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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방 뛰어넘기

야고보서 김필곤 목사............... 조회 수 2672 추천 수 0 2011.07.28 12:0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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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약4:11-12 
설교자 : 김필곤 목사 
참고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용인) 

비방 뛰어넘기
약4:11-12

얼마 전 가수 타블로가 끝없는 스탠퍼드를 졸업하지 않았다는 비방으로 곤욕을 치루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의 가족도 비방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졸업장을 보여 주어도 믿지 않고, 성적 증명서를 보여주어도 믿지 않고 비방하였습니다. 그는 비방을 견디다 경찰에 수사를 의뢰하였고 모 방송에서 스탠퍼드대를 졸업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취재하여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비방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물고 늘어져 비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유명 여배우가 인터넷에 악성 댓글을 달아 비방하는 것을 못 견디어 자살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인터넷에 들어가보면 조금 과장하면 비방 공화국이라고 말할 정도로 사람들은 서로 칭찬하기보다는 비방하기를 좋아합니다. 남을 비웃고 헐뜯어서 말하고, 남의 잘못이나 결점을 책잡아서 나쁘게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 아파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약점 중의 하나가 남을 깎아내리는 버릇이 있습니다. 정치인들은 상대를 결코 칭찬하지 않습니다. 어느 대통령이 노벨상을 받으니까 뇌물을 주고받았다고 비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상대방을 서로 깎아 내리고 물어뜯고 비방하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는 신앙인도 예외는 아닙니다. 인터넷 기독교 신문을 보다보면 얼마나 비방이 난무한지 마음이 아플 때가 많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면 벌떼처럼 몰려와 비방합니다. 요즈음 어느 대형 교회 목사의 성추행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모든 목사가 다 범죄자인 것처럼 비방을 합니다. 한국 교회가 다 병든 것처럼 비방을 해댑니다. 그렇게 비방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신앙인들입니다. 어떤 한 교사가 성추행하면 모든 학교가 병들었고, 모든 교사가 나쁜 사람들입니까? 한 공무원이 뇌물을 받았으면 모든 공무원이 나쁜 놈이고 뇌물을 받은 범법자입니까? 좋은 음악을 들으면 소도 젓을 많이 낸다고 합니다. 좋은 음악을 들으면 나무도 병충해에 잘 견디고 좋은 과실을 맺는다고 합니다. 하물며 사람은 얼마나 더하겠습니까? 비방의 소리가 세상을 지배하면 우리의 정서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유대인의 교훈집 탈무드에 험담은 살인보다 더 위험하다고 가르칩니다. “살인은 한 사람씩 죽이지만, 험담은 세 사람을 동시에 죽인다. 험담을 퍼뜨리는 사람 자신, 그것을 반대하지 않고 듣고 있는 사람, 그리고 화제가 되어 있는 그 사람을 죽인다”고 말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비방을 하는 사람도 되지 말아야 하고 비방에 쉽게 무너지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비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비방에 쓰러지지 않고 인류 구속 사역을 성취하였습니다. 아내의 비방으로 사업을 포기해서도 안되고, 남편의 비방으로 자녀교육을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교인들의 비방으로 봉사를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비방의 장애물을 뛰어 넘어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1. 우리는 서로 비방하지 말아야 합니다(11).
11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라고 말씀합니다. “비방”이란 원어로는 "카탈랄레오"라는 말입니다. '카타'는 영어로 'against' 즉 '반대 '또는 '적대'란 뜻입니다. 그리고 '랄레오'는 '영어로(speak)' 즉 ‘말한다'라는 뜻입니다. 합해서 '카타랄레오' 라는 단어는 '반대하는 말, 적대적 언어' 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비방이란 '상대방이 없는 곳에서 상대를 적대적으로 대하며 상대에게 변명할 기회도 주지 않은 채 그 상대에 대해 악하게 말하는 것이고, 상대를 멸시하며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실이든 거짓이든 타인에게 불리한 말을 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남을 비웃고 헐뜯어서 말하는 것입니다. 영어에서 남을 험담하는 뜻을 가진 단어는 "backbite"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뒤에서'(back)' 물어 뜯는'(bite)것이 비방입니다.
살인하면 죄가 되는 것처럼 비방하는 것도 죄입니다. 비방은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독침과 같은 것입니다. 사탄이 쓰는 무기입니다. 사람들이 누군가를 비방하는 이유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비방을 통해 자기를 우월한 존재로 만들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비방을 통해 상대방을 낮추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마귀의 시험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별명 중에 하나가 헬라어로 '디아볼로스(diabolos)'입니다. 마귀를 뜻하는 영어의 데블(devil)이라는 단어가 ‘디아볼로스'라는 이 단어에서 나왔는데 이 단어의 뜻이 바로 '비방자, 참소자'입니다. 마귀는 '비방자', '참소자'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무너뜨릴 때 사탄은 하나님을 비방합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못하게 한 것은 너희들이 눈일 밝아져 하나님처럼 될까 먹지 못하게 했다고 비방합니다. 이 비방의 유혹에 넘어지면 아담과 하와가 에덴의 행복을 잃었듯이 우리가 신앙 공동체 안에서 행복을 잃어버립니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비방하지 않으려고 해야 합니다. 그대로 방치하면 우리의 입은 쉽게 남을 비방을 하게 됩니다. 쉽게 우리의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도구가 비방입니다. 그러므로 의식적으로 내가 먼저 남을 비방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당시 교회에 다툼이 있었습니다. 다투다 보면 서로 비방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신앙인들이 서로 비방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왜 우리가 비방하지 말아야 합니까?

첫째 우리는 한 형제이기 때문입니다(11). 오늘 비방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면서 계속적으로 나오는 단어는 형제들입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 우리는 형제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산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 자매입니다. 우리는 서로 비방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입니다. 허물을 들추어 내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서로 허물을 덮어주어야 할 형제들입니다. 예수님이 비방받아야 할 문제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누구나 비방거리를 찾으면 끝없는 비방거리가 나옵니다. 그러나 사랑해야 할 거리를 찾으면 끝없이 사랑할 거리가 나옵니다.

둘째 비방을 하면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11).
결국 우리가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면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형제를 비방하는 것은 형제를 사랑하라는 율법을 정면으로 대적하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율법 위에 두는 것입니다. 율법을 준행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율법을 재판자가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레위기19:16-18)
" 너는 네 백성 중에 돌아다니며 사람을 비방하지 말며 네 이웃의 피를 흘려 이익을 도모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 그러면 네가 그에 대하여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 사랑은 최고의 법입니다.(약2:8) 율법은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지 않고 비방하는 판단을 한다는 것은 결국 사랑하라는 율법의 말씀을 어기는 것입니다.

셋째 비방을 하면 징계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비방하지 말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어기면 징계가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모세가 본처 미디안 여인 십보라가 죽은 후 에디오피아 여인과 재혼하였습니다. 모세의 누이는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주동이 되어 아론과 함께 모세를 비방하였습니다. 비웃고 헐뜯었습니다. 이유는 이방 여인과 결혼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방인과 결혼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하나님은 모든 이방인과 결혼을 금지하였습니까? 아닙니다. 가나안 7족과 통혼을 금한 것입니다.(신 7:1-4) 가나안 칠족과 결혼을 하면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섬길 수밖에 없기 때문에 금한 것입니다. 요셉은 이방 여인과 결혼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것에 대하여 잘못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창48:5). 특히 룻은 이방 여인인데 다윗의 선조가 되었고 육신적으로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룻4:13)"
그러면 그들이 비방한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민 12:2)"
시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민 12:8)” 하나님의 진노를 사 결국 미리암은 문둥병이 걸렸습니다. 살이 반이 썩어갔습니다. 미갈은 다윗을 비방하다가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남편을 비방하고 아내를 비방하고 자녀를 비방하고 교인들을 비방하면 그에 따른 대가가 따릅니다. 사이가 좋아지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에 즐거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복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가 비방의 장애물을 뛰어넘어 풍성한 신앙생활을 하려면 먼저 비방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방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하면 우리는 사랑해야 할 한 형제라는 사실을 마음에 외쳐보십시오 비방을 하면 율법을 어기는 것이고 비방을 하면 나에게 징계가 따른다는 사실을 마음에 외쳐보시기 바랍니다.

2. 우리는 비방을 위한 악한 판단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상대를 비방을 하는 것은 판단 기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판단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 칭찬도 하고 비방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보면 비방을 위한 판단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판단은 헬라어 '크리노'라는 단어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결정하다, 간주하다, 규정하다'입니다. 영어로는 번역하면 'judge'입니다.
우리말 큰 사전에 판단이라는 말은 "근본을 따지어 사물의 가치와 관계를 결정하는 일"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선악을 판단, 잘잘못의 판단, 가치의 판단 등을 말할 때 사용합니다. 성경에서 판단을 말할 때 크게 두 가지 경우로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나오는 말씀과 같은 예입니다.
다른 하나는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행 4:19)"
그렇다면 성경은 판단하라는 말입니까? 판단하지 말라는 말입니까? 서로 모순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성경은 문맥을 통하여 잘 이해하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판단하지 말라는 것은 옳고 그름에 대한 가치 판단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야고보는 4장에서 성도간의 다툼의 문제를 말하면서 판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1절에 먼저 서로 피차 비방하지 말라고 말씀하면서 판단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판단하지 말라는 것은 비방하기 위한 판단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파괴적인 판단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방을 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에 대한 악의적인 판단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어떤 것에 대한 가치를 판단하는 판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절대자가 되어 다른 사람을 비방하기 위한 판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미리암과 아론 같이 시기심에 근거하여 "이방 여인과 결혼한 것은 잘못이야"라고 판단하는 판단과 같은 것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자신들의 시기심이 기준이 된 것입니다.
왜 비방을 위한 악한 판단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경우이기 때문입니다.(12)
12절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악의적인 판단을 금하였는데도 판단하면 자신을 하나님의 위치에 올려놓는 교만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입법자이고 재판장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신데 자신이 판단자가 되면 율법을 만드신 하나님보다 더 높은 위치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인간은 단지 율법을 지켜야 할 자이지 율법으로 남을 비방하기 위해 판단하는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내가 똑같은 죄를 범하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롬2:1-3)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2:1-3)"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라고 했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죽이려는 군중을 향하여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7:1-2)"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 대하여 악의적인 판단을 하고 말을 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상대방을 비난함으로 자신의 잘못을 변명하고 희석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정치인들이 그렇습니다. 공격은 최선의 방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흠만 잡기 위해 늘 안테나를 높이 올리고 다닙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함으로 자신의 자존심을 일으켜 세우기 위함입니다(잠26:22) 정도와 종류의 차이이지 우리도 다 비방 받을 것들이 있습니다. 비방 받아야할 요소들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셋째는 사실을 알기도 전에 외적 요소에 의하여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요 7:24)"라고 말씀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쉽게 짧은 시간에 사람들의 얼굴, 옷, 머리 스타일 등을 보고 판단해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엘리가 기도하는 한나를 겉모습만 보고 술취했다고 판단합니다.(삼상1:14-17) 나다나엘도 그렇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고 판단해 버립니다. 겉 모습만 보고 속마음까지 악의적으로 판단해 버립니다. 영적인 것까지 판단해 버립니다. 사실을 알기도 전에 판단하고 비방하고 정죄해 버립니다.(요7:51)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사람들이 욥의 친구들입니다. 결과를 다 보지 못하고 잘못했다고 회개하라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판단할 때 그렇게 합니다(눅 5:30). 왜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과 음식을 먹는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고 예수님을 불결한 죄인으로 비방합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리실 때 비방을 받았습니다. 무지의 소치입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눅 23:39)"
사실을 알기도 전에 판단하면 늘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판단할 때는 나의 관점, 상대방의 관점, 하나님의 관점이 있습니다. 나의 관점이나 상대의 관점은 불완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정확히 알기도 전에 판단을 하면 더 더욱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비방하기 위해 마음 속에 악의적 판단이 들면 지금 내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창조적 판단을 해야 합니다. 내가 똑같은 죄를 범하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한다고 생각하면 더욱 겸손해지고 상대의 실수를 보며 나를 점검해야 합니다. 사실을 알기 전에 외적 요소에 의하여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잘못임을 분명히 알고 의혹이 들면 실체적 진실에 더욱 가까이 접근한 후 판단해야 합니다. 그래도 늦지 않습니다.

우리는 쉽게 내 기준으로 판단하고 비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배드릴 때 교회에 모자 쓰고 앉은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쉽게 판단하고 예의 없는 사람이라고 비방하면 안됩니다. 여름인데도 겨울 내복을 입고 오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모습 보며 쉽게 판단하고 계절 감각이 없는 사람이라고 비방하면 안됩니다. 제가 겨울에 내복 입은 동료 목사님을 이해 못했습니다. 그런데 신경 수술을 받으니까 그렇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사모들이 참 교회에서 처신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성도들이 자신의 입장에서 쉽게 판단하고 정죄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모님이 옷을 잘 입으면 사치한다고 합니다. 사모님이 옷을 잘 못입으면 감각이 둔하다고 말합니다. 자녀 교육에 조금 신경을 쓰면 자식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자녀들에게 신경 쓰지 않으면 교육을 잘 못시켜 자식이 저 꼴이 되었다고 비방합니다. 교회 일에 관여하면 교회 일에 관여한다고 교회 일에 에 관여하지 않으면 목사님의 사역을 돕지 않는다고 비방합니다. 아침 준비하느라 믹서소리에 전화 못받으면 "사모님 새벽기도 다녀와서 주무신다"고 어쩌다 새벽기도 빠지면 "사모님 오늘 새벽에 못 봤다"고 비방합니다. 자신이 기준이 되어 판단하는 것입니다.

3. 우리는 비방을 뛰어 넘어 하나님께서 맡겨준 사명을 감당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비방을 받을 때 참 힘이 듭니다. 비방을 받을 만한 일을 했을 때 비방받는 것이야 당연히 고치면서 감당해야 하는 것이지만 좋은 일하다가 비방 받으면 참 견디기 쉽지 않습니다. 오해로 인하여 비방당하면 참 견디기 힘이 듭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세 가지 반응을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대적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회피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침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비방을 뛰어넘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 나를 인정해주실 분, 입법자과 재판관은 오직 하나님이시다는 사실을 믿고 묵묵히 사명을 이루어야 합니다(12).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사정을 하십니다. 모세와 아론이 좋은 일을 할 때 애굽의 왕이 비난합니다. 동지들이 비난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패장들이 비방합니다. 그 때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문제를 풀어갑니다. 기도하여 문제를 풀어갑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위기에 처했을 때 다윗이 나아갑니다. 그 때 골리앗이 비난합니다.(삼상 17:43-44) 골리앗만 비난한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형들이 비난하였습니다. 큰 형 엘리압이 비난합니다. "노를 발하여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몇 양을 뉘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삼상 17:28)" 이 때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형과 다투지 않습니다. 골리앗과 다투지 않습니다. 그 상황을 피하지 않습니다.
느헤미야가 무너진 성벽을 건축하려고 할 때 산발랏과 암몬 사람, 아라비아 사람들이 업신여기며 비방합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도와주어야 할 선지자 스마야가 악한 말을 지어 비방하려 합니다(느6:13). 이 때 하나님께 나아가 문제를 풀고 사명을 이룹니다.
예수님께서 인류 구원 사역을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로마인들도 비난하지만 혈육으로 같은 백성 유대인들이 비방합니다. 자칭 유대인으로 왕이라고 비방합니다. 침을 뱉으면 비방합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 27:40)"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예수님의 친족들이 비난합니다.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막 3:21)" 그 모든 비방을 이기고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의 구속사역을 성취하셨습니다.
바울을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비방합니다. 사도적 권위가 없다고 비방합니다. 설교를 잘못한다고 비방합니다. 돈을 좋아한다고 비방합니다. 인격에 대한 모독도 받았고 목회에 일관성이 없다는 비방도 받습니다. 기원전 750년경에 아모스는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로부터 먹고 살기 위해 설교하는 삯군 선지자라고 비방을 받았습니다(암7:12).
좋은 일 하다가 우리가 믿었던 사람들에게 이런 비방받을 받으면 얼마나 낙심이 됩니까? 그러나 좋은 일 하면서 가까이에 있는 사람, 아군에게 비방받는 것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 비난한다 해도 하나님께서 맡겨준 일 포기하면 안 됩니다. 좋은 일, 선한 일, 아름다운 일, 위대한 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모세는 자신을 마땅히 지지해 주어야 할 지도자들이 비난해도 민족 해방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형이 비난해도 적을 물리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생명처럼 사랑하며 양육했던 교인들이 비난하여도 복음 증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마땅히 도와주어야 할 제사장이 자신을 삯꾼으로 비난해도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가족이 비난하고 동포가 비난해도 인류 구원사역을 포기하지 않고 다 이루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알아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이 입법자이고 심판자이십니다.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을 가장 구속하는 감옥 중의 하나가 다른 사람의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그래서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면 금방 정서는 스커트 미사일을 맞은 것처럼 낙심해 버립니다. 그러나 좋은 일 하면서 비난에 무릎 꿇지 말아야 합니다. 집단에는 언제나 지지하는 사람과 비난하는 사람, 그저 묵묵히 제 일만 하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비방하는 사람이 떠나면 또다시 비방을 사명으로 살고 사는 사람이 생깁니다. 어차피 집단 구조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비방을 담아 두지 않으면 그 비방이 나를 포기하지 못하게 합니다.

둘째, 진정 내 억울함을 풀어주실 하나님을 찾아가 위로받고 일어서야 합니다(12).
비방을 파괴적으로 대처하지 말아야 합니다. 일일이 대응한다고 문제가 풀리는 것이 아닙니다. 비방은 결코 치료하지 않으며 항상 상처를 줄뿐입니다. 비방으로 사람은 완전해지지 않고 오직 관계를 파괴시킬 뿐입니다. 비방은 결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직 분리시킬 뿐이며 세워주지 못하고 오직 허물뿐이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할 뿐입니다. 문제를 해결한다고 비방하지만 교회 내에서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서로 비방하여 상처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비방을 받으면 사람에게 가지 말고 하나님께 가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105살까지 장수한 할아버지가 계셨답니다. 비방으로 가슴 아프게 사신 분이 물었답니다. “105년 살면서 많은 사람들이 어르신 욕하고 음해하고 비방하여 열 받았을 텐데, 그걸 어떻게 해결하고 이렇게 오래 사세요? 우리 같으면 못 참고 스트레스 받아서 죽었을 텐데요." "그거야 쉽지. 욕을 하든 말든 내버려뒀더니 다 씹다가 먼저 죽었어. 나 욕하던 녀석은 세상에 한 놈도 안 남았어."
비방하는 자를 찾아가 해명한다고 문제가 잘 풀리지 않습니다. 이미 비방하는 자는 우리를 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적은 아무리 선한 일일지라도 비방의 대상일 뿐입니다. 정치하는 정당을 보십시오. 남북한을 보십시오. 적은 적일 뿐입니다. 바로에게 찾아가 보았자 해결이 안 됩니다. 골리앗에게 찾아가 따져보았자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더욱 관계만 나빠지고 더욱 인간관계는 힘들어 집니다. 더 힘들어 집니다. 하나님이 구원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구원해 주실 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을 찾아가야 합니다. 억울함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아가야 합니다. 비방을 받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 안 됩니다. 더욱 하나님을 찾아가야 합니다. 한나는 비방을 받을 때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찾아갑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찾아갑니다. 다윗도 하나님을 찾아갑니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우리의 억울함과 분노, 한을 풀어 주실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셋째는 끝까지 사랑을 포기하지 말고 용서하며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11).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입니다. 사랑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주님의 당한 비방에 비하면 우리가 받는 비방은 별거 아닙니다. 주님은 갖은 비방을 받으면서도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비방하는 자를 용서하기를 거부하고 감옥문을 스스로 단단히 걸어 잠그면 안됩니다. 비방하는 사람을 정죄하고 원수 시 삼으면 결국 사탄에게 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사람들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사탄과의 전쟁입니다. 영적 전쟁입니다. 비방한다고 비난하는 사람을 적으로 원수로 만들면 안 됩니다. 바로를 다시 만나지 않을 원수로 만들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겠습니까? 우리가 살아서 일하기 때문에 비방과 공격을 받게 됩니다. 서양속담에도 '죽은 개는 차지도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비난받는 것을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비방 받는 것을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비방하는 사람을 역할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방을 통해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교훈을 받는 것입니다. 아무런 비방을 받지 않았다면 모세와 아론의 교만이 하늘을 찔렀을지도 모릅니다.
어떤 위치에 있든지 자신도 비방을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비방은 오히려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비방이 있으면 더욱 겸손해져야 합니다. 안일과 나태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해 줍니다. 비방받을 때 오히려 감사하면 삶은 더욱 성숙합니다. 비판 방식에 신경 쓰지말고 그속에 있는 귀중한 제안을 찾으면 됩니다. 그리스 속담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앞뒤에 하나씩 자루를 달고 다닌다. 앞에 있는 자루에는 남의 허물을 모아 담고 뒤에 있는 자루에는 자기의 허물을 주워 담는다." 뒤에 있는 자신의 허물을 담는 자루는 자기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반대로 남들 눈에는 잘 보인다는 것입니다. 근거있고 사실적 비난을 받으면 분노하며 변명만 하지 말고 자신을 성찰하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는 싸움의 대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사람이 싸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영적인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사탄과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사람과 문제를 구분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1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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