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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4: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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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용인) |
수치에서 자랑으로
요한복음4:1-15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교회에 잘 다니는 한 형제가 이상형인 자매를 성가대에서 만났답니다. 늘 같이 다니며 아름다운 아내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일 년이 지나자 아이를 가진 것입니다. 배가 불룩 나와 어디 갈 때 데리고 가지 않았답니다. 그렇게 자랑스럽던 아내가 배가 부르니까 창피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수치스럽게 생각한 것입니다. 부끄럽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를 갖더니 사과 사와라 배사와라 주문을 하는 것입니다. 사가면 금방 마음이 바뀌어 다른 것을 사오라고 합니다. 완전히 공주입니다. 자신은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며 뼈 빠지게 일을 하는데 아내는 너무 편하게 사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하나님께 기도했답니다. "주여, 나는 매일 8시간이나 열심히 일 하는데, 집사람은 집에만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 출근하여 얼마나 힘들게 일하는지를 마누라가 알도록 해주고 싶습니다. 하오니 주여 꼭 하루만 서로의 육체를 바꾸어서 지내게 해 주십시오."
딱하게 여긴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 남편의 소원을 들어주었답니다. 여자가 된 이 남편이 아내가 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일어나자마자 밥을 짓고, 남편 출근시키고, 세탁물을 거두어 세탁기에 돌리고, 이불 개고 쓸고 닦으며 돌아가며 집안 청소를 하고, 개를 목욕시키고, 은행가서 일 보고, 오는 길에 장봐서 낑낑대며 집에 돌아오니 벌써 오후 1시가 넘었답니다. 빨래를 널고 남편 와이셔츠 다림질을 하였답니다. 잠시 TV를 보며 숨 돌리는데 벌써 오후 4시 30분 저녁 준비시간이 되었답니다. 그래서 또 허겁지겁 쌀 씻고 고기 저미고 채소를 다듬어서 국 끓이고 저녁 준비를 정신없이 하였답니다. 저녁 먹은 후에 설거지 끝내고 세탁물을 개어 넣고 나니 벌써 밤 10시가 넘었답니다. 지친 몸으로 남편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답니다.
다음날 아침! 아내가 된 이 인간은 눈뜨자마자 침대 옆에 무릎 꿇고 기도하였답니다. "주여! 내가 정말 멍청했습니다. 마누라가 집에서 하는 일을 너무 모르고 불평하였습니다. 제발 소원하오니, 저를 원상으로 회복하여 당장 남편으로 돌려주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은 빙긋이 웃으시며 "이 인간아 그건 안 되느니라" 그리고는 계속 말씀 하셨답니다. "어제 하루 너는 정말 좋은 경험과 뉘우침을 얻었으리라 믿는다. 나도 네가 바로 남편으로 돌아가길 바라지만. 너는 오늘부터 10개월 후에야 남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넌 어제 밤에 그만 임신하고 말았느니라!!!" 이 때 아내가 된 이 인간은 한숨을 쉬며 "워쩐데유~~~~~남편이 나 부끄러워 안 데리고 다닐 텐데..."라고 울부짖었답니다. 누가 웃자고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수치심은 인간이면 누구나 갖는 감정입니다. 수치는 자신에게 결점이 있다고 느낄 때 혹은 자신의 결점에 타자에게 노출될 때 발생하는 감정입니다. 수치심은 자기 평가 정서입니다. 자부심, 자존감은 긍정적 자기 평가인 반면 수치심은 부정적 자기 평가입니다. 죄의식이나 걸맞지 않는 행동, 도덕적으로 잘못된 행동, 도리에 어긋한 행동으로부터 야기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수치심과 관련된 단어가 히브리어로는 12개 헬라어로는 6개 성경 전체에 100회 이상 나오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습니다. 최초의 수치심의 기록은 아담 하와가 범죄하고 벌거벗은 몸을 보고 부끄러워한 창세기 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학자들은 사람은 보통 3세 전후해서 수치심이 생긴다고 합니다. 타인에게 보여주는 자신의 태도를 의식하기 시작하는 때라고 합니다. 이 수치심의 유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죄의 결과로 생기는 수치심입니다. 자신이 죄를 지으면 수치심이 생깁니다.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할까?”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타인의 범죄의 대상 또는 희생물이 된 결과로 생기게 된 수치심입니다. 더러운 것과 접촉에 의해 생기는 것입니다. 디나가 세겜에게 강간을 당했습니다. 그 때 수치심이 생기는 경우입니다.
수치심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감정으로서의 건강한 수치심입니다.
잘못했을 때 자연스럽게 느끼는 수치심으로 수치심 때문에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집단의 요구에 맞추어 자신을 변화시키게 합니다. 도덕적 규범에 민감성을 갖게 하고 공유 가치를 존중하게 합니다. 반성적 행동을 하게하고 영적 각성을 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런 수치심을 모르면 사이코패스가 됩니다. 죄를 부끄러워 할 줄 아는 것도 복입니다. 사이코패스는 죄책감, 양심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세로토닌(serotonin)이 적게 분비되어 감정이 무뎌져 있다고 합니다. 연쇄살인범, 상습 성폭행범 뿐 아니라 변호사ㆍ의사ㆍ대기업 간부 등 사회 상류층에 속하는 전문직 종사자에게도 나타난다고 합니다. 정서의 결핍되어 있습니다. 후회나 죄책감,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합니다. 과대 망상적으로 자기중심적이고, 다른 사람의 감정을 느끼지 못합니다. 싸이코의 경우 정신병적인 문제이지만 사이코패스는 인격적인 문제라고 합니다. 성경은 이런 인간들을 향해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4:2)"고 말씀합니다. 이런 면에서는 수치감을 느끼는 것도 복입니다.
둘째는 정체성으로서의 해로운 수치심입니다.
수치심 경험이 자신의 정체성으로 변하여 수치적 정체성을 갖게 되는 경우입니다. 더 이상 감정적인 수치심이 아니라 정체성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수치적 경험과 자신을 일체화 시키는 것입니다. 개인의 기본적 본질로서 확장하여 수치심의 안경을 가지고 모든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 부정적 감정을 가집니다. 타인의 칭찬이나 격려도 거짓으로 듣거나 자신에 대하여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알게 되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대인관계에 있어서 자신을 희생하거나 상대방을 희생시킵니다. 수치를 방어하고 숨기려고만 합니다. 자기 경멸을 합니다. 완벽주의 자가 됩니다. 자기 소외와 고립을 만들어 세상으로 도피합니다. 중독의 중심요소로 작용합니다. 우울증, 인격 장애, 감정 장애, 편집증에 사로잡힙니다. 수치와 오욕스런 경험들을 혼자만 간직하며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거나 자신이 만들어낸 가면 뒤에 숨기도 하며 체면을 중시하며 역설적으로 화려한 옷이나 장신구로 치장을 합니다. 그러나 내면은 항상 공허하고 수치심의 노예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우리가 수치심의 노예에서 벗어나 수치가 오히려 자랑이 되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오늘 성경에 보면 남편을 다섯이나 거처가면서 평생 수치심으로 정상적 삶을 살지 못하다가 예수님 만나 자랑하는 인생으로 살아가는 한 여인이 나오고 있습니다. 수치에서 자랑으로 바뀐 인생은 산 여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수치가 자랑이 되는 인생을 살 수 있겠습니까?
1. 우리는 어떤 수치스런 과거가 있다하여도 자신을 수치스런 존재가 아니라 가치 있는 존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자기 발견, 가치감/ 자기 사랑
수치스런 경험을 하여 수치가 건강한 수치심이 아니라 정체감을 갖는 해로운 수치심을 가지면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을 무가치한 존재로 생각합니다. 수치의 경험과 자신을 분리하지 못하기 때문에 수치 경험을 곧 자신이라고 생각해 버려 자신을 수치가 자기의 정체감이 되어 버립니다. 예수님을 만나 이 여인의 자기 존재에 대한 인식을 보십시오. 9절을 보십시오. 물을 달라하는 예수님께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고 반문합니다. 당시 문화는 여인을 인격적으로 대우해 주지 않았습니다. 오늘 날은 여성들이 좋은 대우를 받고 살고 있습니까? 낮에 음식점에 가면 여성들이 80% 이상입니다. 남편들은 열심히 일하고 아내는 모임에 참석하여 음식을 먹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남편은 집에 두고 오면 집에 두고 오면 근심덩어리이고, 같이 나오면 짐 덩어리이며, 혼자 내 보내면 걱정덩어리이고 마주 앉아 있으면 웬쑤 덩어리라는 말입니다.
당시는 여성들이 사람대우 받는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물건처럼 취급하는 문화였습니다. 여인은 남자의 재산처럼 취급받은 때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여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했습니다. 오랜 역사를 지나면서 여자는 남자의 사유재산처럼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리스 시대 대는 여자는 노예처럼 취급해야 질서가 잡힌다고 생각했습니다. 16세기 때도 이런 풍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명한 종교개혁자 루터는 "계집아이는 남자보다도 말을 빨리 배우고, 걸음마도 빨리 배운다. 왜 그런지 아는가? 잡초는 좋은 곡식보다 빨리 자라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여자에게 투표권이 영국에서 허용된 것은 19세기부터입니다.
이 여인은 사마리아 이름 없는 여인입니다. 사마리아 지역은 앗수르에게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이방인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혼혈족이 많이 나온 곳입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을 지을 때 이들이 방해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같은 동족이지만 원수처럼 생각하였고 개처럼 취급하였습니다.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천대 받는 지역의 여인입니다.
지금 말하지 않고 있지만 자신은 남편을 다섯이나 거친 수치스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버림받고 육체적으로 만신창이가 된 여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당하는 여인입니다. 수치심으로 사람들이 많은 때에는 물 길러 나오지도 못하고 사람이 없는 한 낮에 우물가에 나와야만 하는 여인입니다. 수치스런 존재, 태어나지 말아야 할 존재, 아무런 가치가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이 여인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는 그녀를 찾아갔습니다. 수치심의 노예로부터 완전하게 해결해 주시기 위해 찾아가신 것입니다. 오물 보듯 피하는 수치스런 여인, 수치스런 동네를 찾아 갔습니다. 당시 유다를 떠나 갈릴리고 가는 길은 두 길이 있었습니다. 사마리아를 통해 가는 길입니다. 이 길은 지름길입니다. 베뢰아와 데가볼리를 거쳐 가는 길입니다. 이 길은 우회로입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멀지만 우회로를 택하여 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부러 사마리아 수가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우물에 앉아 이 여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근에게 물을 요구합니다.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줄 수 있는 여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대접을 해 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기피하는 수치스런 여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상종해 주지 않아도 예수님만은 상종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근거해서 자신을 평가하고 나의 존재 가치를 발견합니다. 수치심은 다른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근거해서 자신을 평가하고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무가치하다고 여기게 됩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가 아무리 수치스런 존재일지라도 우리를 찾아와 자랑스런 하나님의 아들딸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우리를 존귀한 자로 여기십니다.
우리는 과거 어떤 수치스러운 일이 있을지라도 예수 안에서는 참으로 가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수치심을 극복하려면 먼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부정에서 긍정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수치심의 노예에서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존재에 대한 인식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자신의 쓸모없는 존재, 열등한 존재, 거부된 존재로 받아들입니다. 부모의 적극적인 학대(구타, 욕설, 희롱, 성적학대), 소극적 학대(무시, 과잉보호, 방치, 비난) 비현실적 기대 등으로 자신은 부모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부모로부터 거부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데서부터 수치심은 시작됩니다. 자신을 버림받은 존재로 받아들이고 자라서도 숨기고 싶은 가족의 비밀을 수치심으로 받아들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자였어, 우리 집은 가난한 집이야, 나는 외모가 내 놓을 것이 없어, 나는 이혼한 사람이야, 나는 누구 앞에 말할 수 없는 직업은 가진 사람이야" 등 자신의 환경과 조건을 다른 사람 앞에 내 놓기에 지극히 부끄러운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수치심을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신앙인을 왕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신 하나님은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사 43:1)"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우상숭배하며 우상 숭배하며 우상장사의 아들로 살았습니다. 수치스런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찾아가 자랑스런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야곱은 과거 사기꾼이고 욕심장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찾아가 자랑스런 12지파의 조상이 되게 하였습니다. 모세는 과거 살인자, 도망자, 장인 집에 처가살이하는 수치스런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찾아가 자랑스런 민족 지도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세리 삭개오도 수치스런 인생이었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수치스런 인생이었습니다. 38년 된 병자 수치스런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자 자랑스런 인생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수치스러운 과거가 있다하여도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참으로 존귀하고 가치 있는 존재로 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받아들이면 됩니다.
산에 있는 쓸모없는 돌일지라도 위대한 조각가의 손에 붙들리면 위대한 조각품이 나오게 됩니다. 허름한 바이올린일지라도 위대한 음악가의 손에 붙들리면 참으로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 냅니다. 다 낡은 붓일지라도 훌륭한 화가의 손에 붙들리면 사람을 감동시키는 작품이 탄생하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자존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께서도 존중히 여긴다고 했습니다(삼상2:30)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경멸이 여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하신다고 했습니다.(요13:32) 재물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는 넘치도록 채워준신다고 했습니다.(잠3:9,10)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
영국의 비평가이며 사상가인 존 러스킨(John Ruskin)은 "모래와 흙과 불이 하나님의 장중에 붙잡히게 될 때에 사파이어가 될 수 있다 모래가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게 될 때에 오팔이 될 수 있다. 맨 흙이 하나님의 장중에 붙잡히게 될 때에 다이아몬드가될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시 16:3)"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벧전 2:9)"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수치스런 존재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스스로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존귀한 자입니다.
2. 우리는 수치스런 경험이 있다하여도 예수님을 만나 소속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자기 인식/ 고립과 숨김에서 벗어나기
수치심을 가지면 사람들은 고립하게 됩니다. 숨기게 됩니다. 스스로 고립을 자초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과거를 전혀 알지도 못하는데 다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소속감을 갖지 못하고 원만한 인간관계를 가지지 못합니다. 이 여인은 아무도 만나지 않기 위해 정오에 홀로 물을 길러 옵니다. 자신을 상대해 주는 예수님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봅니다. 안경을 쓰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만난 후 어떻게 변합니까? 28, 29절을 보십시오. 자기를 수치스럽게 보고 있는 동네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자신이 만난 예수님을 자랑합니다.
수치심은 자기 존재에 대한 인식은 중요한 타인을 통해 알게 됩니다. 자아상은 내가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타인이 내게 주는 평가와 피드백으로 이루어집니다. 부모의 그릇된 평가에 의해 자기를 잘못 알게 되고 주위 사람들에 의해 자신을 그릇되게 인지하고 자신을 수치스럽게 느낍니다. 그러면 자신에게 수치심을 준 사람에게 분노를 가지게 되고 그들과 상종하기를 꺼려합니다. 둘째는 창조적으로 수치심을 해결하는 것입니다. 수치심을 은폐할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께 내어놓는 것입니다.
수치심이 있는 사람들은 가능하면 최대한 숨기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면 진실성과 진지성이 없어집니다. 자신을 과대 포장합니다. 위선적이고 형식적인 삶을 살게 만듭니다. 신앙생활도 진실성이 없고 형식적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올무가 되어 평생 수치심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신앙생활을 해도 그 문제에서 자유함을 받지 못합니다. 수치심은 숨기려 한다고 해서 숨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알고 자신이 알고 있습니다. 숨기려 하면 더욱 그것이 자신을 괴롭히고 밝고 건강한 삶을 살지 못하게 합니다. 우울하게 하고 침체되게 만들고 매사 소극적이고 부정적이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 여인이 어떻게 이렇게 수치를 자랑으로 살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메시아로 영접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 마나 자신의 죄를 고백하게 만듭니다.(17) 자신의 수치스런 부분을 주님께 솔직히 털어 놓습니다.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저는 다섯 번 결혼하였으나 실패한 사람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남편도 제 남편이 아닙니다. 저는 상처투성이입니다. 모순 덩어리입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저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사람입니다.
여인은 자신의 목마름을 깨달았습니다.(15) 영생의 물을 내게 주십시오. 저는 여기 이렇게 수치 때문에 몰래 물 길러 오기 싫습니다. 영원히 갈증을 해결할 수 있는 물이 저에게는 필요합니다.
여인은 영안이 열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합니다(19)
그녀는 처음에는 예수님을 유대인이라고 말했습니다.(9) 당신이라고 했습니다.(12) 그러나 그녀의 호칭은 변하기 시작합니다. 15절에는 주라고 합니다. 19절에는 선지자라고 고백합니다. 29절에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아는 것과 고백하는 것은 다릅니다. 사랑하는 것과 고백하는 것도 다릅니다. 사랑하여 결혼하였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으로 결혼한 것 아닙니다. 사랑의 고백을 하고 그 고백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결혼한 것입니다. 우리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한 베드로의 고백이 영혼 깊숙이에서 우러나오고 우리 입술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메시아, 나의 왕, 나의 주로 고백하고 시인하면 우리 인생이 달라집니다. 보이는 세계가 달라집니다. 수치보다 크신 예수님이 내 마음을 지배하면 인생의 수치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수치가 자랑이 됩니다. 내 행한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그 예수님께서 나를 용서해 주시고 나를 새 사람만들어 주어 이렇게 회복되었노라고 자랑할 수 있습니다. 수치의 경험이 수치의 경험이 아니라 자랑의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3. 우리는 수치의 경험을 디딤돌로 하여 예수님 안에서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가치 실현
수치심의 노예가 되면 자신감이 없어집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두려워 스스로 움출어 듭니다. 사람을 기피합니다. 수치심의 안경을 쓰기 시작합니다. 왜곡된 편견을 가지게 됩니다.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 수치심을 치료 받은 이 여인은 어떻게 변했습니까? 28절을 보십시오. 기피하던 동네 사람들에게로 담대하게 나아갑니다. 물동이를 버려두었다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용기 있는 결단을 합니다.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을 안 것입니다. 동네로 담대히 들어가 사람들에게 먼저 말을 합니다. 누가 말을 걸까 두려웠던 사람입니다. 29절을 보십시오.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과거가 인생의 발목을 잡지 않았습니다. 인생의 우선순위가 바뀌는 것입니다. 수치심으로 도피하지 않았습니다. 패배 의식을 갖고 사람을 피하지도 않았습니다. 도저히 부끄러워 예수님을 증거 할 수 없는 여인입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모든 장애물을 뛰어 넘어 버렸습니다. 자신이 만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였습니다. 수치심으로 냉조주의자가 되지도 않았습니다. 수치심의 안경을 쓰고 냉소주의자가 되지도 않았습니다. 수치심으로 편견의 안경을 쓰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도 주님 안에서 우리의 수치의 경험이 사람들에게 간증하는 자랑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수치의 경험을 수치로 끝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연약하여 실수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수치스런 환경을 만나 자신감 없이 살 수 있습니다. 한 순간의 실수로 수치스런 일을 만들어 평생 수치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아는 한 장로님이 계십니다. 이 분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때 청와대 고위직에 있었던 분입니다. 당시 권력을 가지고 많은 부를 얻었습니다. 땅도 많이 사 놓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와 권력을 얻으면 새로운 여인을 만나려고 하듯이 이 분도 쥐도 새도 모르게 예쁘고 젊은 첩을 두었습니다. 당시 교회 집사였습니다. 아내도 몰랐고 자신이 다니고 있는 담임목사님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셨습니다. 간암이 걸린 것입니다. 치료받기 위해 미국에 갔지만 사형선고만 받고 돌아 왔습니다. 그래서 오래 전에 제가 섬겼던 담임 목사에게 찾아 왔습니다. 당시 신유의 은사가 있는 분이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그 집사님을 보자마자 "첩 있지 회개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집사님은 아무도 모른 줄 알았는데 처음 보는 목사님이 자신의 죄를 알고 있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살아계심 앞에 철저히 회개를 하였습니다. 눈물 콧물 다 쏟으며 철저히 회개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분의 질병을 깨끗이 치유시켜 80대까지 살게 해 주었습니다. 나중에는 장로님이 되셨고 제가 섬겼던 그 교회 땅을 기증하였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곳곳의 땅들을 교회를 건축하게 했습니다. 수치를 자랑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누구나 수치스러운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수치가 수치로 끝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 수치가 자랑이 되는 간증을 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 앞에 나와 회개하면 우리 주님 다 용서해 주십니다. 다윗 보십시오. 간음죄를 짓고 살인 죄를 저질렀습니다. 왕으로 얼마나 수치스런 일입니까? 그것 숨기고 살았으면 평생 수치심의 종이 되었을 것입니다. 위선자의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단 선지 앞에서 깨끗이 회개하였습니다. 내가 수치심 숨기고 붙들고 있다고 하나님이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 다 고백하고 용서받고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나의 수치심을 제거해 주신 주님을 자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 앞에 나오면 모든 죄사하고 주의 품에 안기어 편히쉬리라 우리 주만 믿으면 모두구원 얻으며 영생복락 면류관 확실히 받겠네 (205장 1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사 1:18)”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사 43:25)”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수치스런 경험 때문에 자신감을 잃지 말고 예수님을 통해 다 용서 받고 자신감을 가지고 일어 서야 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면 우리는 바울처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수치심을 삶의 유익을 위한 에너지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모든 감정엔 힘이 있습니다. 수치심도 에너지가 있습니다. 이것이 파괴적인 힘으로 발산될 수도 있고 창조적인 힘으로 발산될 수 있습니다. 수치심은 도피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도피하면 도피처를 찾게 되고 그 도피처가 중독의 온상이 되는 것입니다. 중독이 되면 잠깐 수치를 잊을 수 있으나 또 다른 심각한 문제를 만듭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취를 수치심의 도피처로 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일중독에 걸립니다. 어떤 사람은 알코올을 수치심의 도피처로 삼아 알코올 중독에 걸립니다. 어떤 사람은 관계를 수치심의 도피처로 삼아 관계 중독에 걸립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수치심을 해결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증오합니다. 수치심이 있으면 다른 것을 도피처로 삼아 그것에 중독될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계기로 예수님을 만나 새로운 에너지로 수치심을 활용해야 합니다. 남편 다섯이나 두어 그 수치심으로 사람들 앞에 얼굴을 내밀 수 없었던 여인은 그 수치심 때문에 예수님 만나 수치심에서 해방되어 온 동네에 돌아다니며 메시아를 전하는 사람으로 쓰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을 때 우리의 수치도 함께 지고 가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습니다"(히브리서 12:2). 우리의 수치를 십자가 상에서 다 당하였습니다. 신앙인은 이것을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으니 그 얼굴이 영영히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시 34:5)"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1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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