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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 앞에 설 수 있도록”(To Stand Before the Son of Man)
누가복음 김영봉 목사............... 조회 수 2515 추천 수 0 2011.07.31 23:20:23성경본문 : | 눅21:2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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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
2009.11.29 (김 영봉 목사)
“인자 앞에 설 수 있도록”(To Stand Before the Son of Man)
--누가복음 21:29-36
1.
Happy New Year!
매우 뜬금 없게 들리시지요? ‘이제 겨우 추수감사절을 지냈는데, 그리고 아직 성탄절이 한 달이나 남았는데, 벌써 Happy New Year라는 인사가 웬말이냐?’라고 생각하실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월력’(Solar Calendar)에 의하면 그렇습니다만, 교회가 따르는 ‘교회력’(Church Calendar or Liturgical Calendar)에 의하면 오늘이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교회력’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을 따라 일년을 나누어 그분의 생애와 가르침과 그 교훈을 차례로 묵상하도록 도와줍니다.
교회력에 의하면, 성탄일이 되기 전까지 4 주간을 ‘강림절’ 혹은 ‘대강절’이라고 부릅니다. ‘강림’이라는 말은 ‘오신다’는 뜻이고, ‘대강’이라는 말은 ‘오심을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Advent인데, 같은 뜻입니다. 지금으로부터 4주간 동안, 교회는 그리고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념하고 축하하고 또한 기다립니다. 그러기 위해서 대강절 4 주일 동안 우리는 이 예배당 앞에 있는 촛대에 불을 붙입니다. 첫 날 점화한 초는 ‘우리의 희망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다음 주일에는 두 개를 붙일 것입니다. 성탄일에는 가운데 있는 초까지 합하여 다섯 개의 초를 모두 밝히며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념하고 축하하며 또한 기다릴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요약합니다. 강림절 4 주간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우리 모두는 그분의 오심을 기념하고 축하하며 또한 기다립니다.
여러분 가운데 예민하게 듣는 분들은 이렇게 질문하고 싶을지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것은 맞는데, 기다린다? 무엇을 기다린다는 말인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정담을 나누고 선물을 주고 받는 크리스마스 이브를 기다린다는 뜻입니까? 물론, 그것도 기다릴만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강림절에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그보다 더 큰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 즉 ‘재림’(second coming)을 기다립니다.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시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시다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는 그분이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립니다. 그래서 연합감리교회 예배서는 성찬을 나눌 때 목사와 회중이 이렇게 고백하게 되어 있습니다.
“Christ has died; Christ is risen; Christ will come again.”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오실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뜨거운 감자’입니다. 2천년 전에 오셨던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름을 타시고 다시 이 땅에 오신다는 사실이 아무 문제 없이 믿어지는 사람들도 있지만, 더 많은 사람들에게는 가장 믿기 어려운 교리입니다. 믿기 어려울 뿐 아니라, 믿기도 싫습니다. 그같은 우주적인 대격변이 일어날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이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난 2천년 동안 수 많은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나타나 재림을 빌미로 하여 무수한 사람들을 현혹시켜 왔기 때문에 그 말만 들어도 인상이 구겨지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것은 저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신학 공부에 한 참 빠져 들고 있을 때, 저는 이 재림의 교리가 참 어려웠습니다. 재림에 대해 어릴 때부터 전해 받은 동화적인 그림들이 저를 괴롭혔던 것 같습니다. 한 때 저는 재림의 교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매우 위험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 재림의 교리만 없었다면 기독교의 교리가 얼마나 더 매력이 있었을까? 혹시 재림의 교리를 제거할 방도는 없을까? 혹은 달리 해석할 방법은 없을까?”
그 위험한 생각에서 저를 구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문제는 재림의 교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들을 오해한 것에 있었으며, 재림의 교리를 악용한 사람들에게 있었습니다. 재림의 교리는 결코 기독교 교리의 격을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며, 기독교 교리의 심오성을 해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한 참 후의 일이었습니다. 우리의 이성을 포기하지 않고도 재림의 교리를 받아들일 수 있음을 나중에서야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곁길로 빠질 찰나에 있는 저를 잡아 채어 구해 주신 것입니다. 그같은 이력 때문에, 여러분 중에 재림에 대해 거북하게 느끼는 분이 계시다는 사실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불편한 심기와 의문과 불신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이해하는 것을 절대화시키는 오류를 범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지금 내게 믿어지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단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살아온 지난 몇 년을 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10년 전에 받아들일 수 없던 일을 이제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생각해 보면 적잖이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 때, 내 믿음에 배치된다고 해서 ‘절대 그럴 수 없어!’라고 단정해 버렸다면 어쩔 뻔 했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믿지 못할 때, 두 가지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것이 진정 믿을 수 없는, ‘거짓’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의 이성이 그것을 아직 이해할 수 없어서 그럴 수 있습니다. 신앙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이 둘을 잘 분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에서는 자주 이성이 신앙의 적인 것처럼 가르치곤 합니다만, 감리교회는 신앙 생활에 있어서 이성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성이 하나님의 계시를 담아내는 좋은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성을 무시함으로 인해서 거짓을 믿는 위험에 빠지지도 말아야 하겠고, 이성을 지나치게 신뢰함으로 인해 이성의 한계 안에 갇히지도 말아야 하겠습니다.
3.
2천 년 전,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것이 요한복음 3장 16절이 증언하는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나신 분입니다. 한 번은 빌립이라는 제자가 예수님께 청합니다.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좋겠습니다”(요 14:8). 이 청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14:9). 이 대화에서 보듯, 크리스마스의 사건은 숨어계셨던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환히 드러내 보여 주신 사건입니다.
예수께서 태어나기 전에도 삼위일체 하나님은 활동하고 계셨습니다. 태초부터 하나님은 인류를 사랑하셨고 이 세상을 아끼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역사를 펼쳐 오셨습니다. 다만, 그분의 활동 모습이 사람들의 눈에 잘 보이지 않았을 뿐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숨어계신 분처럼 느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때는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이 너무도 분명하게 보이는데, 또 어떤 때는 거짓말 같이 느껴집니다. 육신을 입고 영이신 하나님을 믿고 살아간다는 것은 ‘보일 듯 말 듯한 것’을 보려고 힘쓰는 것과 같고, ‘잡힐 듯 말 듯한 것’을 잡으려고 하는 것과 같으며, ‘알 듯 말 듯한 것’을 알기 위해 힘쓰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어느 철학자와 신학자가 대화를 나눕니다. 신학자가 먼저 철학자에 대해 말합니다. “철학자들은 어두운 방에서 있지도 않은 검은 고양이를 찾는 맹인과 같습니다.” ‘진리’라는 것이 존재하지도 않는데, 그 진리를 찾겠다고 힘쓰느라고 헛수고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철학자가 신학자에게 대답합니다. “신학자들은 더 한심하지요. 있지도 않은 고양이를 찾았다고 주장하니까요!” 존재하지도 않는 신을 찾았다고 믿고 그 신에 대해 연구하고 있으니, 어찌 보면 철학자들보다 신학자들이 훨씬 더 어리석어 보일지 모릅니다. 이 땅에서 영이신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것은 때로 어두운 방에서 존재하지도 않는 검은 고양이를 잡으려고 허둥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4.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신 나머지 육신의 세계, 물질의 세계로 들어오셨습니다. 그것이 성탄절의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저자는 그 사건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1:14). 여기서 ‘그 말씀’은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말한, 태초부터 있었고, 하나님과 함께 있었으며, 또한 하나님이기도 했던 ‘그 말씀’을 가리킵니다. 그 말씀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셔서 사셨습니다. 성탄일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영의 세계로부터 우리가 사는 육의 세계로 뚫고 들어 오셨습니다. 숨어서 활동하시던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환히 드러내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로써 보일 듯 말 듯 하던 하나님이 육신의 눈에 선명히 보이게 되었습니다. 잡힐 듯 말 듯하던 하나님이 손에 잡히게 되었습니다. 알 듯 말 듯하던 하나님이 당신에 대해 환히 알도록 드러내 보여 주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생명의 길, 영생의 길, 진리의 길을 활짝 열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이며, 그것이 그분의 가르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대해 가지고 계신 집요한 사랑의 결과로 생긴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후, 승천하셨습니다. 우주에 대한 이해가 짧은 시절에 사람들은 승천을 생각하면서, 이 세상에 계시던 예수님이 우주에 있는 다른 공간으로 옮겨 가신 것처럼 오해했습니다. 아직도 그같이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바로 그런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승천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합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현대 과학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세계관에 따라 승천을 달리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했다는 말은 육신의 세계로 당신을 드러내셨던 하나님이 다시 영적인 세계로 돌아가셨다는 뜻입니다. 3차원 공간의 세계로 당신을 드러내셨던 하나님께서 다시 신적 차원 즉 영의 차원으로 돌아가셨다는 뜻입니다. 1차원 시간의 영역 안에 들어오셨던 하나님께서 다시 영원의 영역 안으로 돌아가셨다는 뜻입니다.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영적인 존재로서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예배 중에 함께 하시고, 두 세 사람이 그분의 이름으로 모인 자리에 함께 하시며, 찬양 중에 함께 하시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일터에 함께 하시며, 우리의 가정에 함께 하십니다. 승천하여 영적으로 활동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보일 듯 말 듯하고 잡힐 듯 말 듯합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는 우리가 존재하지도 않는 고양이를 잡았다고 좋아하는 사람들처럼 어리석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잡으려는 검은 고양이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증거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그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온다’는 단어에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라는 말을 뒤집으면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가 됩니다. 그것은 성서적 진리에 위배되는 말이요, 영적 체험으로 보아도 진실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 나라가 올 것이다”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하나님 나라는 지금 우리 중에 있지 않다”는 말이 됩니다.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2천 년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환히 보여 주신 이후, 우리는 언제나 그 나라 안에 살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 나라의 현실이 우리에게 환히 보이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다’는 말을 ‘드러난다’ 혹은 ‘나타난다’라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재림’이란 우리 중에 영으로 임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환히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2천 년 전에는 그분이 육신의 세계로 뚫고 들어오심으로써 당신을 드러내셨지만, 그 날에는 우리가 영적인 세계로 뚫고 들어가게 하심으로써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종말’이란 우리 눈에 보일듯 말 듯하게 감추어져 있던 하나님 나라, 그 영원한 세계가 우리 모두에게 환히 드러나는 사건을 말합니다. 태초에 시작하신 창조의 역사, 우주의 역사, 인류의 역사를 완성되는 사건이 종말의 사건입니다.
5.
이런 뜻에서 저는 재림을 믿습니다. 재림을 기다립니다. 그 미래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그 날을 예상하고 기다리고 갈망하는 한 편, 두려움도 제게 있습니다. 그 날이 구원의 날, 생명의 날, 영원한 축복의 날이 될 사람들도 있지만, 그 날이 심판의 날, 영원한 죽음의 날, 영원한 재앙의 날이 될 사람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 완성과 성취의 축제에 참여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거기에 참여할 자격을 잃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축복의 잔치에 참여할 자격이 제게 있는지, 저 자신을 돌아 봅니다. 축복의 날이 될 줄 알고 기다렸는데, 그것이 나에게 재앙의 날이 된다면 얼마나 큰 낭패일까 싶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제 마음에 경고의 말씀처럼 와서 꽂힙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해서, 방탕과 술취함과 세상살이의 걱정으로 너희의 마음이 짓눌리지 않게 하고, 또한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닥치지 않게 하여라”(34절).
“또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또 인자 앞에 설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늘 깨어 있어라”(36절).
‘인자’란 직역하면 ‘그 사람의 그 아들’(the son of the man)인데,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임금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우리에게 환히 드러난 하나님의 나라, 그 나라의 임금, 인자 앞에 과연 우리는 담대히 설 수 있을까요? 인자 앞에 서서, 그분으로부터 “잘 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마 25:21)라는 초청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혹시나 “악하고 게으른 종아!”(25:26)라는 책망의 말을 듣게 되지는 않겠습니까?
이런 생각을 하면 두려워집니다. 다만, 한 가지, 제 마음에 위로로 다가오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 있습니다. 저의 공로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저의 죄를 속량해 주시고 저를 두둔해 주시며 죄 없다고 인정해 주셨기 때문에, 저는 지금도 그분 앞에서 살고 있습니다. 때로 그분의 모습이 잘 안 보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분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때로 잊기도 하고, 때로 무시하기도 합니다만, 늘 그분의 임재에 깨어 있으려 노력합니다. 하지만 그분은 저를 잊는 법도 없고 무시하는 법도 없습니다. 이것이 저의 유일한 위안입니다. 지금 여기서, 비록 보일 듯 말 듯하지만, 영으로 함께 하시는 인자 앞에 서서 하루 하루 살다 보면, 모든 것이 환해질 그 날에도 인자 앞에 설 수 있을 것을 믿습니다.
오늘 읽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 소망과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두 가지 갈림길 중 하나를 택하게 됩니다. 하나는 “방탕과 술취함”입니다. 인생에는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으며, 이 세상은 우연히 생겨났다가 언젠가 뜻 없이 파멸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쾌락에 내어 맡기기 쉽습니다. 다른 하나는 “세상살이의 걱정”입니다. 우리의 인생과 이 세상의 역사를 하나님께서 운행하신다는 믿음을 잃어 버리면, 모든 것이 나에게 걸려 있으며, 따라서 내가 모든 것을 장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로 인해 그들은 세상살이의 걱정에 마음이 짓눌리게 되고, 결국 질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이 소망을 굳게 잡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시작해 오신 인류 사랑의 역사가 완성되는 그 날, 모든 것이 제 모습을 찾고, 감추어진 모든 것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날, 그 날을 기다리며 갈망해야 하겠습니다. 그 소망을 품고 오늘, 잡힐 듯 말 듯한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에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깊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지금 그분과 매일 매일 동행하고 살면, 그분이 환히 드러나는 날이 와도 우리는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마따나, 그 날이 “덫과 같이” 임하지 않을 것입니다.
6.
우리는 지금, 세상 문화가 “방탕과 술취함”을 부추기는 시기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방송에서는 벌써 크리스마스 캐롤이 들리고, 백화점마다 요란하게 성탄 장식을 해 놓고 작년에 못 올린 세일을 올리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이같은 분위기에 편승하여 방탕과 술취함의 문화에 빠지기 쉽고, 그같은 경제적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세상살이의 걱정으로 마음이 짓눌리는” 상황에 빠지기 쉽습니다. 대강절 기간은 거룩한 시기인데, 상업 선전에 속아 우리 앞에 계신 인자 예수 그리스도를 잊고 죄된 삶으로 떨어져 버릴까 걱정스럽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흥청이는 분위기가 더 깊어지기 전에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십시다. 예수께서 오늘 말씀을 통해 당부하시는 대로, 대강절 4주간을 더 깊이 기도하는 기간으로 만드십시다. 우리 앞에 계신 인자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에 더 깨어 있도록 힘쓰십시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임금이신 그분이 영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분의 임재가 때로 잡힐 듯 말 듯합니다만, 그래서 더욱 기도하고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브레넌 매닝(Brennan Maning)의 책 <아바의 아들>(Abba’s Child)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암으로 죽어가는 조(Joe)라는 이름의 노인에게는 딸이 하나 있습니다. 그는 직장 문제로 인해 아버지가 사는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았습니다. 아버지가 걱정된 딸은 아버지 집 근처에 있는 교회에 전화를 하여 신부님에게 심방을 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새로 부임한 신부님이 그 노인을 찾았을 때, 침대 옆에 의자가 하나 보입니다. 신부님이 노인에게 묻습니다. “제가 오는 줄 아셨습니까?” 그러자 노인은 “누구신지요?”라고 반문합니다. “예, 새로 부임한 협동 사제입니다. 저는 빈 의자를 보고 선생님께서 제가 올 것을 알고 기다리는 줄 알았습니다.” 신부님이 대답합니다. 노인은 잠시 눈을 껌뻑이더니, 신부님에게 문을 좀 닫아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리고는 빈 의자에 관한 사연을 신부님에게 말해 줍니다.
그 노인은 평생 교회를 다녔지만 기도할 줄을 몰랐습니다. 정말 하나님과 통하는 기도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한 번은 신부님을 찾아가 고민을 털어 놓습니다. 그러자 신부님은 어느 신학자가 쓴 책을 한 권 내어 주면서 그 책을 읽어 보면 도움이 될 거라고 했습니다. 기도에 관해 쓰여진 책 중에서 최고의 책이라는 극찬과 함께 말입니다. 하지만 그로서는 도저히 그 딱딱한 신학책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그 책을 신부님에게 돌려주고는 기도를 단념하고 살았습니다. 한 동안 그렇게 지내는데, 어느 날, 멀리서 친구가 찾아왔고, 조는 그 친구에게 기도에 관한 고민을 털어 놓습니다. 그러자 친구가 이렇게 답합니다.
“조, 기도란 단순히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걸세. 내 말대로 한 번 해보게. 의자에 앉아서 맞은 편에 빈 의자를 놓고 그 의자에 예수님이 앉아 계신 것을 믿음으로 보게.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네. 예수께서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말일세. 그 다음에는 지금 나와 하는 것처럼 똑같이 그분에게 말씀드리고 또 들으면 되네.”
그 노인은 그 후의 경험에 대해 신부님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래서 신부님, 그대로 했봤더니 너무 좋은 거예요. 그래서 날마다 두어 시간씩 그렇게 하고 있지요. 하지만 조심스러워요. 내가 빈 의자에 대고 말하는 걸 딸이 봤다가는 기절하거나 나를 정신병원으로 보낼 거요.”
신부님은 그 노인에게 계속 그렇게 기도하라고 권면하고 사제관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로부터 이틀 후 그 노인의 딸이 신부님에게 전화를 합니다. 그 노인이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리려는 전화였습니다. 신부님은 딸에게 묻습니다. “편안히 돌아가신 것 같습니까?” 그러자 딸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예, 2시쯤 집을 나와 병원으로 갔어요. 아버지는 저를 침대 옆으로 부르시더니 철지난 우스갯소리를 하나 들려주시고는 제 뺨에 입을 맞추셨어요. 가게에 갔다가 한 시간쯤 후에 돌아오니 이미 운명하신 후였어요. 그런데 신부님, 신기한 것이 있어요. 사실 신기한 정도가 아니라 좀 이상해요. 숨을 거두시기 바로 직전이었던 것 같은데, 아버지는 몸을 잔뜩 기울여 침대 옆 의자 위에 머리를 두고 계셨어요.” (154-155쪽)
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눈을 떠서 우리 앞에 서 계신 인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다. 때로 보일 듯 말 듯한 그분의 임재에 늘 깨어 있도록 더욱 기도에 힘쓰십시다. 마치 그분이 내 침대 옆에 계신 것처럼, 혹은 내 운전석 옆 자리에 앉아 계신 것처럼, 그분과 함께 교통하며 살아가십시다. 그렇게, 살아있는 영적인 사귐을 나누어, 위의 이야기에 나오는 노인처럼, 주님의 무릎에 누워 마지막 숨을 거둘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게, 지금 이 땅에서 그분과 함께 하루 하루를 살아갈 때, 마지막 날, 모든 것이 제 모습을 드러내는 그 날, 우리는 지금처럼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될 것이며,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 대강절에 이 믿음과 소망이 저와 여러분에게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이 기간이 “방탕과 술취함”에 빠지는 기간도 아니고, “세상살이에 대한 근심으로 마음이 짓눌리는” 기간도 아니라, 더욱 기도에 힘 쓰는 기간, 더 깊이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교제하는 기간, 더 성결하고 거룩하고 절제하는 기간, 그리하여 더욱 감사하고 기뻐하는 기간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영원한 왕,
인자이신 예수님,
저희에게 와 주심을 감사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영으로 저희 앞에 서 계십니다.
주님,
더욱 깨어 기도하게 하시어,
주님의 임재를 손에 잡은 듯이 살게 하소서.
마침내 드러날 주님의 영원한 나라를 소망합니다.
지금 그 나라를 보게 하시고
그 나라의 시민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인자 앞에 설 수 있도록”(To Stand Before the Son of Man)
--누가복음 21:29-36
1.
Happy New Year!
매우 뜬금 없게 들리시지요? ‘이제 겨우 추수감사절을 지냈는데, 그리고 아직 성탄절이 한 달이나 남았는데, 벌써 Happy New Year라는 인사가 웬말이냐?’라고 생각하실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월력’(Solar Calendar)에 의하면 그렇습니다만, 교회가 따르는 ‘교회력’(Church Calendar or Liturgical Calendar)에 의하면 오늘이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교회력’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을 따라 일년을 나누어 그분의 생애와 가르침과 그 교훈을 차례로 묵상하도록 도와줍니다.
교회력에 의하면, 성탄일이 되기 전까지 4 주간을 ‘강림절’ 혹은 ‘대강절’이라고 부릅니다. ‘강림’이라는 말은 ‘오신다’는 뜻이고, ‘대강’이라는 말은 ‘오심을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Advent인데, 같은 뜻입니다. 지금으로부터 4주간 동안, 교회는 그리고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념하고 축하하고 또한 기다립니다. 그러기 위해서 대강절 4 주일 동안 우리는 이 예배당 앞에 있는 촛대에 불을 붙입니다. 첫 날 점화한 초는 ‘우리의 희망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다음 주일에는 두 개를 붙일 것입니다. 성탄일에는 가운데 있는 초까지 합하여 다섯 개의 초를 모두 밝히며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념하고 축하하며 또한 기다릴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요약합니다. 강림절 4 주간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우리 모두는 그분의 오심을 기념하고 축하하며 또한 기다립니다.
여러분 가운데 예민하게 듣는 분들은 이렇게 질문하고 싶을지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것은 맞는데, 기다린다? 무엇을 기다린다는 말인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정담을 나누고 선물을 주고 받는 크리스마스 이브를 기다린다는 뜻입니까? 물론, 그것도 기다릴만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강림절에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그보다 더 큰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 즉 ‘재림’(second coming)을 기다립니다.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시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시다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는 그분이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립니다. 그래서 연합감리교회 예배서는 성찬을 나눌 때 목사와 회중이 이렇게 고백하게 되어 있습니다.
“Christ has died; Christ is risen; Christ will come again.”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오실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뜨거운 감자’입니다. 2천년 전에 오셨던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름을 타시고 다시 이 땅에 오신다는 사실이 아무 문제 없이 믿어지는 사람들도 있지만, 더 많은 사람들에게는 가장 믿기 어려운 교리입니다. 믿기 어려울 뿐 아니라, 믿기도 싫습니다. 그같은 우주적인 대격변이 일어날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이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난 2천년 동안 수 많은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나타나 재림을 빌미로 하여 무수한 사람들을 현혹시켜 왔기 때문에 그 말만 들어도 인상이 구겨지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것은 저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신학 공부에 한 참 빠져 들고 있을 때, 저는 이 재림의 교리가 참 어려웠습니다. 재림에 대해 어릴 때부터 전해 받은 동화적인 그림들이 저를 괴롭혔던 것 같습니다. 한 때 저는 재림의 교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매우 위험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 재림의 교리만 없었다면 기독교의 교리가 얼마나 더 매력이 있었을까? 혹시 재림의 교리를 제거할 방도는 없을까? 혹은 달리 해석할 방법은 없을까?”
그 위험한 생각에서 저를 구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문제는 재림의 교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들을 오해한 것에 있었으며, 재림의 교리를 악용한 사람들에게 있었습니다. 재림의 교리는 결코 기독교 교리의 격을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며, 기독교 교리의 심오성을 해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한 참 후의 일이었습니다. 우리의 이성을 포기하지 않고도 재림의 교리를 받아들일 수 있음을 나중에서야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곁길로 빠질 찰나에 있는 저를 잡아 채어 구해 주신 것입니다. 그같은 이력 때문에, 여러분 중에 재림에 대해 거북하게 느끼는 분이 계시다는 사실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불편한 심기와 의문과 불신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이해하는 것을 절대화시키는 오류를 범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지금 내게 믿어지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단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살아온 지난 몇 년을 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10년 전에 받아들일 수 없던 일을 이제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생각해 보면 적잖이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 때, 내 믿음에 배치된다고 해서 ‘절대 그럴 수 없어!’라고 단정해 버렸다면 어쩔 뻔 했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믿지 못할 때, 두 가지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것이 진정 믿을 수 없는, ‘거짓’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의 이성이 그것을 아직 이해할 수 없어서 그럴 수 있습니다. 신앙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이 둘을 잘 분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에서는 자주 이성이 신앙의 적인 것처럼 가르치곤 합니다만, 감리교회는 신앙 생활에 있어서 이성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성이 하나님의 계시를 담아내는 좋은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성을 무시함으로 인해서 거짓을 믿는 위험에 빠지지도 말아야 하겠고, 이성을 지나치게 신뢰함으로 인해 이성의 한계 안에 갇히지도 말아야 하겠습니다.
3.
2천 년 전,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것이 요한복음 3장 16절이 증언하는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나신 분입니다. 한 번은 빌립이라는 제자가 예수님께 청합니다.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좋겠습니다”(요 14:8). 이 청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14:9). 이 대화에서 보듯, 크리스마스의 사건은 숨어계셨던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환히 드러내 보여 주신 사건입니다.
예수께서 태어나기 전에도 삼위일체 하나님은 활동하고 계셨습니다. 태초부터 하나님은 인류를 사랑하셨고 이 세상을 아끼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역사를 펼쳐 오셨습니다. 다만, 그분의 활동 모습이 사람들의 눈에 잘 보이지 않았을 뿐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숨어계신 분처럼 느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때는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이 너무도 분명하게 보이는데, 또 어떤 때는 거짓말 같이 느껴집니다. 육신을 입고 영이신 하나님을 믿고 살아간다는 것은 ‘보일 듯 말 듯한 것’을 보려고 힘쓰는 것과 같고, ‘잡힐 듯 말 듯한 것’을 잡으려고 하는 것과 같으며, ‘알 듯 말 듯한 것’을 알기 위해 힘쓰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어느 철학자와 신학자가 대화를 나눕니다. 신학자가 먼저 철학자에 대해 말합니다. “철학자들은 어두운 방에서 있지도 않은 검은 고양이를 찾는 맹인과 같습니다.” ‘진리’라는 것이 존재하지도 않는데, 그 진리를 찾겠다고 힘쓰느라고 헛수고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철학자가 신학자에게 대답합니다. “신학자들은 더 한심하지요. 있지도 않은 고양이를 찾았다고 주장하니까요!” 존재하지도 않는 신을 찾았다고 믿고 그 신에 대해 연구하고 있으니, 어찌 보면 철학자들보다 신학자들이 훨씬 더 어리석어 보일지 모릅니다. 이 땅에서 영이신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것은 때로 어두운 방에서 존재하지도 않는 검은 고양이를 잡으려고 허둥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4.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신 나머지 육신의 세계, 물질의 세계로 들어오셨습니다. 그것이 성탄절의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저자는 그 사건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1:14). 여기서 ‘그 말씀’은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말한, 태초부터 있었고, 하나님과 함께 있었으며, 또한 하나님이기도 했던 ‘그 말씀’을 가리킵니다. 그 말씀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셔서 사셨습니다. 성탄일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영의 세계로부터 우리가 사는 육의 세계로 뚫고 들어 오셨습니다. 숨어서 활동하시던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환히 드러내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로써 보일 듯 말 듯 하던 하나님이 육신의 눈에 선명히 보이게 되었습니다. 잡힐 듯 말 듯하던 하나님이 손에 잡히게 되었습니다. 알 듯 말 듯하던 하나님이 당신에 대해 환히 알도록 드러내 보여 주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생명의 길, 영생의 길, 진리의 길을 활짝 열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이며, 그것이 그분의 가르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대해 가지고 계신 집요한 사랑의 결과로 생긴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후, 승천하셨습니다. 우주에 대한 이해가 짧은 시절에 사람들은 승천을 생각하면서, 이 세상에 계시던 예수님이 우주에 있는 다른 공간으로 옮겨 가신 것처럼 오해했습니다. 아직도 그같이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바로 그런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승천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합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현대 과학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세계관에 따라 승천을 달리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했다는 말은 육신의 세계로 당신을 드러내셨던 하나님이 다시 영적인 세계로 돌아가셨다는 뜻입니다. 3차원 공간의 세계로 당신을 드러내셨던 하나님께서 다시 신적 차원 즉 영의 차원으로 돌아가셨다는 뜻입니다. 1차원 시간의 영역 안에 들어오셨던 하나님께서 다시 영원의 영역 안으로 돌아가셨다는 뜻입니다.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영적인 존재로서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예배 중에 함께 하시고, 두 세 사람이 그분의 이름으로 모인 자리에 함께 하시며, 찬양 중에 함께 하시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일터에 함께 하시며, 우리의 가정에 함께 하십니다. 승천하여 영적으로 활동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보일 듯 말 듯하고 잡힐 듯 말 듯합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는 우리가 존재하지도 않는 고양이를 잡았다고 좋아하는 사람들처럼 어리석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잡으려는 검은 고양이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증거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그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온다’는 단어에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라는 말을 뒤집으면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가 됩니다. 그것은 성서적 진리에 위배되는 말이요, 영적 체험으로 보아도 진실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 나라가 올 것이다”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하나님 나라는 지금 우리 중에 있지 않다”는 말이 됩니다.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2천 년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환히 보여 주신 이후, 우리는 언제나 그 나라 안에 살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 나라의 현실이 우리에게 환히 보이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다’는 말을 ‘드러난다’ 혹은 ‘나타난다’라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재림’이란 우리 중에 영으로 임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환히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2천 년 전에는 그분이 육신의 세계로 뚫고 들어오심으로써 당신을 드러내셨지만, 그 날에는 우리가 영적인 세계로 뚫고 들어가게 하심으로써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종말’이란 우리 눈에 보일듯 말 듯하게 감추어져 있던 하나님 나라, 그 영원한 세계가 우리 모두에게 환히 드러나는 사건을 말합니다. 태초에 시작하신 창조의 역사, 우주의 역사, 인류의 역사를 완성되는 사건이 종말의 사건입니다.
5.
이런 뜻에서 저는 재림을 믿습니다. 재림을 기다립니다. 그 미래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그 날을 예상하고 기다리고 갈망하는 한 편, 두려움도 제게 있습니다. 그 날이 구원의 날, 생명의 날, 영원한 축복의 날이 될 사람들도 있지만, 그 날이 심판의 날, 영원한 죽음의 날, 영원한 재앙의 날이 될 사람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 완성과 성취의 축제에 참여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거기에 참여할 자격을 잃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축복의 잔치에 참여할 자격이 제게 있는지, 저 자신을 돌아 봅니다. 축복의 날이 될 줄 알고 기다렸는데, 그것이 나에게 재앙의 날이 된다면 얼마나 큰 낭패일까 싶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제 마음에 경고의 말씀처럼 와서 꽂힙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해서, 방탕과 술취함과 세상살이의 걱정으로 너희의 마음이 짓눌리지 않게 하고, 또한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닥치지 않게 하여라”(34절).
“또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또 인자 앞에 설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늘 깨어 있어라”(36절).
‘인자’란 직역하면 ‘그 사람의 그 아들’(the son of the man)인데,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임금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우리에게 환히 드러난 하나님의 나라, 그 나라의 임금, 인자 앞에 과연 우리는 담대히 설 수 있을까요? 인자 앞에 서서, 그분으로부터 “잘 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마 25:21)라는 초청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혹시나 “악하고 게으른 종아!”(25:26)라는 책망의 말을 듣게 되지는 않겠습니까?
이런 생각을 하면 두려워집니다. 다만, 한 가지, 제 마음에 위로로 다가오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 있습니다. 저의 공로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저의 죄를 속량해 주시고 저를 두둔해 주시며 죄 없다고 인정해 주셨기 때문에, 저는 지금도 그분 앞에서 살고 있습니다. 때로 그분의 모습이 잘 안 보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분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때로 잊기도 하고, 때로 무시하기도 합니다만, 늘 그분의 임재에 깨어 있으려 노력합니다. 하지만 그분은 저를 잊는 법도 없고 무시하는 법도 없습니다. 이것이 저의 유일한 위안입니다. 지금 여기서, 비록 보일 듯 말 듯하지만, 영으로 함께 하시는 인자 앞에 서서 하루 하루 살다 보면, 모든 것이 환해질 그 날에도 인자 앞에 설 수 있을 것을 믿습니다.
오늘 읽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 소망과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두 가지 갈림길 중 하나를 택하게 됩니다. 하나는 “방탕과 술취함”입니다. 인생에는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으며, 이 세상은 우연히 생겨났다가 언젠가 뜻 없이 파멸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쾌락에 내어 맡기기 쉽습니다. 다른 하나는 “세상살이의 걱정”입니다. 우리의 인생과 이 세상의 역사를 하나님께서 운행하신다는 믿음을 잃어 버리면, 모든 것이 나에게 걸려 있으며, 따라서 내가 모든 것을 장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로 인해 그들은 세상살이의 걱정에 마음이 짓눌리게 되고, 결국 질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이 소망을 굳게 잡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시작해 오신 인류 사랑의 역사가 완성되는 그 날, 모든 것이 제 모습을 찾고, 감추어진 모든 것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날, 그 날을 기다리며 갈망해야 하겠습니다. 그 소망을 품고 오늘, 잡힐 듯 말 듯한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에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깊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지금 그분과 매일 매일 동행하고 살면, 그분이 환히 드러나는 날이 와도 우리는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마따나, 그 날이 “덫과 같이” 임하지 않을 것입니다.
6.
우리는 지금, 세상 문화가 “방탕과 술취함”을 부추기는 시기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방송에서는 벌써 크리스마스 캐롤이 들리고, 백화점마다 요란하게 성탄 장식을 해 놓고 작년에 못 올린 세일을 올리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이같은 분위기에 편승하여 방탕과 술취함의 문화에 빠지기 쉽고, 그같은 경제적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세상살이의 걱정으로 마음이 짓눌리는” 상황에 빠지기 쉽습니다. 대강절 기간은 거룩한 시기인데, 상업 선전에 속아 우리 앞에 계신 인자 예수 그리스도를 잊고 죄된 삶으로 떨어져 버릴까 걱정스럽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흥청이는 분위기가 더 깊어지기 전에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십시다. 예수께서 오늘 말씀을 통해 당부하시는 대로, 대강절 4주간을 더 깊이 기도하는 기간으로 만드십시다. 우리 앞에 계신 인자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에 더 깨어 있도록 힘쓰십시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임금이신 그분이 영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분의 임재가 때로 잡힐 듯 말 듯합니다만, 그래서 더욱 기도하고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브레넌 매닝(Brennan Maning)의 책 <아바의 아들>(Abba’s Child)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암으로 죽어가는 조(Joe)라는 이름의 노인에게는 딸이 하나 있습니다. 그는 직장 문제로 인해 아버지가 사는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았습니다. 아버지가 걱정된 딸은 아버지 집 근처에 있는 교회에 전화를 하여 신부님에게 심방을 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새로 부임한 신부님이 그 노인을 찾았을 때, 침대 옆에 의자가 하나 보입니다. 신부님이 노인에게 묻습니다. “제가 오는 줄 아셨습니까?” 그러자 노인은 “누구신지요?”라고 반문합니다. “예, 새로 부임한 협동 사제입니다. 저는 빈 의자를 보고 선생님께서 제가 올 것을 알고 기다리는 줄 알았습니다.” 신부님이 대답합니다. 노인은 잠시 눈을 껌뻑이더니, 신부님에게 문을 좀 닫아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리고는 빈 의자에 관한 사연을 신부님에게 말해 줍니다.
그 노인은 평생 교회를 다녔지만 기도할 줄을 몰랐습니다. 정말 하나님과 통하는 기도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한 번은 신부님을 찾아가 고민을 털어 놓습니다. 그러자 신부님은 어느 신학자가 쓴 책을 한 권 내어 주면서 그 책을 읽어 보면 도움이 될 거라고 했습니다. 기도에 관해 쓰여진 책 중에서 최고의 책이라는 극찬과 함께 말입니다. 하지만 그로서는 도저히 그 딱딱한 신학책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그 책을 신부님에게 돌려주고는 기도를 단념하고 살았습니다. 한 동안 그렇게 지내는데, 어느 날, 멀리서 친구가 찾아왔고, 조는 그 친구에게 기도에 관한 고민을 털어 놓습니다. 그러자 친구가 이렇게 답합니다.
“조, 기도란 단순히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걸세. 내 말대로 한 번 해보게. 의자에 앉아서 맞은 편에 빈 의자를 놓고 그 의자에 예수님이 앉아 계신 것을 믿음으로 보게.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네. 예수께서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말일세. 그 다음에는 지금 나와 하는 것처럼 똑같이 그분에게 말씀드리고 또 들으면 되네.”
그 노인은 그 후의 경험에 대해 신부님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래서 신부님, 그대로 했봤더니 너무 좋은 거예요. 그래서 날마다 두어 시간씩 그렇게 하고 있지요. 하지만 조심스러워요. 내가 빈 의자에 대고 말하는 걸 딸이 봤다가는 기절하거나 나를 정신병원으로 보낼 거요.”
신부님은 그 노인에게 계속 그렇게 기도하라고 권면하고 사제관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로부터 이틀 후 그 노인의 딸이 신부님에게 전화를 합니다. 그 노인이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리려는 전화였습니다. 신부님은 딸에게 묻습니다. “편안히 돌아가신 것 같습니까?” 그러자 딸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예, 2시쯤 집을 나와 병원으로 갔어요. 아버지는 저를 침대 옆으로 부르시더니 철지난 우스갯소리를 하나 들려주시고는 제 뺨에 입을 맞추셨어요. 가게에 갔다가 한 시간쯤 후에 돌아오니 이미 운명하신 후였어요. 그런데 신부님, 신기한 것이 있어요. 사실 신기한 정도가 아니라 좀 이상해요. 숨을 거두시기 바로 직전이었던 것 같은데, 아버지는 몸을 잔뜩 기울여 침대 옆 의자 위에 머리를 두고 계셨어요.” (154-155쪽)
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눈을 떠서 우리 앞에 서 계신 인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다. 때로 보일 듯 말 듯한 그분의 임재에 늘 깨어 있도록 더욱 기도에 힘쓰십시다. 마치 그분이 내 침대 옆에 계신 것처럼, 혹은 내 운전석 옆 자리에 앉아 계신 것처럼, 그분과 함께 교통하며 살아가십시다. 그렇게, 살아있는 영적인 사귐을 나누어, 위의 이야기에 나오는 노인처럼, 주님의 무릎에 누워 마지막 숨을 거둘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게, 지금 이 땅에서 그분과 함께 하루 하루를 살아갈 때, 마지막 날, 모든 것이 제 모습을 드러내는 그 날, 우리는 지금처럼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될 것이며,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 대강절에 이 믿음과 소망이 저와 여러분에게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이 기간이 “방탕과 술취함”에 빠지는 기간도 아니고, “세상살이에 대한 근심으로 마음이 짓눌리는” 기간도 아니라, 더욱 기도에 힘 쓰는 기간, 더 깊이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교제하는 기간, 더 성결하고 거룩하고 절제하는 기간, 그리하여 더욱 감사하고 기뻐하는 기간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영원한 왕,
인자이신 예수님,
저희에게 와 주심을 감사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영으로 저희 앞에 서 계십니다.
주님,
더욱 깨어 기도하게 하시어,
주님의 임재를 손에 잡은 듯이 살게 하소서.
마침내 드러날 주님의 영원한 나라를 소망합니다.
지금 그 나라를 보게 하시고
그 나라의 시민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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