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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냇가에 심긴 나무”(A Tree Planted By the Streams of Water)

시편 김영봉 목사............... 조회 수 3241 추천 수 0 2011.07.31 23: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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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시1:1-6 
설교자 : 김영봉 목사 
참고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2009.9.20 (김 영봉 목사)

“시냇가에 심긴 나무”(A Tree Planted By the Streams of Water)
시편 Psalms 1:1-6

1.

참 좋은 계절입니다. 아침저녁으로 맛보는 상쾌한 공기가 때로는 달콤하게 느껴집니다. 저희 집 앞에 있는 도그우드(dogwood, 말채나무)의 잎에 빠알간 단풍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이, 제가 살던 고향집의 감나무 잎에 든 단풍과 같아 보여서, 볼 때마다 붙들립니다. 눈부신 가을 햇살은 밖으로 나와 보라고 손짓하는 것 같습니다. 버지니아와 메릴랜드의 가을은 그 옛날 고향의 가을을 새록새록 기억나게 만듭니다.

이 가을에 여러분의 삶은 어떠십니까? 부디, 이 아름답고 청명한 계절처럼, 저와 우리 모두의 삶도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한국에서 자란 분들은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가을이라는 계절은 왠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게 만들고 생각을 깊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름이라는 계절은 모든 면에서 우리를 느슨하게 만듭니다. 돈 씀씀이에서도 그렇고, 먹고 마시는 일에서도 그렇고, 영적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자기 자신을 관리하는 일에 웬만큼 도통한 사람이 아니라면, 여름 동안에는 대부분 긴장의 끈이 느슨하게 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아마, 지금 쯤, 지난 여름 동안에 사용한 신용카드 명세서를 붙들고 난감해 하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가을은 여름 동안 생활의 모든 면에서 느슨해졌던 끈을 다시 조여 매는 계절입니다. 겨울을 준비하며 부지런히 음식을 끌어 모으는 개미들처럼, 풀어졌던 마음을 다시 추스르는 계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서하기에 가장 좋은 계절입니다. 독서와 사색이 합해지면 우리의 삶에 좋은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이민 생활이라는 것이 때로 책 한 권 읽을 여유도 허락하지 않을 경우가 많지만, 이번 가을에는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 보게 해 주는 좋은 책을 몇 권 읽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을이 독서에 가장 적합한 계절이라면, 동일한 이유 때문에, 이 계절은 또한 우리의 영적 생활을 심화시키는 일에도 가장 적합한 계절입니다. 그래서 시인 김현승 선생은 ‘가을의 기도’라는 시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가을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이 세상 살이에 재미 들린 까닭에 우리의 모국어를 잊어 버렸습니다. 이 좋은 계절, 우리는 하나님 나라, 그 영원한 모국에 대한 그리움을 마음에 품고 영적 생활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2.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 일과 중 시편 1편은 영적 생활에 대한 좋은 이미지로 가득 차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저는 두 가지의 비유에 주목하려 합니다. 하나는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의 비유요, 다른 하나는 ‘바람에 흩날리는 쭉정이’의 비유입니다.

‘시냇가에 심긴 나무’는 우리가 사는 버지니아 혹은 메릴랜드에서는 흔히 볼 수 있지만, 이 시편이 쓰여졌던 팔레스틴에서는 보기 드문 것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나무들은 물기 없는 땅에 심겨져서 간신히 생명을 유지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 나무들은 마음껏 자랄 수도 없고, 좋은 열매를 맺을 수도 없습니다. 반면, 어떤 나무들은 팔레스틴 땅에서는 보기 드문 시냇가에 심겨집니다. 그 나무들은 뿌리를 통해 물을 마음껏 흡수하여 한껏 자라납니다. 때를 따라 새순을 내고, 푸른 잎을 자랑하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습니다.

시냇가에 심긴 나무 안에는 풍성한 생명력이 넘쳐 흐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나무는 봄이 되어 꽃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여름이면 푸른 잎으로 그늘을 만들어 동물들과 사람들을 쉬어가게 해 줍니다. 가을이면 맛있는 열매를 맺어 배고픈 사람들을 먹입니다. 겨울이면 몸집을 줄여 낙엽과 마른가지를 만들어 음식을 지어 먹게 하고 추운 밤을 지나도록 돕습니다. 사시사철, 시냇가에 심긴 나무는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의 축복을 나누는 일로 인해 신바람이 납니다.

여기서 잠시 멈추어, 이 비유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 보십시다. 우리의 삶을 나무에 비유한다면, ‘나’라는 나무는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지금이 가을이니, 열매를 중심으로 생각해 보십시다. 나라는 나무에 어떤 열매가 있습니까? 혹시나 아무런 열매도 없는 것은 아닙니까? 열매는 고사하고, 하루 하루 생명을 지탱하는 것조차도 힘에 버거운 것은 아닙니까? 열매가 있다면, 그 열매가 어떻습니까? 동물이나 사람이 먹어 유익을 얻을 수 있는 열매입니까? 빛깔은 좋지만 먹었다가는 큰 일 날 열매는 아닙니까? 있으나 마나 한 열매입니까?

이것은 심각한 질문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성령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나무와 열매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한 그루 심었는데, 삼 년 동안 지속적으로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포도원 관리인에게 그 나무를 뽑아 버리라고 명령합니다. 그러자 포도원 관리인이 주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님, 올해만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내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지도 모릅니다. 그 때에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어 버리십시오”(눅 13:8-9).

이 비유에서 주인님은 성부 하나님을 가리킨다 할 수 있습니다. 포도원 관리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할 수 있지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열매 맺는 나무가 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 주셨습니다. 친절한 농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우리 존재를 맡기고 그분의 보살핌을 받아 자라간다면, 우리는 머지 않아 열매 맺는 나무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남아 있는 시간 동안에 열매 맺는 나무로 변화하지 못한다면, 그 시간이 다 지났을 때, ‘찍어 버림’을 당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열매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열매는 없으나 믿음은 있다”고 하시겠습니까? 야고보서 2장 14절에서 뭐라 했습니까? 열매가 없으면 그 믿음이 죽었는지 의심할 일입니다.

이 말씀이 위협이 되었다면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위협 전략’(scare tactics)을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믿습니다. 뭔가가 무서워서 예수님을 믿게 하면 나중에 역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좋아서 믿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심판’이나 ‘징벌’이나 ‘지옥’ 같은 이야기를 설교에서 잘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분명히 해야만 하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무한정으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자비로써 우리가 열매 맺는 나무로 변화하기를 기다리시지만, 그 기다림에도 끝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때가 다 지나기 전에, 하나님의 인내심이 다 고갈되기 전에, 우리가 열매 맺는 나무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열매맺는 믿음으로 살아나고 성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3.

전도를 하다 보면 다음과 같은 말로 회피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미안하지만, 아직은 세상 재미를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죽기 직전에 회개해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데, 왜 미리 믿어서 손해를 봅니까? 세상 재미 다 즐기고 난 다음에 죽기 얼마 전에 믿겠습니다.” 사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어느 정도의 선에서 더 이상 들어가기를 주저하는 사람들도 막연하지만 이런 생각을 합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도 ‘언젠가는 믿는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세상 재미를 포기하기에는 너무 이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같은 사고 방식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이 사람들은 자신의 목숨이 어느 정도는 안전하다고, 얼마 정도는 보장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모든 것이 잘 갖추어진 한국이나 미국의 생활 환경은 이런 착각에 빠지도록 만드는 측면이 있습니다. 오늘 쉬는 숨을 내일도 쉴 것이고, 1년 후에도 쉴 것이며, 10년 후에도 쉴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 근거없는 믿음이 우리의 믿음을 썩게 만듭니다. 실은, 하루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목숨입니다.

모태 신앙인인 저는 중학교 때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인격적인 관계를 시작했습니다. 그 때부터 몇 년 동안 저는, 잠자리에 들 때, “하나님, 오늘밤 제 생명이 끝나면 주님의 품 안에서 다시 깨어나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매일 밤 그렇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왜 그랬는지 아십니까? 연탄 깨스 때문이었습니다. 제 가까운 친구를 연탄깨스 중독으로 잃고 난 다음부터 저는 종말론적인 믿음 안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기도를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보일러가 있는 집으로 이사가면서 부텁니다. 연탄을 때는 방에서 잘 때는 내일의 목숨이 보장되지 않았는데, 보일러를 때는 방에서 잘 때는 내일의 목숨이 보장된다고 느꼈습니다.

착각입니다. 우리의 목숨이 언제 어떻게 될지, 그것을 알 수 있는 사람도 없고, 그것을 보장할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미국은 안전한 땅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착각하는 것일 뿐입니다. 미국이 이스라엘이나 이라크보다 더 안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목숨이 돈으로, 정기 검진으로, 체력 단련으로, 첨단의 security system으로 보장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우리가 장담할 수 있는 시간은 단지 지금 이 시간 뿐입니다. 내일 여전히 숨을 쉬게 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둘째, 세상 재미를 다 보고 나서 예수를 믿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고 살아가는 영적 생활에 세상 재미(fun)와는 비교할 수 없는 재미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실, 영적 생활에서 얻는 재미를 ‘재미’라고 이름 붙이기 어렵습니다. ‘기쁨’(joy)이라고 이름 붙여야 더 옳을 것입니다. 우리 말에서 ‘재미’는 보통 얄팍하고 스쳐 지나가는 즐거움을 가리킵니다. 재미는 그 순간을 즐겁게 해 주지만,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공허해지는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에는 더 진한 재미를 추구하게 됩니다. 반면, ‘기쁨’은 마음을 깊이 적셔주는, 좀 더 오래 가는 즐거움을 가리킵니다. 이 기쁨은 내적 공허감을 채워주고 삶에 신선한 활력을 제공해 줍니다.

‘재미’와 ‘기쁨’의 차이는 우리의 언어습관을 잠시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밤 새도록 친구들과 술 마시고 노래하고 놀았다 칩시다. 이른 새벽에 술집을 나오면서 “아, 기쁘다!”라고 말하는 사람 보았습니까? “오늘, 재미 좋았네!”라고 말합니다. “기분, 째지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집에 돌아가 몇 시간을 자고 깨면 극심한 두통과 공허감을 씹게 됩니다. 헛된 재미로 인해 기분이 째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과 함께 동행하며 성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살아가는 삶에는 ‘재미’보다 더 깊은 ‘기쁨’이 있습니다. 기도에 깊이 들어가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나누고 난 다음, 일어나면서 그 사람이 뭐라고 말할 것 같습니까? “재미 좋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 참 기쁘다!”라고 말합니다. 말씀을 읽으며 묵상에 깊이 빠져서 송이꿀 보다도 더 단 말씀의 맛을 보고 나면 어떻습니까? 우리의 영혼이 기뻐 뜁니다. 영감이 충만한 예배를 드리고 나면 어떻습니까? 영혼 깊은 곳에 터치를 받으면 우리는 재미가 아니라 기쁨을 느낍니다. 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이웃을 위해 내 물질을 나누고 시간을 나누어 봉사할 때, 우리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찹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기분을 째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째진 기분을 통합시키고 치유하며 회복시킵니다. 그래서 생명력을 더 강하게 만듭니다. 예수 믿는 것은 세상 재미의 일부를 포기하는 것이 될 수는 있으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을 얻는 일입니다.

4.

셋째, 세상 재미 다 보고 나서 죽기 전에 예수 믿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실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믿기는 믿겠는데, 나중에 믿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어찌보면 ‘나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서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들보다 문제가 더 크다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있던 강도처럼 마지막 순간에 돌아서는 사람에게 조차 열려 있습니다만, 그 은혜를 업신여기고 자신의 욕심대로 산 사람에게도 그럴지, 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아내의 사랑을 업신여기고 평생을 바깥으로 나돌다가 폐인이 되어 돌아온 남편과 같다 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 남편이 아내에 대해 생각하기를, “저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나를 기다릴 수밖에 없어. 언제라도 내가 돌아가면 저 사람은 나를 받아 줄 거야. 그러니 일찍 돌아갈 이유가 뭔가? 다른 여자들과 마음껏 즐기다가 늙어서 돌아가면 되지!”라고 했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을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그것을 알면서도 그 남편을 받아들여 죽을 때까지 돌보아 주었다면, 그 아내를 위해서는 공덕비를 세워 줄만 합니다. 하지만 그 남편의 허물은 책망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업신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분의 사랑은 마치 어머니의 사랑과 같습니다. 아무 조건이 없고, 끝없이 용서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립니다. 한국의 아버지들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사랑을,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보여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상태에 있든, 얼마나 큰 죄를 지었든, 아무리 때가 늦었다고 느끼든,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믿고 그분께 돌아가면 됩니다. 그러면 성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총으로 우리를 받아 주십니다. 하지만 그 사랑과 은혜를 업신여기고, ‘내가 무슨 죄를 지어도 하나님은 나를 용서할 수밖에 없지!’라고 생각하면서 마구 죄를 짓고 살아간다면, 그리고 ‘내가 아무리 늦게 돌아가도 하나님은 나를 받아주실 수밖에 없지!’라고 생각하고는 목숨이 다할 때까지 죄악 가운데 뒹군다면, 그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역사할지, 저는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절대로, “세상 재미 다 보고 나서 믿겠다”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다. 우리에게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분의 은혜로 인해 우리가 열매 맺는 나무로 변화되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통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의 주변에 구덩이를 파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기 위해서 준비하고 계십니다. 필요하다면, 우리를 시냇가에 옮겨 심으려고 삽을 들고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아직 우리에게 시간이 있을 때, 우리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께 맡기십시다.

문제는 우리의 뿌리가 어디에 심겨져 있느냐에 있습니다. 물기라고는 전혀 없는 사막에 심겨져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지금 예배를 드리는 저와 여러분들은 사막에서 옮겨 심긴 나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 다 시냇가에 심겨진 것은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사막에서 옮겨지기는 했으나, 여전히 물기가 부족한 바위 틈이나, 시냇가에서 먼 땅에 심겨져 있는 상황일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살아있기는 한데 생명력이 약하고, 매일 제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일에 급급하여 살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좀 더 시냇가에 깊이 뿌리를 두어 영적 생명력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되는 일입니다. 그냥, 예수 믿고, 적당히 교회 생활 하면서, 죽고 나서 천당 갈 것을 믿고, 그것에 만족하여 살아가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렇게 믿는 것으로는 영적 생명력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 믿음으로는 시험과 유혹과 환난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그런 믿음으로는 오직 자신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매일 몸부림치는 상태에서 머물러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했다면, 그분과 하나되어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시냇가에 깊이 뿌리를 내리는 일입니다.

5.

우리가 종종 영적 생활에 게을리 하게 되는 중요한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열심히 한다고 해도 당장 크게 달라지지도 않고, 게을리 한다 해도 당장 큰 표시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역시 나무의 생리와 많이 닮았습니다. 숲속을 지나다 보면 폭풍우에 뿌리 뽑힌 나무를 자주 봅니다. 그런데 뿌리가 완전히 뽑혀졌음에도 몇 개월 동안 싱싱하게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속에서는 생명력이 서서히 말라갑니다. 죽어가던 나무를 시냇가에 옮겨다 심으면 금세 달라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마음껏 물기를 흡수하여 뻗어갈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영적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시간을 성별하여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합니다. 주일마다 마음을 다해 예배에 참여합니다. 새벽 기도회나 수요 예배, 속회 혹은 다른 은혜 받는 집회에 열심히 참여합니다. 받은 은혜와 은사를 따라 봉사하고 헌신합니다. 직업을 성직으로 알아 신실하게 섬기고, 가정에서 식구들과 영적 사귐을 나누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같은 영적 생활을 통해 우리 존재의 뿌리를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깊이 뻗어 내립니다. 이렇게 하다 보면, 때로 신비로운 일을 경험하고, 상상하지 못한 변화를 경험합니다. 하지만 또 때로는 아무런 변화가 없어 보입니다. 실은 내적으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데, 내가 느끼지 못할 뿐인데, 그 느낌에 속아서 때때로 영적 생활에 게을리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영적 생활에 게을리 하면 당장 무슨 큰 문제가 생기면 좋겠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물기 없는 사막에서 살아도 한 동안 별 문제를 느끼지 못합니다. 특히, 영적 감수성이 예민하지 못한 사람들은 영적 생활이 없어도 충분히 살 수 있을 것처럼 착각합니다. 마치, 뿌리 뽑힌 나무가 “아, 뿌리가 뽑혀도 살아가는 데 지장이 별로 없네!”라고 착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착각을 조심하지 않으면 영영 멀어져 버릴 수도 있습니다.
오늘 읽은 시편 1편의 첫 절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여기서 ‘복 있는 사람’은 영적 생활이 살아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악인’ 혹은 ‘죄인’ 혹은 ‘오만한 자’는 하나님을 등지고 사막에 뿌리를 박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영적 생활에 게을리하고 하나님에게서 점점 멀어지면, 사막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점점 가까와집니다. 처음에는 그들의 말에 귀 기우립니다(“악인의 꾀를 따릅니다”). 하나님에게서 좀 더 멀어지면 그들과 같은 길을 갑니다(“죄인의 길에 섭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과 함께 자리를 틀고 주저 앉습니다(“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습니다”). 그렇게 점점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점점 생명력이 말라가는데, 그것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을 돌아보면, 이미 생명이 고갈되어 죽어가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을 가리켜, 다윗은 ‘바람에 흔들리는 쭉정이’라는 비유를 사용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는 사람의 마지막은 이렇게 됩니다. 문제 중에 문제는 우리의 존재가 이렇게 껍데기가 되고 쭉정이가 될 때까지, 우리 자신이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잘 살고 있다고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때로, 그 사실을 알고 나면 시간이 너무 늦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적 생활에 있어서 영적 감각이 무뎌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는 큰 문제가 아닙니다. 영적 감각만 살아 있다면, 우리 자신의 영적 상태를 수시로 점검하고,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깊이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힘쓸 것이며, 그렇게 되면 우리의 영성은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6.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 지점에 이르렀을 때, 잠시 휴식하면서 이메일을 열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우리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하다가 한국에 귀국한 어느 자매로부터 메일이 왔습니다. 그 자매는 제가 이 설교를 통해 씨름하고 있는 바로 그 문제로 인해 저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메일을 보낸 것이었습니다. 설교 준비를 하다가 이런 경험을 할 때가 자주 있는데, 이럴 때마다 소름이 돋습니다. 성령께서 이 말씀을 준비해 주시는 것을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그 자매의 양해를 얻어 메일의 일부를 읽어 드립니다.

저는 워싱톤에서 유학생활하면서 한 선교 단체를 통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모태신앙이고 구원의 확신이 있었지만, 수련회에서의 하나님과의 만남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느꼈던 만남은 바람처럼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갔는지, 언제부터인가 저는 하나님과 멀어져갔습니다. 그리고 현재 오늘날까지 점점 더 멀어져 갔습니다. 목사님, 하나님과 멀어져 있는 동안 수 많은 생각과 의문과 비신앙적 가치관들이 형성되면서, 저도 세상 속의 어른이 되어가는 걸 느꼈습니다. 불과 몇 년 전에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하면서 헛되어 보였던 것들이 저에게 소중한 것들로 자리 잡았습니다.

저는 나름 제가 아버지께 사랑받고 순수한 딸이라 여기며 살아왔는데 ‘혹시나 제가 살아왔고 믿어왔던 것들이 다 거짓은 아니었나?’라는 생각마저 들면서 두려워 졌습니다. 무엇보다도,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하려고 해도 숨 쉴수 없이 다가오는 답답함이 제게 있습니다. 제 마음 속에 아버지가 없다는 생각에 너무 힘이 듭니다. 회개를 하려 해도 어디서부터 무엇을 해야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도와주세요. 하나님께 다시 가고 싶은데, 제가 너무 멀리 와버린 기분입니다.
제가 너무 세상것에 물들어 있습니다. 목사님, 이것들을 제가 미련없이 내려놓고
아버지께서 주시는 참된 평안을 느끼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말씀을 읽어도 아버지의 말씀이 들리지 않아 답답하고 기도를 하려 해도 막혀진 말문에 너무 답답합니다. 목사님, 아버지를 만나고 싶은데 앞이 캄캄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것 같으면서도 이렇게 나약하게 도움을 청하게 되는게 저의 현실입니다. 제 의지가 부족한 탓인가요? 목사님, 제가 아버지를 만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제가 아버지께 다가갈수 있게 도와주세요.

이 메일의 내용을 들으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어쩌면 그렇게 나와 같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여러분, 먼저 감사하십시다. 이 자매처럼 영적 갈증을 느끼며 그 캄캄한 영적 밤을 괴로와하는 것은 아직도 영적 감각이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그보다 더 심한 상태에 있으면서도 아무 문제 없는 듯이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영적 감각이 살아 있음에 감사하시되, 그 어둠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힘쓰십시다. 어찌할 바를 모르면, 이 자매처럼 누구에겐가 도움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이 메일의 내용을 들으시면서 혹시 이런 생각을 하신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나의 영적 상태가 그 정도는 아니니, 다행이네. 하지만 나도 이 자매처럼 될 수도 있으니, 정신 차려야지!” 그렇습니다. 아마도, 우리 대부분은 이렇게 느껴야 마땅합니다. 영적 어둠은 한 순간에 덥치지 않습니다. “괜찮다! 괜찮다!”하는 동안에 내면 세계가 캄캄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가을에 여러분은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까? 여행 계획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많으십니다. 좋은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독서의 계획을 가지셨습니까? 마음이 살찌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경제적으로 도약할 계획을 하십니까? 경기 침체가 끝나간다는데, 여러분의 경제 문제도 곧 풀려지기를 바랍니다. 건강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까? 건강을 계획하는 것, 아주 좋습니다.

그렇다면, 영적 생활에 대해서는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영적 감각을 활용하여 여러분의 영적 상태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가을 계획에 영적 생활에 대한 계획도 하나쯤 마련하시기 바랍니다. 두 주 후에 있을 남성들을 위한 영성 수양회에 초청합니다.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가 되는 길을 안내할 것입니다. 10월 9일부터 시작될 센터빌 부흥회를 위해서도 기도하며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가을을 맞아 여러 가지의 신앙 교육 클래스가 시작되었습니다. 아직 늦지 않았으니, 과목 설명을 잘 보시고 한 과목씩 택하여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가을이 되었으니, 속회 활동에 더욱 힘을 내십시다. 상쾌한 새벽 공기를 마시며 교회에 와서 기도회에 참여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QT를 게을리 하셨다면, 고삐를 조이십시다.

이 모든 노력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노력의 초점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과 깊이 사귀는 데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의 뿌리를 물 좋은 동산, 깊은 시냇가로 뻗어 내리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깊이 연결될 때, 하나님으로부터 흘러 넘치는 생명의 능력이 우리를 복된 삶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우리를 복되게 하시려는 주님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이 가을에 하나님과 더 깊은 영적 사귐에 이르고, 때가 더 늦기 전에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로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재미가 아니라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생명의 근원되신 주님,
영적으로 목말라 하며
더욱 깊이 주님께 뿌리 내리기를 소망하는
모든 영혼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주의 성령께서 그들의 영혼을 잡으셔서
시냇가에 심긴 나무처럼
영원한 생명의 능력이 충만하게 하시고
잎으로, 꽃으로, 열매로, 단풍으로 그리고 낙엽으로
이웃을 위해 섬기게 하소서.
이 가을에
저희 모두의 영적 생활에
갱신과 부흥을 허락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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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16 이사야 여호와를 앙망함이 보배이다. 사33:1-6  이상호 목사  2011-08-03 2884
5615 이사야 아픔이 아픔을 치유한다”(Pain Heals Pain) 사53:1-6  김영봉 목사  2011-07-31 3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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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09 마가복음 다 거룩하다”(All Things Are Holy) 막7:14-23  김영봉 목사  2011-07-31 2320
5608 베드로전 모두 다 제사장이다”(We Are All Priests) 벧전2:1-5  김영봉 목사  2011-07-31 2460
5607 히브리서 믿음의 담력”(Assurance of Faith) 히4:14-16  김영봉 목사  2011-07-31 2624
5606 로마서 제단에 올려진 삶”(Life Laid on the Altar) 롬12:1-2  김영봉 목사  2011-07-31 2921
5605 로마서 죄 속에 벌이 있다”(Sins Are Sugar-coated) 롬6:15-18  김영봉 목사  2011-07-31 1941
5604 히브리서 제사가 아니다”(It Is Not a Sacrifice) 히10:19-23  김영봉 목사  2011-07-31 2061
5603 요한복음 예수님의 영적 음모”(Spiritual Conspiracy of Jesus) 요2:13-22  김영봉 목사  2011-07-31 2415
5602 요한복음 잔치는 계속된다." (Feast Will Go On) 요2:1-11  김영봉 목사  2011-07-31 2468
5601 누가복음 침체를 끝내는 법”(How to End the Depression) 눅3:21-22  김영봉 목사  2011-07-31 2364
5600 마태복음 찾고 있습니까?”(Are You Seeking?) 마2:1-12  김영봉 목사  2011-07-31 2443
5599 요한복음 나같은 하나님, 나같은 인간”(God Like Me, Human Like Me) 요1:1-5  김영봉 목사  2011-07-31 2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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