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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7:14-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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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용인) |
불신에서 확신으로
마17:14-20
교회에서 퇴근하여 엘리베이터를 탔습니다. 몸이 비대한 중년부인이 함께 탔습니다. 10층을 누르고 기다리고 있는데 중년 부인은 번호를 누르지 않았습니다. 처음 보는 분이었습니다. 같은 층에 사는 분은 아닌데 10층을 가는가 보다 하고 "10층에 가세요."라고 물었습니다. 중년 부인은 그냥 얼버무렸습니다. '이상하다. 왜 번호를 누르지 않을까?' 혼자 생각하고 10층에서 내리려하자 그 때에 번호를 눌렀습니다. 10층보다 아래층을 눌렀습니다. 그리고 잊고 지났는데 며칠 지나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그 땐 20대 되는 자매였습니다. 얼굴 모습이 며칠 전에 본 중년 부인을 닮았습니다. 자매가 먼저 올라갔는데 번호를 누르지 않았습니다. 10층을 누르고 기다렸습니다. "10층 가세요." 아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문이 열리고 내리려고 하자 자매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번호를 눌렀습니다. 저를 불신한 것입니다. 제가 그렇게 불신 받을 만 한가요?
눈만 좀 작아서 그렇지 마음은 쓸만합니다. 눈 큰나 작으나 나이 60이 가까우면 평등합니다. 눈 적은 사람 눈 꺼플 처져 염려 없지만 눈 큰 사람 60대가 되어지면 밑으러 쳐저 신경써야 합니다. 제 아내 눈 큰데 어떤 때 보면 반찬 챙겨놓고 식탁에 가져오지 않습니다. 못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밥 다 먹은 후에 가져 무엇을 가져 오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최근에 저희 교회 등록하신 집사님 심방 가니까 이웃집 아저씨 같아 좋다고 말씀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남편들은 저 같은 농부타입 목사가 오히려 좋지 않습니까? 아랑드롱처럼 생기고 말잘하고 인기 있는 목회자가 있는 교회에 아내가 남낮으로 나가 봉사하면 불안하지 않아요? 그런데 저는 아내 교회에 보내도 불안하지 않지 않아요?
왜 중년 부인과 딸이 저를 불신 했을까요? 첫째는 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신뢰할 만한 대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저에 대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타인의 행위에 대한 부정적 기대가 불신입니다.
둘째는 저를 안다하여도 저에게 속았고 이용당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면 불신하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에 대하여 자신감이 없으면 불신합니다.
셋째는 자신이 남자라는 부류에게 당한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뢰는 오랜 단계를 거치지만 불신은 한 순간에 발생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편화시켜 버립니다. 부분을 전체로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 불신하면 다시 신뢰하기가 아주 힘이 듭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면서도 이렇게 하나님을 불신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하나님과 함께 천국을 향해 가는데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면서도 두려워하고, 회의하고, 냉소적이고, 경계하며 살아갑니다.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자신이 구원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확신이 없습니다.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용서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인도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승리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불신하는 제자들, 불신하는 서기관, 불신하는 질병 걸린 아이의 아버지가 나옵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며 예수님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말씀합니다. 불신하지 말고 확신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어떤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1. 우리는 믿음의 능력을 확신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갔습니다. 그 사이에 9명의 제자들이 산 밑에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이 간질병에 걸린 아버지가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갑자기 심한 경련을 일으킵니다. 땅에 엎드려 굴며 거품을 흘립니다. 이를 갑니다. 때로는 파리하게 질려 죽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일반 간질병과 달랐습니다. 귀신이 들려 때로는 불속으로 뛰어 들어갑니다. 물속으로 뛰어 들어갑니다.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어릴 때부터입니다. 아이들 고치지 위해 재산은 허비했을 것입니다. 가정을 웃을 날이 없었을 것입니다. 온 식구가 늘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희망을 가지고 찾아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계시지 않고 제자들만 있었습니다. 제자들에게 고쳐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런데 고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대는 깨어졌습니다. “귀신을 내어 쫒고 병자를 고친다고 하던데 제자들도 별수 없구먼”. 신뢰는 한 순간에 살아지고 불신이 찾아옵니다. 신뢰를 쌓은 것은 오래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나 불신은 한 순간에 찾아옵니다. 그리고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낙인찍고 신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서기관들과 제자들은 서로 변론하였습니다. 어떤 내용을 변론했는지 성경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잘 모르겠지만 추측해 보면 “왜 이런 병이 걸리고 왜 귀신이 들렸느냐? 왜 너희는 고치지 못하느냐?” “너희들이 귀신을 쫓아낸다면서 순전이 거짓이 아니냐?” 이런 변론을 했을 것입니다. 서기관들의 습성상 원인적 사고를 하는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께 제자들이 물어본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이 때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2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 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산'이란 문자적인 의미보다는 사람의 능력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커다란 문제, 난제(難題) 등을 함측하는 상징적인 표현한 말입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의 격언적 배경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아주 곤란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산을 옮긴다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산은 불가능을 말합니다. 불가능한 것 같은 것이라도 생명력 있는 믿음만 있으면 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아버지가 예수님께 "무엇을 할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말합니다. 제자들을 통해 무능력을 체험했기 때문에 주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불신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선한 의지를 신뢰하였으나 그리스도의 능력은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9장 23절에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회의적인 믿음을 경책하십니다. 반신반의의 믿음을 책망하십니다. 아이의 치유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문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아이를 고치지 못한 것도 그들 마음속에 내제 되어 있는 이런 불신앙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믿음입니다.
믿음은 능력이 있습니다. 믿음의 능력을 확신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곧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관계가 틀어지면 아무것도 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내 능력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영생을 받고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물질과의 관계에서 힘을 얻으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신용입니다. 인간과의 관계에서 힘을 가지려면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형성되고 그것으로 힘을 얻게 됩니다.
이 때 아버지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돈이 없어서가 문제가 아닙니다. 지혜가 없어서가 문제가 아닙니다. 조건이 문제가 아닙니다. 근본적인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산적한 문제가 있습니까? 내 믿음을 키우는 기회로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위대한 능력이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고 했습니다. 바라는 것들이 믿음을 가지고 가면 실상으로 나타나고 보지 못한 것들이 믿음이 있으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이 믿음이 마음을 지배하고 몸을 지배하고 믿음이 행동을 다스리며 믿음이 미래를 만들어 냅니다. 믿는 대로 이루어집니다. 믿음이 세상을 바꿉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이런 글이 싫렸습니다. 유방 절제 수술을 받은 57명의 유방암 환자를 조사해 보니 치료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싸운 사람은 10명 중 7명이 10년 후에도 살았답니다. 낙담한 자 5명 중 4명이 죽었답니다. 순순히 받아들인 자 32명 중 24명이 죽었답니다. 단지 사람의 생각도 이렇게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정신 분석학자 칼맨닝거는 태도 즉 마음의 자세는 사실보다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커밍워크(Comming Walk)라는 사람은 성공의 요인을 네 가지로 요약해서 말한 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머리"(I.Q)가 좋아야 하며, 둘째는 "지식"(Knowledge)이 있어야 하며, 세째는 "기술"(Attitude) 넷째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네가지 요인 중에서 성공적인 삶에 적어도 93% 이상으로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바로 "태도"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의 태도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던 골드스미스는 8년 만에 거의 무일푼에서 백만 파운드의 자산을 보유한 사업가로 변모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중심으로 "미다스 메소드"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그 책에서 "믿지 않으면 가능성도 없고, 불신과 의심이 인생의 성공을 가로 막는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행복과 성공 비결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며, 믿음을 가진 자가 세상을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기적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성공 비결의 75%는 믿음에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긍정적인 생각, 적극적인 생각, 낙관적인 생각 차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면 불가능을 가능하게 해 주신다는 확신입니다.
모세가 홍해 앞에 불신하지 않았습니다. 지팡이를 들어 홍해를 가르치라는 말씀을 전적으로 믿고 그렇게 함으로 홍해를 갈랐습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 법궤를 메고 가라고 합니다. 불신하지 않았습니다. 믿고 나아갈 때 요단강이 갈라졌습니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립니다. 여리고성을 돌라는 것입니다. 논쟁하지 않습니다. 그저 믿음을 돌 때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10명의 문둥병환자에게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합니다. 당시 제사장에게 가면 죽임을 당합니다. 불신하지 않았습니다. 믿고 나아가다 보니 문둥병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믿음이 능력입니다. 결국 오늘 우리 시대에 있어 모든 영적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믿음입니다. 믿음의 능력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백부장 하인이 질병에 걸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마 8:13)" 그 말씀을 그대로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눈먼자가 예수님께 왔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마 9:29)" 그대로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5:4)" 믿음의 능력을 확신하십시오.
2. 우리는 말씀의 권세를 확신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귀신을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십니까? 18절을 보십시오. “꾸짖으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꾸짖으십니까? 막9장 25절을 보십시오. 많은 무리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의 권세로 더러운 귀신을 꾸짖습니다. 그리고 말씀합니다.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막9:25)" 말씀의 강력한 권세로 더러운 귀신을 좇아냅니다. 귀신은 최후의 발악을 합니다.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나가고 아이는 죽은 것같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보고 죽었다고 말합니다. 이 때 예수님은 그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습니다. 제자들은 변론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귀신과 변론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를 변론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변론하면 불신만 더 키웁니다. 말씀의 권세를 가지고 물리치는 것입니다.
이미 제자들에게 이 권세를 주셨습니다. 막6장 7절을 보십시오.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라고 말씀합니다.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이미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막 3:15).
이 권세를 제자들은 사용해 본 사람들입니다. 마가복음 6장 13절을 보십시오. "많은 귀신을 쫓아 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권세를 사용하지 않고 변론만하고 있는 것입니다. 변론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신 영적 권세를 가지고 말씀으로 악한 세력들을 물리쳐야 합니다. 영적인 문제는 변론하고 설득하고 회의하고 논쟁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강력한 말씀의 권세를 사용해야 악한 세력이 물러나고 정상적인 정신으로 회복이 됩니다. 베드로는 이 권세를 받았으나 예수님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세 번이나 부인하고 무기력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에 날에 성령 충만받고 이 권세를 사용합니다. 한 번의 설교로 3천명을 회개시켰습니다. 이 권세로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주님의 주신 권세로 말씀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 3:6)"
룻다에서 중풍병자 애니아 고치셨습니다. 8년 된 중풍병자입니다. 예수님의 권세로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행 9:34)"라고 말씀합니다.
욥바에서 죽은 자인 다비다를 살리셨습니다. "다비다야 일어나라(행 9:40)라고 말씀합니다. 권세를 사용하였습니다. 오늘날도 말씀은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권세를 확신해야 합니다. 오늘날 말씀이 얼마나 불신받고 있습니까? 믿으려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종교 다원주의가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성경의 절대성을 무시합니다. 성경에 있는 신화적 기록을 재 해석해야 한다고 합니다. 성경은 단지 그 당시 사람들의 신앙고백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의도를 가지고 인간이 편집한 책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권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딤후 3:16-17)”
너무나 세상의 권위에만 노예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문화( '모두가 그렇게 하니까' ). 전통( '항상 그렇게 해왔으니까' ). 이성( '논리적이니까' ). 또는 감정( '옳은 일처럼 느껴져서 )에 최종적인 권위를 두며 그것으로 인생을 변화시키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씀은 권세가 있습니다.
성경에 있는 3만 1,173개의 구절 가운데 한 말씀만 붙들어도 우리의 인생은 바뀌어집니다. "천로역정"의 저자 죤 번연은 요한복음 6:37에 의해, 위대한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말씀에 의해, 세계 선교에 앞장 섰던 윌리암 캐리는 "네 장막터를 넓히라"고 하신 이사야 54:2의 말씀에 감동을 받아 인생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성경에 있는 진리 하나가 인간의 모든 지혜보다 나은 것입니다.
`사랑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지 뮬러 목사는 3천명 이상의 고아를 돌보았습니다. 한 기자가 그에게 "어떻게 그런 훌륭한 일을 할 수 있었습니까"라고 물답니다. 그러자 그가가 대답하기를 "나는 평생동안 성경을 1백번 읽었습니다. 단 한번도 싫증을 느낀 적이 없지요. 내가 성경을 읽지 않았던 3년은 `잃어버린 시간'이었습니다. 하루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않으면 영적인 활력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최고의 선물은 성경이다"라고 말했답니다. 링컨은 매일 성경을 묵상하며 삶의 지혜를 얻었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시편 19편 7-1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율법은 우리의 영혼을 소성케 합니다.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합니다.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순결하게 합니다. 이것을 지키며 큰 상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정금보다 사모할 것입니다.
3. 우리는 기도의 응답을 확신하여야 합니다.
오늘 사건이 마가복음에는 더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들과 서기관이 아이 문제를 놓고 변론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막7장 16절에서 말씀합니다. "너희가 무엇을 저희와 변론하느냐?" 변론하지 말아야 할 것을 변론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무엇을 이루려고 생각하니까 변론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에서 우리 교회에서 우리 삶에서 지금 변론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진정 변론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을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깊은 수렁에 빠져 버립니다. 전투적 사고로 변하여 양심도 말씀의 기준도 살아지고 오직 권모술수와 전략만 남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사탄의 사람으로 전락되어져 갑니다.
병원에서 환자 놓고 변론하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물에 빠져 죽어가는 웅덩이에서 변론하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이 아이를 괴롭히는 귀신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불행에 처한 그 가정의 행복을 찾아 주는 것입니다. 눈물로 살아가는 부모의 아픔을 덜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으로 가능하겠습니까?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마가복음 9장 29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기도 외에는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변론이 아니라 기도해야 합니다. 21절의 없음은 다른 사본에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런 유가 나가지 아니하느니라”고 적혀 있습니다. 성경 원본은 없습니다. 사본이 무수히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 사본이 사해사본, 알렉산드리아 사본, 바티칸 사본에는 없는데 다른 사본에 있을 때는 이렇게 없음이라고 표시합니다.
어떤 문제가 발생할 때 변론이 아니라 기도입니다.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변론할 시간이 있으면, 비난할 시간이 있으면, 논쟁할 시간이 있으면, 회의할 시간 있으면 그 시간에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 모세는 광야에서 산적한 문제를 풀었습니다. 기도를 통해 한나는 사무엘을 낳았습니다. 기도를 통해 솔로몬은 지혜와 부귀 영화를 누렸습니다. 기도를 통해 엘리야는 불을 내렸습니다. 기도를 통해 히스기야는 불치의 병을 고쳤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마 7:7-8)"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약 5:13-15)"
초대 교회도 많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이방인 구원받을 수 있느냐? 받지 못하느냐? 할례 받아야 하느냐? 받지 말아야 하느냐?" 핍박과 박해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교회는 이 문제를 가지고 변론하기보다는 기도하였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내 속에 역사합니다. 악한 것이 나아갑니다. 교만이 깨어집니다. 기도할 때 마귀의 궤계가 무너지고 사탄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요 16:24)"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10년 6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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