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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체를 끝내는 법”(How to End the Depression)

누가복음 김영봉 목사............... 조회 수 2352 추천 수 0 2011.07.31 23: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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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3:21-22 
설교자 : 김영봉 목사 
참고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2010.1.10 (김 영봉 목사)

“침체를 끝내는 법”(How to End the Depression)
누가복음(Luke) 3:21-22

1.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까지 어떻게 성장했을까? 청소년 시기에 그분은 어떤 고민을 하며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을까? 청년 예수는 어떠했을까? 그는 자신의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 어떤 준비를 어떻게 했을까?

누가복음 3장 23절에 보니, “예수께서 활동을 시작하실 때에, 그는 서른 살쯤이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이후로부터 돌아가실 때까지의 이야기는 네 개의 복음서에 어느 정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문서 시대가 아니었던 당시의 상황을 생각하면, 그 정도의 기록이 남아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 광야에 나타나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활동을 시작하기 전까지, 거의 30년 동안 그분이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청소년 혹은 청년기의 예수가 인도에 가서 여러 종교들을 섭렵하며 내공을 쌓았다는 이야기를 들어 보셨는지요? 어떤 사람은 인도를 여행하면서 역사적 자료를 찾는 데 일생을 바치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거의 ‘믿거나 말거나’ 수준의 근거를 가지고 예수님이 인도에서 교육 받았다는 주장을 담아 책을 펴내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뉴에이지 사상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이 소문에 매달려 온갖 헛소문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모든 종교를 혼합시켜 만든 ‘잡탕 영성’을 기존 종교에 대한 새로운 대안으로 생각하는 뉴에이지 추종자들은 예수님을 잡탕 영성의 시조로 만들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서른 살이 되기 전까지 예수님이 어떻게 사셨는지를 말해주는 역사적 자료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다만, 추측할 수밖에 없습니다. 공적인 활동을 시작하고 난 다음에 그분이 하신 말씀과 행적을 살펴 보면, 그분이 어떻게 자랐을지 대략 추측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이 열 두 살 때 있었던 이야기가 하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사렛에 살던 예수님의 가족이 유월절 축제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갔었는데, 돌아오는 길에 소년 예수가 실종된 것을 발견합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성전에서 율법학자들의 가르침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어머니 마리아는 한꺼번에 솟아오르는 분노를 억누르고 이렇게 말합니다. “얘야, 이게 무슨 일이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찾느라고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른다”(48절). 그랬더니 소년 예수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였습니까?”(49절) “염장을 지른다”는 표현은 이럴 때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같은 아들을 기르는 부모도 이같이 속이 뒤집히는 것 같은 상황을 겪어야 했다는 사실이 청소년 아이를 기르는 부모들에게는 얼마나 큰 위로인지요!

사흘 동안 아들을 찾아 다니며 속이 시커멓게 되어 버렸을 부모에게 던진 이 냉정한 말 한 마디에서 우리는 소년 예수가 어떻게 성장했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릴 적부터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음을 인식하고 자랐습니다. 집에서 목수인 아버지의 직업을 이어 생계를 꾸리는 한 편, 유대교의 전통과 관습을 따라 진지하게 진리를 추구했을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나누었을 것입니다. 그같은 영성 생활을 통해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확인했을 것이며, 그 소명을 이루기 위해 나서야 할 때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2.

오늘, 교회력에 따른 성서 일과에 정해진 말씀, 누가복음 3장 21절과 22절은 ‘사적인 예수’가 ‘공적인 예수’로 바뀌는 전환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친척 형뻘 되는 세례 요한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볼 때, 세례 요한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 시대를 위해 보내주신 예언자였습니다. 세례 요한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매우 중대한 일을 시작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시작되고 있는 그 중대한 역사 속에 자신의 자리도 있음을 아셨습니다. 하여, 요한을 찾아 요단강으로 가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영적으로 매우 민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대번에 그분이 누구인지 알아 보았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 보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터인데, 선생님께서 내게 오셨습니다”(3:14). 그러자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지금은 그렇게 하도록 하십시오. 이렇게 하여, 우리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옳습니다”(15절). 실로, 영적 거목들의 대화답지 않습니까? 결국, 요한은 예수님의 뜻대로 합니다.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예수님은 신비한 영적 체험을 합니다.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그분에게 내려 앉아 그분의 존재를 에워쌉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니,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예수 위에 내려오셨다”(눅 3:22)고 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외형이 비둘기처럼 생겼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이 예수님 위에 내릴 때, 마치 비둘기가 땅에 사뿐히 내려 앉듯, 그렇게 조용히, 그렇게 차분히 덮어 씌웠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것은 그분이 자라면서 자주 읽고 묵상했던 성경 말씀이었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는 너를 좋아한다”.

먼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말씀은 시편 2편 7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 옛날, 선민 이스라엘의 왕은 기도 중에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사용하여 예수님의 내면의 귀에 속삭이십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이 한 마디 속에 담긴 의미는 이런 것입니다. “너는 나에게 특별한 존재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를 통해 할 일이 있다. 그래서 너에게 내 영을 부어 주는 것이다.”

그 다음, “나는 너를 좋아한다”라는 말씀은 이사야 42장 1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사야서에는 네 개의 ‘종의 노래’가 나옵니다. 이 ‘종의 노래’들은 예수님에게 특별히 중요했습니다. 이사야 42장은 첫 번째 ‘종의 노래’입니다. 그 첫 절에서 하나님은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종을 보아라.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사람이다. 내가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가 뭇 민족에게 공의를 베풀 것이다”(사 42:1).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하나님은 그분의 내면의 귀에 이 말씀을 속삭이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 말씀을 읽고 암송하고 묵상하는 일이 얼마나 유익한지, 그 실례를 봅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려 하실 때, 우리 마음 안에 저장되어 있는 성경 말씀은 아주 유용한 전달 수단이 됩니다. 문자로 기록된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복음서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 드릴 때도 자주 성경 말씀을 사용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도 자주 평소에 외우고 묵상했던 성경 말씀을 통해 들었습니다.

3.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예수님은 두 가지를 얻으셨습니다. 하나는 성령의 충만한 임재 안에 거하게 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바위같은 확신을 얻게 된 것입니다.
“성령이 비둘기같은 형체로 예수 위에 내려오셨다.” 아, 하나님의 거룩한 기운이 그분의 전 존재를 감싸 안을 때, 예수님은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아마도, 전쟁에 나가는 장수가 전신갑주로 중무장을 했을 때와 같지 않았을까요? 실제로, 예수님은 지금 전투장에 나서는 장수와 같은 입장이었습니다. 영적인 적들과 인간적인 적들이 진을 치고 있는 세상으로 나가 하나님의 부름을 위해 헌신하려는 찰나에 있었습니다. 이 중대한 순간에 이미 그분과 함께 계셨던 성령께서 더할 수 없이 강력하고 농도 짙게 그분의 존재를 덮었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는 너를 좋아한다.” 이 음성은 이 순간부터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실 때까지 예수님의 마음 속에서 때로는 크게, 또 때로는 작게 계속 울렸을 것입니다. 그 음성은 예수님께, 당신이 누구인지, 당신이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지, 당신의 소명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를 끊임없이 확인시켜 주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인간이었으니, 때로 지치기도 했을 것이고, 때로 낙심할만한 일도 있었습니다. 때로 거대한 악의 세력 앞에서 자신이 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문에 빠질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모진 박해와 고난을 당하면서 그 소명을 던져 버리고 싶은 때도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때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는 너를 좋아한다”는 음성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 음성은 그분을 다시 일으켜 주었을 것입니다.

요단 강에서 이같은 영적 경험을 하신 예수님은 광야로 나가 40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신 다음, 세례 요한이 체포되자 갈릴리로 나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로부터 약 3년 동안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면서 그분은 많은 능력을 행하셨고, 권위있는 말씀을 전하셨으며, 마침내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소명을 다 이루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끝까지 완주하고 십자가의 길을 가실 수 있었던 주된 힘은 요단강에서 겪은 이 영적 경험에서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압도적인 덮어 씌움과 하나님의 음성이 그로 하여금 끝까지 완주하도록 밀어주고 당겨 주었습니다.

4.

그런데 이것은 2천 년 전에 한 번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역사 상 가장 뛰어났던 한 인물에게만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2천 년 동안 많은 믿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일어난 일이며, 앞으로도 세상 끝날까지 일어날 일입니다. 누구든지, 진정한 영적 생명을 원한다면,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겪은 이 두 가지 경험을 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에피파니’의 사건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의 성령에 덮어 씌우는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내리심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뜨거운 불과 같이 임하기도 하고, 차가운 물과 같이 밀려 오기도 합니다. 폭풍처럼 휩쓸기도 하고, 미풍처럼 불기도 합니다. 이글이글 타는 적도의 햇볕처럼 임하기도 하고, 봄철에 창문을 통해 깃드는 ‘비밀 햇볕’처럼 임하기도 합니다. 어떤 모습으로 임하든, 어떤 형식으로 만나든, 하나님의 성령의 임재를 깨닫고 그 능력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영적인 눈을 떠서 우리가 그동안 알았던 세상이 얼마나 축소된 것이었는지를 깨달아야 하며, 그동안 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나라를 보아야 합니다. 그 신비롭고 영광스러운 나라 안에 자신이 서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는 내 사랑하는 딸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음성이 들려져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들려주신 음성이 아닙니다. 물론, 그분은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이 하나님께 특별한 분이셨습니다. 그분의 소명은 우리의 소명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큰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이 거룩한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주 쉽게 그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사랑 받을 만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아!” 그것은 우리의 생각일 뿐이고,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그분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이 음성을 들려 주시기 원하십니다.

헨리 나우엔(Henri Nouwen) 신부는 <탕자의 귀향>(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이라는 책에서 우리 각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내가 하나님을 발견하길 원하는 만큼(그 이상이겠지만 적어도 그만큼은) 주님도 나를 찾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은 집에서 팔짱을 끼고 앉은 채, 자식이 돌아와서 탈선 행위를 사죄하고, 용서를 청하며, 앞으로 잘 살겠다고 약속해 주기를 기다리는 가부장적인 아버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집 밖으로 찾아다닙니다. 위엄 따위는 내팽개치고 달려 나갑니다.

그러면서 나우웬 신부는 독자들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주님이 반드시 찾아야 할 만큼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하십니까?” 같은 질문을 어거스틴의 표현대로 하면 이렇게 됩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사랑할 사람이 당신 한 사람 밖에 없는 듯이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하나님께 그처럼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고 사랑하신다고 믿습니까? 아마도, 이렇게 반문하실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아니, 내까짓 게 뭐라고, 내가 한 일이 뭐가 있다고,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생각하신다는 말입니까?” 또 어떤 분은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전체로 사랑하시는 줄은 알지만, 어찌 나를 개별적으로 관심하시고 사랑하신다는 말입니까? 한 분 하나님이 어떻게 그 많은 인간들을 하나 하나 사랑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또 이렇게 생각하실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아, 나는 틀렸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죽고 나서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나를 못 마땅하게 생각하고 계실 것이고, 아마 화가 나 계실 것입니다.”

5.

다 좋은 말씀입니다. 어찌 보면, 아주 겸손하게 들립니다. 하지만 여러분, 실상은 정반대입니다. 이같은 생각과 태도를 하나님께서 가장 가슴 아파하십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 하나 하나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싶어하십니다.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겨 너를 사랑한다”(사 43:4).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되, 내가 그분에게 등지고 죄악 속에서 뒹굴 때조차 사랑하시며, 세상 구석 구석을 뒤져서라도 나를 찾아내고자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되, 내가 사랑받을 만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진실이 이렇게 분명한데, 왜 우리는 이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할까요? 우리가 그런 사랑을 경험해 본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라면서 조건적인 사랑만을 경험했습니다.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잘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친구의 사랑이든, 연인 사이의 사랑이든, 모두 조건적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사랑은 그렇지 않아야 하는데, 우리는 그렇게 사랑할 능력을 잃어 버렸습니다. 다른 모든 것들은 진화하고 발전하는데, 사랑의 능력만큼은 퇴화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릴 적부터 ‘잘 하면 사랑 받고 잘 못하면 미움 받는 법’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사랑이란 당연히 그런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기준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봅니다. 정직한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정도로 자신이 잘 했다 싶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내 자격과 조건이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시다면, 죄송합니다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대부분, 하나님의 기준에 자신은 불합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사랑은 고사하고,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라고 말하고 싶어집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아직 죄인으로 사는 동안에도 나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내가 그분에게 등지고 사는 동안에도 나를 찾고 계셨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나 자신을 보아도 좋아 보이는 구석이 없는데, 그런 나를 향해 “너는 내 사랑하는 딸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말하실 리가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체험하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사실, 사랑은 이해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체험하는 대상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해 보아야, 그 사랑이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경로로든,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때, 그 사랑이 처음부터 나를 비추고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 사랑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 사랑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임을 깨닫습니다. 그 사랑은 바로 나 한 사람을 위한 것임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사랑을 경험하는 순간에, 마치 어두운 방에서 전등불이 밝혀지는 것처럼, 한 순간에 모든 것이 너무도 자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리고 마침내 깨닫습니다. 바로 그것이 그동안 자신이 몸부림치며 추구해 왔던 것이라는 사실을!

이 두 가지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임재에 눈을 뜨고 그분의 능력에 사로잡히는 것, 그리고 “너는 내 사랑하는 딸이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음성을 듣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것이 이 험한 세상을 살아 나가는 데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돌아보아도 만족할 수 없는 내가 참되게 변화되기 위해서는 이 능력에 사로잡히고 이 사랑에 취하는 것 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사랑 받을 자격이 없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비로소 사랑받을만한 사람으로 변모해 가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야 우리는 비로소 ‘사랑한다’ 말할 수 있습니다.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송구영신 예배 후에 저는 원하는 교우들 한 분 한 분의 이마에 기름을 발라 드리면서 기도했습니다. 그 때, 많은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이 기도의 자리로 나아왔습니다. 그들의 이마에 기름을 발라 주면서 저는 그들의 귀에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Remember that God’s Spirit is within you. Remember that God loves you. Never forget this. God loves you. You are in His plan. You are in His love.” (기억해라. 하나님의 성령이 네 안에 있다. 기억해라.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신다. 결코 그것을 잊지 말아라.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신다. 너는 그분의 계획 안에 있다. 너는 그분의 사랑 안에 있다.) 그들의 귀에 이렇게 속삭이면서 저는 그들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기를 기도했습니다. 저는, 제가 그들에게 속삭인 말이 하나님께서 그 젊은 영혼들에게 가장 하고 싶었던 말씀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믿습니다. 그 속삭임이 그들의 마음 속에 새겨져서 언젠가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다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자신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다시 발견하면 그것으로 “문제 끝!”입니다.

6.

그러면, 이 두 가지를 얻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읽은 본문에서 누가복음 저자는 다른 세 복음서 저자가 놓친, 매우 중요한 사실을 언급해 놓았습니다. 누가복음 저자가 우리에게 해 준 특별한 공헌이라 할 수 있습니다. 21절을 다시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백성이 모두 세례를 받았다. 예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는데, 하늘이 열렸다.” 다른 복음서 저자들과 달리, 누가복음 저자는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 기도하셨고, 그 기도의 응답으로서 성령의 덮어 씌움을 받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실 때에 처음 기도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분은 소년 시절에도, 청소년 시절에도, 그리고 청년 시절에도 ‘기도의 사람’으로 성장했을 것입니다. 그 깊은 기도, 그 오랜 기도가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 절정에 달한 것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기도가 쌓이고 쌓여 임계점(tipping point)에 이르렀다 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그 순간은 그분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더욱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시어 하늘을 여시고 성령을 부으셨고 그 심령에 지워지지 않을 음성을 들려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도입니다. 해답은 기도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한 번은 제자들에게 기도에 대해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마치, 아버지가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처럼, 하늘 아버지께서도 우리에게 ‘좋은 것 중에 좋은 것’ 즉 성령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해야 합니다. 눈 감고 하는 기도만 아니라, 예배로 드리는 기도, 찬양으로 드리는 기도, 봉사로 드리는 기도, 말씀 묵상으로 드리는 기도, 노동으로 드리는 기도, 매사를 기도로써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세례를 기도로써 행했듯이 모든 것을 기도로써 행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기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자신을 온전히 덮어 씌울 때까지,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때까지, 그분은 기도하고 또 기도하셨습니다. 일하기 전에 기도하셨고, 기도하면서 일하셨고, 일하고 나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그분은 언제나 성령의 충만한 임재 안에 거하셨고, 하나님의 사랑을 늘 맛보고 살았으며, 그 음성을 늘 듣고 살았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경지와 같은 경지에 이를 수야 없겠지만, 적어도 같은 방향을 보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2010년을 복된 한 해로 만드는 비결입니다. 경기 침체가 언제 끝날지를 묻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경기 침체는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내가 끝내야 합니다. 이 침체와 불황의 국면을 끝내는 길이 기도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통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 기도, 하나님의 성령의 임재에 깊이 들어가게 하는 기도,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하는 기도, 그 사랑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하는 기도, 그 깊은 기도에 이 긴 침체를 끝내는 길이 있습니다.

2010년, 더 깊은 기도로써 새로운 희망을 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기도하신 주님,
저희도 기도하게 하소서.
더 깊이,
더 오래,
기도하게 하소서.
기도로써
영의 눈이 밝아지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보게 하시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그 사랑에 감격하여
주신 소명 이루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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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20 로마서 오직 믿음으로! 롬1:16-17  이상호 목사  2011-08-03 2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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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18 빌립보서 일체의 비결 - 자족 빌4:10-13  이상호 목사  2011-08-03 3235
5617 시편 불안과 절망을 넘어 시42:1-5  이상호 목사  2011-08-03 2734
5616 이사야 여호와를 앙망함이 보배이다. 사33:1-6  이상호 목사  2011-08-03 2867
5615 시편 순례길에 오른 캐라반”(Caravan on Pilgrimage) 시133:1-3  김영봉 목사  2011-07-31 2575
5614 요한복음 영생에 이르는 열매”(The Crop for Eternal Life) 요4:3-9  김영봉 목사  2011-07-31 2729
5613 야고보서 두 개의 영적 전립선”(Two Spiritual Prostates) 약2:14-17  김영봉 목사  2011-07-31 2485
5612 마가복음 우리의 거울은 너무 작다”(Our Mirrors Are Too Small) 막8:27-30  김영봉 목사  2011-07-31 2297
5611 시편 시냇가에 심긴 나무”(A Tree Planted By the Streams of Water) 시1:1-6  김영봉 목사  2011-07-31 3232
5610 마가복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By All Means) 막9:42-48  김영봉 목사  2011-07-31 2880
5609 마가복음 우리에게 부족한 것”(One Thing We Lack) 막10:17-22  김영봉 목사  2011-07-31 2537
5608 시편 따뜻한 관심(Radical Hospitality) 시34:1-8  김영봉 목사  2011-07-31 2427
5607 시편 예배가 나를 만든다”(Worship Forms Me) 시24:1-10  김영봉 목사  2011-07-31 3662
5606 마가복음 진리는 때로 부담스럽다”(Truth Is Often Burdensome) 막12:38-44  김영봉 목사  2011-07-31 2628
5605 히브리서 새로운 살 길을 걷다”(We Are On the New and Living Way) 히10:19-25  김영봉 목사  2011-07-31 2425
5604 누가복음 인자 앞에 설 수 있도록”(To Stand Before the Son of Man) 눅21:29-36  김영봉 목사  2011-07-31 2506
5603 말라기 금을 연단하는 불같이”(Like a Refiner’s Fire) 말3:1-5  김영봉 목사  2011-07-31 2635
5602 누가복음 고민을 멈추면 썩는다”(Holy Agony) 눅3:7-18  김영봉 목사  2011-07-31 2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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