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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담력”(Assurance of Faith)

히브리서 김영봉 목사............... 조회 수 2624 추천 수 0 2011.07.31 23:20:23
.........
성경본문 : 히4:14-16 
설교자 : 김영봉 목사 
참고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2010.3.7 (김 영봉 목사)

“믿음의 담력”(Assurance of Faith)
--히브리서 4:14-16

1.

저는 지난 2월부터,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이 성전을 허물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뜻을 헤아리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율법주의의 포로가 된 성전 종교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끝장 날 것임을 예언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분은 3년 여 동안 활동을 하시면서 유대인들의 영성을 결박하고 있던 율법주의(legalism)와 싸우셨고, 그것을 대치할 은혜의 복음(the Gospel of Grace)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완전하고도 영원한 제사를 드리고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예수님을 사흘 만에 부활시키셨습니다. 이로써 율법주의를 끝내고 ‘은혜의 복음’을 완성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허물어지면, 제사도 끝나고 제물도 드릴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 일이 일어나면 사라져야 할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제사장들입니다. 오늘날의 목사들은 훈련과 심사를 통해 양성되지만,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은 혈통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 중에서도 레위 지파 남자들, 그리고 그 지파 중에서도 아론의 혈통을 이은 남자들만이 제사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아론의 자손들 가운데서 사독 가문의 남자들만이 대제사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후대로 오면서 대제사장의 자리는 정치 권력에 의해 결정되었고,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 황실에 의해 임명되었습니다.

제사장이 혈통을 따라 결정되다 보니, 그 수가 적지 않았습니다. 역사적인 기록을 보면, 예수님 당시에 적게 잡아도 일만 명 정도의 제사장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24개 조로 편성되어, 일 주일 씩 돌아가면서 성전에서 제사장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평소에는 자신의 생업에 종사하다가 일년에 두 주일을 성전에 와서 ‘부역’(public service)을 하면 되었습니다. 제사장들 가운데는 성전에서 전임(full-time)으로 일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 제사장들은 상당한 재산과 권력을 누리는 귀족이었습니다. 년중 무휴로 진행되는 성전 제사는 그들의 금고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성전 뜰에서 돈을 바꾸어 주거나 제물을 파는 상인들과 결탁하여 재산을 불렸습니다. 물론, 그들 가운데는 진실하고 정직하고 청렴하고 바른 제사장들도 있었지만, 대체로 부패하고 오염되어 있었습니다.

이같은 상황에서, 성전의 권력자들 앞에 서서 예수님은 “이 성전을 허물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성전에서 기득권을 누리고 있던 제사장 귀족들에게는 커다란 위협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성전이 허물어지면 평생 끊어지지 않을 줄 알았던 돈줄이 끊어져, 다른 제사장들처럼 땀 흘려 일해 먹고 살아야 할지 모릅니다. 그러니 그들의 눈에 예수님이 얼마나 가시처럼 보였겠습니까? 제사장 귀족들이 바리새인들과 협잡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가장 큰 동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2.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이 심판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예언하셨을 뿐 아니라, 그분 자신이 몸소 대제사장의 역할을 떠 맡아, 당신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 영원하고도 완전한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이런 까닭에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대한 대제사장’(4:14)이라고 부릅니다. 그분을 ‘위대하다’고 묘사한 이유는 다른 제사장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특성이 그분의 제사장직에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9장에서 일반 제사장들과 예수님의 ‘위대한 제사장직’을 대조하여 설명해 줍니다. 모든 제사장들은 혈통을 따라 결정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직접 임명하시고 세워주신 대제사장입니다. 다른 제사장은 인간의 손으로 지은 성전에 들어가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리지만,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성소에 들어가셔서 당신의 보혈로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다른 제사장은 제사를 끊임없이 반복해야 하지만, 예수께서는 단 한 번에 영원하고도 완전한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그리고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 지금도 대제사장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로써 결론을 맺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자기 몸을 제물로 바치셨고, 두 번째로는 죄와는 상관없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셔서 구원하실 것입니다. (히 9:28)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제사도 필요 없고, 제물도 필요 없으며, 따라서 제사장도 필요 없습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 안에서 성부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누가 개입할 이유가 없습니다. 디모데전서에 기록된 초대 교회의 한 신앙 고백문은 이 사실을 아주 정확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 뿐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
자기를 대속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딤전 2:5-6)

죄를 회개하기 위해서든, 은혜를 구하기 위해서든, 혹은 애정 깊은 사귐을 나누기 위해서든, 우리는 제사장의 중재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여 담대히 성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과거에 십자가 위에서 한 번 대제사장의 역할을 하고 만 것이 아니라,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 안에는 제사장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제사장의 역할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대제사장직에 모두 흡수되어 버렸습니다. 만일 누군가, 스스로 제사장을 자처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부정하는 셈이 됩니다. 만일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누군가가 끼어 들어 도와 주기를 기대한다면, 그 사람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부인하는 것이며 그분의 보혈의 능력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3.

사정이 이렇게도 분명한데, 지난 2천 년 기독교 역사를 살펴 보면, 이미 폐지된 제사장직을 회복시키려는 음모가 꾸준히 꿈틀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음모는 성직자들에 의해 모의되기도 했고, 평신도들에 의해 모의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같은 경향은 여전합니다. 가톨릭교회든, 개신교회든, 사정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이 대목에서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회의 차이를 언급하지 않고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이 설교를 들으시는 가톨릭 교우들께 우선 양해의 말씀을 드립니다.

가톨릭 교회는 주교(bishops)와 신부(priests)가 사도직(apostolic authority)을 계승했을 뿐 아니라, 구약의 제사장직까지 계승했다고 가르칩니다. 가톨릭 사전에 보면, “사제직은 신과 인간과의 중재의 임무를 가진다”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제’라는 말이나 ‘제사장’이라는 말이나 같은 뜻입니다. 영어에서는 구분 없이 priest라는 하나의 단어로 충분합니다. 개신교를 시작시킨 종교 개혁자들(reformers)은 이같은 신학과 제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무효화시키는 것이라고 보았고, 그래서 가톨릭 교회의 교권 체제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가톨릭 교회에 있는 것 중에서 개신교회에 없는 것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고해 성사’(sacrament of penance)입니다. 자신의 죄를 신부 앞에서 고하고 사죄를 받는 의식입니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예수님에게 주어졌고, 그 권한은 다시 열 두 사도에게 인계되었으며, 그것이 마침내 주교와 신부에게 인계되었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신부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신부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용서를 확인해 줍니다. 신부는 하나님과 신자 사이에 중재자로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개신교회는 이것이 성경을 오역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죄하는 권한은 믿음의 공동체 즉 교회에게 준 것이지, 특정의 사람들에게 준 것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또한 인간이 사죄를 선언하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권위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주어진 사죄의 은혜를 확인시켜 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개신교회에서 고해 성사를 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개신교인들은 언제 어디서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누구에겐가 죄를 고백하고 싶다면, 믿음의 식구들 가운데 영적으로 신뢰가 가는 사람에게 하면 됩니다. 죄의 고백을 들은 그 형제나 자매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고백한 형제나 자매에게 확인시켜 주고 함께 기도하면 됩니다.

이렇듯, 가톨릭 교회에서는 신부를 제사장으로 가르치지만, 개신교회에서는 목사를 제사장으로 보지 않습니다. 목사는 제사장이 아닙니다. 신약성서를 보면, 초대 교회에서 누군가에게 제사장이라는 타이틀을 준 예가 없습니다. 그 전통을 지키는 것이 옳다고 믿습니다. 목사는 하나님의 부름을 따라 불려 나온 ‘백성’의 일원입니다. 다만, 책임이 다르고, 기능이 다를 뿐입니다.

4.

이 대목에서, 자신이 개신교인이라는 사실에 대해 은근히 자부심이 느껴지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별로 자랑스러워할 것이 없습니다. 개신교 목회자와 교인들 가운데는 종교 개혁자들의 그 고귀한 유산을 망각한 채, 다시금 제사장직을 복구시키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니, 이미 목회자를 제사장으로 생각하는 사고 방식은 개신교 안에 굳어질대로 굳어져 있습니다.

여기에는 목회자들의 책임이 큽니다. 목회자들이 그렇게 가르치고 또한 그렇게 행동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목회자의 권위를 강화시키는 데 도움이 됩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구약에 나오는 제사장직을 그대로 목회자에게 적용하면서,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되었던 복종과 희생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어떤 목회자는, 장로는 레위인에 속하고, 부목사와 전도사는 제사장에 속하며, 담임목사는 대제사장에 해당한다고 가르친다고 합니다. 그분은, 구약의 대제사장은 무엇이든 최상의 물건만을 사용했기 때문에 담임목사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고 합니다.

이것은 상당히 심한 경우이기는 하지만, 한국 개신교회는 목회자에 대한 대접, 충성, 복종, 희생에 있어서 그 어느 나라에서도 보기 힘들 만큼 탁월합니다. 교회 안에서 목회자는 언제나 특권층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됩니다. 참된 교회라면, 목회자와 모든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로서 서로 섬겨야 합니다. 성숙한 성도라면, 목사를 대하는 태도나 다른 교인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지 않아야 합니다. 목회자들도 특별 대우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제사장으로서 군림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종으로서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지역에서 통역 일을 하는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공항이나 관공서 같은 곳에서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 직원이 그분에게 전화를 하여 통역을 의뢰한다고 합니다. 그분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가끔 목사님들을 위해 통역하는 일이 생기는데,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적지 않은 분들이 대화 중간에 그러신다고 합니다. “아, 나 목산데… 나, 목사란 말이야…” 그러면서 그분이 제게 묻습니다. “그래, 목사라서 어쩌라는 겁니까?” 자기와는 아무 상관 없는, 전혀 일면식도 없는 사람과 전화로 통화하면서, 목사니까 특별 대우를 해 달라고 요청하는 탓에 때로 할 말을 잃는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듣는데, 제 얼굴이 얼마나 화끈 거렸던지요! 목회자들이 스스로를 제사장으로 여기고 특별 대우 받는 것에 너무도 익숙한 나머지, 누구에게나 그런 대접을 하도록 기대하고 강요할 정도가 되었다면,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지난 주간에 만난 어느 원로 목사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목사 앞에서 굽신굽신 하는데, 돌아서서는 뭐라고 하는지 알아? 그것도 모르고, 자기 앞에서 굽신거린다고 좋아하지 말아야지!” 그렇습니다. 강요된 존경, 강요된 복종, 강요된 헌신은 아무 쓸 모 없는 것입니다. 아니, 역겨운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갱신을 위해 가장 필요한 일은 목회자들이 제사장으로서 누리던 특권을 내려 놓은 것이라고 믿습니다. 누구에게 떠밀려서 혹은 억지로 강요되어 내려 놓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 알고 기꺼이 내려 놓아야 합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에서 토로한 고백, 즉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고전 9:19)라는 고백이 모든 목회자들의 마음에서 울려 나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저는 두렵고 떨립니다. 저도 이 점에서 부족함이 많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는 다만 그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 이 점에서 더욱 노력할 것을 약속드리는 바입니다.

5.

개신교회 안에서 목회자를 제사장으로 여기는 사고방식이 공고하게 자리를 잡은 데에는 평신도들의 책임도 적지 않습니다. 평신도들은 목회자들을 제사장으로 인정해 주는 대신, 목회의 모든 책임을 떠넘깁니다. 스스로 영적 성장을 위해 노력하기를 게을리하고, 모든 것을 목사가 대신 해 주기를 기대합니다. 스스로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생수를 길어 올리기를 귀찮게 여깁니다. 목회자가 먹기 좋게 요리하여 떠 먹여 주기를 기대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기보다는 목회자가 대신 기도해 주기를 바랍니다. 먹고 살도록 해 주었으니, 자기들 대신에 자신의 모든 영적 요구를 채워 달라고 요구하고 기대합니다. 그렇게 의존적으로 신앙 생활을 하는 가운데 평신도들의 영성은 파리하게 여위어 갑니다.

평신도들이 이렇게 의존적인 신앙에 머물게 되면, 목회자들은 아주 편해집니다. 할 일이 많아져서 육신은 피곤하지만, 마음은 편합니다. 강단에서 무슨 말을 하든, 성도들이 “아멘!”으로 응답하고 받아들여 주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에 익숙해지면, 목회자들은 평신도가 성경에 대해 많이 아는 것을 은근히 싫어합니다. 신앙 생활에 대해 무슨 질문이라도 할라 치면, 큰 시험이나 든 것처럼 정죄하고 억압합니다. 지난 반 세기 동안 한국 개신교회는 평신도들을 억압해 왔고, 평신도들의 침묵과 묵인 속에서 교회는 타락해 왔습니다. 이같은 ‘침묵의 카르텔’로 인해 오늘날 한국 교회 강단에서 복음의 진리가 얼마나 왜곡되고 있는지, 그 실상을 제대로 안다면, 탄식으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목회자와 평신도의 이같은 결탁이 우리 모두의 영성에 얼마나 치명적인 해를 입히는지,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그 부정한 결탁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얼마나 해를 입히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목회자 한 사람이 목회의 모든 짐을 독점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해로운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목회자와 평신도가 영적으로 함께 자라가야 합니다. 목회자와 평신도가 성령께서 주신 은사에 따라 함께 목회와 선교 사역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교회는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목회자의 목표는 모든 성도들이 ‘목사가 필요 없는 성도’로 자라도록 돕는 데 두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성도들이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하여 목사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 최종 목표입니다. 이 말을 듣고는 “진짜 그런 일이 일어나면 목사는 무엇하려고 그러느냐?”고 질문하실 분이 계실 것입니다. 교인들 모두가 목사가 필요 없을 정도로 성숙한 교인들이 되면, 목회는 더욱 많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목사는 기존 신자들의 끝도 없는 요구에서 해방되어 믿지 않는 사람들을 찾아 전도하고 선교할 시간과 에너지를 더 많이 얻게 될 것입니다. 영적으로 성장하지는 못한 상태에서 모두가 목사의 역할을 하려고 나서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 교회는 심한 어려움을 겪을 것입니다.

요즈음 저는 예배가 끝난 후, 기도를 필요로 하는 분들을 중보기도실에서 만나고 있습니다. 제가 심방을 자주 하여 교우들을 만나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조금이라도 교우들에게 가까이 가기 위해 이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이제 한 달 정도 했는데, 잘 했다 싶습니다. 교우들의 사정을 더 많이, 더 깊이 알게 되었고, 기도로써 교우들의 어려움에 동참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저는 믿음의 한 형제로서, 한 믿음의 공동체를 책임진 사람으로서, 그리고 기도하는 사람으로서, 기도의 도움이 필요한 분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제가 어느 교우의 머리에 안수하고 기도하는 것은 제사장으로서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형제로서 하는 것입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을 믿고 함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누구도 끼어들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여러분에게는 하나님께 나아가 은혜를 구할만한 믿음의 담력이 부족할지도 모릅니다. “나같은 것이 하나님 앞에서 감히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겸손은 좋은 것이지만, 자기 비하는 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면 그렇게 자기를 비하할 이유가 있다 할 수 있습니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써 구속된 우리는 결코 그렇게 자기를 낮추어 보면 안 됩니다. 그분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는 사람은 누구나 성부 하나님을 향해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오늘 히브리서 저자가 한 말씀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비를 받고 은혜를 입어서,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도록 합시다. (4:1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에 일어나야 할 모든 일을 이미 다 이루어 주셨고,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원한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또한 우리의 영적 여정에서 믿음의 형제 자매들의 도움은 매우 중요합니다. 감독이든, 목사든, 그 어떤 직분을 가진 사람이든, 그 사람은 믿음의 여정을 함께 가는 동무입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셨다면, 믿음의 담력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힘 입어 담대하게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두 팔 벌려 맞아주시고,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간절하게 드리는 기도는 그 누구의 기도보다 더 강력한 능력이 됩니다. 믿음의 식구들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의지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자신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십자가의 은혜를 힘 입어 직접 나아가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시고, 주저하지 마시고, 머뭇거리지 마시고, 두리번 거리지 마시고, 겸손히 그러나 담대히,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가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가 우리를 위해 준비되어 있습니다.

위대한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시여,
물과 피를 다 쏟으시어
저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저희를 도우시어
믿음의 담력을 가지게 하소서.
오직 한 분,
주님만을 중보자로 삼고
겸손히
그러나 담대히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게 하소서.
주님께서 그러셨듯,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감히 “아빠”라고 부르며
그 사랑 안에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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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89 마가복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By All Means) 막9:42-48  김영봉 목사  2011-07-31 2889
5588 시편 시냇가에 심긴 나무”(A Tree Planted By the Streams of Water) 시1:1-6  김영봉 목사  2011-07-31 3241
5587 마가복음 우리의 거울은 너무 작다”(Our Mirrors Are Too Small) 막8:27-30  김영봉 목사  2011-07-31 2308
5586 야고보서 두 개의 영적 전립선”(Two Spiritual Prostates) 약2:14-17  김영봉 목사  2011-07-31 2494
5585 요한복음 영생에 이르는 열매”(The Crop for Eternal Life) 요4:3-9  김영봉 목사  2011-07-31 2745
5584 시편 순례길에 오른 캐라반”(Caravan on Pilgrimage) 시133:1-3  김영봉 목사  2011-07-31 2582
5583 요한계시 3 가지 새로움 계21:1  강종수 목사  2011-07-31 2111
5582 오바댜 이스라엘의 회복된 모습 옵1:19-21  박상훈 목사  2011-07-30 2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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