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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단에 올려진 삶”(Life Laid on the Altar)

로마서 김영봉 목사............... 조회 수 2913 추천 수 0 2011.07.31 23:20:23
.........
성경본문 : 롬12:1-2 
설교자 : 김영봉 목사 
참고 : <p>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p> 
2010.2.28 (김 영봉 목사)

“제단에 올려진 삶”(Life Laid on the Altar)
--로마서 (Romans) 12:1-2

1.

얼마 전, 기독교 계통의 온라인 신문에서, 성경 말씀을 자기에게 필요한대로 왜곡하는 한국 교회의 사례에 대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 중 하나의 예로 거론된 것이 솔로몬이 드린 ‘일천번제’(one thousand burnt offerings)입니다. 열왕기상 3장에 보면, 솔로몬이 왕위에 오른 후에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번제’를 드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율법 규정에 의하면, ‘번제’(burnt offering)는 소나 양이나 염소 혹은 비둘기 같은 짐승을 잡아서 피를 쏟아내고 살과 뼈를 제단에서 태워 바치는 제사입니다. ‘번제’라는 말에서 ‘번’(燔)은 ‘사르다’, ‘태우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영어에서는 burnt offering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렸다는 말은 천 마리의 짐승을 번제로 드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일천번제’를 ‘일천 번 드린 제물’로 오해하는 사례가 한국 교회에서 자주 발견됩니다. ‘태우다’는 뜻의 한자 ‘번’(燔)을 ‘차례’를 뜻하는 ‘번’(番)자로 오해한 것입니다. 몰라서 오해한 것인지, 일부러 그렇게 왜곡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유야 어쨋든, 그렇게 해석한 다음에, ‘일천번제 헌금’이라는 것을 만들어 냈습니다.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리고 나서 하나님께로부터 축복을 받은 것처럼, 정해진 액수의 헌금을 일천 번 드리게 되면 기도 응답을 받을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경을 오역했다는 문제입니다. 둘째는 ‘헌금’을 ‘제물’로 해석하고 있다는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헌금은 예수님 이전에 유대인들이 드리던 제물과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드리고 그분의 은혜를 얻기 위해서 성전에서 제물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이 성전을 허물어라!”고 말씀하셨고, 십자가 위에서 영원하고도 완전한 제물을 드림으로써 제사를 폐지시키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십자가 위에서 드린 영원하고도 완전한 제물에 그 무엇도 더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헌금’은 제물이 아닙니다.

전에 한국에 살 때, 어느 시골 교회에 갔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예배당 입구에 여러 개의 헌금 봉투가 꽂혀 있었는데, 그 이름이 모두 구약의 제물의 이름을 딴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십일조 헌금’, ‘일천번제 헌금’, ‘속죄 헌금’, ‘속건 헌금’ 등의 글자가 봉투에 검은 글씨로 적혀 있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심한 경우이지만, 헌금을 제물로 생각하고 가르친다는 점에서 한국 교회들은 거의 예외가 없습니다. 헌금이 제물이 되면, 그것이 율법이 되고, 의무가 되며, 강요와 협박이 뒤따라 오게 됩니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는 말라버리고 그 자리에 율법주의의 공포가 자리를 잡게 됩니다.

2.

구약성경을 보면, 제물의 종류가 매우 다양합니다. 제물의 종류로는 번제(burnt offering), 화목제(peace offering), 속죄제(sin offering), 속건제(guilt offering)가 있고, 제물로 쓰이는 대상에는 소, 양, 염소, 비둘기 같은 짐승과 곡식과 포도주가 있었습니다. 제사 드리는 사람의 상황과 목적에 따라 제물에 대한 세밀한 규정이 있었고, 그 규정에 따라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일년 내내 제사를 드리려는 사람이 줄을 이었습니다.

제사와 제물에 대한 이 모든 규정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그 은혜에 보답하는 것으로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점차로 율법주의적으로 흐르게 되었습니다. 비유하자면, 부모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효도하던 사람이 점차 그 은혜에 둔감해져 나중에는 의무감으로 효도를 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 일어난 것입니다. 부모님의 은혜가 마음에 살아 있으면 최선을 다해 효도를 합니다만, 그 은혜가 메마르면 마음에 없는 효도를, 그것도 최소한으로 행하고 맙니다. 제사와 제물을 대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태도가 그러했습니다. 제물에는 그들의 마음이 담기지 않았고, 그래서 최소한의 형식을 갖추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제사와 제물에 대한 비판의 말씀이 구약성경에도 자주 나오는 이유가 그래서입니다.

제사와 제물에 대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신 첫 번째 이유는 ‘제사 따로, 생활 따로’의 현상 때문이었습니다. 제사 드릴 때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 같은데, 성전 바깥에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 답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데에는 정성을 쏟으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제사와 제물에만 관심이 있는 분이 아니라, 그들이 가정에서, 일터에서, 사회에서 살아가는 순간 순간을 관심하십니다. 살아가는 과정에서는 악하게 살고, 제사에만 정성을 다한다면, 그 제사는 허위요 위선입니다. 이 점에서 가장 신랄한 비판의 메시지를 전한 사람이 예언자 호세아입니다.

에브라임[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이 죄를 용서받으려고 제단을 만들면 만들수록
늘어난 제단에서 더욱더 죄가 늘어난다.
수만 가지 율법을 써 주었으나, 자기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처럼 여겼다.
희생제물을 좋아하여 짐승을 잡아서 제물로 바치지만
그들이 참으로 좋아하는 것은 먹는 고기일 따름이다.
그러니 나 주가 어찌 그들과 더불어 기뻐하겠느냐? (8:11-13)

이와 같은 비판의 말씀은 구약 성경의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세상에서 자기 욕심대로 부정하게 이익을 챙기고, 가끔 성전에 와서 제사를 통해 그 죄에 대한 용서를 빌고, 다시 세상에 나가 과거와 동일하게 행동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진실로 살아계시다면,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겠습니까? 만일 묵묵히 제사를 받고 그 제사의 대가로 용서를 허락하신다면, 그리고는 그들이 세상에서 범하는 죄악에 대해서는 제삿밥의 대가로 묵인해 준다면, 그것은 우상이지 진리의 하나님, 정의의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우상으로 취급한 것입니다. 그분이 성전 안에만 머물러 주시기를 바라고, 자신들이 바치는 제물을 받아 ‘잡수시고’, 자신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서는 ‘질끈’ 눈 감아 주기를 기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에서 본다면, 그것은 당신을 능멸하는 처사였습니다. 그랬기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예언자들을 통해, 그런 예배라면 집어 치우라고 명하셨습니다. 예언자 호세아를 통해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의 심정을 토로하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6:6)

3.

제사와 제물에 대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책망하신 두 번째 이유는 마음이 담기지 않은, 형식적인 제사와 제물 때문이었습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암소 한 마리를 번제로 드려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그에게는 암소 여러 마리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제일 마르고 병약한 암소를 제물로 가져갑니다. 어차피 죽거나 팔아도 제 값을 받지 못할 것이므로 제물로나 쓰겠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럴 경우, 그는 율법의 형식은 지켰습니다만, 하나님께 그 제물은 가증스러운 것이 됩니다. 이런 경우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은 말라기 예언자를 통해 다음과 같이 책망하셨습니다.

제사장들아, 너희가 바로 내 이름을 멸시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가 언제 주님의 이름을 멸시하였습니까?’ 하고 되묻는다.
너희는 내 제단에 더러운 빵을 바치고 있다.
그러면서도 너희는, ‘우리가 언제 제단을 더럽혔습니까?’ 하고 되묻는다.
너희는 나 주에게 아무렇게나 상을 차려 주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눈먼 짐승을 제물로 바치면서도 괜찮다는 거냐?
절뚝거리거나 병든 짐승을 제물로 바치면서도 괜찮다는 거냐?
그런 것들을 너희 총독에게 바쳐 보아라.
그가 너희를 반가워하겠느냐?
너희를 좋게 보겠느냐?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말 1:6-8)

제사와 제물에 마음이 담기지 않는 이유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무감각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느껴지지 않으니, 제물을 드리는 것이 아깝습니다. 안 드리자니 개운하지 않고, 드리자니 아깝습니다. 그러니 어쩝니까? 제사에 관한 율법의 형식만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는 율법을 범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그것이 율법주의의 함정입니다.

‘법’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습니다.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다”(Law is a minimum standard for public morality)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최소한의 기준을 명시한 것이 법이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빈틈을 만들어 자기 편리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가령,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을 형식적으로 지키기는 아주 쉽습니다. 다른 사람의 목숨을 해치지만 않으면 형식상 이 율법을 지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도 괜찮고, 목숨을 해치지 않을만큼 해꼬지 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실제로는 한 사람을 정신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죽게 만들어 놓고, 나는 그 사람의 목숨을 해치지 않았으니 율법에 흠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율법의 형식을 지키는 것입니다.

과거, 빌 클린턴 대통령이 선거 유세 중에 영국 유학 시절에 마리화나를 피웠다는 의혹을 받았습니다. 실제로 친구들과 마리화나를 피우는 사진도 공개되었습니다. 그 때, 빌 클린턴은 뛰어난 법학도 답게 이렇게 답했습니다. “나는 영국에 있을 때 한 두 번 마리화나에 대해 실험해 보았습니다. 나는 그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 연기를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그 이후로 다시는 시도하지 않았습니다”(When I was in England, I experimented with marijuana a time or two, and I didn't like it. I didn't inhale and never tried it again.). 여기서, 마리화나를 ‘실험해 보았다’거나, ‘마시지는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법학도의 뛰어난, 그러나 정직하지 못한 언어 선택입니다. 법적, 도덕적 비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입니다.

4.

제사와 제물에 대해 유대인들이 범했던 두 가지의 잘못에 대해 예수님도 공감하셨습니다. ‘제사 따로, 생활 따로’의 문제에 대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책망하십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그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했지만, 이것들도 마땅히 행해야 했다. 눈 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키는구나! (마 23:23)

여기에서 언급한 ‘박하와 회향과 근채’는 음식 재료 혹은 약재로 쓰이는 식물인데, 율법에 의하면 이것들은 십일조를 드리는 항목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율법의 자구만 따지자면,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을 과시하기 위해 식물까지도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자부심 가운데 하나로 이런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십일조를 드리지 않은 음식은 그 무엇도 입에 넣지 않겠다.” 그들은 율법에 대한 특별한 열심을 과시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십일조를 드리는 일에 열심을 다하는 사람들이 일상 생활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믿는 표시가 나지 않았습니다. 정의에 대해 관심이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자비롭게 대하지 않았습니다. 신의를 지키는 데 있어서도 그들의 율법적 열심이 전혀 차이를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의 관심사가 아닌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정의와 자비와 신의는 다만 몇 가지의 예일 뿐입니다. 정직, 순결, 겸손, 양보, 배려, 염치, 예의 등, 열거하자면 한이 없습니다. 이같은 덕에 대해 하나님은 제물만큼이나 관심을 두고 계십니다.

‘제사 따로, 생활 따로’의 현상을 책망하시면서 예수님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어리석음’이라고 비유하십니다. 즉, 물질의 십일조를 드리는 일이 하루살이라면, 일상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은 낙타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십일조를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했지만, 이것들도 마땅히 행해야 했다”는 말씀에서 ‘그것들’은 물질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을 가리키고, ‘이것들’은 정의와 자비와 신의를 실천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물질의 십일조도 드려야 하지만, 정의와 자비와 신의를 실천하는 일에도 마음을 다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5.

예수께서는 제사와 제물에 대해 유대인들이 범했던 잘못에 공감하고 비판하시는 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아예 제사와 제물을 끝내 버리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두고 “이 성전을 허물라!”고 말씀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영원하고도 완전한 제사를 드리심으로, 제사와 제물을 더 이상 드리지 않아도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가 돌아오기를 양 팔 벌려 기다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웅변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 안에서 우리는 제사와 제물 없이,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올리는 것은 더 이상 ‘제사’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신 구원과 사랑에 응답하는 ‘찬양’과 ‘경배’와 ‘예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은 두려워 떨며 ‘제발 살려 주십시오!’ 하고 비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이 너무도 크고 놀라워 그 사랑에 감복하여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하고 엎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어떻게든 보답하기 위해 드리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기가막힌 소식입니까? 자신의 죄성으로 인해 한 번이라도 진실하게 떨어 본 사람이라면, 십자가의 복음이 얼마나 놀라운 소식인지를 인정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거룩성 앞에 설 때, 우리는 자신의 절대적인 죄성을 깨닫고 꼼짝없이 죽게 되었음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벌어진 간격을 메우기에는 그 어떤 제물도 부족하다는 것을 자인하고 절망하게 됩니다. 그 때,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모든 죄에 대한 징벌을 받고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지만 그것 밖에는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주님께서 드리신 영원하고도 완전한 제사로써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 주시고, 주님의 보혈의 능력으로써 우리를 새롭게 지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렇게 맡기고 기도할 때, 십자가는 살아있는 능력이 되어 우리를 새롭게 해 주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 지어집니다. 새로운 존재로 지어진 우리는 더 이상 제물을 드리지 않습니다만, 이제 우리의 삶 전체가 제물이 됩니다. 우리의 삶 전체, 시간 전체, 물질 전체가 하나님에게 드려진 제물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여 자신의 전부를 바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 속에서 바울 사도가 하는 말이 그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롬 12:1)

비유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써 구속되는(redeemed) 순간, 그 사람의 인생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제단 위에 올려진 것입니다. 삶 전체가 제사요 제물로 드려지는 것입니다. 시간의 일부만 떼어 바치는 예배가 아닙니다. 물질의 일부만 떼어 바치는 제사가 아닙니다. 예배당에서 행하는 행동만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시간 모두, 우리의 물질 모두, 우리의 행동 모두가 제단에 올려진 제물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되도록 내어 놓은 인생이 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6.

여기까지 들으시고, 뭔가 잘 못 되어 가고 있는 느낌을 받는 분이 계실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드린 영원하고도 완전한 제사로 인해 이제는 더 이상 제사 드릴 이유가 없다는 말을 듣고 해방감을 느꼈는데,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받은 사람은 그의 모든 시간과 물질과 인생이 하나님의 제단에 올려진 제물이 된다는 말을 듣고 더 큰 부담을 느낄 수 있습니다. 복음이 우리를 율법의 족쇄로부터 해방시키는 힘인 줄 알았는데, 더 큰 짐을 지우는 것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내 시간 전체를 제물로 내어 드리는 은혜의 복음보다, 시간의 일부만 바치는 율법주의가 더 편해 보일지 모릅니다. 내 물질의 일부를 제물로 바치는 율법주의가 내 물질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로 여기는 은혜의 복음보다 더 이로와 보일지 모릅니다.

바로 거기에 율법주의의 함정이 있습니다. 율법주의는 우리에게 유익하고 이롭게 해 주겠다는 구실로 우리를 속입니다. 하나님을 적당히 만족시키면서도 자신의 욕심도 함께 만족시킬 방도가 있다고 속입니다. 하지만 율법주의에 빠져 버리면, 우리는 결국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 되고, 우리의 영성은 죽어 버립니다. 의무감으로 형식만 만족시키는 선에서 신앙 생활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피상적이고 형식적인 차원에 머물러 버립니다. 신앙 생활에 기쁨도, 활력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 우울한 마음으로 제사를 드립니다. 율법주의는 우리를 이롭게 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절단내는 일이 되어 버립니다.

또 하나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 내어 드리는 일은 우리의 노력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그렇게 하려면, 그것은 율법을 지키는 것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운 일이 될 것이며, 그 일에 성공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담당하지 못할 짐을 지우시는 분이 아닙니다. 삶 전체를 제물로 드리는 삶을 우리에게 제시하신 이유는 그것이 우리를 진실로 행복하게 하는 길이기 때문이며, 또한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오늘 읽은 말씀의 후반부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롬 12:2)

이 짧은 말씀 속에서 바울 사도는 우리의 전 생애를 제물로 드릴 수 있는 비결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을 잘 기억하시면, 복음이 주는 자유와 능력을 누릴 수 있습니다.

첫째,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을 직역하면, “이 시대의 풍조에 의해 사로잡히지 말라”(Do not be conformed to the pattern of this world)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수동태의 동사를 쓴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의 가치관, 세계관, 인생관, 성공관, 물질관 등을 적극적으로 따라가지 않아도, 방비를 하지 않으면 그것들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을 배격하라는 말이 아니라, 분별력을 가지고 해로운 것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라는 말입니다.

둘째,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도 역시 수동태 동사를 사용합니다. 내가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나를 변화시키도록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라’는 말씀은 이 세상의 가치관을 따르지 말고 성령께 자신을 내어 드리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면 변화를 받을 수 있습니다. 변화를 받으면 나의 모든 것을 제물로 드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의역성경 <메시지>에서 유진 피터슨은 로마서 12장 1절과 2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해 놓았습니다. 이 의역 안에 오늘 제가 드린 말씀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여러분이 이렇게 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도우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매일의 삶, 일상의 삶?자고 먹고 일하고 노는 모든 삶?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하시는 일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여러분이 그분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입니다. 문화에 너무 잘 순응하여 아무 생각 없이 동화되어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대신에, 여러분은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십시오. 그러면 속에서부터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분께서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것을 흔쾌히 인정하고, 조금도 머뭇거리지 말고 거기에 응하십시오. 여러분을 둘러싸고 있는 문화는 늘 여러분을 미숙한 수준으로 끌어 낮추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서 최선의 것을 이끌어 내시고 여러분 안에 멋진 성숙을 길러 주십니다.

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물로 드려지는 삶에 한 번 도전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그 삶에 잔치의 비밀이 있습니다.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만이 예배가 아니라, 내 집에서, 직장에서, 체육관에서, 골프장에서 혹은 유흥장에서 행하는 행동까지도 모두 예배가 될 때, 비로소 잔치의 흥을 제대로 맛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잔치의 삶에로 우리를 초청해 주셨고, 또한 그 잔치가 가능하도록 모든 것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다만 그분의 선물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의 제단에 올려 놓으면 됩니다. 그렇게 하여 먹고 마시는 것까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기 위해 노력할 때, 우리 삶에는 비로소 참된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제단에 올려져 그분의 뜻을 위해 바쳐지는 것이 진정한 자아 실현이며, 가장 복된 삶의 길입니다.

그러니 늘 생각하십시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제단 위에 올려진 제물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나 자신으로서 살아가는 삶은 이미 끝났다는 것을 매일 선언하고 또한 기억하십시다.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교회에서든 혹은 그 어디에서든, 하나님의 제단에 바쳐진 제물로 살아가십시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나의 모든 시간과 생명과 물질이 사용되는 것을 소망하며 그렇게 살아가십시다. 그렇게 하기 위해 매일 성령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내어 맡기십시다. 하나님께서 열어 주신 길이므로, 그분이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행복을 우리 자신보다 더 간절히 바라시는 하나님께서 열어 주신 길이므로 그 길을 걸을 때 우리가 진실로 행복할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영원하고도 완전한 제물이 되신 주님,
저희도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저희 삶을 주님의 제단에 올려 놓습니다.
저희의 생명과 시간과 재물을 모두
주님 제단에 올려 놓습니다.
주님,
쓰시옵소서.
주님의 뜻대로 다 쓰시옵소서.
저희를 인도하시어
매일 그렇게 살도록 인도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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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98 요나 요나의 기도 욘2:1-10  한태완 목사  2012-10-30 2918
16197 디모데전 예의범절의 힘(The Power of Manners) 딤전3:1-13  이정수 목사  2011-04-08 2918
16196 이사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사40:1-11  정용섭 목사  2010-05-17 2918
16195 역대하 끝이 좋은 사람 대하33:10-13  김필곤 목사  2010-02-14 2918
16194 이사야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삶 사41:1-4  이한규 목사  2013-09-21 2917
16193 요한복음 물이 포도주 됨과 같이 요2:1-11  류공석 목사  2013-06-22 2917
16192 마태복음 악마의 유혹 앞에서 마4:1-11  정용섭 목사  2010-03-13 2917
16191 에스겔 파수꾼의 사명을 감당하라 겔33:1-9, 17  한태완 목사  2007-11-11 2917
16190 요한복음 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처럼 요15:1-11  김동호 목사  2012-01-24 2916
16189 창세기 전화위복의 감사 창50:19-21  한태완 목사  2007-12-11 2916
16188 마태복음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5) 세리에서 사도로 마태 마9:9-13  김필곤 목사  2013-04-20 2915
16187 예레미야 하나님이 하나님 되는 때 렘31:1-6  정용섭 목사  2010-08-05 2915
16186 마태복음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마5:10-12  박신 목사  2012-09-18 2914
16185 고린도후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함이 있다 고후3:12-18  허태수 목사  2011-11-06 2914
16184 누가복음 예수의 사람 눅19:28∼40  김창인 목사  2010-10-29 2914
16183 사도행전 용기를 주는 사람들 행18:1- 8  우제돈 목사  2010-06-03 2914
16182 스가랴 큰 산을 평지로 만드는 믿음 슥4:7-10  이한규 목사  2010-04-03 2914
16181 누가복음 아름다운 열매를 맺자 file 눅3:8-9  한태완 목사  2009-05-04 2914
16180 열왕기하 병고침 받는 7단계 왕하5:8-14  이상호 목사  2013-07-18 2913
16179 마태복음 사랑과 용서 마6:14-15  한태완 목사  2012-10-04 2913
» 로마서 제단에 올려진 삶”(Life Laid on the Altar) 롬12:1-2  김영봉 목사  2011-07-31 2913
16177 고린도전 죽은 자의 부활과 오늘의 삶 고전15:12-19  정용섭 목사  2010-01-29 2913
16176 요한복음 부족한 중에 감사하는 믿음 요6:4-13  김필곤 목사  2010-01-16 2913
16175 시편 꿈같은 축복을 얻는 길 시126:1-6  이한규 목사  2012-07-14 2912
16174 빌레몬서 화평케 하는 자 몬1:8-16  박상훈 목사  2011-07-25 2912
16173 디모데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되게 딤전3:15  한태완 목사  2012-10-17 2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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