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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거룩하다”(All Things Are Holy)

마가복음 김영봉 목사............... 조회 수 2320 추천 수 0 2011.07.31 23: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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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7:14-23 
설교자 : 김영봉 목사 
참고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2010.3.28 (김 영봉 목사)

“다 거룩하다”(All Things Are Holy)
-- 마가복음 7:14-23


1.

달라스에서 유학 생활을 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 때 저는 작은 한인 교회에서 전도사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교인들의 수는 적었지만,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 전문인으로 일하는 분들이 다니는 교회였습니다. 그분들 중에는 아마추어 신학도들도 몇 분이 계셨습니다.

그 교회에서 겪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부끄러운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에 저는 주로 중고등부 학생들을 맡고 있었는데, 어느 날, 담임목사님이 당신 대신에 성인 성경 공부 모임을 하루만 인도하라고 부탁을 하셨습니다. 그 날 제게 맡겨진 본문이 레위기 11장이었습니다. 이 장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부정한 동물과 먹어도 무방한 정결한 짐승의 목록이 들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목록에 들어 있는 부정한 음식들을 철저히 금했습니다. 그런데 금지된 음식 안에는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은 거리낌 없이 먹는 것들이 여러 가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돼지, 게, 랍스터, 오징어, 낙지, 쭈구미, 장어 같은 것들이 그 예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먹지 말라고 한 음식인데,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은 개의치 않고 먹습니다. ‘안식교’라고 알려진,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Seventh-Day Adventist Church)에서는 레위기 11장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킵니다만, 정통 기독교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모태 신앙인인 저는 어릴적부터 돼지 고기를 먹어왔고, 방언 기도를 하시는 제 어머니는 자식들이 고향을 찾을 때마다 고향 바다에서 잡은 게와 굴과 쭈꾸미를 사다가 요리를 해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레위기 11장을 읽을 때면, “어,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있네? 이거 어쩌지?”라고 자문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시에 저는 성경공부를 인도하기 위해 준비하는 동안에 이 질문에 봉착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제게는 그 질문에 답할만한 신학적 안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서관에 가서 책을 뒤져 보았습니다만, 이 질문을 속시원하게 해결해 주는 자료를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공부 시간은 다가오는데, 그 본문을 두고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해결하지 못했으니, 제 마음은 매우 초조해졌습니다. 결국, 시간이 되어, 저는 아마추어 신학도가 포함되어 있는 성경공부반에 들어갔고, 그 질문이 나오지 않고 한 시간이 흘러가기만을 간절히 바랬습니다.

저의 기대는 보기 좋게 깨졌습니다. 해박한 신학 지식으로 신학도인 저를 자주 주눅들게 했던 어느 교우께서 거의 끝나갈 즈음에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제가 두려워 했던 바로 그 질문이었습니다. “전도사님, 이 모든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데, 왜 우리는 이 말씀을 어기고 있는 겁니까? 돼지 고기를 계속 먹어도 되는 겁니까? 아니면, 안식교인들처럼 이제부터 돼지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합니까?”
저는 횡설수설하고 얼버무렸습니다. 등에서는 식은 땀이 흘렀습니다. 그 날, 집에 돌아와서 저 자신에 대해 얼마나 비참함을 느꼈는지요! 하지만 그것이 제게 큰 자극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교우께 마음으로나마 감사하고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하기 전, “너희의 하나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레위기 19:2)고 말씀하시면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 율법 안에는 소위 ‘성결법’이라는 것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을 구분하고, 부정해졌을 때 그 부정을 씻는 방법에 대해 지침을 주셨습니다. 그 내용이 출애굽기에도 있고, 레위기에도 있으며, 신명기에도 있습니다. 이 성결법은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숭배와 타락으로 오염되어 있던 땅 가나안에 들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별됨을 지키도록 하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거룩’에 해당하는 히브리말 ‘카도쉬’는 원래 ‘구별됨’을 뜻합니다.

예컨대, 아이들이 어릴 적에 부모들은 ‘나쁜 것’과 ‘좋은 것’을 구분하여 가르칩니다. 거짓말 하는 것은 나쁜 것이다, 싸우는 것은 나쁜 것이다, 단 것은 나쁜 것이다, 저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이다, 저 나라는 나쁜 나라다 등등. 어린 아이가 분별력과 판단력이 형성되기 전에 이런 것들에게 노출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아이는 나중에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100% 나쁜 사람도, 100% 나쁜 것도, 100% 나쁜 나라도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나중에 그것을 알았다고 해서 “아, 부모에게 속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가르친 이유를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부정한 것과 거룩한 것을 구분해 주시고 부정한 것들을 철저히 경계하도록 가르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시로는 영적인 어린이와 같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사탕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생기기 전까지는 그것을 나쁜 것이라고 가르치면서 경계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가나안 토속민들과 함께 살면서 이런 것들을 경계하지 않으면,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서기는 커녕, 몇 년도 되지 않아서 가나안의 타락한 문화로 인해 썩어 버릴 것이 뻔했습니다.

돼지 고기가 본질적으로 부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게나 랍스터나 굴이나 쭈꾸미가 창조될 때부터 부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을 창조하시고는 “아, 참 좋다!”라고 스스로 감탄하셨습니다. 온 우주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지 않은 것이 없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 중에 본질적으로 악하거나 부정하게 지어진 것이 없습니다. 다만, 가나안 땅에서 그런 것들을 탐하다 보면, 가나안 족속들의 우상 숭배와 그들의 타락한 생활 습관에 빠질 위험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가치관이요 우상숭배요 타락한 삶이었습니다. 그것에 빠지지 않게 하려면, 그것과 연결된 고리부터 끊어야 했습니다.

우리 나라에 복음이 전해지던 초창기에 서양 선교사들은 술과 담배와 도박을 ‘죄’로 가르쳤습니다. 그 세 가지가 죄로 이어지는 연결 고리의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흡연이나 음주 혹은 도박을 하고 싶어하는 분들은 지금도 따져 묻습니다. “아니, 성경 어디에서 술이나 담배 혹은 빠찡꼬를 죄라고 규정하고 있습니까?” 이 질문은 문제의 핵심을 피하려는 술수입니다. 100년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히, 이 세 가지는 심각한 죄로 우리를 이끌어 들이는 연결 고리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 세 가지를 경계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3.

율법은 본래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좋은 뜻과 의도를 가지고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그 율법을 왜곡합니다.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살피고 그 뜻을 이루는 일에 대한 관심은 제쳐 두고, 율법을 자신들에게 이롭게 왜곡합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분하신 것은 그들이 영적으로 성숙해 지도록 돕는 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모세에게 율법을 계시하면서 주신 말씀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너희가 정말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다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선택한 백성이 되고,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출 19:5-6)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님이 조심하라고 가르친 것들을 조심하면서 잘 성숙하여 나중에는 그런 것들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성인으로 자라는 것처럼, 혹은 초신자가 자신의 신앙에 해가 될만한 것들을 경계하고 삼가하면서 영적 성숙을 향해 자라가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죄와 악으로 오염된 가나안 땅에 들어가 죄악과 연결된 것들을 조심하고 경계하면서 영적으로 자라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 율법을 ‘몽학 선생’ 즉 ‘개인교사’라고 불렀습니다(갈 3:24). 율법을 통해 더 성숙하고 성장하여 더욱 온전한 교사가 필요하도록 자라가라는 뜻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것이 싫었습니다. 그들에게도 타락한 본성이 그대로 있었기에 죄와 완전히 담을 쌓고 살기가 싫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완전히 등지고 살 담력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중간 지점에서 타협점을 찾았습니다. 그것이 율법주의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고 율법의 문자적 요구을 만족시키는 것이 율법주의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법망을 피해 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변명할 말을 만들고, 동시에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눈을 피해 적당히 죄악을 즐기려 했습니다.

율법주의는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분하고 있는 율법의 자구를 그대로 지키고 또한 그것을 철칙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돼지 고기가 본질적으로 부정하고, 랍스터가 창조될 때부터 부정한 생물로 창조된 것처럼 왜곡한 것입니다. 돼지 고기나 랍스터를 안 먹고 살아가는 것이 거룩한 백성이 되라는 부름을 따르는 것보다 훨씬 쉬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율법주의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에게 그런 음식들을 철저히 금하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위선과 허위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어떤 유대인 상인이 사업차 거래하는 폴란드 고객의 집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폴란드 고객은 돼지 고기 음식과 포도주로 식탁을 차렸습니다. 그 유대인 상인은 차려 놓은 음식에 손도 대지 않고 있었습니다. 주인이 그에게 묻습니다. “왜 드시지 않습니까?” 그러자 유대인 상인이 대답합니다. “예, 저희는 돼지 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또한 이방인이 만든 포도주를 마시지 않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다시 묻습니다. “아니, 그러면 굶어 죽게 된 상태에서도 이런 음식은 먹지 않습니까?” 유대인이 대답합니다. “아, 그럴 경우에는 규정이 따로 있습니다. 죽고 사는 경우에는 부정한 음식을 먹는 것이 허용됩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폴란드 주인이 인상을 험악하게 구기고는 벽에 걸려 있던 권총을 꺼내어 유대인의 관자놀이에 대고 위협합니다. “이 포도주를 마시게. 그렇지 않으면 당장 쏠테니까!” 유대인은 포도주 한 잔을 순식간에 들이켰습니다. 폴란드인은 다시 한 잔을 따라 주면서 말합니다. “한 잔 더 마시게. 죽고 싶지 않다면 말이지.” 유대인은 거침 없이 포도주 잔을 들이킵니다. 그러자 폴란드 사람이 활짝 웃으며 말합니다. “아, 미안합니다. 제가 포도주를 가지고 장난을 쳤습니다. 혹시, 화가 나신 것은 아니겠죠?” 그랬더니 그 유대인이 대답합니다. “웬걸요. 매우 화가 나 있습니다. 왜 돼지 고기를 가지고는 장난을 치지 않은 겁니까?”

4.

이같은 사고방식은 짐승과 음식에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율법은 일부의 사람들을 부정하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장애인들, 하혈을 하는 여성들,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 그리고 이방인들이 그 예입니다. 그들을 부정하다고 규정한 이유는 그들을 차별하라는 뜻이 아니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율법을 ‘차별을 위한 면허증’으로 왜곡했습니다. 이같은 사고방식과 태도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눈물을 흘려야 했을지, 감히 다 짐작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 7장의 말씀은 이런 점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은 음식을 먹을 때 손을 씻는 전통을 소홀히 했습니다. 이 ‘정결례’의 전통은 후대에 유대인 지도자들이 만든 것입니다. 음식을 먹을 때, 율법에 부정하다고 규정된 음식을 피할 뿐 아니라, 부정한 손으로 먹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흐르는 물에 손을 씻는 전통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손에 탄 부정을 씻을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내장이 부정타는 일을 막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율법주의가 끝까지 가면 이렇게 됩니다. 율법주의는 어떤 음식 혹은 어떤 사람에게 부정한 ‘영적 균’이라도 있는 것처럼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차별하고 소외시켰을 뿐 아니라, 그것과 접촉하면 마치 전염병이라도 옮은 것처럼 번잡을 떨었습니다. 그 영적인 균을 씻어내기 위해 음식을 먹기 전에 반드시 손을 물로 씻어야 했고,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을 대단한 일(big deal)로 만들어 고통을 주곤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동조하실 수 없었습니다. 과거에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받은 율법을 아직도 절대적인 진리처럼 여겨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하고 거룩한 피조물의 일부를 부정하다고 구별하고 차별하고 소외시키는 상황을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영적인 균이 득실거리는 것처럼, 음식을 먹을 때마다 손을 씻는 전통에 대해서도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위생을 위해서라면 모르지만, 음식으로 인해 부정탄다는 말은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그 전통을 무시했고, 제자들도 하나 둘씩 따라 했습니다.

율법주의와 깊은 사랑에 빠진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상황을 그냥 두고 볼 리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연락하여 율법학자 몇 사람을 오게 했습니다. 율법 전문가를 내세워 예수의 위반에 대해 문책할 계획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율법학자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작심한 듯이 대답하십니다. 그분의 대답은 대략 이런 뜻입니다. “당신들은 장로의 전통이라는 것들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뜻을 회피하고 있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율법에 담긴 뜻을 행하는 것이지, 율법의 자구를 따르는 것이 아니오.” 이어서 예수님은 당시 유대교인들에게는 혁명적으로 들릴만한 발언을 하십니다.

무엇이든지 사람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서 그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 사람을 더럽힌다. (15-16절)

아마도, 이 말을 처음 들은 유대인들은 어안이 벙벙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사람들은 부정한 것과 거룩한 것으로 나뉘어 있다는 믿음은 그들에게 너무도 자명한 진리였습니다. 음식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어릴 적부터 부정한 음식을 먹거나 부정탄 손으로 음식을 먹는 일로 인해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흔들 수 없는, 그들의 세계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같은 그들의 세계관의 기초를 흔들고 계십니다. 이럴 경우, 사람들은 혼란을 피하기 위해 그 진리를 거부합니다. 못 들은 척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고 변명합니다.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정결례를 무시하는 것을 보고 따라 하기도 했지만, 그 배경에 그런 엄청난 이유가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과 따로 만난 자리에서 그 말씀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여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이해력이 부족해서 다시 물어 본 것이 아니라, 믿기 어려워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같은 말을 다시 한 번 들려 주십니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밖에서 사람의 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지, 사람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뱃속으로 들어가서 뒤로 나가기 때문이다. (18-19절)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예수님은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고 덧붙이셨습니다. 이 선언은 예수님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도발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당시 율법주의가 사람들에게 붙인 부정하다는 딱지를 무시했습니다.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셨고, 부정한 땅으로 여겨졌던 사마리아 땅에 자주 들어가셨습니다. 지나가는 상여를 멈추고 시체에 손을 대셨고, 병자들의 환부에 손을 대어 고쳐 주셨습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이라면 가까이 하기를 꺼렸던 죄인들과 장애인들을 찾아가셨습니다. 그 모든 행동을 통해 그분이 하고자 하셨던 말씀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깨끗하다! 하나님이 깨끗하다고 한 사람을 부정하다고 하지 말라!”

이 발언과 행동은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이 성전을 허물어라”라고 외치신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 가나의 혼인잔치 집에서 예수님은 정결례를 위해 준비된 물 항아리를 포도주 항아리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그로 인해 손을 씻는 것이 영 불가능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예수님에게 있어서 손을 씻고 음식을 먹는 정결례는 더 이상 중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을 나누는 사고 방식과 그에 따른 전통과 관습은 당장 없어져야 할 것이었습니다.

5.

오늘, 우리는 ‘종려주일’(Palm Sunday)을 지키고 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따라 새끼 나귀를 타고 뒤뚱뒤뚱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신 그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 날로부터 6일째 되는 날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십니다. 그분은 그같은 일이 일어날 것임을 미리 아셨지만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율법주의의 심장을 향해 걸어 나가셨고, 율법주의를 지키기 위해 단결한 권력자들과 그들에 의해 사주된 군중의 함성 속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2천 년 전, 어느 금요일 정오, 예수님이 십자가 형틀에 달려 허공에 들려졌을 때, 율법주의는 승리의 축배를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흘만에 성부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시키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절망에 빠져 있던 제자들을 다시 일으키시어 당신께서 시작하신 영적 혁명을 이어 가게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율법주의가 만들어 놓은 모든 차별과 장벽을 뛰어 넘어 은혜의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율법주의가 만들어 놓은 벽과 장애물이 허물어졌습니다. 유대 땅 안에서만이 아니라, 로마에서도, 이집트에서도, 러시아에서도, 한국에서도, 참된 복음이 들어가면 차별과 소외가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아니라 인간의 욕망이 지배하는 곳에는 언제나 차별과 소외와 단절과 억압이 존재하게 마련입니다. 그렇게 하여 세상은 속에서부터, 소리 없이 변화되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은 모두 복음의 은혜입니다. 율법주의의 기준에 의하면, 저와 여러분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는, ‘부정한 이방인’들입니다. 지금도 근본주의적인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방인들인 우리는 ‘부정타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기피 인물(the untouchable)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기준에 의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이유가 다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 율법학자들의 기준에 의하면, 우리는 차별과 소외와 저주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큰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주의에 대항하여 목숨을 걸고 진리를 위해 싸우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영영 알지 못한 채, 헛된 삶을 살다가 헛되게 죽었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말씀을 전해 드립니다. 2천 년 전, 이방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에게 하신 그 말씀은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을 위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지난날에 육신으로는 이방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사람이라고 뽑내는 이른바 할례자들[유대인들]에게 여러분은 무할례자들[이방인들]이라고 불리며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그 때에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었고,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제외되어서, 약속의 언약과 무관한 외인으로서, 세상에서 아무 소망이 없이, 하나님도 없이 살았습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분의 피로 하나님께 가까워졌습니다. …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은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성도들과 함께 시민이며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며, 그리스도 예수가 그 모통잇돌이 되십니다. (엡 2:11-13, 19-20)

우리가 오늘 복음의 진리를 알고 그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이 말씀은 힘 있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2천 년 전, 어느 날, 예수님께서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고 선언하셨을 때, 결국 그 복음이 차별과 장벽을 넘고 넘어, 저와 여러분에게까지 미칠 날을 내다 보고 계셨을 것입니다. 2천 년 전,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여기고 기피하던 사람들을 찾아가 안아주시고 만져 주실 때, 그분은 이 복음이 대양과 대륙을 넘어 우리에게까지 올 것을 예견하셨을 것입니다. 그랬기에 그분은 그 일에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수난 주간’(the Passion Week)에 우리는 바로 그 고귀한 희생을 기억하고 감사하고 묵상하는 기간입니다.

6.

하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감사하는 것만으로 다 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 제자들과 초대 교인들을 일으켜 모든 장벽과 차별을 넘어 복음을 전하도록 이끄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복음이 우리에게까지 미쳤고, 그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며 영생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일이 우리에게서 끝나면 안 됩니다. 주님은 우리를 통해서 이 일을 계속 이어가기를 원하십니다. 온갖 형태의 율법주의에 묶여 신음하는 사람들이 복음의 진리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도록 돕기 위한 것입니다. 구별과 차별과 소외와 억압과 저주를 이 땅에서 걷어내고 모든 생명의 거룩성을 회복시키기 위해 복음이 전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전도에 힘써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고귀한 사명을 제대로 받들기 위해 우리 교회는 Authentic Outreach라는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센터빌에서는 이미 시작했고, 맥클린에서는 4월부터 시작할 것입니다. 또한 이 프로그램을 만든 분을 초청하여 강의도 들을 것입니다. 또한, 4월 29일부터 5월 1일까지 예정되어 있는 Silver Mission을 위한 훈련도 이같은 고귀한 사명을 이루도록 돕는 과정입니다. 거북이 마라톤 행사를 통해 탄자니아에 짓는 학교를 돕자는 것도 복음을 통해 생명의 거룩성을 회복시키자는 데 목적이 있으며, 멕시코 선교에 나다니엘 센터를 짓고 선교에 힘쓰는 것도 모두 여기에 목적이 있습니다.

원래, 모든 사람이 거룩하게 지어졌습니다. 하지만 죄로 인해 모두가 타락해 버렸습니다. 복음은 그 거룩성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복음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모두가 거룩하니, 복음으로써 모두를 거룩하게 하라! 이 세상 모든 만물이 거룩하게 지어졌으니, 복음으로써 다시 거룩하게 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것을 거룩하다 하시며 또한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하시는 주님께 감사하십시다. 그분께 우리의 삶을 내어 드리십시다. 성령께서 우리를 복음의 진리 안에서 자유케 하실 것입니다. 모든 고정 관념과 선입견과 딱딱한 교리의 틀로부터 우리를 풀어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이끄시어 복음의 자유가 필요한 이들에게 가게 하실 것이며, 손을 뻗게 하실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이 필요한 사람들을 보게 하실 것입니다. 진실로 그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복음의 진리를 나누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이 거룩한 삶이 저와 여러분에게 항상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새끼 나귀를 타신 주님,
그렇게, 고난의 길을 걸어 마침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
십자가에서 모든 구별과 차별과 장벽을 허무신 주님,
주님의 은혜로 저희가 여기에 서 있습니다.
주님께서 생명을 바쳐서 허무신 차별의 장벽을 다시 세우지 않게 하시고,
복음의 능력 안에서 자유하게 하소서.
저희를 사용하시어 자유의 복음이 전파되게 하시고,
복음을 통하여 거룩한 이 땅을 거룩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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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14 요한복음 네 영혼의 오두막으로 오라”(Come to the Shack of Your Soul) 요21:15-17  김영봉 목사  2011-07-31 3334
5613 창세기 누구나 아프다”(Everybody Hurts) 창3:1-7  김영봉 목사  2011-07-31 2891
5612 창세기 보시기에 참 좋았으나…”(It Was Very Good, But …) 창1:26-31  김영봉 목사  2011-07-31 2117
5611 요한복음 인생은 성찬이다”(Life Is Sacramental) 요17:15-19  김영봉 목사  2011-07-31 2314
5610 마태복음 매일이 주일이다”(Everyday is the Lord’s Day) [1] 마28:16-20  김영봉 목사  2011-07-31 2971
» 마가복음 다 거룩하다”(All Things Are Holy) 막7:14-23  김영봉 목사  2011-07-31 2320
5608 베드로전 모두 다 제사장이다”(We Are All Priests) 벧전2:1-5  김영봉 목사  2011-07-31 2459
5607 히브리서 믿음의 담력”(Assurance of Faith) 히4:14-16  김영봉 목사  2011-07-31 2624
5606 로마서 제단에 올려진 삶”(Life Laid on the Altar) 롬12:1-2  김영봉 목사  2011-07-31 2921
5605 로마서 죄 속에 벌이 있다”(Sins Are Sugar-coated) 롬6:15-18  김영봉 목사  2011-07-31 1941
5604 히브리서 제사가 아니다”(It Is Not a Sacrifice) 히10:19-23  김영봉 목사  2011-07-31 2061
5603 요한복음 예수님의 영적 음모”(Spiritual Conspiracy of Jesus) 요2:13-22  김영봉 목사  2011-07-31 2415
5602 요한복음 잔치는 계속된다." (Feast Will Go On) 요2:1-11  김영봉 목사  2011-07-31 2468
5601 누가복음 침체를 끝내는 법”(How to End the Depression) 눅3:21-22  김영봉 목사  2011-07-31 2364
5600 마태복음 찾고 있습니까?”(Are You Seeking?) 마2:1-12  김영봉 목사  2011-07-31 2443
5599 요한복음 나같은 하나님, 나같은 인간”(God Like Me, Human Like Me) 요1:1-5  김영봉 목사  2011-07-31 2499
5598 누가복음 루저들에게 임하는 성탄의 은혜"(The Christmas Is For the Losers) 눅2:1-1  김영봉 목사  2011-07-31 2961
5597 누가복음 고민을 멈추면 썩는다”(Holy Agony) 눅3:7-18  김영봉 목사  2011-07-31 2382
5596 말라기 금을 연단하는 불같이”(Like a Refiner’s Fire) 말3:1-5  김영봉 목사  2011-07-31 2657
5595 누가복음 인자 앞에 설 수 있도록”(To Stand Before the Son of Man) 눅21:29-36  김영봉 목사  2011-07-31 2515
5594 히브리서 새로운 살 길을 걷다”(We Are On the New and Living Way) 히10:19-25  김영봉 목사  2011-07-31 2439
5593 마가복음 진리는 때로 부담스럽다”(Truth Is Often Burdensome) 막12:38-44  김영봉 목사  2011-07-31 2637
5592 시편 예배가 나를 만든다”(Worship Forms Me) 시24:1-10  김영봉 목사  2011-07-31 3672
5591 시편 따뜻한 관심(Radical Hospitality) 시34:1-8  김영봉 목사  2011-07-31 2436
5590 마가복음 우리에게 부족한 것”(One Thing We Lack) 막10:17-22  김영봉 목사  2011-07-31 2552
5589 마가복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By All Means) 막9:42-48  김영봉 목사  2011-07-31 2889
5588 시편 시냇가에 심긴 나무”(A Tree Planted By the Streams of Water) 시1:1-6  김영봉 목사  2011-07-31 3241
5587 마가복음 우리의 거울은 너무 작다”(Our Mirrors Are Too Small) 막8:27-30  김영봉 목사  2011-07-31 2308
5586 야고보서 두 개의 영적 전립선”(Two Spiritual Prostates) 약2:14-17  김영봉 목사  2011-07-31 2494
5585 요한복음 영생에 이르는 열매”(The Crop for Eternal Life) 요4:3-9  김영봉 목사  2011-07-31 2745
5584 시편 순례길에 오른 캐라반”(Caravan on Pilgrimage) 시133:1-3  김영봉 목사  2011-07-31 2582
5583 요한계시 3 가지 새로움 계21:1  강종수 목사  2011-07-31 2111
5582 오바댜 이스라엘의 회복된 모습 옵1:19-21  박상훈 목사  2011-07-30 2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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