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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물질과 영성의 실용단계

영성묵상훈련 인보라............... 조회 수 2159 추천 수 0 2011.07.30 18: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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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ww.inbora.com/gnuboard/bbs/board.php?bo_table=board13&wr_id=18 
물질과 영성의 실용단계

Ⅰ. 들어가면서

물질의 실용 단계란 삶에서 물질에 대한 바른 관리자로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의도대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영광을 위하여 물질로 참여되는 구체적 삶의 시작을 말한다. 우리는 전에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을 바르게 사용하지 못했으나 실용단계에 이르러 비로소 하나님께서 물질의 주관자이시고 생사화복의 주인이 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 앞에 살아 드리므로 실용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것처럼 살아 왔으며 환경과 조건, 내가 가진 돈 등 여러 가지 육신 적인 것들을 의지하여 살아 왔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소망이 주께 있음을 알지 못하고 내가 소유한 것을 가지고 기뻐하고, 이 세상에서 천년 만년 살 것처럼 나의 소유하는 것을 목표로 살았다. 그래서 많은 부분들에 있어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지 못했다.

물질의 실용이란 하나님께서 주시기도 하시고 거두시기도 하시는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하나님으로 산다 것을 구체적으로 경험함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광야 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먹게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을 경험시키기 위해서이다(신 8:3). 이 사실에 대해 신명기는 반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있다. 우리는 실용단계의 구체적인 삶의 경험을 통해서, 내가 사는 것이 단순히 물질로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공과를 배우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은혜로 산다는 것을 주관적으로 경험할 때에 구체적으로 실용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물질의 실용이란 세상에서 체험하는 그러한 실용이 아니다. 물질의 실용이란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물질을 보내 주시기도 하고 거두시기도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경험하면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하나님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아직은 실용단계의 삶을 영적인 삶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 단계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많은 실용을 체험을 해야한다.

이제는 물질에 대한 가치관과 사고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임을 알기 때문에 내가 가진 것이 있든지 없든지 무조건 하나님으로 인해 안식을 누리는 삶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실용 단계에서 깊이 경험을 해 봐야 알 수 있다. 아직까지는 내 소유를 믿고 만족하거나, 내 육체가 원하고 바라는 만큼 소유하지 못했을 때 우리는 불평과 원망, 근심과 염려를 가지고 살아왔다.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하나님보다는 내가 가지고 있는 물질이나 내 주변의 환경을 바라보고 그 안에서 안식하고자 하는 그 연약함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실용단계에서 철저하게 훈련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인해 사는 삶으로 바꾸어져야 할 것이다.

물질의 의무와 책임단계를 다시 한번 배운 대로 점검해 보자

물질의 훈련은 우리가 훈련한 만큼만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실용단계에 들어가기 전에 다시 한번 물질의 의무와 책임단계를 배운 대로 훈련받고 있는지 우리의 훈련을 우리의 훈련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는, 내가 주인 되었던 삶에서 하나님께 주인의 자리를 내어주는 훈련이다. 그리하게 될 때 우리는 물질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심을 배우게 되고, 우리의 모든 삶을 하나님 중심으로 하여 살 수 있게 된다. 다웟은 역대상 29:11에서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는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라고 선포하고 계신다.

둘째로, 사람에 대하여 의무와 책임을 졌다면, 이제는 하나님에 대하여 의무와 책임을 져보는 훈련이 되어져야 한다. 전에는 내 의지와 내 뜻대로 내가 사용하고 싶은 곳에 사용했다면 이제는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곳에 사용하고자 하는 훈련이 의무와 책임단계에서 잘 되어져야 한다. 각자의 삶 속에서 얼마큼 충실하게 순종했는가에 따라서 그 열매는 달라진다. 물질의 실용단계를 배우면서 실용단계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체험들을 누리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심는 의무와 책임을 다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실용의 구체적인 누림이 없다. 다시 한번 물질의 의무와 책임단계를 배운 대로 훈련하고 점검해보아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께 묻는 훈련이다. 많은 사람들이 필자에게 하나님께 물어봐도 대답이 없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묻고자하는 그 마음이다. 아직은 성장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답을 듣는다는 것은 솔직히 어렵다. 적어도 진리단계에 들어서야 가능하다. 그러나 묻고자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실용적으로 구체적인 체험을 할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묻는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것은 내가 사람 앞에 심지 아니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주인 되셔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밭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하나님 앞에 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하나님께 묻고 행하는 훈련을 해야 할 것이다.

넷째는, 물질을 아니라, 그를 통해 물질을 주시는 하나님을 받는 훈련을 해야 한다. 우리가 사는 삶은 영적인 세계요, 이미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법을 따라서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우리는 단지 육신으로 주고 육신으로 받으면서 그렇게 살았다. 우리가 영성 훈련을 받으면서도 단지 육신으로 주고 육신으로 받고자 해서는 안 된다. 물론 우리가 그렇게 하고자 할지라도 내 영혼이 구체적으로 성장되지 않는 한 하나님 앞에 내 영혼이 심고 거두는 구체적인 삶의 열매는 아직 거둘 수가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 그를 통해 물질을 주시는 하나님을 받는 삶을 살고자하는 우리의 의지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 훈련을 복합적으로 받으면서 실용단계로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특별히 이 단계에서는 영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간증과 체험을 주시는 시기이다. 이러한 체험들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게 하며, 실용단계로 들어가게 한다.

실용단계는 단순하게 심고 거두는 개념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심을 깨우쳐 알아 가는 시기이다.

이웃을 섬기는 것이 단지 내가 좋아서, 나를 위해서, 내가 기쁘므로, 내 것 가지고 주다 보면. 당연히 그 결과로 자랑하게 되고, 공로 의식이 생겨난다. 그래서 당연히 주었던 만큼 찾으려고 한다. 하나님께 심어놓고 이상하게 사람에게 거두려고 한다. 물질이란 하나님께서 주인이시다 는 사실을 오늘 깨우쳐 가는 것을 실용단계라 한다. 실용 단계는 단순하게 심고 거두는 개념이 아니다. 실용단계의 시작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심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복의 근원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수도 있고 주시지 않을 수도 있다. 모든 것은 하나님 주관 아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실용 단계에 입문할 수 있게 되어진다. 사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산다. 또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복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는다.

광야에서 훈련받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역시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찾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근원이신 것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모세를 의지했다. 모세가 산에 올라가자, 금송아지 만들어서 하나님이라고 숭배했다. 그들이 믿고 의지했던 것은 모세의 배후에 계셨던 하나님이 아니라 모세였다. 그래서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으니까 불안해하며, 두려워하고, 근심했다. 그래서 우상을 만들다. 아론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니 당연히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가르쳐야 했는데, 아론은 그렇지 못했다. 오히려 백성의 비위를 맞추어 주었다. 잘못된 목회자의 본이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추구하고 있는 사람의 욕망을 부추겨서 오히려 그 욕망으로 잘못 가게 만드는 것이다. 어쨌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를 통하여 가르치고자 하셨던 것은 하나님께서 복의 근원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신명기 8:2-4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하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삽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 하였느리라"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치기 원하셨던 것은 사람의 살고 죽음과 사람의 복과 화가 바로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셨고, 때로는 시험을 내리셔도 역시 이 진리를 가르치시기 위해서 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의도를 져버린 채 자기 육신의 먹고, 배고프고, 목마르고 하는 자기들의 형편만 보았기 때문에 남의 다리만 긁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 편에서 바라보아야 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나를 주시해야 한다. 내게 일어나는 사건과 문제 속에서 하나님께서 도대체 무엇을 원하셨는지, 왜 하셨는지 하는 것들을 주시해야 그 안에서 하나님의 공과를 배우고 결국에는 하나님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 편에서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목적과 다른 쪽으로 자꾸만 간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측면에만 치우쳐버리니 같은 일을 경험하면서도 광야 길을 40년을 돌았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모습이 우리에게 나타날 가능성이 다분히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실용 단계에 입문한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다. 우리에게 실용 단계라는 것은 물론 생명적 관점에서 볼 때에 대단하지 않지만 보편적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펴볼 때 이 실용단계에 입문한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하나님께서 복과 화의 주관자라는 사실을, 그래서 하나님 앞에만 복이 있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되어야 형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 들은 남의 다리를 긁는다.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간을 하나님 앞에 다룸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시기 위해서 마침내 그렇게 하셔야만 했다고 신명기 8장에 말씀하신다."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함이었느니라"(신8:16).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그 진정한 목적을 우리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서 자꾸만 남의 다리를 긁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러한 목적 안에 들어가 있지 못하므로 하나님의 목적이 보여지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그 진정한 목적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서 자꾸만 남의 다리를 긁을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남의 다리는 모세였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모세가 있다. 그 모세가 남편이나 혹은 직장이나 혹은 어떤 사람이나 환경이 될 수 있다. 아니면 내 자신의 욕망들이 모세가 되어있는 분들도 있다. 더 부하고 싶은 욕망, 더 좋은 집, 더 좋은 차, 더 좋은 환경, 더 부하고 싶은 욕망들이 모세가 되고 싶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에 결국은 남의 다리를 긁는 것이 된다.

목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져야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는 잘못 이해하고 있다. 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져야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우리가 통과해야하는 길(과정)을 준비해 두셨다. 우리는 이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를 복 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삶을 주관하심을 알게 하는 실용단계를 경험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살리고자 하시면 천하에 누가 와서 저를 죽이고자 해도 죽일 수 없다. 베드로가 감옥 속에 갇혀서 지금 죽을 날짜 받아놓았어도 감옥에서 자고 있다. 천사가 가서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웠다(행 12:5,6). 베드로의 믿음이 깊어서가 아니다. 이미 생(生)과 사(死)의 문제는 자기를 떠났기 때문에 편히 잘 수 있었던 것이다. 사느냐, 죽느냐 하는 것은 이미 자기를 떠나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살리고자 하면 죽을 사람 없고, 하나님께서 죽이고자 하면 살 사람 없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 있다. 그런데 조바심 낼 까닭이 뭐 있겠는가. 다만 주께서 하시리라 하고 편히 잘 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 자신이 생명 적인 삶을 살아지면 자연스럽게 누릴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아직 과정 속에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권리를 주장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 시험을 통과해야만 된다.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통과해야만 된다. 통과해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사용하실 수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 과정을 주신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복이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요구하셨던 사건을 통해 우리는 영적 지각을 사용해서 하나님을 알고 또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 사건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복인 줄 앎으로 인해 아브라함이 순종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영적 지각을 사용하여 훈련해야 한다. 오늘 하나님 앞에서 훈련을 받아야 된다. 더 나아가서 우리가 이제는 하나님께서 복의 근원이라는 사실,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았다면 그 다음부터는 우리가 복 받을 행위를 해야 한다. 하나님께 복을 받을 행위가 '심는 것'이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기지 않으신다.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갈 6:7). 이것이 진리이며, 하나님께서 복의 근원이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우리가 이제는 구체적으로 심어보자는 말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8)라고 말씀하신다.

심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개념이다. 헌금을 드려도 하나님 앞에 드리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사람 앞에 보이려고 해서는 안되며 정말로 내 중심을 하나님 앞에 변화시켜 보자는 것이다. 이것이 되어지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좀 울어도 보자. 내가 하나님 앞에 심지 못하는 이 인색함을 발견하고 이 인색함 을 하나님 앞에 회개도 해 보고, 하나님을 믿어 드리지 못하는 이 불신을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변화시켜 보아야 한다. 그래서 심을 수 있는 사람이 되자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주님 앞에 물어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나와 만나게 하신 것은 나로 도와주라는 것입니까? 그러면 주님의 마음으로, 기쁨으로 심어 보겠습니다 라고 순종해야 한다. 이렇게 되어지는 과정 속에서 우리가 되어지지 않던 부분들이 실제화가 되어질 수 있으며 구체적인 경험들이 풍성하게 되어질 것이다.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b).

말씀대로 되어지는 훈련을 받는 것이다. 성경은 주는 자가 복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보편적 도덕이고, 윤리이다. 세상 나라는 받는 사람이 복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주는 사람이 복이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 나라로 들어 왔으니까 하나님 나라의 보편적 도덕이 우리의 삶이 되어져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저 세상 나라에서 살았던 삶의 습관을 그냥 가지고 있다. 내 감정과 지식에, 내 선지식에 가지고 있는 윤리 도덕을 버리셔야 된다. 우리가 도와준다는 개념도 내가 기분 내키는 대로, 내 좋아하는 사람, 내 뜻대로 해주는 것 옳지 않다. 그래서 주 앞에 물어보아야 한다.

Ⅱ. 실용단계 정의

실용단계란 '물질(돈을 포함한 포괄적인 모든 물질의 세계)을 물질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물질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심을 알고 하나님께 심어 하나님으로부터 거두는 과정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를 훈련의 차원에서 다시 정의하면, 실용단계는 헌금을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물질적인 복을 받는 것을 경험하며 헌금을 단순한 기부행위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는 방편이요, 비결로 이해를 해서 단지 복을 받는 것이 목적이 되어 열심을 내어 헌금을 하고, 구제에도 관심을 갖고 어떻게 하면 많이 할 수 있을까 방법을 도모하는 단계이다. 즉 하나님을 의식하고 헌금을 하거나 이웃을 구제한 행위에 대하여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역사 하심을 경험하는 단계이다.

또한 실용단계는 구체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기 시작하는 단계로써, 과거에는 하나님 앞에 살지 못했지만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물질로 구체적인 삶을 살아드리게 된다. 이 단계에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인생의 생사화복의 주관자가 되심을 깨달을 때에 구체적인 실용을 경험하게 된다. 이 실용은 세상에서 경험하는 그런 실용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시기도 하고 하나님께서 거두시기도 하는 하나님으로 산다하는 구체적인 경험을 의미한다. 쉽게 말하면, 실용단계는 하나님의 밭에 심고 하나님의 밭에서 거두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주가 되시고 주관자가 되신다는 것이 깊이 체험되어져야 한다.

'물질'이란 도대체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이 개념을 바르게 알아야 실제화 되어 생명이 된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1) 물질은 단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수단이다.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이 왜 '존재' 하는 것이고, '물질'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그 개념을 바르게 알아야 실제화 되어지고, 생명이 되어진다. '생명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내게 내 자녀를 섬기고 돌보는 수단으로 물질을 위탁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간 관계에 있어서 내 자녀를 대함에 있어 하나님 편에 서서 주님의 마음과 사랑으로 대해질 때에 물질도 역시 그 안에서 사용되어지기 때문에 생명 적인 것이 되어진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내 자녀이기 때문에, 내 자녀를 위하여, 내 자녀를 사랑해서 하는 육신적 관계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편에 서서 사용되어지는 것이 되어질 때 우리는 물질의 바른 사용자가 되어 하나님과의 물질 관계에 있어서 바르게 살아지는 삶이 되어진다.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주님이 쓰실 수 있게 되어지는 것이 물질의 생명이다. 물질의 최종적인 목적은 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에 사용하시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먹는 것도 하나님의 일이다. 이것을 깨닫고 보니 육체는 하나님 것인데 내가 제대로 관리하지 못함으로 몸이 아파서 아버지께서 쓰시고자 하시는 때에 쓰실 수가 없을 때 내 몸이 아픈 것도 주께 죄송함을 알게 되었다.

2) 주안에 들어가 보아야 한다.
물질의 목적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안에 들어가 보아야 한다. 주안에 들어가 보아야만 물질이 주님을 위해서 또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의 몸에 대하여 자신이 먹어주는 음식도 주님을 위해서 먹어주는 것이 된다. 그렇게 될 때에 이 물질을 자신의 몸을 위해서 쓰고도 주님을 위해서 쓰는 것이 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육체의 대한 사랑, 예를 들면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자신이 건강해지고 싶은 것, 더 오래 살고 싶은 것 등의 육체에 대한 사랑이 온전히 배제될 때에 우리가 먹는 것, 또 먹는데 사용되어지는 돈까지도 주의 일이 될 수 있다. 다 바친 다는 것은 곧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 되어진다라는 개념이다. 전부 바친다는 개념이 단순히 육신 적으로 하나님 앞에 헌금하여 다 드린다는 것이 아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몽땅 바칠 수는 없다. 언제든지 무엇인가는 남아있다. 이런 의미가 아니라 정말로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 되어져서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사용되어질 때에 그때에 전부 바치는 것이 되어진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내 물질이 아니고 하나님 것이므로 하나님 원하는 대로 사용해 드릴 수가 있다.

3) 하나님 앞에 다룸을 받아서 물질이 하나님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데서부터 출발되어져야 한다.
어느 날 갑자기 전부 바친다고 바쳐지는 것이 아니다. 생명 적인 삶은 하나님을 위하여 거지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위하여 망한다는 것이다. 내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육신은 죽어야 한다. 날마다 죽어야 한다. 날마다 망해야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 고백이 있어야 날마다 영으로 살 수 있다. 옛사람은 날마다 벗어버리고 날마다 하늘로부터 오는 신령한 옷,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

4) 내 것이 주님의 것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주님의 것이 내 것이 된다.
주 앞에 다 드리고 보니 내 것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거지다. 그런데 주안에 있어보니 다시 주님의 것이 다 내 것이 된다. 주님의 것이 다 내 것이 되어지려면 먼저 내 것이 주님의 것이 되어져야 된다. 내가 주안에 있지 아니하면 주님이 내 안에 계실 수 없다. 내가 먼저 주께 드려질 때에 사실 주님의 것이 다 내 것이다.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5:7에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하셨다.

영성적으로 이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주님 안에 내가 들어가 있으면 그리고 주님 말씀이 내 안에 있으면 하나님 앞에 무엇이든지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든지"의 개념이 육신적인 의미가 아니다. 이 개념은 사실 우리가 주안에 충분히 들어가서 나는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있어지는 삶을 누려봐야 깨달아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전 10:31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라고 이 말씀이 우리 안에 이루어진다.

Ⅲ. 실용단계 특징

1. 육신 적이기는 하지만 기쁜 마음으로 드린다.

이것은 결론적인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의무와 책임 단계 훈련을 열심히 하면 이렇게 실용단계의 결과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런 기쁨이 있어서 정말로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것 자체가 기쁨이다. 그런데 우리 자신들이 아직은 이러한 마음이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기쁜 마음으로 드리려고 하는 이와 같은 우리의 순종의 자세가 너무나 소중하다. 이렇게 되어져야 실제 속에 들어갈 수 있다.
기쁜 마음으로 드리는 것은 나중의 일이다. 지금은 먼저는 순종을 하고 그 다음에 기쁨으로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체험을 통해서 점점 우리의 가치관이 변화되기 시작한다.

실제 된 다음에 하려고 하지 말라. 이것은 순종이 아니다. 실제는 안 됐지만 오늘 내가 하나님 앞에서 이것이 우리의 삶의 도리(윤리)이며 정말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참된 방법이고, 모습이라고 깨달았다면 그렇게 한번 해보자. 순종한 이후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기쁨은 대단하다. 이 기쁨은, 영혼 안에서 하나님 뜻대로 순종해 드림으로써 얻는 기쁨이다. 이것은 주안에서만, 영적인 세계 속에서만 누릴 수 있다. 심을 곳을 찾아내고 그곳에 정성을 다해서 심은 이후에 어떤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칭찬 속에서 기쁨을 누려야 한다.

2. 하나님께서 나와 모든 것의 주관자이시고 다스리는 분임을 안다.

시편의 기자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 24:1) 라고 노래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목마를 때 하나님께서 물을 주셨다. 그러나 길을 가는 도중에 미리 샘물을 파놓으셨다가 목이 마르기 전에 먼저 알아서 주시지 않으셨다. 일주일의 분량을 쌓아 놓았다가 마음 편히 먹게 하시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미리미리 하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도 안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니다. 혼의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가? 아마 하나님께서 그리하셨다 하더라도 그들은 또 다른 불평거리를 찾아냈을 것이다. 우리의 혼은 불평거리 찾는데 천재이다. 한가지 불평을 찾아내면 그 속에 빠져서 나올 생각을 안 한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통해서 날마다 먹이시고, 목이 말라서 갈할 때에 반석에서 물을 내셨다. 그리고 고기가 먹고 싶을 때에 불평을 하므로 하나님께서 그 때에 메추라기를 보내셨다. 이 사건 사건이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다루고 계시는가? 하나님께서 주관자라는 것이다. '주인'이라는 개념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주관자라는 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나를 다스린다는 개념이다. 우리가 아직은 하나님께서 나를 다스리도록 살아드리지 못한다. 아직까지 하나님보다는 하나님의 것(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 평안, 건강 등등)에 관심이 더 많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기쁨보다는 내 기쁨이 더 중요하다. 하나님의 만족보다는 내 만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직은 우리가 내가 나의 주인인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영적인 현주소이다. 그러나 여기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3. 하나님 앞에 비로소 물질로 사는 구체적인 삶의 시작이다.

물질에 있어서 실용 단계는 이제 드디어 하나님 앞에 내가 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에 하나님 앞에 내가 물질로 살지 못했었는데 이제 하나님 앞에 드디어 물질로 사는 그런 구체적 삶의 시작이 실용 단계이다.

4. 하나님의 밭에 심고 그 밭에서 거둔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라"(고전 3:9)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밭에 심고 그 밭에서 거두는 거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주가 되실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주관자가 되시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임을 알기 때문에 내 자신이 물질이 있든지 없든지 모든 조건을 떠나서 무조건 안식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실용 단계에서 깊은 경험을 해야 한다. 우리가 아직까지는 내 소유를 믿고 그리고 내 만족할만한, 즉 내 육체가 원하고 바랄 만큼 가지지 못할 때 우리는 불평이나 원망과 근심과 염려를 가지고 살아간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하나님보다는 내 주머니나 환경을 바라보고, 그 안에서 안식하고자 하는 그 연약함이 있다. 아직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사실은 구체적으로 내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5. 물질을 주는 것은 '하나님'을 드리는 것이다.

우리는 물질을 심을 때 여전히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나 이웃에 대해서 내 것 가지고 내가 주지 아니하는가 살펴야 한다. 우리가 물질을 주고 심을 때 '하나님'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주는 경우가 많다. '사람'을 주어짐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첫째는 내 것 가지고 주므로 사람 앞에서 주인된 자리를 취한다. 둘째는 내 것 가지고 사람을 주므로 공(功)을 치사한다. 자기생각으로는 하나님 앞에 하나님께서 사랑하라 말씀하시니 이웃을 섬기라 하시니 한다고 순종해놓고 보면은 우리의 육의 성향이 공(功)을 치사하는 이상한 방향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것을 말하고 싶어서 견디질 못한다. 내가 주인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심었기 때문에 그 밭에서 내가 거두고 싶어하는 마음이다.

6. 하나님 앞에서 가나안 땅은 심은 만큼 거두는 곳이다.

여호수아 5:11,12절에서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 소산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니 그 땅 소산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열매를 먹었더라" 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 앞에서 가나안 땅은 구체적으로 심은 만큼 거두는 곳이다. 광야에서는 만나를 먹고살았다. 하나님께서는 일평생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을 하지 안 했어도 먹이셨다.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졌지 자기 힘으로 되어진 것은 하나도 없다. 안 심어도 만나를 먹이셨다. 그러나 가나안은 그렇지 않다. 가나안은 심고 거두는 땅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만나가 그치게 하셨다. 우리가 가나안에 들어가도 여리고를 넘어서야 비로소 영성적 윤리단계가 확립이 된다. 삶의 구체적인 체험은 이 때 이루어진다. 지금은 훈련이라는 것이다. 구체적인 실제는 그 때 이뤄지고 지금은 훈련이라는 것이다. 실제가 되어져서가 아니라 그렇게 훈련을 받는 마음이 중요하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만나를 먹으면서도 원망하였다.
필자도 하나님 앞에 훈련을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 정말 많이 울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참 모습이 보여졌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주신 것도 잘 보여지지 않는지.... 육신의 인간은 원래 그렇다. 만나를 먹으면서도 원망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원망하며 살았다. 내가 하나님 앞에 받을 자격이 하나도 없으면서도 당연히 더 받아야 될 것처럼 원망한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먹이시는 것이 얼마나 은혜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더 받을 것이 있는 것처럼 원망만 한다. 그래서 일평생 하나님 은혜로 살아왔으면서도 현실 속에서 우리는 매일 불평과 원망을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깨뜨리신다. 필자 자신에게 이러한 깨뜨리는 훈련이 시작되어 하나님 앞에 울 수밖에 없었다. 이것을 깨닫고 정말 은혜를 많이 받았다.

2) 깨달아 지는 대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구체적으로 심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래서 필자는 서울에서 영성 훈련을 받을 때에도 점심시간에도 식사를 빨리 하고 혼자 앉아서 오전시간에 받은 은혜의 말씀을 되새김질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은혜 받은 말씀을 되새김질하면서 정말 많이 울었다. 그런데 서울에서 그렇게 울며 회개하고 하나님께 감사 드렸는데 광주로 내려오면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다 잊어버리는 것이었다. 현실을 바라보면 정말 한심하기 때문이다. 그 때에 필자가 깨달았던 것이 '내가 아직은 그저 내 영혼이 듣고서 이렇게 살아야겠다'하고 깨달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깨달아지는 대로 순종해 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하나님 앞에 그리고 사람 앞에 구체적으로 심는 훈련을 시작했다. 좋아서, 재미있어서 순종해 드린 것이 아니다. 때로는 내가 쓰고 싶은 돈도 이웃에게 심었다. 내 구두 보면 내 구두 낡아서 새 구두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성도의 낡은 구두를 보고 사주었다. 내가 써야 할 곳에 나보다도 내가 까마귀가 돼서 내가 배달해 주어야 할 엘리야를 찾았다.

3) 배운 대로 순종하려고 하다보면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인색한지 발견되어진다. 내 모습의 참된 실상이 발견되어져야 하나님 앞에 울어진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라고 했다. 좋은 마음으로 심지 않을 때도 많이 있었다. 때로는 억지로, 마지못해 할 때가 있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울었다. 나의 마음이 보여지므로... 그런데 처음부터 순종해보지 않으면 이것 또한 알지 못한다. 배운 대로 순종하려고 하다보면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인색한지 발견할 수가 있다. 내 모습의 참된 실상이 발견되어져야 하나님 앞에 울어진다. 우리 자신의 죄의 본성이 드러나지 아니하면 진정한 회개는 되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적당히 얼마큼은 의롭다라고 여겨지고 있는 한은 진실된 회개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나님 앞에 이것이 뼛속까지 죄인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느껴져야 하며 하나님 앞에서 도저히 살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아야 진정한 회개가 되어진다.

7. 물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깨달으므로 주인의 자리에서 비켜나기 시작한다.

물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들과 씨앗도 하나님의 것이라고 자신에게 가르치지만 아직도 여전히 육신 적인 개념 속에서 있다. 기쁨으로 하지만 내가 하는 것 같으므로 자꾸만 육신 적으로 흐른다. 그래서 밭을 찾아 심는 것 자체가 기쁨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자꾸만 거둠에 대해서 생각한다. 내가 주인의 자리에 있지 말고 옆으로 비켜나야 한다. 육신의 마음은 참 기묘하다. 아이들에게 엄마가 심부름 보내면 자기 것을 가져다 주는 것 같아서 이웃집 아이들도 업신여긴다. 우리가 꼭 하나님 앞에 그러하다. 그러나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는 것이 되어져야 한다.

8. 물질중심의 신앙이 형성된다.

"이것은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고후 9:6)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심고 거둠의 원리를 자꾸만 발견하면서 신앙을 곧 육신의 삶을 유익 되게 하는 수단으로 발전시킨다. 심지 않고 바라는 것은 도둑 심보이다. 복 받을 일을 해야 복을 받는다. 그렇다 해서 복을 받고 싶어 심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물질중심의 신앙적 가치관이 형성되어야 한다. 아직까지도 영원 즉, 하나님 나라에 속한 의식이 없다. 그러므로 물질 단계를 얘기하면서도 영혼의 영성에 대해서 접근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필자 자신이 영생을 발견하고 보니 모든 것이 다 하찮게 느껴졌다. 오히려 필자 자신 속에서 육신이 거추장스럽고 걸림돌이 되었다. 육신이라는 것이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도구이기도 하지만 또한 자신을 더 신령한 자리로 나아가는데 많은 장애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이 이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는 결혼도 하지 않았다. 바울은 영생을 산 것이다. 현세천국에서 하나님나라로 옮겨 진 삶이다. 신앙생활이란 것은 이런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살다가 하나님 나라로 옮겨져야 한다. 이것이 육신의 옷을 벗어버리는 것이다. 말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로 옮겨져야 한다. 그래서 무엇보다 영혼의 영성이 잘 입혀져야 한다. 우리가 그러한 성숙한 단계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이 자리에서 물질 중심의 신앙 생활이 형성이 된다고 말했지만 우리 자신이 이것을 다스려서 주인의 자리를 하나님께 내어주는 훈련을 하여야 한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져야만 어떤 삶을 살 수 있다. 이것이 존재의 영성이다. 우리 자신이 명예라는 걸 하찮게 여겨야 남이 나를 비난하는 소리에 자유로울 수 있다. 명예에 집착하니까 비난하는 말을 못 견딘다. 내가 이 세상 나라에 대해서 집착이 없어져야 이 물질적인 가치관을 벗어날 수 있다. 내가 아직은 어떤 사람이 되어지지 아니하면 그런 삶이 있는 건 너무 당연한 것이다. 내가 아직 육신의 잘되고 못되는 데에 삶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오늘 내 삶 속에서 우리가 물질 때문에 근심과 염려를 한 것이다.

9.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져 하나님 앞에 사용하는 것이 즐거운 일이 된다.

1)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물질의 훈련을 통해서 물질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가르치신다. 그래서 이 훈련을 우리가 받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 앞에 묻고 사용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쓰실 수 있도록 먼저 자원하는 마음을 드려야 한다. 오늘 우리는 물질을 대부분 나를 위해서 쓴다. 내 아내, 내 남편, 내 자녀를 위해서 쓴다. 결국은 자신을 위해서 쓰는 것이다. 자녀를 위해서 쓸 때 아까워하지를 않는다. 이상하게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면 남편을 위해 쓰는 것이 아깝지 않다. 또한 남편도 아내를 위해서 쓰는 것도 아깝지 않다. 그런데 사랑에 금이 가면 아까워진다. 아내가 옷 한 벌 사 입는다고 하면 밤낮 옷만 사냐고 윽박지른다. 그러나 사랑할 때는 그렇지 않다. 결국은 자기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자기가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깝지가 않은 법이다.

2)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윤리 의식이 생겨지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 주 앞에 사용되어지는 것이 아깝지 않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 과정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는 이 과정 속에서 조금 더 나아가면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사용되어진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원래대로 하나님께 돌려 드린다는 개념이다.

3) 하나님을 사랑해서 내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드리게 되어지면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 심었다고 말할 수가 없게 된다.

10. 아직 진리 적인 축복의 의미를 깊이 알지는 못하지만 부분적으로 축복을 체험한다.

실용단계의 특징에서 우리가 점검해야 할 것은 이 부분에 아직 진리 적으로 물질적 축복의 의미를 깊이 알지는 못하지만 우리는 부분적으로 체험한다. 진리 적인 물질적 축복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진리 적인 물질의 축복이란 내가 무엇을 받아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지므로 감사하는 것이다. 심고 거둠의 체험에 있어 내가 무엇을 받았기 때문에 좋은 것이 아니라 진리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감사한 것이다. 또한 물질이라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임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

1) 물질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에게 주셨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을 쉽게 망각한다. 그러므로 진리 적인 삶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피조물들이 허무한 것들에 굴복하며 피조물들이 탄식하면서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을 기다리는 것이다(롬 8:19,20).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을 알지만 아직은 그 축복의 의미를 알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현재에 그러한 삶을 자꾸만 추구해 드려야 우리 자신이 그런 삶에 도달되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를 위해서 기뻐하고 자기를 위해서 즐거워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오늘 주셨으면 오늘 심을 곳을 찾아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안다면, 다시 심을 것을 찾아야 한다.

2) 이제는 실제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내면적인 중심으로 접근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 다룸을 받는다는 것은 아주 단순한 것이다. 우리가 그 의미를 외형적인 접근에서 이제는 실제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내면적인 중심으로 접근해 들어가야 된다. 많은 분들이 외형적 접근을 한다. 외형적 훈련을 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내가 오늘 이 일을 하는 그 동기, 목적에 있어서 접근이다. 아직은 내가 육신 적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위하여, 내가 아직은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위하여 자꾸만 관리하는 자로써의 내면적 훈련을 자꾸만 시켜줘야, 다시 말하면 얼마를 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심고자 하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 심고자 하는 내면적 훈련이 되어져야 우리가 바르게 성장되어질 수 있다.

우리 자신들이 이제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정말로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하나님의 바른 목적을 위해서, 그것이 실제는 아니지만 그렇게 믿고 한다. 이것은 내가 아직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물질의 참된 축복의 의미를 잘 모르지만 그러나 그렇게 믿고 한다는 것이다. 물질에 대해서 물질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거구나. 내 생활의 유익과 자기 편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하는 거구나. 내 것이 다 하나님을 위해서 쓰라고 주시는 거구나. 이 정도 깨닫는다는 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깊이 들어가야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우리 안에서 자꾸만 육신적 동기들이 있다. 아깝기도 하고, 잘 믿어지지도 않고, 자꾸만 자기 삶을 돌아본다. 우리가 결과에 대해서 뭔가 반응하고 열매를 기다리는 이런 마음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실제지만 선험적 지식, 먼저 간 사람들의 지식을 배워서 우리가 그렇게 순종해 보면, 그렇게 믿고, 내 마음을 바꾸어서 순종해 보면 영적 실제 안에 쉽게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교육이 우리의 성장을 촉진시킬 수 있는 요소가 되어진다.

Ⅳ. 실용단계 훈련

"훈련"이라는 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아직 되어지지 아니하므로 훈련이 필요한 것이지 되어진 다음에는 훈련이 필요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직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나의 주관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믿어드리지 못함을 이제는 믿어드리고 사람
앞에 하던 일을 하나님 앞으로 가지고 가는 훈련이다. 이런 의미에서 "훈련"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아직은 그것이 분명히 인식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렇게 해 보고자 훈련이 참으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1. 하나님에 대하여 심어야 한다. 즉 하나님 앞에 자신의 중심을 훈련시켜야 한다.

실용단계 훈련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하여 심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드리는 훈련을 할 수 있겠는가?

첫째, 중심을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행해야 할 것을 얼마나 자주 망각해 버리는가? 스스로 자신을 속이지 말고 철저히 내 중심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훈련을 해야 한다. 스스로 되는 척, 하는 척을 하지 말아야 한다. 단 한 가지라도 행여나 이것이 사람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하는 것이 될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내 중심을 훈련시켜야 한다.

둘째, 훈련받는 마음으로 한다.
실제가 아니기 때문에 하기 싫어도 자꾸만 해야 된다는 말이다.

셋째, 씨앗도 하나님 것임을 알라.
씨앗도 하나님 것이라고 나를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의 참 의미를 이해 할 수 있다. 우리는 씨앗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잘 모르기 때문에 자꾸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기는커녕 세상이 다 알기를 원한다. 정말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우리가 안다면 어떻게 감히 창피해서 그럴 수 있겠는가? 이런 훈련들을 통해서 내가 뼛속까지 썩었다는 것이 발견되어진다. 나의 참 모습에 부딪혀 참된 나의 실상이 발견되어진다. 그래서 같이 실용을 경험해도 육신에 머물러서 경험할 수가 있다. 즉 뭔가 되어진 것만을 경험할 수 있고, 정말로 그 영혼까지 같이 주님 안에서 주님을 만남으로 성장되어질 수 있다.

2 실용적인 훈련에 참여해서 하나님 앞에 부지런히 심으면 거둠이란 구체적인 체험을 우리에게 주신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5,6)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가 실용적인 훈련에 참여해서 하나님 앞에 부지런히 심으면 반드시 거둠이라는 구체적 체험을 우리에게 주신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체험들을 단순히 그저 심는다라는 육신적 행위에 초점을 맞추어 훈련을 하면 우리 자신의 영혼이 결코 더불어 성장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의무와 책임을 배워 그렇게 순종하다보면 육신의 부모에 대해서도 의무와 책임을 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만큼 우리가 정말로 저 뼛속까지 하나님 앞에 죄인이다. 여전히 우리 육신의 성향은 받는 것은 너무 좋아하는데 말씀대로 심는 것을 순종하기는 왜 이렇게 어려운지.... 우리가 훈련받는 마음으로 부지런히 심을 곳을 찾고 또 내 중심으로 하나님을 대해서 드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훈련을 받아야 한다. 씨앗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서 반복적으로 훈련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정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일곱 가지 재앙이 없어도 충분히 애굽에서 출애굽 시키실 수 있었다. 왜냐하면 바로의 마음만 바꿔 버리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경험시키려고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경험시키려 하셨다. 그래야 그들이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사람들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저 평범한 방법이 아니라 기적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켰다. 우리 삶 속에서도 똑같다. 우리가 이러한 기적과 이적이 없이는 절대로 세상으로부터 하나님 나라로 중생 되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너무 세상 나라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 속에 그냥 머물고 싶지 하나님 나라로 옮겨지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철저히 다루신다.

오늘 내 삶에 나타나는 사건들을 가만히 살펴보아 과연 하나님께서 무엇을 가르치고 싶어하시는 가를 알아야 한다.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광야의 구체적인 다룸을 통과하고 있는가? 광야의 구체적인 다룸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심을 인정해 드리는 삶으로써 의무와 책임을 져보아야 한다. 부모와 자녀간에도 자꾸만 책임을 져 봐야 부모에 대한 도리를 알 수 있다. 아이에게도 부모가 작은 것을 요구해야 한다. 받고 싶어서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의무와 책임을 지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으면 아이들이 성장해서 부모를 섬길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어릴 때 너무 사랑스럽다고 감싸기만 하고 의무와 책임을 안 가르쳐줘서 지금 내 자식이 불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특히 요즘 젊은 엄마들은 대부분 사랑하는 방법이 잘못된 것 같다. 아이를 양육하는 자로써의 의무를 모른다. 사랑해 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바르게 양육해 주어야 한다.

3. 하나님으로부터 심고 거둠을 배울 때 하나님께서 왜 주셨는지, 어떻게 주셨는지 그리고 어떻게 심어야 하는지를 철저히 묻는 훈련을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받고 또한 얻고 싶어서 이렇게 훈련시키시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훈련을 요구하시는가? 우리로 하나님 앞에 바르게 '양육'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자꾸만 의무와 책임을 지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훈련받는 가운데 의무와 책임을 지는 이상을 넘어서서 하나님께 자원하는 마음으로 자꾸 물어야 한다. 오늘은 누구를 돕고, 누구를 섬겨야 되는지 물어봐야 한다. "하나님! 제 형편이 어려운데 누구를 좀 보내주세요"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짝사랑이다. "하나님! 이제 제가 누구를 섬겨야 됩니까?" 라고 물어야 한다. 심어야 거둠이 있음을 알아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먼저 심으라. 그리고 거둠에 관심을 갖기 보다 심는 것에 관심을 갖고 묻는 훈련을 철저히 해야 한다. 거둠은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진다는 사실을 깨달아 거둠에 대한 자유가 있기를 바란다. 실용 단계에서 심는 대로 거둔다는 원칙을 알아서 묻는 훈련은 영성을 입혀 가는데 참으로 소중한 것이다.

4. 변화 받아야 할 사람은 오직 나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문제가 내 탓이라고 발견되어야 한다.

영성 훈련의 가장 큰 의미는 나를 변화, 성숙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든 문제가 내 탓인 것을 발견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것을 인정해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관심을 갖도록 가치관을 바꾸어야 한다. 오늘 모든 삶의 결과를 내 탓으로 여기면 우리는 더 이상의 원망을 멈출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 탓인걸 몰랐기 때문에 원망을 했다. 그들은 항상 모세를 원망하며 불평하며 자기를 보지 못했다. 우리 자신들이 스스로를 양육할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 모든 문제를 내 문제로 받으며 날마다 머무르지 않고 자기 자신을 변화시켜 반복적인 훈련은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준다.

5. 영과 혼의 다툼이 있으므로 철저하게 영으로 혼을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도리(윤리)를 발견하면 영혼이 하나님 앞에 심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의 육체는 심는 것을 통해서 거둠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면 살며시 내 육체가 구체적으로 땅에 대한 욕망을 갖기 시작한다. 즉 꿈틀거리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자랑하기 시작한다. 간증이 아니라 자랑을 한다. 간증을 하면서 심고 거둔 그것이 전부 내 공로가 되어져 버리는 것을 듣고 한다. 하나님께서 심고 거둠의 진리를 가르치신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심은 것과 거둔 것을 자랑하고 있을 때가 많이 있다. 그래서 침묵하는 훈련을 자신에게 시켜야 한다. 말을 하다가도 아니면 입술을 다물어야 한다. 계속하다 보면 거기서 과장되고, 거짓말을 하게되고, 실수하게 된다.

영과 육의 다툼이 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3)

영혼이 잘되기 시작하면 육체가 때때로 심술을 부린다. 내 육체가 싫어한다. 영혼이 성장하기 시작하면서 영성 훈련 강의를 받고 오면 아내하고 많이 다투곤 했다. 육체가 심술을 부린 것이다. 영성 훈련을 받기 시작한지 한 일년동안을 앉기만 하면 밤을 새워가며 서로 깨닫고 서로 발견된 것을 나누었다. 그런데 어느 날 괜히 육체가 싫어하기 시작하더니 심술을 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내와 다투게 되었다. 그런 쓴맛을 경험하면서 성장을 하게 되었다. 실패도 이러한 면에서는 유익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실패하면 실패한 원인을 알아야 한다. 그 원인이 잘 깨달아지지 않을 때에는 먼저 훈련받은 영성의 선배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좋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영성의 선배가 말해준 '형과 아우의 싸움' 즉 '영과 육'의 싸움이라는 것을 듣고 그 원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영으로써 육의 행실을 죽이면 산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6. 물질의 관리자로 옮겨지기 위해서는 반복적인 훈련이 반드시 필요하다.

주님께서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0,21)라고 말씀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을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사용해야 할 것인가? 자꾸만 물어보고 사용해야한다. 이 훈련은 반복적으로 되어야 한다.
실용단계에서 묻고 행하는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로가 되어지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물질을 쌓아두면 도둑이 들고 좀이 먹는다. 그래서 주님이 부자 청년에게 그 원리를 가르쳐 주셨다.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눅 18:22)고 말씀하셨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내 모든 삶 속에 있어서 더 이상 나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관리자의 자리'로 옮겨지기 위해서는 반복적 훈련이 반드시 필요하다.

7. 성령을 위해서 성령으로 심을 때 거기서 영생을 거둘 수 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8)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신령한 복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자꾸만 육신을 위해서 심으므로 육신으로부터 죽고 썩을 것밖에 거두지 못한다. 고전 15:50 말씀에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라고 하셨다. 성령을 위해서 성령으로 심어야 거기서 영생을 거둘 수 있다. 우리는 자꾸만 우리 자신들을 하나님 앞에서 복 받을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 자기 상을 이미 받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 6:20,21) 이런 일들에 대해서 우리가 철저하게 경계하고 조심해야 한다.

물론 실용 단계는 육신 적인 자리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영혼의 영성이 잘 되어 졌다 해도 아직은 '영원'을 바라보며 살지는 못한다. 주안에서 조금 더 성장되고 성숙해야 영원을 바라보고 살 수 있다. 우리는 이 세상 나라에 속해 있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하면 복을 받고, 얼마나 누리면서 안식하고, 얼마나 행복한가 하는 구체적인 육신의 나라 즉 세상나라에 자꾸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우리의 실제이다. 만약 우리가 영원을 살고 있다면 오늘 우리에게 '육신을 위해서 심으라' 해도 심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훈련하는 것이다. 먼저는 하나님에 대해서 하고자 하는 내 중심을 바꾸어 드려야 된다는 것이다.

8. 우리의 중심을 바꿔서 하나님에 대해서 심을 수 있어야 한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 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찌니라." (갈 6:7-10)

1) 절대로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말라.
절대로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 우리가 영성 훈련을 하면서 대체로 이러한 부분에 있어서 많은 실수를 한다. 자기 자신을 속이고자 하지 아니 할 때 이 말씀을 알 수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꾸만 내 중심을 하나님을 대하여 살 수 있도록 바꿔드리는 일이 중요하다. 이 훈련 너무 소중하다.

2) 받을 것을 찾지 말고 심을 곳을 찾아야 한다.
사람들에게 자주 심는 훈련을 하는 것은 너무 좋은 일이다. 자꾸만 의무와 책임을 져봐야 한다. 의무와 책임을 져보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다. 자꾸만 심을 곳을 찾는 마음이 너무나 소중하다. 이 단계에서는 주님을 사랑해서 찾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훈련받기 위해 찾는 것이다. 아직은 훈련받아야 하므로 실용단계를 충분히 경험하기 위해서 심을 곳을 자꾸만 찾아야 한다.

받을 것을 찾지 말고 심을 곳을 찾아야 한다. 자꾸만 까마귀를 기다리지 말고 하나님께서 내가 오늘 누구에게 까마귀가 되기를 원하시는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중심을 바꿔서 하나님에 대해서 심을 수 있도록 자꾸만 나 자신을 채찍하고 나 자신을 가르치는 그런 귀한 일이 필요하다.

9. 자신을 쳐 복종시켜야 한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라" (고전 9:27)

1) 자신을 쳐 복종시킨다는 말은 훈련의 의미이다.
훈련의 의미를 이해하고 보면 자기를 쳐서 복종시킨다는 의미를 안다. 우리가 풍성히 경험하기 전에는 자기 안에서 쓸데없는 일을 한다고 생각하곤 한다. 아깝다는 생각이다. 아깝지 않으면 비정상이다. 그래서 자신을 쳐 복종시키는 훈련이 필요하다. 심기는 하지만 아깝다고 한다. 그러면 '과정'이라는 이야기밖에 드릴 수가 없다. 훈련이 있어야 된다. 우리는 여태까지 은혜만 받는 자였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내가 은혜를 베푸는 자로 살아드리기를 원하시는구나! 라고 영적으로 깨달아져야한다.

필자 자신도 훈련받을 때 그렇게 훈련해 드렸다. 필자는 평생을 하나님 앞에 받은 연단이 많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까마귀를 보내셨는지 모른다. 영성훈련을 받으면서 정말 필자의 영혼이 '아 정말 이렇게 살아야겠구나, 내가 못 사는 것(물질적으로 풍요롭지 못하는 것)이 이해가 된다'라고 탄식했다. 도대체 심어 둔 것이 있어야 오늘 거둘 것이 있을 텐데... 거둘 것이 없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라고 생각하니 불평의 마음이 없어졌다. 하나님께서 '목사 하라' 하셔서 했는데 왜 이렇게 날마다 안 되는지... 불평이 너무나 많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깊은 회개를 드렸다.

2) 육신의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잘 모른다.
하나님께서 육신의 인간을 향해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얼마나 많이 말씀하시는가. '너희들을 누가 애굽에서 구출해 냈느냐'. 하나님께서 당신의 공로를 자랑하려 그렇게 말씀하셨는가? 하나님의 은혜를 그들에게 자랑하려고 그러하셨는가? 아니다. 그들의 육신의 의식이 깨어져야 그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10. 우리자신들을 스스로 양육할 수 있어야 한다.

1) 물질을 하나님께서 물질을 주관하신다는 의미를 깊이 새겨 보아야 한다. 영성 적으로 실용단계에서 내 삶에 찾아 온 물질적인 고난에 대해서 우리가 진정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아직도 여전히 실용단계를 잘 모르는 것이다. 내게 오는 여러 가지 궁핍이라던가, 환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마땅히 받을만한 것을 받는 것이다. 필자 자신이 서울에서 영성훈련을 받으면서 아주 신이 났다. 그러나 광주에 다시 내려오면 맥이 빠졌다. 깨닫고 경험한 것과 실제는 너무 달랐다. 그 괴리 속에서 굉장히 많이 허덕였다. 그러나 훈련이 한달 두 달 지나면서 하나님께서 내게 너무 과분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런 욕망과 욕심들이 내 안에서 사라져 가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해 드렸다. "하나님! 너무 과분합니다! 이만큼 하나님께서 내게 교회를 맡기시고(그때 성도는 약 20-30명 정도), 훈련받을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신 것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필자는 항상 더 큰 것, 더 많은 것들을 바라보면서 이 은혜를 깨닫지 못하였고 마음속에서 불평만 하였던 것이다.

2) 하나님께서 과분하게 사랑하셨음을 발견하면서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그 욕망들을 비울 수가 있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배운다면 우리는 진리단계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진리단계로 나아가는 과정 속에서,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주관하심을 배워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겪은 경험이 이런 경험이다.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진리를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철저하게 알게 되었다. 그들은 철저하게 배웠기 때문에, 자기들의 목숨을 하나님께 맡기고 요단강을 건널 수가 있었으며, 또한 여리고 성에서 하나님께 순종해 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철저히 깨닫지 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순종해 드릴 수 없다. 깊이 새겨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제단에 우리를 올려놓은 훈련을 철저하게 받아야 한다. 그리할 때에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삶을 주관하심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11. 하나님 앞에 여김의 훈련을 해야 한다.

1) 여김의 정의
훈련 중에 있는 우리는 아직은 하나님께서 주인이라는 사실,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사실 잘 안 믿어진다. 내 주머니에 돈이 있으니 내 것 같이 여긴다. 그러므로 우리가 훈련하는 마음으로 자꾸만 하나님 것으로 여겨야 한다. 이것이 "여김의 훈련"이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 6:13)에서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로 여길지어다'에서 의 여김이다.

2) 여김은 진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실제이다.
"여김"이란 예를 들면 사랑해야 할 사람이 우리에게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람에게 도저히 사랑이 나아가지 않는다. 그러나 사랑하는 것으로 여기고 사랑하고자 해야 한다. 이것이 여김이다. 이것은 거짓이 아니다. 진리라는 것은 주안에서 이루어진 실제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라고 말씀하셨다. "실제"라는 것은 내가 믿어지든지, 믿지 아니하든지 이건 사실이다. 실제는 곧 사실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훈련은 이것을 사실로 알게 하시는 과정이며 이것이 곧 하나님의 목적이다. 우리가 사실 아직까지 믿어지지 않지만, 그렇게 깨달아지지 않지만, 진리를 배워 알기 때문에 이 사실에 대해서 공감은 하는 것이다.

3) 하나님께서 자꾸만 간섭하신다.
오늘도 내가 내 마음대로 결재하고 내 마음대로 눌러 버린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헌금조차도 내 마음대로 결재를 해 버린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런 것을 훈련시키시기 위해서 자꾸만 간섭을 하신다. 영적 지각이 있어서 그 간섭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간섭을 많이 하신다.

4) 여긴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김"이란 것은 무엇인가. 여김이란 것은 곧 믿어드린다는 것이다. 실제라면 여길 필요가 없다. 여긴다는 것은 믿어드린다는 것이다. 믿어 드리고 주인처럼 묻고 쓴다는 것이다. 실제가 되었다면 그렇게 살아드리면 된다. 실제 되지 않았으므로 믿어드리고 여겨드리는 것이 필요하다. 여긴다는 것은 '척'하는 것 곧 위선과는 다르다. 위선은 그런 척 하는 것이고 여긴다는 것은 그런 줄 믿고 순종해 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사랑이 되어지지 않지만 주께서 그를 사랑해야 될 내 지체라고 말씀하시면 그 사람이 지체라고 아무리 여겨지지 않아도 지체로 여기고 사랑해야 한다. 사랑이 되지 않지만 사랑한다 말하고, 사랑의 행위와 섬김을 하다 보면, 발을 씻어주다 보면 내 속에 주께서 사랑의 마음을 심어주신다. 어떤 사람에게는 주께서 성령으로 그 마음을 주어 사랑하게 하시고, 어떤 사람에 먼저 요단강에 발을 들여놓으니까 요단강이 갈라진 것처럼 먼저 믿고 순종해 드릴 때에 실제화 되기도 한다. 오늘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여긴다는 것은 대단히 소중한 것이다.

물질의 훈련에 있어서 자꾸만 묻고 행해야 하나님께서 물질의 주인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주인인 것을 다 깨달은 다음에 묻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인인 줄 믿고 자꾸만 하나님 앞에 묻게 될 때에 구체적으로 실용을 경험하게 된다.

5) 여기고 순종하다보면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진리를 좇아서 순종해 보면 그 경험들이 실제로 되어지고,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만약에 영성을 하는 우리들이 이러한 구체적인 체험들이 없다면 어떻게 여기까지 걸어왔겠는가. 물론 그 실용이라는 개념은 여러 가지가 있다. '삼십 배, 육십 배 백배'라는 것은 가시(可視)적이다. 실용이라는 개념을 심고 거둔다라고 했다. 거둔다는 개념을 산술적으로 천 원 투자했더니, 천 원의 백 배를 거둔다는 것으로 이해한다.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라고 하므로 성경 적인 것 같지만 아니다. 육신의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육신적 안목으로 거둠을 바라보면 하나님의 거둠을 잘 모른다.

하나님의 법칙은 썩을 것을 심고 신령한 것을 얻는다. 고전 15:42-44 말씀에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물질의 심음을 세상 속에서 신령한 것으로 거두게 하신다. 하나님의 뜻대로 누구를 섬기는 그 기쁨이 어떤 것인지 깨닫는 것보다 더 큰 소득 없다. 물론 하나님께서 가시적으로 눈에 보여지는 대로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로 주시는 것은 틀림없다.

6) 세상 가치관으로 생각하지 말자.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5-7)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내가 실제로 사랑할 수 없고 또 아직은 그렇게 드리고 싶지도 않지만 그렇게 여기고 아버지께 묻고 내가 이렇게 살아보아야 한다. 우리를 변화시켜 보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마 25:28)고 하셨다. 이것이 의의 열매이다. 세상 물질적 가치관으로 생각하지 말자. 세상 적인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그러므로 의의 열매는 하나님 앞에 더 많아질수록 더 풍성해 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뿌리가 깊어지면 깊어진 만큼 가지도 온 세상으로 뻗어나간다. 이것이 겨자씨 비유의 교훈이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그 여김을 통해서 실용단계의 구체적 훈련을 받아야 한다.

12. 세속 재물과 신령한 재물: 재물의 허(虛)와 실(實)

결론적으로 지금까지 우리가 이상과 같은 가치관으로 헌금을 하고, 이웃에 대한 구제를 해왔다면, 비록 하나님께서 그 행위에 대하여 물질적인 축복을 하셨다해도 그 재물은 세속재물로서 영원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육신 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행한 것은 모두 죽고 썩는다는 절대적인 진리에 대입해보았을 때 그 결과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롬8:5-8"소망이 부끄럽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으리라"

아래에 제시되어 있는 도표를 참고하여 세속재물과 신령한 재물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 재물의 허(虛)와 실(實) -

1) 재물의 허(虛)와 실(實)

재물의 허와 실이라는 제목으로 도표 안에 의무와 책임, 실용단계, 그리고 진리와 생명단계로 나누어져 표현되어 있다. 다시 표현하면, 의무와 책임 그리고 실용단계는 '허(虛)'라고 하며 진리단계와 생명단계는 '실(實)'이라고 표현한다. 왜냐하면 '허(虛)'라는 것은 아직은 내가 주체가 되어 져서 살아지는 그러한 삶이기 때문에 아직은 '허(虛)'라고 표현된다. 그러나 진리와 생명단계는 내가 주체가 되지 아니하고 성령이 주체가 되어져서 성령 안에서 깨닫고 성령 안에서 발견되어지는 대로 진리를 따라 살아지는 삶이 되기 때문에 '실(實)'이라 표현한다.

2) 허상(虛像)과 실상(實像)

허상이라는 표현은 말 그대로 그림자요, 가짜라는 의미이며, 반면에 실상이라는 표현은 참된 것이요, 열매라는 의미이다. 지금 우리가 윤리단계를 그리고 물질에 대해서는 실용단계를 나누고 있는데, 이 단계는 여전히 허상이다. 왜냐하면 아직은 내가 주인 되어져서 나를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이다. 인간의 참된 실상은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내가 살아질 때에 비로소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내가 발견되어져야 인간의 참된 실존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과 떨어져서 나를 생각하고 나의 복과 물질에 대한 부와 나의 소유적 개념에서 바라볼 때 아직은 허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실용단계에 있는 우리의 육신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보다는 결과에 대해서 소망하기 때문에 하나님나라의 법을 발견하고 하나님나라에 속한 자로써 살아지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허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우리가 실용단계에서도 여전히 '결과'에 우리의 마음이 빼앗기기 때문에 실용단계조차도 사실은 허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3) 죽고 썩을 것과 하늘의 영원한 상급

육신에서는 죽고 썩을 것 밖에는 거둘 것이 없다. 우리가 죽고 썩을 것이라는 개념을 육신의 개념으로 생각해서 우리가 죽으면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 하는 개념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필자도 주안에서 발견해보니 육체로 하나님 앞에 신령한 일을 하지 못하고 정말로 육체로 죽고 썩을 일을 행했던 모습이 육체에게 너무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의 몸은 도구이다. 이 도구인 몸은 얼마든지 주안에서 신령하게 사용될 수 있고 또한 세상 속에서 죽고 썩을 일을 할 수 도 있다. 몸이라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 보면 물질이다. 물질이란 개념은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신령한 곳에 사용되어질 수도 있다. 신령한 곳에 사용되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죽고 썩을 것에 사용되어지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된다. 그래서 죽고 썩을 것이란 의미는 말 그대로 죄가 되며 죄의 열매를 거두어 내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물질을 가지고 우리의 욕망을 위해서 사용하고 있는 한 이것은 마귀의 제물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그 뜻 안에서 사용되어질 때에 그것이 영원한 생명과 상급이 된다.

그러면 이제는 영원한 상급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자.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상급을 이해할 때, 면류관과 같은 유형적인 개념보다는 더 폭넓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 자체를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상급으로 이해하면 더욱 유익이 될 것이다. 우리가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 자체가 상급이 되어져야 하며, 오늘 우리 자신들이 맺는 과실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요, 우리의 양식이 되어야 한다.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되었다"라고 하셨다. 주님의 양식은 "오직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되었다 라고 말씀하신다. 바로 이것이 하늘나라의 영원한 상급이다. 오직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주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우리의 영원한 상급이 되어질 때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충성된 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서 이제는 죽고 썩을 자리에서 영원한 하늘의 상급이 있는 이 영생의 자리로 옮겨져야 할 줄로 믿는다.

4) 진리단계는 계속적 경험의 초기단계이다.

우리의 육신은 "성령의 다루심"을 통하여 새로워지며 영생을 알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육신은 이러한 성령의 다루심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늘 반대하고 대항하는 세력으로 우리 안에 남아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심은 만큼 거두게 하시는 경험을 통해서 우리의 육신이 굴복하여 하나님의 뜻에 동의하도록 하는 과정을 허락하신다. 그러한 경험을 통해서 우리의 육신은 체질적인 변화를 경험하며, 이제는 신령한 몸으로 우리의 육체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에 대하여 동역자로 살아드리는 진리단계의 삶을 경험한다. 그러나 이것은 여기서 표현한대로 계속적 경험의 초기단계라 한다. 계속적이란 표현은 동역자가 되어지기 때문에 반대되어지지 아니하는 계속적 체험아래 들어가게 되기 때문에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외적인 충만함과 내적인 충만함을 입어서 순종해드리고 그 순종해드리는 과정 속에서 나를 자꾸만 비켜드리는 훈련을 해야한다. 그리할 때에 우리는 이 단계에 속히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5) 생명단계는 계속적 체험의 풍성한 단계이다.

"계속체험의 초기와 풍성"이라는 표현은 생명의 흐름을 의미한다. 필자 자신도 진리 단계에 있을 때, 설교를 하는데 마치 시냇물이 가뭄 때 흐르는 것 같이 졸졸 흘러서 예배를 드릴 때 보면 그저 소수의 사람만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계속적 체험의 풍성한 단계로 들어가니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한 것처럼 주님의 뜻을 묻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주님이 전달되어지고 받아지는 역사가 나타났다. 이것은 물질 관계에 있어서도 똑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주인 되어진 이후에는, 우리에게 모든 물질을 새롭게 바라 볼 수 있는 가치관이 형성된다. 이러한 변화는 부분적으로 나타나다가 풍성한 단계로 들어가게 되는데 바로 이러한 단계를 생명적 체험이라 부른다. 우리 자신들이 속히 그 단계로 들어가야 한다.

6) 소유의 개념과 허비의 개념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덜 사랑을 받겠느냐"(고후12:15)

부자청년(막 10:17-23)의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는 부자청년의 물질에 대한 개념과 진리로 심고 의의 열매로 풍성해지는 개념을 이해하고자 한다.
부자청년의 개념은 말 그대로 육신 적인 물질의 개념이며, 물질을 유동적으로 보지 못하고 고정적인 것으로 보기 때문에 소유의 개념이다. 그래서 부자청년은 내가 얼마를 가졌으며, 또한 내가 얼마를 빼앗긴다하는 자기 소유의 개념에서 물질을 생각했다. 우리가 본능적이고 실용적인 단계에서는 부자청년과 마찬가지로 종종 이 물질을 소유의 개념으로 바라본다. 그래서 죽은 사해가 되는 것이다. 소유의 개념으로 받아들이니 계속해서 받는 것과 소유한 것이 복인 줄 착각한다. 그렇게 되어짐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받기 위해서 심는다. 심을 때는 순수했다 할지라도, 심고 나서 다시 상급을 기대한다. 심을 때는 우리가 자기를 쳐서 순종시키는 마음으로 분명히 우리가 심었는데 심고 나서 다시 상급을 기대하고 있다. 슬프지만 이것이 우리의 실상이다. 칭찬 듣고 싶고, 자랑하고 싶고, 나타내고 싶고, 우리 안에 공로의식이 있어서 왜 거둠이 없는지 살피게 된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가 부자 청년이 갖고 있는 물질의 개념인 소유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진리로 심고 의의 열매가 풍성해진다는 의미는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 흐름의 개념이다. 예를 들면, 돈은 다만 필요한 곳에 사용되기 위해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물질은 소유하려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곳에 사용되어지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물질을 그런 개념에서 이해할 때에 전혀 소유 적인 개념에서 죽고 썩어질 일을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필요한 곳에 물질을 사용할 수 가 있는 청지기가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물질을 허비의 개념, 다만 통로로 여기고 물질은 쓰기 위해 있는 줄 알아서 하나님께서 써야 할 장소를 우리에게 보여주실 때마다 기쁜 마음으로 드리는 삶이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는 개념이 된다.

우리는 세속재물과 신령한 재물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삶 속에서 세속재물이 신령한 재물로 바뀌어지는 변화를 구체적으로 경험을 해야하며,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우리의 가치관이 날마다 새로워지며 우리가 나 자신을 포함한 모든 물질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쁨으로 드릴 수 있는 자리까지 넓혀져야 할 것이다. 할렐루야!

Ⅴ. 실용단계 함정

1. 하나님 앞에 더 받기 위해서 심는다.

실용단계란 말 그대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께서 물질의 주관자인 것을 알고 하나님에 대하여 심는 것이 실용이다. 물론 여기에는 많은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하나님 앞에 물질을 받다 보니까 하나님 보다 물질에 관심을 가지고 더 받기 위해서 심는다는 것이다. 심고 거두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신앙을 마치 육신의 삶을 유익 되게 하는 수단으로 발전되어 물질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보지 못하고 자기의 유익을 추구함으로 함정에 빠진다. 특별히 내 자신의 훈련을 위해서 훈련을 냉철하게 하다보면 우리가 받기 위해서 심는 그 함정을 피해갈 수 있다. 이 함정을 피해 가는 몇 가지를 살펴보자

1)우리의 혼을 길들이기 나름이다. 잘 길들려 놓으면 이런 함정을 피해갈 수 있다.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4:8)

우리의 혼은 길들이기 나름이다. 육신의 훈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므로 금생과 내생에 복(딤전 4:8)이 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혼을 잘 길들여 놓으면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고 피해갈 수 있다. 물질에 대하여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기보다는 물질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거두려고 심지 않고 심을 수 있는 밭을 열심히 찾으므로 이런 함정을 피해가야 한다. 필자에게 있어서 자신을 발견해 보니까 잘못 살아온 날들에 대한 보상심리가 있었다. 이 모습이 발견되자 너무나도 하나님 앞에 잘못 되었고, 죄악 투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므로 거둔다는 마음은 가질 수도 없었고, 사람들에게 거두기 위해 심는다는 것이 참으로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2)철저하게 나를 훈련시키는 마음으로 하나님에 대해서만 심고 행하고 누리면서 피해 갈 수 있다.

또한 필자와 과거에 연관되어 있는 사람 중에 패망한 사람이 몇이 있었다. 제가 직접적으로 망하게 한 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제게 도움의 손길을 끊어 버시려고 망하게 하셨다. 제가 계속 그들을 바라보고 있을 것 같으시니까 망하게 하신 것이다. 그가 남아있는 동안은 필자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망하게 하신 것이다. 이러한 사건은 하나님과 필자 자신과의 관계에서 참으로 내가 진 빚임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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