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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살 길을 걷다”(We Are On the New and Living Way)
히브리서 김영봉 목사............... 조회 수 2439 추천 수 0 2011.07.31 23:20:23성경본문 : | 히10:19-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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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
2009.11.15 (김 영봉 목사)
<열매맺는 교회의 다섯 가지 습관>
다섯 번째 습관: ‘영적 성장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Intentional Faith Development)
“새로운 살 길을 걷다”(We Are On the New and Living Way)
--히브리서 10:19-25
1.
우리가 속해 있는 미국 연합감리교회의 mission statement 즉 ‘사명 선언문’을 알고 계십니까? To Make Disciples of Jesus Christ for the Transformation of the World. 우리말로 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만들어 세상을 변혁시킨다”입니다. 믿는 사람들 하나 하나를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양육하면 그 결과로 세상에 변화가 일어난다는 믿음을 담아 낸, 아주 좋은 사명 선언문입니다. 온 세상이 변화될 것을 믿음의 눈으로 내다 보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위해 일하자는 뜻입니다.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세상이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사람들마다 바라는 ‘새 세상’의 모습이 다르기는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해 완전히 만족하지 못하는 점에서는 예외가 별로 없습니다. 어떤 이유로든 우리는 이 세상이 불완전하다고 느끼고 있으며, 좀 더 나은 세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정권이 바뀌면 그 소망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고, 어떤 사람은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며, 또 어떤 사람은 종교적인 차원에서 그같은 천지개벽을 기대합니다. 그같은 소망이 때로는 끔찍한 범죄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Fort Hood에서 일어난 끔찍한 총격 사건은 현실 세계에 절망하고 새 세상을 꿈꾸던 한 사람의 비틀린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언젠가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것이라고 믿고 기다립니다. 우리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요 저술가인 톰 라잇(N. T. Wright)은 ‘임한다’(arriving)고 표현하지 않고 ‘드러난다’(being revealed)라고 표현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저 먼 우주 공간에 있다가 우리가 사는 세계로 진입해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감지하지 못하는 형태로 우리의 우주를 감싸고 있다가 어느 순간에 우리에게 드러날 것이라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의 표현대로 우리는 지금 우리의 세상을 “부분적으로만 알고”(고전 13:9) 있을 뿐입니다. 장차 지금 우리 눈에 가려져 있는 실체가 드러날 것인데, 그 때서야 우리는 전체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우리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온전한 세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장차 이러한 변화가 일어날 것을 기대하는 동시에,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언젠가 드러나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과 같아지게 만들기 위해 기도하고 헌신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모든 것이 새롭게 되기 전까지 이 세상은 완전해지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망연히 그 때만을 기다리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내 힘이 미치는 영역부터라도, 아주 사소한 변화라 하더라도, 이 세상이 성경이 제시한 하나님 나라의 비전에 가까와지도록 할 일을 찾아 해야 할 것입니다.
2.
그런데 그같은 세상의 변화를 위해서 가장 먼저 일어나야 하는 일은 믿는 사람 자신이 변화되는 일입니다. ‘세상’이란 무엇입니까? ‘사람들의 사회’입니다. 사람이 모여 세상이 됩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아니,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입니다. 내가 변화되는 것이 이 세상의 변화의 출발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먼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로 거듭나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새로 빚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성숙해지지 않으면, 세상은 결코 변화되지 않습니다. 자신이 먼저 변화되지 않고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만일 자신의 변화에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키겠다고 나선다면, 그 변화는 분명 ‘파괴적인 변화’가 될 것입니다. 연합감리교회 사명 선언문, 즉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만들어 세상을 변혁시킨다”는 사명 선언문에서 “세상을 변혁시킨다”는 말에 초점을 맞추면 큰 실수를 하는 것이 됩니다.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가 저질러 온 무수한 범죄들은 대부분 믿는 사람이 먼저 변화되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힘쓰는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명 선언문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만드는 것”에 우선 집중해야 합니다.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 나고 그분의 영으로 새로와지도록 돕는 것이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기독교는 군사력이나 금력이나 정치 권력같은 것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에 대해 반대합니다. 시시 때때로 그같은 잘못을 범해 왔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습니다. “칼을 쓰는 사람은 모두 칼로 망한다”(마 26:52)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기독교의 원리입니다. 돈을 쓰는 사람은 돈으로 망할 것입니다. 권력을 사용하는 사람은 권력으로 망할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통해 선한 영향력을 세상에 미치는 방법을 택합니다. 소금이 배추에 녹아들듯이 혹은 촛불이 조용히 어둠을 밀어내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된 사람들을 통해 거룩하고 선한 영향력을 파급시킴으로써, 조용히, 은밀히, 그리고 속에서부터 세상을 변혁시킵니다.
물론, 때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연대하여 행동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거대한 사회적 악이 사람들의 생명을 짓누르고 있을 때, 그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연대하여 목소리를 높이고 정의를 외쳐야 할 때도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 킹 목사님이 흑인들의 인권을 위해 생명을 내걸고 정의를 외친 것처럼, 혹은 본회퍼 목사님이 나치 정권의 폭정을 끝내기 위해 목사의 신분으로 히틀러 저격단에 가담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의 변혁을 위해 먼저 행동해야만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라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질문은 ‘내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변화하고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악과 싸움을 하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의 악에 대해서는 눈이 멀어 버리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세상을 바꾸려고 몸부림쳤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모순투성이의 인간으로 머물러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도 바꾸지 못하고 자신도 변화되지 못합니다. 마침내 그런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이 거북해 하는 기피 인물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렇게 애정을 가지고 바꾸려 했던 사회에 대해서도 증오심을 품게 됩니다.
3.
저는 두 주일 전 설교에서 공지영씨의 신작 소설 <도가니>의 등장 인물에 대해 말씀 드렸습니다. 이 소설의 두 주인공 이강석과 이강복은 그리스도의 제자로 변화되지 않은 채 교회 생활 경력만으로 장로가 되었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변화되지 않은 채 장애인들을 위한 복지 사업에 손을 댔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거듭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매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도 그들의 관심은 영적으로 성장하고 변화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변혁시키는 힘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힘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소설의 또 다른 등장 인물 중 서유진이라는 여자가 있습니다. 결혼에 실패하고 친정 어머니와 아이 둘을 데리고 무진에 내려와 살아가는 single mother입니다. 서유진의 아버지는 목사였는데, 독재 정권과 싸우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서유진은 무진시로 내려와 ‘인권운동사무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의 대학 후배인 강인호와의 인연으로 인해 이강석, 이강복 형제가 운영하는 자애학원의 비리를 폭로하는 일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아버지로부터 전해받은 정의감과 의협심 그리고 강단이 그에게 있었지만, single mother로서 무진시의 거물들이 연루된 거대한 악과 싸우는 것은 힘겹고 벅찬 일이었습니다. 때로 가망 없어 보이고, 부질 없는 일처럼 보였습니다.
상황이 한 참 어렵게 진행될 즈음, 악한 사람들이 세운 철옹성이 결코 무너질 것 같지 않아서 서유진은 점차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그 어간의 어느 날, 서유진은 차에 키를 두고 내리는 바람에 무진시 경찰을 책임지고 있는 장경사의 차를 얻어 탑니다. 장경사라는 사람은 지역 유지들과 적당히 타협하며 일신상의 이익을 꾀하는 타락한 경찰 공무원입니다. 그가 운전하면서 지쳐있는 모습의 서유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당신을 보면 무슨 배짱으로 저러고 사나, 뭐 이런 생각이 듭니다. 잘 모르지만 정치할 생각은 없으신 것 같고…… 그렇다면 혹시 그런 순진한 방법으로 세상을 바꾸겠다고 그러는 건가……”
그러자 서유진이 장경사의 말을 끊고 나지막하게 그러나 강한 어조로 대답합니다.
“세상 같은 거 바꾸고 싶은 마음, 아버지 돌아가시면서 다 접었어요. 난 그들이 나를 바꾸지 못하게 하려고 싸우는 거예요.”(257쪽)
저는 이 대목을 읽을 때 마음이 찡했습니다. 서유진의 말이 오늘을 사는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도 진실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자주 우리의 믿음으로 세상을 변혁시키겠다고, 보무도 당당하게 외치지만, 정작 우리에게 더 시급한 과제는 세상에 의해 우리가 변질되는 것을 막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이같은 태도는 너무나 소극적이고 패배주의적인 것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그래가지고야 이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겠느냐고 묻고 싶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소설의 이야기 세계 속에서 서유진이 싸우는 ‘가망없는 싸움’은 그 자신을 지켜 주기도 했지만,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소금같이 혹은 촛불같이 그 역할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서유진, 그는 이 세상이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게 하려고 싸움으로써 이 세상을 조금이나마 변화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4.
실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변혁시키려 하기에 앞서, 세상에 의해 세뇌당하고 오염되고 꺾이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싸워야 할 가장 우선적인 싸움이며, 그것이 이 세상을 변혁시키는 가장 주효한 방법입니다. 우리는 서유진처럼 때로 거대한 악의 세력 앞에서 침묵을 강요 당하기도 하고, 타협을 요구 받기도 합니다. 금전적인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부정한 술수도 가리지 않는 사업 세계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가치관을 지키고 살아가는 것은 때로 벅찬 일입니다. 그 뿐 아닙니다. 우리는 가치관을 오염시키고 판단력을 마비시키고 내면에 있는 타락한 욕망을 따라 살아가도록 교묘하게 공격해 오는 세속 문화의 영향력과 싸워야 합니다.
최첨단 문명의 이기로 인해 이제 인류는 뭔가를 생각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서부터 세속 문화의 영향력 아래에서 노출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인으로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역량이 길러지기도 전에 사람들은 세속 문화의 가치관에 완전히 예속되어 버립니다. 며칠 전, 부목사님 한 분에게서 들었습니다. 한 돌도 안 된 아이가 울며 떼를 쓸 때, 그 무엇을 주어도 그치지 않는데, 이상하게도 I-Phone을 주면 울음을 뚝 그친답니다. 그 기계에서 보고 듣는 것을 이해할 수도 없는 나이인데도 그 기계가 요즘 아이들에게는 신기하기만 합니다. 그런 이유로 인해 바쁜 부모들은 어릴 적부터 어린아이들을 여러 종류의 기계에 맡겨 둡니다. DVD 플레이어, TV, 게임, 오락기, 컴퓨터, I-Phone 등등. 이렇게, 아이들의 영혼은 세속 문화에 맡겨집니다. 어쩌면 요즈음 아이들은 무덤에 이를 때까지 기계의 세계에 함몰되어 살아갈지도 모릅니다.
어린이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TV나 인터넷 혹은 그와 같은 매체들을 통해 우리의 정신과 영혼을 지배하려는 세속 문화의 공격이 얼마나 은밀하고 교묘한지요! 과연 우리는 그같은 전면 공격에 대해 얼마나 준비되어 있습니까? 우리는 과연 밤낮으로 교묘하게 우리의 정신과 영혼을 마비시키려는 세속 문화의 ‘소비주의’, ‘황금만능주의’, ‘물질주의’, ‘성공지상주의’, ‘외모지상주의’, ‘이기고 보자 주의’ 등에 대해 얼마나 대비되어 있습니까? 과연, 우리에게는 이같은 문화적 선전들을 보면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별하여 우리 자신이 변질되지 않도록 지킬 수 있는 힘이 있습니까?
과연,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을 계획하고 디자인할 때, 무엇을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까? 성경에 나와 있는 진리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습니까? 아니면, TV나 영화 혹은 상업 선전물에서 본 것을 기준으로 삼습니까? 여러분이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하는 삶의 방법은 예수님을 통해 배운 것입니까? 아니면, 세상 문화를 통해 전해 받은 것입니까? 여러분이 신봉하고 있는 가치관을 하나 하나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들이 어떻게 형성된 것이며, 과연 그 가치관은 성서의 진리에 얼마나 가깝습니까?
“나는 세상이 나를 바꾸지 못하게 하려고 싸우는 거예요.” 서유진의 이 말을 우리는 잘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우선적인 관심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세상에 의해 변화되지 않도록 지키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지 않더라도 나 한 사람이 세상에 동조하지 않고 의롭고 바른 길을 간다면 나로 인해서 이 세상은 그만큼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몇 번을 생각해도 결론은 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이 달라지기를 원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에 가깝도록 변화되기를 원하는데, 그 모든 소망의 첫 걸음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5.
교회력에 따라 읽은 오늘의 성서 일과는 히브리서 10장 19절부터 25절의 말씀입니다. ‘히브리서’라는 편지는 초대 교회에 실재했던 어느 교회를 위해 쓰여진 설교입니다. 이 편지가 쓰여질 때, 그 교회 교인들은 그들을 변질시키려는 세상과의 지루한 싸움에 지쳐 있었고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함께 모여 기도하고 서로 격려하며 힘껏 싸워 왔는데, 상황이 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점점 기운이 소진되었습니다. 마치, 거대한 악의 세력과 싸우다 지쳐 두려움에 질려 있는 서유진처럼, 그들은 자신들의 힘은 너무 약하고 싸워야 할 세상은 너무도 강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줄을 서서히 놓고 있었습니다. 함께 모이려는 열심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한 때, 기꺼이 생명이라도 바칠 것 같았던 믿음에 대해서 확신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영적인 성장을 위한 열정이 싸늘하게 식어 있었습니다. 이런 사정에 있던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며 참된 희망이라는 사실을 여러 가지의 비유와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 자신의 몸을 바쳐 “새로운 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10:20).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그 새로운 길, 그 생명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 길에 서서 멈추지 말고 앞으로 걸어 나갈 때, 예수님께서는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서’ 저자는 오늘 읽은 본문에서 결론적으로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갑시다”(22절).
“또 우리에게 약속하신 분은 신실하시니, 우리는 흔들리지 말고, 우리가 고백하는 그 소망을 굳게 지킵시다. 그리고 서로 마음을 써서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합시다. 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우리는 모이기를 그만하지 말고, 서로 격려하여 그 날이 가까워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힘써 모입시다”(23-25절).
이 권면에서 우리는 세 가지의 요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세 가지 요점은 세상의 압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원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꼭 기억해야 할 가르침입니다.
첫째, 믿는 바를 굳게 잡으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진리는 다수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인류 역사를 살펴 보면, 진리 편에 섰던 사람들은 많은 경우 다수가 아니라 소수였습니다. 진리 편에 섰던 사람들은 박해와 오해와 손해를 감수해야 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절대 다수가 내 믿음을 조롱하더라도 결코 흔들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에게 열어 놓으신 길만이 참된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어 놓으신 길을 걷는 일을 멈추지 말라는 것입니다. 길을 나섰으면 걸어가야 합니다. 길은 걸어가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길을 걷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영적 여정’(Spiritual Journey)이라고 부릅니다. 때론 멈추어 쉬기도 하고, 때로 경치 구경에 넋을 잃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또 다시 일어나 걸어가야 합니다. 부단히 영적으로 성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은 믿음의 종착점이 아니라 출발점입니다. 좁은 문을 열고 좁은 길을 걷기 시작한 것입니다. 생명의 성에 도착할 때까지 좁고 험한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을 걸어갈 때 우리에게는 길벗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절대 다수가 외면하는 진리의 길을 가려는 사람은 그 길을 함께 갈 길벗을 찾아야 합니다. 홀로 그 길을 갈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로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예배를 위해 모이고, 속회로 모이고, 성경 공부로 모이고, 영적 대화를 위해 모여야 합니다. 서로 격려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고, 서로 부축하여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세상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생명의 길에 서서 진보해 나갈 수 있습니다.
6.
지난 주일까지 우리는 네 주간에 걸쳐 로버트 슈네지 감독이 제안한 <열매맺는 교회의 다섯 가지 습관>을 살펴 보았습니다. 슈네지 감독은 한 그리스도인이 열매 맺는 신앙인이 되고 한 교회가 열매 맺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첫째, extravagant generosity 즉 ‘후한 인심’의 습관, 둘째, radical hospitality 즉 ‘따뜻한 관심’의 습관, 셋째, passionate worship 즉 ‘영감있는 예배’의 습관, 넷째, risk-taking mission and service 즉 ‘위험을 감수하는 선교와 봉사’의 습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다섯 번째 습관으로서 intentional faith development 즉 ‘영적 성장을 위한 지속적 노력’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항목에서 슈네지 감독이 강조하려는 단어는 intentional 즉 ‘의도적인’이라는 말입니다. 영적인 성장을 위해 의도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우리의 노력이 우리를 바꾸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만이 우리를 바꿀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를 터치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부단히 그분에게 노출시키는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진실로 열매 맺는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꾸준히 영적 성장에 힘써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진실하게 거듭나야 합니다. 성령의 은혜를 받아 그 능력으로 새로와져야 합니다. 우리의 속 사람이 무럭 무럭 자라나야 합니다. 그 속사람이 나의 옛 사람을 완전히 지배할 정도로 성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으로부터의 어떠한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고 그 어떤 선전에도 속지 않는 영적 능력을 얻어야 합니다. 세상의 오염으로부터 자신을 거룩하게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 만으로도 우리는 세상을 달라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까지 살펴 본 네 가지 습관은 모두 이 한 가지 습관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 한 가지 습관으로 귀결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맡겨진 것들을 잘 관리하여 넉넉하게 드리고 나누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한 그렇게 드리고 나누는 일에 마음을 쓰다 보면, 그것이 영적인 성장으로 귀결됩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만이 다른 이들에게 따뜻한 관심을 보일 수 있고, 그렇게 따뜻하게 이웃을 대하다 보면 영적으로 더 성숙하게 됩니다. 영감있는 예배를 드리려면 영적으로 성장해야 하는 동시에, 그렇게 예배하다 보면 영적인 성장을 경험하게 됩니다.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하는 만큼 우리는 더 많은 부담과 위험을 감수하고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돌볼 수 있으며, 어려움에 처한 이웃과 진실로 만날 때 우리는 영적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영적 성장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열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온 세상이 변화하는 것은 바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로 변하는 것, 거기에서 시작됩니다. 내 직장이 변하고 내 가정이 변하는 것, 그것도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되게 변하는 것, 바로 거기에서 시작됩니다. 세속 문화의 공격으로부터 나 자신을 지키는 것, 그것도 역시 성령의 능력 안에서 내가 영적으로 변화하는 데 열쇠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우리가 믿는 바를 더욱 굳게 잡고, 교회로, 속회로 모이기를 힘쓰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어 놓으신 구원의 길을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붙여주신 길벗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을 걷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이 길에서 결코 멈추거나 낙오됨이 없기를 바랍니다. 이 좁고 험한 길을 기뻐 뒤며 걸어 생명의 성에 이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12장에서 교인들을 격려하는 말을 전해 드립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나른한 손과 힘빠진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똑바로 걸으십시오. 그래서 절름거리는 다리로 하여금 삐지 않게 하고, 오히려 낫게 하십시오.”(12-13절)
오, 주님,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제자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비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 가시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에게서 그들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과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여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요 17:15-17)
오, 주님,
저희에게도 이 기도가 필요합니다.
저희를 세상으로부터 지켜 주시고
거룩하게 하여 주소서.
주님의 제자로서 자라게 하셔서
소금으로
빛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열매맺는 교회의 다섯 가지 습관>
다섯 번째 습관: ‘영적 성장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Intentional Faith Development)
“새로운 살 길을 걷다”(We Are On the New and Living Way)
--히브리서 10:19-25
1.
우리가 속해 있는 미국 연합감리교회의 mission statement 즉 ‘사명 선언문’을 알고 계십니까? To Make Disciples of Jesus Christ for the Transformation of the World. 우리말로 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만들어 세상을 변혁시킨다”입니다. 믿는 사람들 하나 하나를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양육하면 그 결과로 세상에 변화가 일어난다는 믿음을 담아 낸, 아주 좋은 사명 선언문입니다. 온 세상이 변화될 것을 믿음의 눈으로 내다 보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위해 일하자는 뜻입니다.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세상이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사람들마다 바라는 ‘새 세상’의 모습이 다르기는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해 완전히 만족하지 못하는 점에서는 예외가 별로 없습니다. 어떤 이유로든 우리는 이 세상이 불완전하다고 느끼고 있으며, 좀 더 나은 세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정권이 바뀌면 그 소망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고, 어떤 사람은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며, 또 어떤 사람은 종교적인 차원에서 그같은 천지개벽을 기대합니다. 그같은 소망이 때로는 끔찍한 범죄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Fort Hood에서 일어난 끔찍한 총격 사건은 현실 세계에 절망하고 새 세상을 꿈꾸던 한 사람의 비틀린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언젠가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것이라고 믿고 기다립니다. 우리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요 저술가인 톰 라잇(N. T. Wright)은 ‘임한다’(arriving)고 표현하지 않고 ‘드러난다’(being revealed)라고 표현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저 먼 우주 공간에 있다가 우리가 사는 세계로 진입해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감지하지 못하는 형태로 우리의 우주를 감싸고 있다가 어느 순간에 우리에게 드러날 것이라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의 표현대로 우리는 지금 우리의 세상을 “부분적으로만 알고”(고전 13:9) 있을 뿐입니다. 장차 지금 우리 눈에 가려져 있는 실체가 드러날 것인데, 그 때서야 우리는 전체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우리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온전한 세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장차 이러한 변화가 일어날 것을 기대하는 동시에,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언젠가 드러나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과 같아지게 만들기 위해 기도하고 헌신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모든 것이 새롭게 되기 전까지 이 세상은 완전해지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망연히 그 때만을 기다리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내 힘이 미치는 영역부터라도, 아주 사소한 변화라 하더라도, 이 세상이 성경이 제시한 하나님 나라의 비전에 가까와지도록 할 일을 찾아 해야 할 것입니다.
2.
그런데 그같은 세상의 변화를 위해서 가장 먼저 일어나야 하는 일은 믿는 사람 자신이 변화되는 일입니다. ‘세상’이란 무엇입니까? ‘사람들의 사회’입니다. 사람이 모여 세상이 됩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아니,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입니다. 내가 변화되는 것이 이 세상의 변화의 출발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먼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로 거듭나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새로 빚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성숙해지지 않으면, 세상은 결코 변화되지 않습니다. 자신이 먼저 변화되지 않고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만일 자신의 변화에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키겠다고 나선다면, 그 변화는 분명 ‘파괴적인 변화’가 될 것입니다. 연합감리교회 사명 선언문, 즉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만들어 세상을 변혁시킨다”는 사명 선언문에서 “세상을 변혁시킨다”는 말에 초점을 맞추면 큰 실수를 하는 것이 됩니다.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가 저질러 온 무수한 범죄들은 대부분 믿는 사람이 먼저 변화되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힘쓰는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명 선언문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만드는 것”에 우선 집중해야 합니다.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 나고 그분의 영으로 새로와지도록 돕는 것이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기독교는 군사력이나 금력이나 정치 권력같은 것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에 대해 반대합니다. 시시 때때로 그같은 잘못을 범해 왔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습니다. “칼을 쓰는 사람은 모두 칼로 망한다”(마 26:52)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기독교의 원리입니다. 돈을 쓰는 사람은 돈으로 망할 것입니다. 권력을 사용하는 사람은 권력으로 망할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통해 선한 영향력을 세상에 미치는 방법을 택합니다. 소금이 배추에 녹아들듯이 혹은 촛불이 조용히 어둠을 밀어내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된 사람들을 통해 거룩하고 선한 영향력을 파급시킴으로써, 조용히, 은밀히, 그리고 속에서부터 세상을 변혁시킵니다.
물론, 때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연대하여 행동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거대한 사회적 악이 사람들의 생명을 짓누르고 있을 때, 그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연대하여 목소리를 높이고 정의를 외쳐야 할 때도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 킹 목사님이 흑인들의 인권을 위해 생명을 내걸고 정의를 외친 것처럼, 혹은 본회퍼 목사님이 나치 정권의 폭정을 끝내기 위해 목사의 신분으로 히틀러 저격단에 가담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의 변혁을 위해 먼저 행동해야만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라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질문은 ‘내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변화하고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악과 싸움을 하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의 악에 대해서는 눈이 멀어 버리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세상을 바꾸려고 몸부림쳤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모순투성이의 인간으로 머물러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도 바꾸지 못하고 자신도 변화되지 못합니다. 마침내 그런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이 거북해 하는 기피 인물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렇게 애정을 가지고 바꾸려 했던 사회에 대해서도 증오심을 품게 됩니다.
3.
저는 두 주일 전 설교에서 공지영씨의 신작 소설 <도가니>의 등장 인물에 대해 말씀 드렸습니다. 이 소설의 두 주인공 이강석과 이강복은 그리스도의 제자로 변화되지 않은 채 교회 생활 경력만으로 장로가 되었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변화되지 않은 채 장애인들을 위한 복지 사업에 손을 댔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거듭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매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도 그들의 관심은 영적으로 성장하고 변화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변혁시키는 힘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힘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소설의 또 다른 등장 인물 중 서유진이라는 여자가 있습니다. 결혼에 실패하고 친정 어머니와 아이 둘을 데리고 무진에 내려와 살아가는 single mother입니다. 서유진의 아버지는 목사였는데, 독재 정권과 싸우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서유진은 무진시로 내려와 ‘인권운동사무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의 대학 후배인 강인호와의 인연으로 인해 이강석, 이강복 형제가 운영하는 자애학원의 비리를 폭로하는 일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아버지로부터 전해받은 정의감과 의협심 그리고 강단이 그에게 있었지만, single mother로서 무진시의 거물들이 연루된 거대한 악과 싸우는 것은 힘겹고 벅찬 일이었습니다. 때로 가망 없어 보이고, 부질 없는 일처럼 보였습니다.
상황이 한 참 어렵게 진행될 즈음, 악한 사람들이 세운 철옹성이 결코 무너질 것 같지 않아서 서유진은 점차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그 어간의 어느 날, 서유진은 차에 키를 두고 내리는 바람에 무진시 경찰을 책임지고 있는 장경사의 차를 얻어 탑니다. 장경사라는 사람은 지역 유지들과 적당히 타협하며 일신상의 이익을 꾀하는 타락한 경찰 공무원입니다. 그가 운전하면서 지쳐있는 모습의 서유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당신을 보면 무슨 배짱으로 저러고 사나, 뭐 이런 생각이 듭니다. 잘 모르지만 정치할 생각은 없으신 것 같고…… 그렇다면 혹시 그런 순진한 방법으로 세상을 바꾸겠다고 그러는 건가……”
그러자 서유진이 장경사의 말을 끊고 나지막하게 그러나 강한 어조로 대답합니다.
“세상 같은 거 바꾸고 싶은 마음, 아버지 돌아가시면서 다 접었어요. 난 그들이 나를 바꾸지 못하게 하려고 싸우는 거예요.”(257쪽)
저는 이 대목을 읽을 때 마음이 찡했습니다. 서유진의 말이 오늘을 사는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도 진실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자주 우리의 믿음으로 세상을 변혁시키겠다고, 보무도 당당하게 외치지만, 정작 우리에게 더 시급한 과제는 세상에 의해 우리가 변질되는 것을 막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이같은 태도는 너무나 소극적이고 패배주의적인 것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그래가지고야 이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겠느냐고 묻고 싶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소설의 이야기 세계 속에서 서유진이 싸우는 ‘가망없는 싸움’은 그 자신을 지켜 주기도 했지만,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소금같이 혹은 촛불같이 그 역할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서유진, 그는 이 세상이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게 하려고 싸움으로써 이 세상을 조금이나마 변화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4.
실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변혁시키려 하기에 앞서, 세상에 의해 세뇌당하고 오염되고 꺾이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싸워야 할 가장 우선적인 싸움이며, 그것이 이 세상을 변혁시키는 가장 주효한 방법입니다. 우리는 서유진처럼 때로 거대한 악의 세력 앞에서 침묵을 강요 당하기도 하고, 타협을 요구 받기도 합니다. 금전적인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부정한 술수도 가리지 않는 사업 세계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가치관을 지키고 살아가는 것은 때로 벅찬 일입니다. 그 뿐 아닙니다. 우리는 가치관을 오염시키고 판단력을 마비시키고 내면에 있는 타락한 욕망을 따라 살아가도록 교묘하게 공격해 오는 세속 문화의 영향력과 싸워야 합니다.
최첨단 문명의 이기로 인해 이제 인류는 뭔가를 생각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서부터 세속 문화의 영향력 아래에서 노출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인으로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역량이 길러지기도 전에 사람들은 세속 문화의 가치관에 완전히 예속되어 버립니다. 며칠 전, 부목사님 한 분에게서 들었습니다. 한 돌도 안 된 아이가 울며 떼를 쓸 때, 그 무엇을 주어도 그치지 않는데, 이상하게도 I-Phone을 주면 울음을 뚝 그친답니다. 그 기계에서 보고 듣는 것을 이해할 수도 없는 나이인데도 그 기계가 요즘 아이들에게는 신기하기만 합니다. 그런 이유로 인해 바쁜 부모들은 어릴 적부터 어린아이들을 여러 종류의 기계에 맡겨 둡니다. DVD 플레이어, TV, 게임, 오락기, 컴퓨터, I-Phone 등등. 이렇게, 아이들의 영혼은 세속 문화에 맡겨집니다. 어쩌면 요즈음 아이들은 무덤에 이를 때까지 기계의 세계에 함몰되어 살아갈지도 모릅니다.
어린이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TV나 인터넷 혹은 그와 같은 매체들을 통해 우리의 정신과 영혼을 지배하려는 세속 문화의 공격이 얼마나 은밀하고 교묘한지요! 과연 우리는 그같은 전면 공격에 대해 얼마나 준비되어 있습니까? 우리는 과연 밤낮으로 교묘하게 우리의 정신과 영혼을 마비시키려는 세속 문화의 ‘소비주의’, ‘황금만능주의’, ‘물질주의’, ‘성공지상주의’, ‘외모지상주의’, ‘이기고 보자 주의’ 등에 대해 얼마나 대비되어 있습니까? 과연, 우리에게는 이같은 문화적 선전들을 보면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별하여 우리 자신이 변질되지 않도록 지킬 수 있는 힘이 있습니까?
과연,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을 계획하고 디자인할 때, 무엇을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까? 성경에 나와 있는 진리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습니까? 아니면, TV나 영화 혹은 상업 선전물에서 본 것을 기준으로 삼습니까? 여러분이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하는 삶의 방법은 예수님을 통해 배운 것입니까? 아니면, 세상 문화를 통해 전해 받은 것입니까? 여러분이 신봉하고 있는 가치관을 하나 하나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들이 어떻게 형성된 것이며, 과연 그 가치관은 성서의 진리에 얼마나 가깝습니까?
“나는 세상이 나를 바꾸지 못하게 하려고 싸우는 거예요.” 서유진의 이 말을 우리는 잘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우선적인 관심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세상에 의해 변화되지 않도록 지키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지 않더라도 나 한 사람이 세상에 동조하지 않고 의롭고 바른 길을 간다면 나로 인해서 이 세상은 그만큼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몇 번을 생각해도 결론은 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이 달라지기를 원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에 가깝도록 변화되기를 원하는데, 그 모든 소망의 첫 걸음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5.
교회력에 따라 읽은 오늘의 성서 일과는 히브리서 10장 19절부터 25절의 말씀입니다. ‘히브리서’라는 편지는 초대 교회에 실재했던 어느 교회를 위해 쓰여진 설교입니다. 이 편지가 쓰여질 때, 그 교회 교인들은 그들을 변질시키려는 세상과의 지루한 싸움에 지쳐 있었고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함께 모여 기도하고 서로 격려하며 힘껏 싸워 왔는데, 상황이 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점점 기운이 소진되었습니다. 마치, 거대한 악의 세력과 싸우다 지쳐 두려움에 질려 있는 서유진처럼, 그들은 자신들의 힘은 너무 약하고 싸워야 할 세상은 너무도 강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줄을 서서히 놓고 있었습니다. 함께 모이려는 열심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한 때, 기꺼이 생명이라도 바칠 것 같았던 믿음에 대해서 확신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영적인 성장을 위한 열정이 싸늘하게 식어 있었습니다. 이런 사정에 있던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며 참된 희망이라는 사실을 여러 가지의 비유와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 자신의 몸을 바쳐 “새로운 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10:20).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그 새로운 길, 그 생명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 길에 서서 멈추지 말고 앞으로 걸어 나갈 때, 예수님께서는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서’ 저자는 오늘 읽은 본문에서 결론적으로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갑시다”(22절).
“또 우리에게 약속하신 분은 신실하시니, 우리는 흔들리지 말고, 우리가 고백하는 그 소망을 굳게 지킵시다. 그리고 서로 마음을 써서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합시다. 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우리는 모이기를 그만하지 말고, 서로 격려하여 그 날이 가까워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힘써 모입시다”(23-25절).
이 권면에서 우리는 세 가지의 요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세 가지 요점은 세상의 압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원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꼭 기억해야 할 가르침입니다.
첫째, 믿는 바를 굳게 잡으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진리는 다수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인류 역사를 살펴 보면, 진리 편에 섰던 사람들은 많은 경우 다수가 아니라 소수였습니다. 진리 편에 섰던 사람들은 박해와 오해와 손해를 감수해야 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절대 다수가 내 믿음을 조롱하더라도 결코 흔들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에게 열어 놓으신 길만이 참된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어 놓으신 길을 걷는 일을 멈추지 말라는 것입니다. 길을 나섰으면 걸어가야 합니다. 길은 걸어가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길을 걷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영적 여정’(Spiritual Journey)이라고 부릅니다. 때론 멈추어 쉬기도 하고, 때로 경치 구경에 넋을 잃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또 다시 일어나 걸어가야 합니다. 부단히 영적으로 성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은 믿음의 종착점이 아니라 출발점입니다. 좁은 문을 열고 좁은 길을 걷기 시작한 것입니다. 생명의 성에 도착할 때까지 좁고 험한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을 걸어갈 때 우리에게는 길벗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절대 다수가 외면하는 진리의 길을 가려는 사람은 그 길을 함께 갈 길벗을 찾아야 합니다. 홀로 그 길을 갈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로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예배를 위해 모이고, 속회로 모이고, 성경 공부로 모이고, 영적 대화를 위해 모여야 합니다. 서로 격려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고, 서로 부축하여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세상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생명의 길에 서서 진보해 나갈 수 있습니다.
6.
지난 주일까지 우리는 네 주간에 걸쳐 로버트 슈네지 감독이 제안한 <열매맺는 교회의 다섯 가지 습관>을 살펴 보았습니다. 슈네지 감독은 한 그리스도인이 열매 맺는 신앙인이 되고 한 교회가 열매 맺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첫째, extravagant generosity 즉 ‘후한 인심’의 습관, 둘째, radical hospitality 즉 ‘따뜻한 관심’의 습관, 셋째, passionate worship 즉 ‘영감있는 예배’의 습관, 넷째, risk-taking mission and service 즉 ‘위험을 감수하는 선교와 봉사’의 습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다섯 번째 습관으로서 intentional faith development 즉 ‘영적 성장을 위한 지속적 노력’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항목에서 슈네지 감독이 강조하려는 단어는 intentional 즉 ‘의도적인’이라는 말입니다. 영적인 성장을 위해 의도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우리의 노력이 우리를 바꾸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만이 우리를 바꿀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를 터치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부단히 그분에게 노출시키는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진실로 열매 맺는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꾸준히 영적 성장에 힘써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진실하게 거듭나야 합니다. 성령의 은혜를 받아 그 능력으로 새로와져야 합니다. 우리의 속 사람이 무럭 무럭 자라나야 합니다. 그 속사람이 나의 옛 사람을 완전히 지배할 정도로 성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으로부터의 어떠한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고 그 어떤 선전에도 속지 않는 영적 능력을 얻어야 합니다. 세상의 오염으로부터 자신을 거룩하게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 만으로도 우리는 세상을 달라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까지 살펴 본 네 가지 습관은 모두 이 한 가지 습관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 한 가지 습관으로 귀결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맡겨진 것들을 잘 관리하여 넉넉하게 드리고 나누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한 그렇게 드리고 나누는 일에 마음을 쓰다 보면, 그것이 영적인 성장으로 귀결됩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만이 다른 이들에게 따뜻한 관심을 보일 수 있고, 그렇게 따뜻하게 이웃을 대하다 보면 영적으로 더 성숙하게 됩니다. 영감있는 예배를 드리려면 영적으로 성장해야 하는 동시에, 그렇게 예배하다 보면 영적인 성장을 경험하게 됩니다.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하는 만큼 우리는 더 많은 부담과 위험을 감수하고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돌볼 수 있으며, 어려움에 처한 이웃과 진실로 만날 때 우리는 영적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영적 성장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열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온 세상이 변화하는 것은 바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로 변하는 것, 거기에서 시작됩니다. 내 직장이 변하고 내 가정이 변하는 것, 그것도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되게 변하는 것, 바로 거기에서 시작됩니다. 세속 문화의 공격으로부터 나 자신을 지키는 것, 그것도 역시 성령의 능력 안에서 내가 영적으로 변화하는 데 열쇠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우리가 믿는 바를 더욱 굳게 잡고, 교회로, 속회로 모이기를 힘쓰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어 놓으신 구원의 길을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붙여주신 길벗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을 걷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이 길에서 결코 멈추거나 낙오됨이 없기를 바랍니다. 이 좁고 험한 길을 기뻐 뒤며 걸어 생명의 성에 이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12장에서 교인들을 격려하는 말을 전해 드립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나른한 손과 힘빠진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똑바로 걸으십시오. 그래서 절름거리는 다리로 하여금 삐지 않게 하고, 오히려 낫게 하십시오.”(12-13절)
오, 주님,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제자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비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 가시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에게서 그들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과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여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요 17:15-17)
오, 주님,
저희에게도 이 기도가 필요합니다.
저희를 세상으로부터 지켜 주시고
거룩하게 하여 주소서.
주님의 제자로서 자라게 하셔서
소금으로
빛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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