 뿐 아니라 삶의 전 영역에 걸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그 여파가 기독교 정체성을 도전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 영성’의 역사적인 이해와 현재적인 이해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
1. “기독교 영성”이란 용어의 역사적인 조명
우선 바울의 용어인 “영적(프뉴마티코스)”이라는 형용사로부터 “영성(sprituality)"이란 명사적인 용어의 발달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바울은 고린도전서 2:14-15절에서 ”영적인 사람“과 ”육적인 사람“을 구별하고 있다. 이러한 구분은 비물잘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삶과 죽음, 그리고 선과 악을 구분하는 이원론적인 구분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의 지배 아래에 있느냐 혹은 단순히 자연적인 인간성의 지배 아래에 있느냐를 구분하는 바울의 신학적인 용어이다. 이러한 바울 신학적인 의미로 ‘영성(sprituality)'이라는 용어가 교부시대를 걸쳐 12세기 스콜라주의 시대 이전까지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13세기에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인 방법론이 신학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영성’이라는 말이 ‘물질 혹은 육체(materiality or corporeality)'와 상반되는 개념으로 발전하였다. 뿐만 아니라 교회적인 가치와 세속적인 가치를 대조하는 의미에서 ’영성‘이라 했고, 후자를 ’일시적인 것(temporality)'이라 했다. 17세기에 들어 영성이란 말은 보다 구체적인 용어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영성’이란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내면적인 삶을 대표하는 말이었다. 특히 감성적인 삶을 강조하는 경향이 짙기에 흔히 경멸적인 뉴앙스를 지닌 말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영성이란 열광주의 혹은 정적주의라는 말과 상통되는 의미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부정적인 인상을 불식시키기 위해 보다 냉정성과 절제성을 지닌 용어인 ‘헌신(devortion)'이라는 마로 대체되기도 하였다. 18세가에 이르러 ’영성‘이란 말은 엘리트적인 영성주의를 반영하는 용어로 발전되었다. 즉 ’영성‘이란 일상적인 믿음 생활과 다른 차원인 완덕은 추구하는 영적인 삶을 지칭하는 최상의 용어였다. 그러므로 영성적인 사람이란 신비적이고 영성적인 삶을 지도할 수 있는 신학적이고 경험적인 능력을 갖춘 사람을 의미하였다. 그래서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이르러 ’영성‘이란 말은 완덕의 삶을 성취하기 위한 내면적인 삶을 지칭하는 특별한 말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2. 영성신학이란?
살아있는 경험을 지칭하는 기독교 영성이 학문적인 용어에로 관심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60년대 후반에 걸쳐 70년대 초에 이르러 로마 카톨릭 교회 영역의 신학자들이 본격적인 관심을 표하기 시작했다. 선교에서 보여준 영성에 대한 가장 최근의 세계적인 관심은 80년대 중반이다. 세계교회 협의회(W.C.C)는 세계적으로 영성에 대한 중요성이 고조됨을 인식하고 1984, 1986, 1987년에 걸쳐 영성에 대한 주제를 주요한 의제로 다루게 되었다. 이로 인해서 10여년 전부터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 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영성’을 하나의 인정받는 신학적인 주제로 널리 다루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최근의 동향 외에도 사실은 그 이전 세기부터 영성 신학에 대한 역사적인 유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중세 스콜라주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신학과 영성이 뚜렸하게 분리되는 현상을 보였다. 스콜라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기독교 경험으로서의 영성의 주제를 그의 역작인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에서 윤리신학(moral theology)이라는 분야에 예속시키고 있다. 비로소 영성이 신학의 한 영역으로써 자리를 잡기 시작한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에 이르러서도 기독교 신학을 이론과 실천적인 영역으로 더욱 뚜렸하게 나누어 다루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로마 카톨릭에서는 이론적인 영역의 신학을 '교리신학(dogmatic theology)'이라 했고, 실천적인 영역을 ‘윤리신학(moral theoloy)'이라 했다. 개신교에서는 전자를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이라고 불렀고. 후자를 기독교 윤리 ’(Christian ethics)'라고 불렀다. 교리신학이나 조작신학은 고백적인 서술, 즉 ‘무엇을 믿느냐’를 다루는 영역이고, 윤리신학이나 기독교 윤리는 교리적인 고백의 의미에 따라서 ‘어떻게 사느냐’를 다루는 영역이다. 여기서 기독교 영성이 자리를 잡아야 할 곳은 전자의 조직 신학보다는 후자의 기독교 윤리에 더 적합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윤리는 그 의도보다는 그 포기 후훨씬 좁혀질 수 밖에 없었다. 우리가 고백한 교리에 따라서 어떻게 사느냐라는 삶의 전체적인 양식을 다루기보다는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잘 되었는가? 잘못 되었으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 라는 문자 그대로 윤리적인 질문에만 국한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윤리성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기독교적인 삶 즉 영적인 체험 등을 기독교 윤리에서 다루기에는 뷰적합한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17세기 로마 카톨릭에서는 윤리신학을 “수덕신학과 신비신학(ascetical thology/ mystical thelogy)"으로 더욱 세분된다. 수덕신학이란 마 5:48절의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말씀과, 마 19:21절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쫓으라“는 말씀에 기초한 것이다. 여기서 수덕신학의 목적은 완덕에 이르려는 것인데, ‘완덕에 이른다’는 말은 초인적인 인간의 노력을 통해서 모든 악을 극복하고 인간의 연약성을 극복할 수 있는 초월적인 성취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다. 수덕신학이란 완덕을 향한 내적인 말을 강조한 말에 불과하다. 책임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적인 노력을 강조하는 것은 사실이나 결코 완성적인 의미는 아니라 단지 준비적인 과정이다. 즉 하나님의 은총을 받기 위한 인간적인 차원에서의 준비과정이다. 반면에 신비신학이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는 (고전 2:9) 신비로운 영적세계를 다루는 분야이다. 신비신학이란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드러나는 것이 무엇이냐’에 관심을 보이는 영역이다. 다시 말하면 수덕신학이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을 다루는 것이라면, 신비신학은 히나님이 우리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를 다룬다. 그래서 수덕신학은 그리스도의 삶의 참여하기 위한 인간의 행위규범을 추구한다면 신비신학은 기도를 통한 하나님 경험의 발단단계나 그 의미를 탐구한다. 수덕신학과 신비신학은 반드시 순차적인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서로가 서로의 길을 열어주는 상호보완적인 관계이다. 이런 ‘영성’이란 말은 점차적으로 수덕신학과 신비신학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말로 발전되어 갔다. 그래서 일반적인 영성적인 경험뿐만 아니라 그 경험으로 이르는 모든 과정을 포함하여 ‘영성(sprititulality)'이라 했고, 방법론을 도입하거나 여타 가른 영역의 학문을 도입하여 영성적인 체험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이해하려는 시도를 ’영성신학(spiritual theology)'라 했다.
3. 영성의 현대적인 의미
이렇게 먼저 영성에 대한 역사적인 고찰을 제시한 이유는 아직까지도 영성에 대해서 보편적인 정의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역사적인 맥락은 통하여 독자들 나름대로 영성에 대한 의미를 설정하고 생각해 보라는 뜻이다. 그러나 현재 영성신학 분야에서 그런대로 역할을 해내고 잇는 몇몇 신학자들의 정의를 고려하면서 비교적 보편적인 영성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로 Joann Wolski Conn의 제안으로서 자아 초월적인 의미로서 '영'을 말한다.“자아 초월을 위한 능력 즉 진리를 알 수 있고, 사랑으로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우리자신을 사람들이나 어떤 이상에 자유롭게 내어줄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영성이라고 한다.” 두 번째 제안은 Ewert Cousins(카즌스)의 제안으로서, 그는 말하기를 “전통적으로 인간의 내적인 차원을 ‘영(spirit)’라고 했다. 이 영이란 인간의 가장 심원한 중심을 말한다. 초월적인 세계를 향해 인간의 자기 자신을 열어 보이는 곳이 바로 이곳이고, 궁극적인 실제를 경험하는 곳도 바로 이곳이다.” 즉 영성이란 인간의 자기 초월 능력과 관계가 있으며 그러한 능력으로 인해서 궁극적인 실제를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는 말이다.
세 번째 제안은 Sandra Schneiders(산드라 슈나이더)의 제안이다. 그녀 역시 영성을 자아 초월과 관련시키고 있다. “영성이란 고립과 자아 도취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파악하고 있는 궁극적인 가치를 향하여 자신을 초월하고 역으로 다시 현실로 돌아와 자신의 삶을 의식적으로 통합해 가는 경험을 말한다. 이런 영성적인 노력은 궁극적인 지평을 발견케 하고, 그 안에서 자신을 변화시키는 길을 발견함으로써 전인적인 삶에 고결함과 의미를 가져다 주는 가능성을 말한다.” 네 번째 제안은 Bernard McGinn의 것인데, 그것을 또 다른 정의라기보다는 위의 정의와 연관되어 있다. “기독교 영성이란 교리보다는 기독교적인 확신에 대한 살아있는 경험이다.”라고 했다.
이상과 같은 네 가지 정의들에서 영성이란 인간의 ‘자아 초월적인 능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용어가 아니라 경험과 연결되어지는 역동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일반적인 영성에 대한 정의의 패턴을 기독교적인 영성을 설명하려 할 때 ‘궁극적인 가치’나 ‘궁극적인 지평’이란 하나님을 의미한다. 인간의 자아 초월적인 능력이란 전통적으로 말하고 인가의 ‘영’을 의미하는 것이고, 구약 성서적인 의미로는 ‘하나님의 형상’을 말함이다. 바로 이러한 초월적인 자아능력은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반응하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한 경험들이 특히 신자들의 어머니인 교회라는 상황 속에서 이루어질 때 그것이 바로 전형적인 ‘기독교 영성’이 된다.
기독교 영성을 실천적인 영역에서 말한다면 그것은 전통적으로 관상과 기도의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관상과 기도의 삶의 모범자들인 성자들이나 신비가들에 대한 연구는 기독교 영성에서 필수적이다. 그들의 탁월한 영성생활의 경험을 담고 있는 영적인 대화나 자서전, 혹은 영적 일기, 영성적인 이론들이 중요한 영성신학의 자료가 된다.
오늘날 가장 보편적으로 이해되어지고 있는 현대적인 의미의 기독교 영성 경험은 카리스마적인 경험을 들 수 있다. 이 카리스마적인 경험이란 가히 환상적이고 초월적인 경험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경험자체에 대한 의의보다는 이런 압도적인 경험이 계기가 되어 또 다른 영적 경험으로 인도되어지며, 보다 풍성하고 성숙한 영성적인 경험의 세계로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다는 데에 그 의미의 중요성이 있다. 영성적인 경험이란 결코 카테고리적이고 피상적이고 문화적인 종교형태의 경험을 말함이 아니다. 오히려 어느 정도 문화적인 단절을 의미하기도 한다. 기독교 영성에서 경험되는 궁극적인 카리스마란 바로 교회 공동테 안에서 경험되는 예수의 영이다. 이 예수의 영이 실존적이고 전인적인 삶 속으로 스며들도록 함으로써 진지하고 헌신된 기독교적인 삶을 낳게 하는 모든 과정을 포함하여 ‘기독교 영성’이라고 한다. 기독교 영성의 근거리 목표는 ‘경건, 헌신, 거룩“이라는 신학적인 용어로 설명할 수 있다.
기독교 영성을 기독교 실체에 대한 경험이라고 강조할 때 사실 이 경험이란 대단히 위험스러운 요소를 안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영성은 언제나 통제와 식별적인 기능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건전한 기독교 영성을 형성키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도움에 의존하게 된다. 첫째는 성서요, 둘째는 교회적인 전통에 대한 이해이다. 세 번째는 이미 교회에서 검증된 과거의 성인들이나 신비가들의 경험이다.
결국 기독교 영성을 가능케 하는 세 요소는 인간의 핵심 요소라고 말하는 ‘영’과 그 영의 초월적인 경험을 가능케 하는 ‘성령’과 ‘그리스도’ 그리고 ‘교회’이다. 우리는 여기에 식별적인 도구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이것은 여타 다른 이론 신학과의 긴밀한 관계를 의미한다. 그래서 영성은 이론적인 신학의 원 자료가 되며 그것으로 인해서 생동력 있는 신학을 가능케 하며, 동시에 이론 신학은 건전한 영성을 가능케 하는 통제적인 기능을 제공하게 된다. *
유해룡 교수
물질적이고 증거주의적인 현대문명의 흐름은 비물질적이고 초월적인 세계에 대한 경험의 필요성을 인식시키기가 어려운 시대로 만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좀 더 심도있고 신뢰할 만한 영적생활을 하고자 하는 욕구로 날로 더해 가고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이니 뉴에이지 운동이니 하는 움직임이 이런 영적 기갈증에 대한 또 다른 표현으로 해석되어진다. 그러나 신학자들은 그동안 이러한 문제를 공적인 주제로 가루기를 조심스러워 했다. 영성운동이 한 이름하에 메살리안니즘(Messalianism)이나 거짓 영지주의(Pseudgnosticism)등의 오류에 빠질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메살리안니즘이란 현실로부터 도피하여 내세주의로 기울려지는 경향을 말하고, 거짓 영지주의란 신적인 경험을 인간의 감정이나 정서적인 현상으로 환원시키려는 위험성을 말한다. 영성에 대한 이러한 선입감 때문에 영성을 신학의 중심 주제로 다루기를 꺼린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영성이란 주제가 신학 뿐 아니라 삶의 전 영역에 걸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그 여파가 기독교 정체성을 도전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 영성’의 역사적인 이해와 현재적인 이해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
1. “기독교 영성”이란 용어의 역사적인 조명
우선 바울의 용어인 “영적(프뉴마티코스)”이라는 형용사로부터 “영성(sprituality)"이란 명사적인 용어의 발달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바울은 고린도전서 2:14-15절에서 ”영적인 사람“과 ”육적인 사람“을 구별하고 있다. 이러한 구분은 비물잘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삶과 죽음, 그리고 선과 악을 구분하는 이원론적인 구분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의 지배 아래에 있느냐 혹은 단순히 자연적인 인간성의 지배 아래에 있느냐를 구분하는 바울의 신학적인 용어이다. 이러한 바울 신학적인 의미로 ‘영성(sprituality)'이라는 용어가 교부시대를 걸쳐 12세기 스콜라주의 시대 이전까지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13세기에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인 방법론이 신학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영성’이라는 말이 ‘물질 혹은 육체(materiality or corporeality)'와 상반되는 개념으로 발전하였다. 뿐만 아니라 교회적인 가치와 세속적인 가치를 대조하는 의미에서 ’영성‘이라 했고, 후자를 ’일시적인 것(temporality)'이라 했다. 17세기에 들어 영성이란 말은 보다 구체적인 용어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영성’이란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내면적인 삶을 대표하는 말이었다. 특히 감성적인 삶을 강조하는 경향이 짙기에 흔히 경멸적인 뉴앙스를 지닌 말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영성이란 열광주의 혹은 정적주의라는 말과 상통되는 의미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부정적인 인상을 불식시키기 위해 보다 냉정성과 절제성을 지닌 용어인 ‘헌신(devortion)'이라는 마로 대체되기도 하였다. 18세가에 이르러 ’영성‘이란 말은 엘리트적인 영성주의를 반영하는 용어로 발전되었다. 즉 ’영성‘이란 일상적인 믿음 생활과 다른 차원인 완덕은 추구하는 영적인 삶을 지칭하는 최상의 용어였다. 그러므로 영성적인 사람이란 신비적이고 영성적인 삶을 지도할 수 있는 신학적이고 경험적인 능력을 갖춘 사람을 의미하였다. 그래서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이르러 ’영성‘이란 말은 완덕의 삶을 성취하기 위한 내면적인 삶을 지칭하는 특별한 말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2. 영성신학이란?
살아있는 경험을 지칭하는 기독교 영성이 학문적인 용어에로 관심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60년대 후반에 걸쳐 70년대 초에 이르러 로마 카톨릭 교회 영역의 신학자들이 본격적인 관심을 표하기 시작했다. 선교에서 보여준 영성에 대한 가장 최근의 세계적인 관심은 80년대 중반이다. 세계교회 협의회(W.C.C)는 세계적으로 영성에 대한 중요성이 고조됨을 인식하고 1984, 1986, 1987년에 걸쳐 영성에 대한 주제를 주요한 의제로 다루게 되었다. 이로 인해서 10여년 전부터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 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영성’을 하나의 인정받는 신학적인 주제로 널리 다루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최근의 동향 외에도 사실은 그 이전 세기부터 영성 신학에 대한 역사적인 유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중세 스콜라주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신학과 영성이 뚜렸하게 분리되는 현상을 보였다. 스콜라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기독교 경험으로서의 영성의 주제를 그의 역작인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에서 윤리신학(moral theology)이라는 분야에 예속시키고 있다. 비로소 영성이 신학의 한 영역으로써 자리를 잡기 시작한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에 이르러서도 기독교 신학을 이론과 실천적인 영역으로 더욱 뚜렸하게 나누어 다루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로마 카톨릭에서는 이론적인 영역의 신학을 '교리신학(dogmatic theology)'이라 했고, 실천적인 영역을 ‘윤리신학(moral theoloy)'이라 했다. 개신교에서는 전자를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이라고 불렀고. 후자를 기독교 윤리 ’(Christian ethics)'라고 불렀다. 교리신학이나 조작신학은 고백적인 서술, 즉 ‘무엇을 믿느냐’를 다루는 영역이고, 윤리신학이나 기독교 윤리는 교리적인 고백의 의미에 따라서 ‘어떻게 사느냐’를 다루는 영역이다. 여기서 기독교 영성이 자리를 잡아야 할 곳은 전자의 조직 신학보다는 후자의 기독교 윤리에 더 적합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윤리는 그 의도보다는 그 포기 후훨씬 좁혀질 수 밖에 없었다. 우리가 고백한 교리에 따라서 어떻게 사느냐라는 삶의 전체적인 양식을 다루기보다는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잘 되었는가? 잘못 되었으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 라는 문자 그대로 윤리적인 질문에만 국한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윤리성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기독교적인 삶 즉 영적인 체험 등을 기독교 윤리에서 다루기에는 뷰적합한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17세기 로마 카톨릭에서는 윤리신학을 “수덕신학과 신비신학(ascetical thology/ mystical thelogy)"으로 더욱 세분된다. 수덕신학이란 마 5:48절의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말씀과, 마 19:21절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쫓으라“는 말씀에 기초한 것이다. 여기서 수덕신학의 목적은 완덕에 이르려는 것인데, ‘완덕에 이른다’는 말은 초인적인 인간의 노력을 통해서 모든 악을 극복하고 인간의 연약성을 극복할 수 있는 초월적인 성취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다. 수덕신학이란 완덕을 향한 내적인 말을 강조한 말에 불과하다. 책임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적인 노력을 강조하는 것은 사실이나 결코 완성적인 의미는 아니라 단지 준비적인 과정이다. 즉 하나님의 은총을 받기 위한 인간적인 차원에서의 준비과정이다. 반면에 신비신학이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는 (고전 2:9) 신비로운 영적세계를 다루는 분야이다. 신비신학이란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드러나는 것이 무엇이냐’에 관심을 보이는 영역이다. 다시 말하면 수덕신학이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을 다루는 것이라면, 신비신학은 히나님이 우리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를 다룬다. 그래서 수덕신학은 그리스도의 삶의 참여하기 위한 인간의 행위규범을 추구한다면 신비신학은 기도를 통한 하나님 경험의 발단단계나 그 의미를 탐구한다. 수덕신학과 신비신학은 반드시 순차적인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서로가 서로의 길을 열어주는 상호보완적인 관계이다. 이런 ‘영성’이란 말은 점차적으로 수덕신학과 신비신학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말로 발전되어 갔다. 그래서 일반적인 영성적인 경험뿐만 아니라 그 경험으로 이르는 모든 과정을 포함하여 ‘영성(sprititulality)'이라 했고, 방법론을 도입하거나 여타 가른 영역의 학문을 도입하여 영성적인 체험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이해하려는 시도를 ’영성신학(spiritual theology)'라 했다.
3. 영성의 현대적인 의미
이렇게 먼저 영성에 대한 역사적인 고찰을 제시한 이유는 아직까지도 영성에 대해서 보편적인 정의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역사적인 맥락은 통하여 독자들 나름대로 영성에 대한 의미를 설정하고 생각해 보라는 뜻이다. 그러나 현재 영성신학 분야에서 그런대로 역할을 해내고 잇는 몇몇 신학자들의 정의를 고려하면서 비교적 보편적인 영성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로 Joann Wolski Conn의 제안으로서 자아 초월적인 의미로서 '영'을 말한다.“자아 초월을 위한 능력 즉 진리를 알 수 있고, 사랑으로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우리자신을 사람들이나 어떤 이상에 자유롭게 내어줄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영성이라고 한다.” 두 번째 제안은 Ewert Cousins(카즌스)의 제안으로서, 그는 말하기를 “전통적으로 인간의 내적인 차원을 ‘영(spirit)’라고 했다. 이 영이란 인간의 가장 심원한 중심을 말한다. 초월적인 세계를 향해 인간의 자기 자신을 열어 보이는 곳이 바로 이곳이고, 궁극적인 실제를 경험하는 곳도 바로 이곳이다.” 즉 영성이란 인간의 자기 초월 능력과 관계가 있으며 그러한 능력으로 인해서 궁극적인 실제를 경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는 말이다.
세 번째 제안은 Sandra Schneiders(산드라 슈나이더)의 제안이다. 그녀 역시 영성을 자아 초월과 관련시키고 있다. “영성이란 고립과 자아 도취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파악하고 있는 궁극적인 가치를 향하여 자신을 초월하고 역으로 다시 현실로 돌아와 자신의 삶을 의식적으로 통합해 가는 경험을 말한다. 이런 영성적인 노력은 궁극적인 지평을 발견케 하고, 그 안에서 자신을 변화시키는 길을 발견함으로써 전인적인 삶에 고결함과 의미를 가져다 주는 가능성을 말한다.” 네 번째 제안은 Bernard McGinn의 것인데, 그것을 또 다른 정의라기보다는 위의 정의와 연관되어 있다. “기독교 영성이란 교리보다는 기독교적인 확신에 대한 살아있는 경험이다.”라고 했다.
이상과 같은 네 가지 정의들에서 영성이란 인간의 ‘자아 초월적인 능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용어가 아니라 경험과 연결되어지는 역동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일반적인 영성에 대한 정의의 패턴을 기독교적인 영성을 설명하려 할 때 ‘궁극적인 가치’나 ‘궁극적인 지평’이란 하나님을 의미한다. 인간의 자아 초월적인 능력이란 전통적으로 말하고 인가의 ‘영’을 의미하는 것이고, 구약 성서적인 의미로는 ‘하나님의 형상’을 말함이다. 바로 이러한 초월적인 자아능력은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반응하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한 경험들이 특히 신자들의 어머니인 교회라는 상황 속에서 이루어질 때 그것이 바로 전형적인 ‘기독교 영성’이 된다.
기독교 영성을 실천적인 영역에서 말한다면 그것은 전통적으로 관상과 기도의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관상과 기도의 삶의 모범자들인 성자들이나 신비가들에 대한 연구는 기독교 영성에서 필수적이다. 그들의 탁월한 영성생활의 경험을 담고 있는 영적인 대화나 자서전, 혹은 영적 일기, 영성적인 이론들이 중요한 영성신학의 자료가 된다.
오늘날 가장 보편적으로 이해되어지고 있는 현대적인 의미의 기독교 영성 경험은 카리스마적인 경험을 들 수 있다. 이 카리스마적인 경험이란 가히 환상적이고 초월적인 경험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경험자체에 대한 의의보다는 이런 압도적인 경험이 계기가 되어 또 다른 영적 경험으로 인도되어지며, 보다 풍성하고 성숙한 영성적인 경험의 세계로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다는 데에 그 의미의 중요성이 있다. 영성적인 경험이란 결코 카테고리적이고 피상적이고 문화적인 종교형태의 경험을 말함이 아니다. 오히려 어느 정도 문화적인 단절을 의미하기도 한다. 기독교 영성에서 경험되는 궁극적인 카리스마란 바로 교회 공동테 안에서 경험되는 예수의 영이다. 이 예수의 영이 실존적이고 전인적인 삶 속으로 스며들도록 함으로써 진지하고 헌신된 기독교적인 삶을 낳게 하는 모든 과정을 포함하여 ‘기독교 영성’이라고 한다. 기독교 영성의 근거리 목표는 ‘경건, 헌신, 거룩“이라는 신학적인 용어로 설명할 수 있다.
기독교 영성을 기독교 실체에 대한 경험이라고 강조할 때 사실 이 경험이란 대단히 위험스러운 요소를 안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영성은 언제나 통제와 식별적인 기능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건전한 기독교 영성을 형성키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도움에 의존하게 된다. 첫째는 성서요, 둘째는 교회적인 전통에 대한 이해이다. 세 번째는 이미 교회에서 검증된 과거의 성인들이나 신비가들의 경험이다.
결국 기독교 영성을 가능케 하는 세 요소는 인간의 핵심 요소라고 말하는 ‘영’과 그 영의 초월적인 경험을 가능케 하는 ‘성령’과 ‘그리스도’ 그리고 ‘교회’이다. 우리는 여기에 식별적인 도구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이것은 여타 다른 이론 신학과의 긴밀한 관계를 의미한다. 그래서 영성은 이론적인 신학의 원 자료가 되며 그것으로 인해서 생동력 있는 신학을 가능케 하며, 동시에 이론 신학은 건전한 영성을 가능케 하는 통제적인 기능을 제공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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