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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42: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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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용인) |
낙심에서 소망으로
시편 42:1-11
신앙 생활하면서 낙심한 경험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말 큰 사전에 보면 낙심(落-떠어질 락 心-마음심)이란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 마음이 풀어짐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낙심은 바라던 일 즉 기대와 관계가 있습니다. 기대가 없으면 낙심도 없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아들에 대하여 기대를 가지고 잘 기르기 위해 애를 썼답니다. 그런데 아들이 계속 나쁜 짓을 하여 속이 많이 상했답니다. 아들에게 사랑의 매를 대도 별 효과가 없어서 이번에는 옛 어른들이 사용했던 고전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답니다. 아들을 앞에 세워 놓고 "네가 잘못된 것은 먼저 내가 너를 잘못 가르쳤기 때문이다. 내가 너 대신 벌 을 받아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회초리를 들고 자신의 종아리를 세게 치기 시작했답니다. 그러면 아들이 자신의 잘못을 빌 줄 알았답니다. 그런데 아들은 "아버지 내가 잘못했어요."라고 빌기는커녕 그냥 웃으며 멀거니 보고만 있었답니다. 목사님은 하도 어이가 없고 자신만 손해 보는 것 같아서 자신을 때리는 것을 중단하였다고 합니다. 자녀를 양육하면서 심히 낙심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다윗도 자신의 아들에게 반역을 당하고 낙심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이 시편의 저자는 다윗이고 후대 고라 자손 중 한 사람이 수집한 시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 기자가 다윗이라면 압살롬의 반란으로 도망 나와을 때의 기록입니다. 아들의 반역으로 왕궁에서 쫓겨난 다윗이 얼마나 낙심이 되었겠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6절에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11절에 “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병균에 감염되면 사람의 몸이 풀이 죽고 누어 꼼짝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 낙심에 마음이 감염되면 소망을 잃어버립니다. 무기력해집니다. 쉽게 포기해 버립니다. 사람도 만나기 싫습니다. 일하기도 싫습니다. 우리가 이 낙심에서 벗어나 소망을 가지고 인생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1. 일을 하면서 나의 능력의 한계로 나타난 기대 밖 결과에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1,2,6,8)
이 시편 기자는 왜 낙심합니까? 2절을 보세요.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까 낙심합니다(2).
예루살렘에서 떨어져 예루살렘에 올라가 예배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갈 수 없습니다. 자신의 능력이 자신이 해야 할 과업보다 터무니없이 작은 것입니다. 일에 대한 기대를 능력의 한계 때문에 이룰 수 없을 때 낙심합니다. 능력의 한계 앞에 우리는 낙심합니다. 왕일 때는 자유롭게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제 도망자가 되니 마음대로 예배드리러 가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과학의 발달로 사람의 능력은 많이 향상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자신의 미래를 통제할 수 있고 미래 예측이 훨씬 더 수월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하다가 능력의 한계에 부딪치면 낙심하게 됩니다. “내가 이 정도 밖에 되지 않는군?” “나라는 존재는 별 수 없어.”라는 식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왕이 되어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같았습니다. 그런데 아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쫓겨났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 자신에게 집중을 합니다. 시편 42편에는 인칭 대명사가 무려 51개가 등장합니다. 시인은 계속적으로 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를 강조하면 무엇이 나오겠습니까? 무능력한 나입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의 무능력을 고백합니다. 사람은 대단한 것같지만 그 자리 바뀌면 힘이 없습니다. 다윗은 왕이었습니다. 왕의 자리 내려오니까 스스로 제사 드리러 가는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럴 때 시편 기자는 어떻게 합니까? 낙심하고 포기해 버립니까? 절망하고 실망하며 좌절합니까? 아닙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1절을 보십시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였습니다(1).” 절박하게 하나님을 찾습니다. 목마른 사슴이 물이 없어 물을 찾는 것처럼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2절 보십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만 소망을 둡니다. 11절에도 반복하여 하나님께 소망을 둡니다.
우리는 초점을 연약한 나에게 맞추면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대단한 것 같지만 무능력합니다. 내 능력 없어 일이 안될 때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라는 신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관점은 무능한 나에서 돌려 하나님을 향할 때 우리는 낙심에서 벗어나 소망으로 향하는 출발점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무능력을 방관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 내 힘으로 안된다고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소망으로 일어서야 합니다.
인도에서 열심히 선교사역을 한 스텐리존스라는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열심히 전도 하였지만 완악한 인도 사람들은 회개 하지 않았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스텐리 존스는 너무 한심하기도 하고 사기도 떨어져 사과나무 밑에 쓰러져 누워 있었습니다. 그 때 나무 사이에서 “존스 피곤하지 지쳤지?”라는 내면의 소리를 들었답니다. “예 하나님 지쳤습니다.” “왜 지쳤느냐?” “제가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저들이 예수를 영접하지 않습니다 저들에게는 열매가 없습니다.” 이제 8월 첫주일입니다. 열매가 없어 낙심하며 피곤에 지쳐있는 사람은 없습니까? 열심히 공부는 하였지만 성적은 여전히 부진합니다. 올해 전도 열심히 할려고 했는데 결실이 없습니다. 하나님 위해 돈 좀 많이 벌어 보려고 했는데 성과가 없습니다. 교사로 성가대로, 아버지로, 어머니로, 자식으로, 부모로 한 번 잘 해보려고 했는데 결과가 없습니다. 혹 낙심된 성도님 안계십니까? 교회는 다녔지만 신앙의 진보가 없다고 낙심하시는 분은 안계십니까? 처음 시작할 때 굉장한 의욕과 열심을 가지고 시작했던 그 일로 부터 손을 떼고 후회하며 좌절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낙심한 스텐리 존즈 선교사에게 말했답니다. "이 사과나무를 보아라 지금은 열매가 없는 것 같으나 뿌리가 땅에 묻혀있고 잎이 태양을 향해 펼쳐 있고 채널이 나를 향해 맞춰져 있을 땐 언젠가 좋은 열매가 맺힐 것이다. 낙심하지 말아라 아름다운 열매가 맺힐 것이다"
우리 일의 성과가 없다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시 126:5)"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열매를 주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소망가운데 일어서는 8월 첫주일이 되시길 바랍니다.
2. 신뢰의 대상에 대하여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신뢰하며 약속 붙들고 소망하여야 합니다(6,5,8,11).
사람이 낙심하는 두 번째 이유는 신뢰의 대상에게서 기대한 받을 얻지 못했을 때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신뢰하면 살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철저히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을 때도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아들에게 왕위를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도망자가 되어 목숨 건지기 위해 구차한 인생을 살아야 되었습니다. 신뢰한 대상으로부터 기대한 것을 얻지 못하면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됩니까? “내가 이렇게 했는데 하나님 어찌하여 왜 이런 결과를 주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어찌하여(5.9.11)"라는 질문을 계속 반복하고 있습니다. 일이 안된 이유를 모를 때 낙심합니다(2,9) 어찌하여 하나님이 자신을 잊었는지, 어찌하여 원수들이 핍박하는 지를 몰라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어느 때까지”를 7곱 번이나 계속 반복하여 질문합니다. 어찌하여 왕위에서 쫓겨나 방황해야 하는지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일이 잘 안될 때 이런 질문을 던지고 모르는 이유 앞에서 낙심합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고 미래가 불안해 지는 것입니다(5,11). 그러나 이유를 안다고 모든 문제의 답이 있습니까? 인간 사회에는 이유를 안다할 지라도 풀지 못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연 " 왜 이런 일이 내게 임했을까? .. 왜 하필이면 나라는 말인가?..."라고 질문하면 낙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유를 모두 다 알고 하는 것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밥에 대하여 다 이해하고 밥을 먹습니까? 자동차에 대하여 다 이해하고 자동차 탑니까? 어떤 사람은 신앙도 다 이해하고 믿겠다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다 이해하고 믿겠습니까? 믿으면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종로가는 지도를 주고 종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종로 가는 길을 다 이해하고 다 답사해 보고 갑니까? 그 지도를 준 사람과 그 지도를 그린 사람을 믿고 그대로 따라 가다 보면 종로가 나오는 것이고 이해가 되는 것 아닙니까?
신앙인의 삶이란 설명보다는 약속에 의지하는 삶입니다. 아이가 골절이 되어 병원에가서 X-Ray를 찍었습니다. 의사는 부러진 뼈를 맞추고 기부스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의사가 X-Ray 사진을 가지고 환자에게 뼈의 성분, 골절의 이유, 수술시 약품투여 방법, 그 약품의 효능 등 이런 저런 이야기를 장황하게 설명한다면 그 환자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요? 차라리 “앞으로 2주 후면 낮게 됩니다.”라고 그 사람에게 말한다면 더 소망을 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의뢰하고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6절에 보면 주를 기억하였다고 했는데 이 시편 기자가 다윗일 경우는 지금은 비록 쫓기는 신세이지만 그의 왕국이 영원하리라는 삼하 7:12-16의 약속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삼하 7:16)” 비록 지금 기대한 바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신실하게 그 약속을 지키실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소망 가운데 일어서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나에게 기대하지 않은 일이 이루어진 이유는 몰라도 약속을 의지하고 살아갈 때 소망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기대했던 대상으로부터 기대했던 결과를 얻지 못한다 해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 나와 기대에 벗어난 목사님, 기대에 벗어난 장로님으로부터 낙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1997년 연속 사극“용의 눈물”이 인기리에 방영될 때 미국 L.A.에서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랍니다. 당시 비디오를 빌려다 보았는데 어느 장로님이 재미 있어서 한꺼번에 비디오 4개를 빌려왔답니다. 토요일 밤이라 1~2개만 보고 자려고 했는데 내용이 아슬아슬하게 끝나서 참지 못하고 새벽 4시까지 시청했답니다. 잠깐 눈을 붙이고 교회에 가서 대표기도를 하는데 “다 함께 기도합시다. 거룩하신 하나님,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라고 시작하였답니다. 그러자 회중석에서 폭소가 터졌답니다. 회중석에서 교인들이 웃자 장로님은 "통 촉하여 주소서I"라고 기도했답니다. 이런 장로님 보면 낙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비슷합니다. 시선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게 향하면 낙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거두워 버리면 다 낙심할 수 밖에 없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자신이 신뢰한 하나님이 기대와 다른 결과를 주었을 때 시편 기자는 어떻게 합니까?
지금 예루살렘에 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포기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6절 보십시오. 헤르몬과 미살 산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보이는 산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7절 보십시오. 지금 어려운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일로 받아들입니다. 비록 파도에 휩쓸린 삶입니다. 그렇다고 포기합니까? 8절을 보십시오.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5절 하반절, 11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여전히 하나님께 찬송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갈 수 없지만 현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리는 것처럼 예루살렘을 바라보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마치 자신이 하고자 한 것이 이루어진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가 기대한 바 대로 주시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말고 약속에 근거하여 소망하며 마치 그것이 이루어진 것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주어진 조건에서 하나님 약속 붙들고 소망을 가지고 기도하며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 하나님에 대한 기대를 접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목표를 향한 걸음을 중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기도를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 6:9)”
3. 사람의 평가에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평가를 기대하며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3,10,4).
왜 다윗이 낙심하고 있습니까? 현재 처한 기대에 못 미치는 불행한 상황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 때문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고 조롱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면 너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종일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뼈를 찌르는 칼같이 대적들이 비방을 합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하나님 잘 믿는다더니 왜 자식이 그 모양이야, 왜 탈선해, 왜 실패해, 왜 사업이 그 모양이야? 왜 부도가 나, 왜 직장을 잃었어. 왜 병들었어.” 그런 말을 듣자 다윗은 자신의 눈물이 주야로 음식이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의 평가 참고는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평가를 무시하고 자신을 해치고 폄하할 정도까지 절대화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다 자기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 여인이 공원 벤치에 앉아서 자식들 이야기로 꽃을 피우고 있었답니다. "댁의 사위는 어때요?" "아주 훌륭해요,딸이 아침을 차려 주지도 않고 늦잠 자게 내 버려 두지오." "댁의 며느리는요?" "아주 형편없어요, 아침마다 늦잠을 자는 바람에 아들이 굶고 다녀요~!" 사람의 평가는 객관적이기보다는 주관적입니다. 자신이 기준이 되어 평가합니다. 사람들은 누군가가 자기를 인정해주지 않으면 견딜 수 없고, 자신이 다른 사람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해 보이는 것을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의 평가에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진정한 평가자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잘했다 칭찬해 주실 영원한 하나님의 평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람의 평가를 보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인간의 평가란 다 상대적이고 주관적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지금 우리에게 왜 이런 어려운 상황, 실망할 수 밖에 없는 상황를 주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정확한 평가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타나 도우실 때가 있습니다(5, 11). 다윗은 어찌 자신을 잊었냐고 하지만 하나님은 다윗을 잊은 것이 아닙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인자를 베풀어 주시고 마지막에 잘했다 충성된 종이라고 평가해 줄 날이 오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 당하면 자신 스스로를 평가하며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4절에 보십시오. 화려했던 과거와 비교하며 스스로 낙심합니다. 화려했던 과거와 도망자 신세인 지금을 비교하면 얼마나 낙심이 되겠습니까? 과거에는 왕으로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며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는데 지금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속이 상한 것입니다. 스스로 낙심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나이 들면서 과거 자신의 위치와 지금의 위치를 비교하면 스스로 낙심이 될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화려했던 과거와 비교하면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은 과거의 사람이 아니라 미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실 미래를 보며 소망을 가지는 사람들입니다.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소망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정 과거를 생각하고 싶으면 비교되는 과거만 생각하지 말고 처음 과거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것도 없는 적신으로 나온 처음 과거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왕도 되게 하고 부귀영화도 주었습니다. 지금 생명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자신을 지지해 주고 조금 따르는 사람도 남아 있지 않습니까? 조금 사정이 나빠졌을 따름입니다. 시편 기자는 고백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를 베푸신다고 말씀합니다. 물론 이 낮이 해 뜨는 낮일 수 있지만 상징적 표현입니다. 좋은 날이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인자하심을 베풀어 주실 좋은 날 이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밤 좋지 않은 밤에도 찬양하며 기도하겠다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낮이 옵니다. 하나님의 인자함을 맞보는 낮이 오고야 맙니다. 언젠가 번영의 시기가 돌아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는 절대 자포자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재앙의 때에도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심지어 재앙과 슬픔의 어두운 밤에도 나는 하나님을 찬양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반석이십니다.
미래를 바라보며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아직 인생 끝난 것 아닙니다. 갈 길이 남아 있습니다. 숙제 하다 말고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직 인생의 막은 내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인생 살다보면 낙심될 상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인생 다 산사람처럼 그렇게 지금이 전부라고 평가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30년 준비하여 3년 일하였습니다. 모세도 80년의 준비기간이 있었습니다. 지금 잘되는 것이 없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신앙의 선배들은 낙심되는 상황에 있었지만 낙심하며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17살에 꿈을 꾸며 성경에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설렘과 기대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찾아온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죽음의 고비, 인신매매, 노예였습니다. 얼마나 낙심되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요셉의 인생의 끝인가요?
모세를 보십시오. 40세에 조국을 위하여 큰 꿈을 가지고 출발하였습니다. 민족을 위해 일어섰습니다. 그던데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40년간이나 말입니다. 장구한 세월을 광야에서 고독하게 보내어야 했습니다.
바울은 어떻습니까? 위대하고 극적인 부름을 받았지만 3여 년 동안 아라비아에 들어가 침묵의 기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분들이 겪은 것이 오늘 우리가 겪는 것보다 덜 힘든 것일까요? 그렇다고 하나님이 그들의 인생을 그것으로 마치게 했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훈련시켜 하나님의 쓰실 만한 그릇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윈스턴 처칠"도 학교 다닐 때에 낙제한 적이 있었습니다. 유명한 발명왕 에디슨도 무수히 많이 실패하였습니다. 링컨도 사업에 실패하고 신경쇠약에 걸렸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을 실패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당대 그 실패의 현장에서는 사람들이 조롱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들의 미래를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생의 과정을 보고 낙담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니까 제자들은 실패한 줄 알고 낙담하고 다 제갈길로 갔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을 부활하심으로 그들을 다 회복시켰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사람들처럼 낙담하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습니다.
실패도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 영광 돌릴 기회일 뿐입니다. 우상장사의 아들 아브라함, 부인을 누이라고 속인 실패의 사람 아브라함, 목동 다윗, 여러번 실패한 어부 베드로, 예수님을 핍박한 사람 바울, 기생의 아들 입다, 바람둥이 삼손, 겁쟁이 기드온, 농사꾼 아모스, 소모는 엘리사... 하나님은 이들 모두에게 낙심할 만한 상황에서도 사명을 주어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였습니다.
환난을 당하고 있습니까? "환난을 당할때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요16:33)고 말씀합니다. 미래를 보며 두려워 하고 있습니까? "두려움이 엄습할 때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사41:10)라고 말씀합니다. 모두가 떠나 버리고 홀로입니까? "외로울때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6)라고 말씀합니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였습니까? "선을 행하나 낙심될 때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되면 거두리라"(갈6:9)고 말씀합니다.
낙심하지 마십시오. 소망을 가지십시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1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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