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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영적 음모”(Spiritual Conspiracy of Jesus)

요한복음 김영봉 목사............... 조회 수 2415 추천 수 0 2011.07.31 23:20:23
.........
성경본문 : 요2:13-22 
설교자 : 김영봉 목사 
참고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2010.1.24 (김 영봉 목사)

“예수님의 영적 음모”(Spiritual Conspiracy of Jesus)
--요한복음 John 2:13-22

1.

지난 주, 우리는 갈릴리 가나에 있었던 결혼 잔치 이야기를 읽고 물을 포도주로 만든 표징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나서, 최근에 큰 어려움을 당한 교우 한 분이 기도 부탁을 해 오셨습니다. 간절히 기도하고 났더니, 그분이 눈물을 훔치시면서 그러십니다. “그래도 괜찮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잔치는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그렇습니다. 그 교우님처럼, 여러분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영적 잔치를 발견하고 그 맛을 맛봄으로, 어떤 경우에도 우리의 잔치는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대목이 하나 더 있습니다. 예수께서 여섯 개의 물 항아리를 모두 포도주 항아리로 바꾸셨을 때, 신랑과 잔치를 맡은 사람은 뛸 듯이 기뻐했을 것입니다. 파장날 뻔 했던 잔치를 계속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율법을 글자 그대로 지키는 일에 목숨을 걸었던 유대인들은 잠시 난처해졌을 것입니다. 준비된 물이 모두 포도주로 변했으니 손을 씻는 정결례를 행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사실보다 정결례를 행할 물이 없다는 것이 더 큰 문제로 보였을 것입니다.

물론, 신랑은 급히 종들에게 시켜서 임시 물항아리를 마련했을 것이고, 손님들은 그 물로써 손을 씻고 잔치를 즐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잔치의 분위기는 크게 달라졌습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잔치집의 중심에는 율법을 준수하도록 마련된 물 항아리 여섯 동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물 항아리는 모두 포도주 항아리가 되었습니다. 율법을 준수하기 위해 마련된 임시 물통은 잔치집의 가장 자리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던져 놓으신 또 다른, 아주 은밀한 표징 즉 sign을 읽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율법 중심의 유대교 신앙에 대해 아주 은밀하지만 혁명적인 음모를 진행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가나의 잔치집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은 새로운 포도주 맛을 즐기고 있었지만, 볼 눈이 있는 사람들은 나사렛 청년 예수로 인해 시작된 그 은밀한 혁명의 기운을 감지했을 것입니다. 유대교 종교 체제를 수호하려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매우 불길하고 기분 나쁜 징조였고, 율법주의 아래에서 신음하며 새로운 영성의 출현을 기대하던 사람들에게는 가슴 설레게 하는 은밀한 혁명이었습니다.

2.

오늘 우리는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으킨 소동에 대해 읽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께서 시작하셨던 영적 음모의 또 다른 차원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을 함께 생각하지 않으면 그 은밀한 영적 음모를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13절에보니, 때는 유대인들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이었습니다. 우리의 기념일로 빗댄다면 광복절 혹은 미국의 the Fourth of July와 맞먹는 유월절 축제에는 세계 각지로부터 순례객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성전 뜰에는 제물로 바칠 짐승을 파는 상인들과 돈을 바꾸어 주는 환전상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유월절 특수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성전 제사에 쓸 짐승은 필히 성전에서 구입해야 했습니다. 집에서 기르던 짐승을 가지고 오면 제사장들이 흠을 잡아서 퇴짜를 놓았기 때문입니다. 로마 제국의 여러 도시에 살다가 온 순례객들은 성전에서 헌금을 드리기 위해 환전상에게 돈을 바꾸어야 했습니다. 로마 화폐에는 황제의 초상이나 신상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헌금으로 드릴 수 없다고, 제사장들이 규정해 두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부산하게 사고 파는 광경을 지켜 보고 계시다가 일대 소란을 일으키십니다. 예수님의 행동을 ‘소란’이라고 표현해서 죄송합니다만, 로마 군인들이나 유대인 지도자들이 볼 때 그것은 말 그대로 ‘소란’이었습니다. 그분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성전 뜰에 매어 있던 양들과 소들을 쫓아 내시고, 장사하는 사람들을 위협하여 흩으셨고, 돈 바꾸는 사람들이 사용하던 탁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에게는 조금 유하게 대하셨는데, 그들은 환전상이나 우양을 파는 상인들에 비해 영세한 상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말로 타일렀습니다. “이것을 걷어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아라”(16절).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왜 이같은 소동을 일으키셨을까?”를 물어야 합니다. 이 소동을 ‘개혁자적 의도’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부패한 성전 체제를 개혁하려는 행동이었다는 것입니다. 실로, 당시의 성전은 썩을 대로 썩어 있었습니다. 성전 뜰에서 장사하는 사람들과 환전상들은 성전을 지배하는 제사장들과 뒷거래를 하여 백성들을 속이고 부정한 이득을 취했습니다. 이것은 마땅히 개혁되어야 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도 그 부정과 비리에 환멸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만일 그것이 의도였다면, 예수님은 혈기를 통제하지 못하고 좌충우돌 하면서 일을 그르친 꼴이 되고 맙니다. 개혁이 그분의 의도였다면, 그분은 달리 행동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소동을 통해 성전이 장차 어찌될 것인지를 몸으로 예고하신 것입니다. 성전 뜰에서 짐승을 파는 사람들을 모두 쫓아내면 성전 제사는 즉각 중단되고 맙니다. 성전에서 로마 화폐를 성전용 쿠폰으로 바꾸어 주는 사람들이 없어지면, 성전의 헌금궤는 텅 비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성전이 그 때까지 행했던 가장 중요한 기능, 즉 제사를 드리는 기능이 중지됩니다. 성전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바로 그것을, 예수께서 의도하신 것입니다. 지금 당장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장차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그렇게 될 것임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전하려는 은밀한 메시지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성전 제사는 이제 무효입니다! 성전은 이제 더 이상 효력이 없습니다! 이곳에서 제사 드려 보아야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순례객들이여, 여러분은 헛수고를 했습니다. 여기까지 올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 따위 짐승 제사를 드려 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성전은 이제 끝났습니다. 이제 곧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폐허가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 중에도 볼 눈이 있고 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몸짓으로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알아챘습니다만, 도대체 그 말을 하는 예수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이 이런 일을 하다니, 무슨 표징을 우리에게 보여 주겠소?”(18절) 그러자 예수께서 이렇게 답하십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19절). 이 말을 듣고 유대인들은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반문합니다. “이 성전을 짓는 데에 마흔 여섯 해나 걸렸는데, 이것을 사흘 만에 세우겠다구요?”(20절)

3.

아마도 이 지점에서 유대인들은 더 이상 대화를 지속할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도대체 앞뒤가 닿아야 말을 계속할 것 아닙니까? 분명히 제 정신인 것 같은데, 말하는 것은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으니, 그런 사람과 어떻게 말씨름을 계속하겠습니까? 그들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그 자리를 떠나갔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더 이상의 소동을 벌이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고, 그러자 쫓겨 갔던 상인들과 환전상들이 슬금슬금 제 자리로 돌아와 다시 장사판을 폈을 것입니다.

다행히, 이 사건과 대화를 제자들이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그 자리에서는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이 사건과 대화를 기억해 낸 것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의 일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던 예수께서 사흘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시자, 제자들은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 냈습니다. 그제서야 그들은 깨달았습니다. “아, 예수께서 사흘 만에 세우겠다던 그 성전은 바로 당신 자신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구나! 이제 성전은 무효가 되었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우리에게 성전이 되셨구나!”

가나의 혼인 잔치 자리에서 물 항아리를 포도주 항아리로 바꾸어 놓으심으로서 율법을 가장 자리로 치워내신 예수님이, 이번에는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을 몰아내심으로써 유대인들의 신앙의 중심에 서 있던 성전을 치워내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볼 때, 이것은 실로 엄청난 음모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세 가지를 하나님의 선민의 증거로 여겼습니다. 그 하나는 ‘율법’(law)이요, 다른 하나는 ‘약속의 땅’(promised land)이며, 또 하나는 ‘예루살렘 성전’(Jerusalem Temple)이었습니다. 약속의 땅은 로마에게 주권을 빼앗김으로 이미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 두 가지마져도 치워질 것이라는 불길한 징조를 보여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전 생애를 통해 이 은밀한 음모를 하나씩 하나씩 수행해 나가셨습니다. 들을 귀가 있고 볼 눈이 있던 유대인들은 이 음모를 알아차렸습니다만, 그렇다고 당장 잡아 넣을 정도로 딱히 드러난 것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을 안절부절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나사렛 예수를 통해 장차 유대교 전체를 뒤집어 엎을만한 모종의 음모가 진행되고 있음이 분명한데, 그분을 잡아 넣을만한 구실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 영적 음모는 갈릴리에서부터 드러나지 않게, 천천히 그러나 아주 확실하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초조해졌던 유대인들은 마침내 예수를 잡아 넣을 구실을 찾았고, 그것을 빌미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처형했습니다.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했을 때, 유대인 지도자들은 그 기분 나쁘고 불길한 음모를 중단시킨 것에 대해 축배를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셔서 그 영적 음모를 완성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종교, 새로운 영성이 시작된 것입니다.

누구든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면, 그분의 십자가의 공로로써 죄 사함을 받고, 그분의 성령의 능력으로 새로움을 얻는 새로운 종교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율법이 필요 없게 되었고, 성전에서 제사 드릴 필요도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율법을 통해 이루려던 것보다 더 큰 의를 이룰 수 있게 되었고, 성전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은혜보다 더 큰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영적 음모는 ‘율법 종교’(religion of law)를 밀어내고 ‘은혜의 종교’(religion of grace)가 그 자리에 들어오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4.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시작된 이 ‘은혜의 종교’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 종교를 끝내고 은혜의 종교를 시작하기 위해 당신의 생명을 바쳤습니다. 바울 사도는 은혜의 종교를 지켜내기 위해 율법 종교와 피나는 싸움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2천 년의 역사를 거쳐 오면서, 기독교 신앙이 얼마나 자주 율법 신앙으로 전락했는지요!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율법 종교로 타락한 기독교 신앙을 은혜의 종교로 되돌려 놓기 생명을 바쳤는지요!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그런 사람이요, 존 웨슬리(John Wesley)가 그런 사람이며,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가 또한 그런 사람입니다.

이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은혜의 종교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율법 종교에 노예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아니, 은혜의 종교를 믿는다고 자신하는 사람들도 자세히 분석해 보면 율법 종교의 요소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예가 ‘교회’ 혹은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부르는 데서 드러납니다.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부르는 것은 기독교인들 사이에 너무나 보편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문제시 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신학적으로 그리고 신앙적으로 매우 중대한 문제입니다.

성가대가 부르는 묵도송 중에 제가 거북하게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많은 성가대가 애송하는 찬송입니다. 다행히 우리 성가대는 그것을 부르지 않습니다. 그 묵도송은 이렇습니다. “주는 성전에 계시니 주 앞에서 잠잠해.” 사실, 이 가사는 구약성경 하박국서 2장 20절 말씀에 기초한 것입니다. <새번역>으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나 주가 거룩한 성전에 있다. 온 땅은 내 앞에서 잠잠하여라.” 그러니, 성경에 나와 있는 말씀을 빌어 찬송을 하는데, 뭐가 잘 못 되었느냐고 따질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문제가 없지 않습니다. 우선, 저는 이 묵도송의 가사가 이렇게 들립니다. “주는 성전에 계시니 주 앞에서 입닥쳐!” 뭔가 억압적이고 강압적인 분위기를 강하게 느낍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이 묵도송을 들으면서 회중은 무의식 중에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 이곳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고,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곳에 계시지. 그러니 마음의 옷매무새를 고치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지!’ 여기까지는 좋습니다만, 이 논리를 계속 연장시키면 어떻게 됩니까? 예배를 드리고 예배당 문을 나서면서 ‘이제 성전을 떠나간다. 이제 하나님과 멀어진다’는 생각을 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겠지만, 무의식으로는 그렇게 행동합니다. 여기에는 적어도 두 가지의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예배당을 우상으로 만드는 문제입니다. 예배당은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목적을 위해 성별되었다는 점에서 다른 건물과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당 안에서 성스러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정갈하고 아름답게 유지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맥클린 캠퍼스와 예배실을 사랑합니다. 주차장에 들어서는 순간, 혹은 예배실에 들어서는 순간, 이 세상과는 다른 곳에 와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합니다. 자리에 앉는 순간,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배실을 예배실답게 마련하고 유지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이 일을 위해 애쓰시는 모든 봉사자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이것이 지나치면, 예배당 건물은 ‘성전’으로, 예배당에 있는 물건들은 ‘성물’로 신성화시키는 잘못에 빠지기 쉽습니다. 예배당은 그 건물 자체의 어떤 속성 때문이 아니라, 거룩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기 때문에 거룩한 것입니다. 그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면 우상 숭배로 전락해 버립니다.

둘째, 하나님을 예배당 안에 가두게 되는 잘못을 범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당 안에 가둔다 해도 갇힐 분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짓고 봉헌할 때 솔로몬 왕이 드린 기도를 기억하십니까?

하나님, 하나님께서 땅 위에 계시기를,
우리가 어찌 바라겠습니까?
저 하늘,
저 하늘 위에 하늘이라도 주님을 모시기에 부족할 터인데,
제가 지은 이 성전이야 더 말하여 무엇하겠습니까? (왕상 8:27)

얼마나 옳은 말입니까?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당 안에 가두려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 아니라 우상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 스스로 우상을 만들어 예배당 안에 세워 놓고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온 세상에 충만하시며,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 옛날, 다윗이 하나님의 신비를 잠시 꿰뚫어 보고 이렇게 노래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주님의 영을 피해서 어디로 가며,
주님의 얼굴을 피해서 어디로 도망치겠습니까?
내가 하늘로 올라가더라도 주님께서는 거기 계시고,
스올에다 자리를 펴더라도 주님은 거기에도 계십니다.
내가 저 동녘 너머로 날아가거나,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거기에 머무를지라도,
거기에서도 주님의 손이 나를 인도하여 주시고,
주님의 오른손이 나를 힘있게 붙들어 주십니다.(시 139:7-10)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입니다. 한 장소에 가두어 둘 수도 없고, 감금되지도 않는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눈을 감고 “없다!”고 생각하니까 그렇지, 영의 눈을 뜨고 보면, 창조주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예배당에도 계시고, 우리의 집에도 계시며, 직장에도 계십니다. 아이티의 참혹한 지진 피해 현장에도 계시고, 백악관 회의실에도 계십니다. 참혹한 테러를 모의하고 있는 지하 밀실에도 하나님은 계시고, 바다 밑 잠수함 안에도 계십니다. 다윗의 고백대로, 지옥의 가장 밑바닦에도 그분은 계시며, 천국의 가장 높은 자리에도 그분은 계십니다.

5.

따라서 이 땅에 성전을 다시 세우고 싶어하는 것은 타락한 인간의 불순한 음모라 할 수 있습니다. 온 우주에 충만한 그분의 임재를 부정하고, 안방 깊은 곳까지 임하는 그분의 통치권을 부정하려는 음모입니다. 예배당을 성전이라 부르는 것은 우리의 영적 편의주의(spiritual opportunism)입니다. 하나님을 한 장소에 가두어 놓고 필요할 때마다 방문하여 불편한 양심을 다독거리려는 심산입니다. 이 땅에 성전을 다시 세우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그 생애와 가르침 그리고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을 모두 무효화시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면서까지 이루어 놓으신 영적 혁명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드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바쳐 허물어뜨린 성전을 다시 세우지 마십시다. 우리가 모이는 이 건물은 예배당이지 성전이 아닙니다. 이 기회에 저는 우리 교회 교우들에게 청합니다. 이 건물을 ‘예배당’이라고 부르십시다. ‘성전’이라고 부르지 마십시다. 앞으로 예배당을 건축할 일이 있을지 모릅니다만, 그 때라도 ‘성전 건축’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맙시다. ‘성전 건축’이라고 말하면 건축 헌금이 더 많이 모아질지는 모릅니다만, 그보다 더 큰 것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섬긴다는 우리가 그분이 무너뜨린 성전을 다시 세운다면, 우리는 그분을 주님으로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여쭙고 싶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살아계신 하나님께 자신을 활짝 열고 그분의 다스림을 받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아마도 이 질문에 대해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적지 않은 분들이 하나님을 완전히 떠나기를 원하지도 않지만, 완전히 붙들리고 싶어 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율법 종교가 딱입니다. 성전 종교가 아주 편합니다. 그 편의를 위해 예수께서 허무신 성전을 다시 세우고 싶어할지 모릅니다. 하나님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내가 필요할 때만 잠시 만나고 헤어지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종교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죄로 인해 불편한 양심을 때때로 위로해 줄 뿐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열어 놓으신 은혜의 종교에 진정한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열려 있되 완전히, 속속들이, 구석 구석 열려 있는 삶에 희망이 있습니다. 주일에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 순간, 언제나, 늘, 끊임없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은혜의 종교에 진정한 희망이 있습니다. 한 장소에서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은혜의 종교에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그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예수께서 완성하신 영적인 혁명이요, 영적인 음모였습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굳게 뿌리를 내립시다. 바울 사도가 사용했던 표현으로 하자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진을 치고 주둔하십시다. 결코 그분의 임재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십시다. 그렇게 되면, 우리 몸이 성전이 됩니다. 바울 사도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의 성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성령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모시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사들인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십시오. (고전 6:19-20)

그뿐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견고하게 머물러 있으면, 어디를 가나, 그곳이 성전이 됩니다. 성전은 하나님과 만나는 곳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늘 하나님과 동행하니, 어디를 가나 성전입니다. 예수께서는 한 곳에 세워져 있던 성전을 허물어 버리고 영적인 성전을 세우심으로 우리가 어디를 가나 성전 안에서 살도록 마련하셨습니다. 성령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항상 동행하면, 우리는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어떤 상황에 있든 하나님의 사랑의 다스림 아래에서 살 수 있습니다.

6.

오해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언제 어디서든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면 그곳이 성전이니, 교회로 모일 필요도 없고, 나 홀로 주님만 섬기면 된다고 비약하지 말기 바랍니다.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불러내어 하나의 ‘백성’을 이루게 하십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지체로 만들어 하나의 ‘몸’을 이루게 하십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벽돌로 만들어 하나의 ‘성전’을 이루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종교에서 모이는 것은 필수입니다. 교회로 모이고, 속회로 모이고, 기도회로 모이고, 봉사회로 모여야 합니다. 그 모임이 바로 성전이 됩니다. 그렇게 모이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면서 우리는 영적으로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완성시키신 이 영적 음모는 우리의 삶을 잔치로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시작하신 은혜의 종교는 삶을 잔치로, 축제로 만들자는 것입니다. 율법 종교는 우리의 삶을 장례식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주는 성전에 거하시니, 주 앞에서 입 닥치라!”고 호통을 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기뻐 뛰며 축하하고 찬송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즐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안에 있고, 하나님의 구원이 이미 우리에게 임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견고히 뿌리를 두고 살면, 언제나 그 은혜와 사랑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의 종교를 결코 놓지 마십시다. 이 은혜의 종교를 더욱 배우십시다. 이 은혜를 더욱 깊이 체험하십시다. 부활하신 주님 안에 깊이 뿌리를 내려 은혜의 실상을 경험하십시다. 그리하여 언제 어디서나 성전으로 살고, 가는 곳마다 성전으로 변모시키는 능력을 얻으십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잔치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로 인해 초상집 같았던 이 세상은 잔치집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주님,
저희 안에 더 깊이 오소서.
주님 모심으로
저희 존재가 성전이 되게 하시며,
주님 모심으로
저희가 가는 곳마다 성전되게 하소서.
저희 영혼이 무뎌질 때마다 깨우쳐 주시어
저희가 주님 안에 있음을 알게 하시고,
주님의 다스림에 저희를 맡기게 하소서.
그것이 진정한 혁명이며,
그것이 진정한 희망임을 믿습니다.
주님,
저희를 잡으시고 다스리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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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11 요한복음 인생은 성찬이다”(Life Is Sacramental) 요17:15-19  김영봉 목사  2011-07-31 2314
5610 마태복음 매일이 주일이다”(Everyday is the Lord’s Day) [1] 마28:16-20  김영봉 목사  2011-07-31 2971
5609 마가복음 다 거룩하다”(All Things Are Holy) 막7:14-23  김영봉 목사  2011-07-31 2320
5608 베드로전 모두 다 제사장이다”(We Are All Priests) 벧전2:1-5  김영봉 목사  2011-07-31 2460
5607 히브리서 믿음의 담력”(Assurance of Faith) 히4:14-16  김영봉 목사  2011-07-31 2624
5606 로마서 제단에 올려진 삶”(Life Laid on the Altar) 롬12:1-2  김영봉 목사  2011-07-31 2921
5605 로마서 죄 속에 벌이 있다”(Sins Are Sugar-coated) 롬6:15-18  김영봉 목사  2011-07-31 1941
5604 히브리서 제사가 아니다”(It Is Not a Sacrifice) 히10:19-23  김영봉 목사  2011-07-31 2061
» 요한복음 예수님의 영적 음모”(Spiritual Conspiracy of Jesus) 요2:13-22  김영봉 목사  2011-07-31 2415
5602 요한복음 잔치는 계속된다." (Feast Will Go On) 요2:1-11  김영봉 목사  2011-07-31 2468
5601 누가복음 침체를 끝내는 법”(How to End the Depression) 눅3:21-22  김영봉 목사  2011-07-31 2364
5600 마태복음 찾고 있습니까?”(Are You Seeking?) 마2:1-12  김영봉 목사  2011-07-31 2443
5599 요한복음 나같은 하나님, 나같은 인간”(God Like Me, Human Like Me) 요1:1-5  김영봉 목사  2011-07-31 2499
5598 누가복음 루저들에게 임하는 성탄의 은혜"(The Christmas Is For the Losers) 눅2:1-1  김영봉 목사  2011-07-31 2961
5597 누가복음 고민을 멈추면 썩는다”(Holy Agony) 눅3:7-18  김영봉 목사  2011-07-31 2382
5596 말라기 금을 연단하는 불같이”(Like a Refiner’s Fire) 말3:1-5  김영봉 목사  2011-07-31 2658
5595 누가복음 인자 앞에 설 수 있도록”(To Stand Before the Son of Man) 눅21:29-36  김영봉 목사  2011-07-31 2515
5594 히브리서 새로운 살 길을 걷다”(We Are On the New and Living Way) 히10:19-25  김영봉 목사  2011-07-31 2439
5593 마가복음 진리는 때로 부담스럽다”(Truth Is Often Burdensome) 막12:38-44  김영봉 목사  2011-07-31 2637
5592 시편 예배가 나를 만든다”(Worship Forms Me) 시24:1-10  김영봉 목사  2011-07-31 3672
5591 시편 따뜻한 관심(Radical Hospitality) 시34:1-8  김영봉 목사  2011-07-31 2436
5590 마가복음 우리에게 부족한 것”(One Thing We Lack) 막10:17-22  김영봉 목사  2011-07-31 2552
5589 마가복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By All Means) 막9:42-48  김영봉 목사  2011-07-31 2889
5588 시편 시냇가에 심긴 나무”(A Tree Planted By the Streams of Water) 시1:1-6  김영봉 목사  2011-07-31 3241
5587 마가복음 우리의 거울은 너무 작다”(Our Mirrors Are Too Small) 막8:27-30  김영봉 목사  2011-07-31 2308
5586 야고보서 두 개의 영적 전립선”(Two Spiritual Prostates) 약2:14-17  김영봉 목사  2011-07-31 2494
5585 요한복음 영생에 이르는 열매”(The Crop for Eternal Life) 요4:3-9  김영봉 목사  2011-07-31 2745
5584 시편 순례길에 오른 캐라반”(Caravan on Pilgrimage) 시133:1-3  김영봉 목사  2011-07-31 2582
5583 요한계시 3 가지 새로움 계21:1  강종수 목사  2011-07-31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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