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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성화와 기도

목회독서교육 인보라............... 조회 수 2199 추천 수 0 2011.08.06 12: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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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mall.godpeople.com/?G=9788904155590&from_user=az9191 

m_9788904155590.jpg 성화와 기도

저자 서문
이 땅에 있는 신자에게는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두 날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입니다.
하늘나라에 올려지는 기도는 마치 우편물과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나와는 별 상관없는 수많은 전단지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우편물들은 개봉도 되지 않은 채 쓰레기통에 버려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도 그렇습니다. 얼마나 많은 시간들이 의미없는 기도로 허비되고, 또 얼마나 많은 희생과 수고들이 그릇된 태도로 드리는 기도의 실천 때문에 폐기처분되는지 모릅니다. 정직하게 성경의 교훈을 살피면, 기도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바꾸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태도를 바꾸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노예 김남준

제1장 기도, 성화의 방편

기도의 과정을 통한 영혼의 자유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구하는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는 것은 그 이상의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도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도의 참된 목적은 구하는 것을 얻는 데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무엇이 필요하든지 구할 대상은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의 과정과 기능을 통하여 우리를 훈련시키시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며 살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청구용 기도와 성화용 기도가 따로 있나?
기도가 죄를 죽인다고 말할 때, 죄를 죽이는 그 효과는 기도 제목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도에 쏟아 붓는 마음과 태도에 다려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 그것들을 통하여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신자가 되고, 구원의 계획에 합당한 삶을 살고, 예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해 달라는 기도 제목은 그 내용상으로 볼 때 거룩한 기도임이 틀림없습니다. 반면, 먹을 것을 구하고, 직장을 구하는 기도 제목은 세상적인 기도 제목들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거룩한 기도 제목으로 기도해도 죄가 죽지 않는 경우가 있고 세상적인 기도 제목들을 가지고 기도해도 죄가 죽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죄가 거하는 자리가 입술이라면 거룩한 기도 제목들이 쏟아져 나올 때 그 제목들을 들으면서 죄가 죽어 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의 자리는 우리의 입술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거룩하고 신령한 기도 제목들이라 할지라도 그 내용에 의해 죄가 죽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세계 선교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좋은 기도 제목들을 수없이 쏟아내도 우리 안에 있는 죄는 기도 제목이 가치 있는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죽지 않습니다.
죄는 마음의 시선으로 하나님을 주목하며 우리의 중심을 정직하게 쏟아놓을 때,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비로소 죽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내면에서 죄가 죽어갈 때, 믿음도 더욱 강하게 우리 안에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죄의 자리도 마음이고, 신앙의 자리도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기도의 내용이 세상적인 것처럼 보여도,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며 열렬히 기도하면 그러한 실천을 통하여 죄는 죽습니다. 죄를 죽이는 것은 기도의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뢰하고 그분께 온전히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쏟아짐 없이 흘러나오는 모든 기도는 중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죄는 중언부언하는 기도에 의해서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은 그렇게 중언부언하는 기도의 태도를 지닌 채 죄를 미워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죄를 미워하지 않는 영혼이 죄에 맞설 리 또한 없습니다. 죄 역시 우리가 그런 식으로 기도하는 한, 우리의 기도에 대해서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얼마든지 그런 기도의 태도와 더불어서 공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중언부언하는 기도 생활은 죄를 전혀 위협하지 않을 분 아니라, 오히려 아예 기도 생활을 안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거하기 좋은 환경을 죄에게 제공합니다.
기도를 아예 안하는 사람드에게는 그나마 기도를 안했다는 자책감이라도 남아 있지만 중언부언하며 형식적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는 실제로는 거의 기도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늘 기도하며 산다는 착각이 깃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터널식 세차기에서 세차를 할 때면, 우리는 차 위로는 물이 소낙비처럼 쏟아지지만 차 안에는 한 방울도 물이 들어오지 않는 것을 경험합니다. 중언부언하는 기도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기도한다 할지라도 그 기도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 마음 자체를 쇄신시키는 어떤 변화와 함께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 안에 있는 죄는 거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제2장 기도와 내재하는 죄

청교도 존 라일의 지적과 같이 죄는 기도를 죽이고 기도는 죄를 죽입니다. 간절히 기도하는 심령과 담대히 죄를 짓고자 하는 마음은 함께 공존하지 않습니다. 기도가 어떻게 신자 안에 있는 죄의 정욕과 죄의 경향성들을 죽이고 성령님으로 말미암는 내적인 쇄신에 기여하는지를 살펴보기 위하여 다음 몇 가지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욕과 죄와의 관계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죄의 경향성을 죽이시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우리 안에 있는 정욕을 죽이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죄의 법’이라고 표현한, 경향성으로서의 죄를 강화시키는 것이 바로 우리의 정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도움으로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정욕을 죽이지 아니하면, 우리 안에 있는 죄의 경향성은 정욕의 도움으로 점점 더 강한 힘을 얻게 되고, 그 죄의 경향성은 다시 우리를 정욕에 쉽게 굴복하게 함으로써 그 힘을 더하여 갑니다.

 

평상시에는 능히 극복할 수 있는 정욕에 대해서도 죄의 경향성이 힘을 얻어 강력해지면 저항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정욕에 굴복하는 일을 통해서 죄의 경향성은 힘을 얻게 됩니다. 죄를 죽이려면 죄에게 그런 힘을 공급해 주는 먹이가 되는 마음의 정욕을 죽이는 삶을 지속적으로 실천하여야 합니다.

 

정욕을 죽이면 죄의 경향성들이 약화됩니다. 그러나 정욕은 끊임없이 우리 속에서 샘솟듯이 생겨납니다. 보는 것, 듣는 것, 상상하는 것들은 우리의 오감을 자극하여 끊임없이 정욕을 불러일으킵니다. 누구도 그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은혜로써만 이러한 정욕을 죽일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은혜는 육체의 정욕을 죽이고 육체의 정욕은 은혜를 죽입니다.

신자안에 내재하는 죄

죄의 정체는 적의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정체는 하나님을 향한 적으로, 이것은 존재 자체에 대한 혐오에서 비롯됩니다. 역사를 보면, 어느 나라에나 ‘부관참시’라는 형벌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미 죽은 사람의 시신을 무덤에서 파내어 다시 한번 토막내는 것입니다. 부관참시는 대적은 사라질 수 있어도 적대감은 사라질 수 없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적의의 대상
적의의 첫 번째 대상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모든 거듭난 신자들은 죄에 대하여 이미 용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 안에는 여전히 죄가 남아 있으며, 그 죄의 정체는 하나님을 향한 적의입니다. 죄는 하나님 자신을 싫어하게 만듭니다. 죄를 미워하고 그 죄와 더불어 싸우려고 많이 애쓰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남아 있는 죄와, 그 죄가 제공해 주는 즐거움이 좋아서 버리지 않고 스스로 남겨두고 있느 죄가 우리의 영혼에 미치는 영향은 크게 다릅니다. 그것은 영혼에 대한 파괴력에 있어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적의의 두 번째 대상은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입니다. 신자가 사랑해야 마땅할 하나님과 그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들에 대해 적의를 가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는 스스로 모순 속에 갇혀 버리고 말 것입니다.

기도의 은혜를 보존하는 길
신자 안에 있는 죄는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해 적대감과 반감을 품게 합니다. 따라서 신자 안에 있는 죄는 하나님을 향해 열렬히 기도하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기도의 열렬함은 하나님과 얼마나 친밀함, 또 그분과 얼마나 화목한지에 비례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연합이 없이도 열렬하게 기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교도적인 열정주의입니다. 육체로는 열렬함을 가장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영혼은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영혼의 열렬함이란 흉내낼 수도 가장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신자를 거룩하게 하는 열렬한 기도는 아무 것에도 매이지 않은 영혼의 자유함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하고 간절한 기도는 그 실천 속에서 영혼으로 하여금 죄와 맞붙어 싸우게 하고 이때 성령님께서 죄를 죽이십니다. 신자가 기도의 은혜를 보존하는 길은 끊임없이 자기 안의 죄와 싸워 이기는 것입니다. 신자으 마음 안에서는 죄의 맹렬함을 능가하는 진지한 열렬함이 불타올라야 합니다. 끊질긴 기도의 실천 속에서....

제3장 기도와 죄죽임

 

기도가 죄를 죽인다고 할 때, 그것은 기도 자체 안에 있는 어떤 비범한 능력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도의 실천 안에 깃들인 성령님의 죄를 죽이시는 역사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간절한 기도 속에서만 죄와 싸우기 시작하는 영혼
죄는 매우 교묘하기 때문에 신자의 모든 실천이 죄의 정체인 적대감 자체를 공격하지 않는 한, 죄는 모든 것을 양해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주일마다 성경책을 들고 교회에 가는 것 가지고는 죄가 죽지 않습니다. 따라서 죄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것이 자기를 향한 공격이 아닙니다. 오래 믿어서 집사가 되고, 안수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또 목사가 된다고 할지라도, 그것 자체로 죄가 공격을 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죄는 신자의 그러한 외적인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신자가 이런 저런 일들로 분주하게 살게 되고, 하나님을 위하여 크고 작은 일을 계획하고 섬긴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죄 자체를 공격하는 것이 아닌 한 죄는 그 실천에 반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열심있는 일꾼으로 알려진 신자들이 불결한 삶을 사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신자가 도덕적인 삶을 실천하고, 성경을 많이 공부하고, 교리적으로 잘 정리되고,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하고, 꼬박꼬박 십일조 생활도 하면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죄는 전혀 죽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부터 드리는 지속적이고 열렬한 기도는 죄를 죽이는 가장 효능있는 방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도 생활 없이는 죄를 죽이는 삶도 없습니다. 의무적으로 기도 시간을 지킨다고 할지라도 죄는 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자 안에 있는 죄를 죽이는 것은 기도의 외적인 의무나 형식이 아니라 기도의 실천 속에서 부어지는 마음과 영혼에 역사하는 성령님으 작용이 가져오는 효과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죽이는 기도의 실천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난 간절하고 진실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우리 영혼은 죄와 맞붙어서 죽도록 싸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안의 죄에 대하여 예배 시간에 한번 툭 쳐 주는 것으로 공격을 끝내려고 합니다. 물론 신자가 죄에 대하여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툭툭 치므로 죄가 싫어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의 생명에 위해를 가할 정도로 심각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죄는 너그럽게 이해를 해줍니다. 기도 시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번 흔들어만 볼 뿐 신자 안에 있는 죄가 죽임을 당할 만큼 치열한 기도는 드리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 죄는 경계하지만,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 안에서 거하는 생활을 이야기할 때 전투적인 자세를 가지고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사신 바 된 하나님의 사람인데, 여전히 우리 안에 죄가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죄는 은혜가 고갈될수록 끊임없이 우리의 정욕의 도움을 받아 점점 더 강한 세력을 형성해 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전에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 죄와 더불어 싸우는 공격적인 성화의 자세가 없으면 우리의 삶은 은혜로부터 멀어져 부패하고야 맙니다.

제4장 죄 죽임과 열렬한 기도

열렬한 기도를 잃어버리는 이유
첫째는 영혼의 싫증 때문이고, 둘째는 실천의 규칙이 없기 때문이며, 셋째는 마음을 쏟지 않기 때문이고, 마지막 넷째는 힘없는 짧은 기도의 습관 때문입니다.

영혼의 싫증
전혀 기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거의 없어도 열렬한 기도의 은혜 안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에 있어서 총체적인 싫증 속에 빠져 있습니다. 교회에 착실히 출석하고 있더라도, 교회에서 어떤 중요한 직분을 맡아서 섬긴다 할지라도, 예전에 받은 말씀의 빛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그렇게 기도하지 않고 있다면 그는 지금은 은혜에서 멀어져 부패한 사람입니다. 그의 마음의 세계는 죄에 대한 모든 저항력을 상실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영혼이 그런 상황에서 떨어지기 전까지 여러 단계를 거쳐 열렬한 기도 생활로부터 물러가는 일이 먼저 있었습니다.

실천의 규칙이 없음
정한 규칙이 없는 기도 생활 때문입니다. 신자가 기도한다할지라도 기도생활에 있어서 스스로 마음에 정해 놓은 규칙이 없으면 열렬한 기도 생활에서 물러나기 쉽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기도가 되면 하고 안 되면 안하는 사람들로, 기도를 안해도 기도에 대한 간절한 필요성을 지식적으로 거의 느끼지 못하는 상태로까지 미끄러진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영혼의 갈급함 같은 것은 전무합니다. 스스로 기도하지 않으며, 말씀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끊어졌는데고 갈급할 줄 모르는 질병적인 상태로까지 들어가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너진 기도의 세계를 다시 회복할 기회를 주셔도 활용하지 못하고 또 다시 뒤로 물러가고 맙니다. 스스로 의무를 부과하여 기도하는, 정해진 기도의 실천 규칙이 없는 신자의 영적 생활은 견고함에 이르기는 어렵고 실패에 이르기는 쉬운 것입니다.

마음을 쏟지 않음
마음을 쏟아 붓지 않는 형식적인 기도 생활입니다. 비록 기도 생활의 규칙이 정해져 있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마음을 쏟지 않으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새벽 기도, 혹은 저녁 기도라는 형식이 아무리 굳건하게 남아 있다할지라도 그 정해진 기도 시간에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기도를 드리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기도 시간에 오랫동안 엎드려 있으므로 남들은 굉장히 많이 기도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기도 가운데 죄를 죽이는 영혼의 작용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 경우입니다. 이것은 기도의 형식은 있으나 기도의 능력은 사라진 상태입니다. 그렇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의 실천이 없이 육체적인 성실함으로 기도 시간만을 지키는 사람들에게서 죄가 죽는 은혜의 역사를 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가 아니면 진실할 수도 없고 간절할 수도 없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전수받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마음을 드리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특히 신령한 의무일수록 심령의 헌신 없이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마음을 쏟지 않는 기도 생활이 습관화됨으로써 신자 안에 죄가 쉽게 깃들이게 되고, 한번 것들인 죄는 떠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짧은 기도
아주 짧은 시간밖에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 시간을 약속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지키며 살려고 노력하며, 기도 가운데 마음이 실리기도 하지만, 아주 짧은 시간밖에 기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마음엣 우러나는 기도를 한다 할지라도 신자 안에 있는 죄를 효과적으로 죽일 수가 없습니다. 마음 쏟는 깊은 기도는 신자로 하여금 오래도록 기도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그런 기도 속에서 신자 내면에 깊이 자리 잡은 죄는 효과적으로 죽임을 당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실은 기도라 할지라도, 아주 잠시 그렇게 기도할 뿐이라면 이러한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될 수 없습니다.

 

뜨겁게 기도하는 것 같은데도 성화에 있어서 진전이 없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열렬히 기도할 수 있으나, 그것을 오래 지속할 수는 없거나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자기 깨어짐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장시간 깊이 기도할 수 없도록 계속 방해를 받기 때문에 점차 열렬히 기도할 수 있게 하는 영적인 욕구를 상실하게 되고 맙니다.
E.M 바운즈의 지적은 두고두고 가슴에 샛길만 합니다.

 

강한 능력을 느끼게 하는 기도의 실천은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하나님과 많은 시간을 교제하는 데서 오는 산물이다. 짧은 기도로도 충분히 효과적일 수 있는 것은 그 이전에 이미 드려진 오랜 시간의 기도의 효과와 요점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기도생활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열렬한 기도에 많은 시간을 헌신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를 통하여 자기 안의 죄는 죽고, 마음이 성결해지며, 기도자 자신은 변화되어 가기 때문입니다.

열렬한 기도생활
기도에 관하여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신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쏘자. 쏘자. 하늘 높이 우리의 기도의 활을 쏘자. 우리 마음의 시위를 떠난 기도의 화살이 새들 날아 다니는 첫째 하늘을 지나고, 악한 영들이 권세 잡은 둘째 하늘을 가로질러, 거룩하신 하나님 보좌가 있는 삼층천에 이르도록. 오늘도 힘차게 기도의 활을 쏘자.”
열렬함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육체적인 열렬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싣지 않은 채 고성으로 부르짖는다든지, 아니면 손바닥을 치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육체적 열렬함의 기도 행위들의 가치는 높게 평가될 수 없습니다. 마음을 바치는 기도가 더욱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묵상 기도만을 좋은 기도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온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영혼의 간절한 열렬함으로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응시하는 것입니다. 깊은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리듯이, 마음 깊은 곳에서 진심을 길어올리는 기도가 진정한 기도입니다. 마치 자신에게 최면을 걸 듯이 육체적으로 열렬해지고자 몸부림을 치는 기도 행위는 순결한 영이시고 인격체이신 하나님 만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기도의 실천입니다. 마음이 실리지 않은 고성의 기도, 자신이 드리는 기도의 의미도 알지 못한 채 중얼거리는 방언 기도로 대부분의 기도 시간을 채우는 것은 참된 기도의 열렬함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기도의 열렬함이란 기도자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갈망으로 맹렬하게 타오르는 것입니다. 열렬함의 기원은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강력하게 역사하기 시작하실 때, 제일 먼저 일어나는 일은 우리의 죄와 죄의 비참함에 대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밝혀 주시기 때문입니다.

열렬한 기도에 이르는 길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오류에 빠지지 않고 순종적인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 열렬하게 기도할 수 있을까요?

정직한 기도
정직의 빛이 필요합니다. 말씀의 빛 앞에서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성찰하는 정직함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열렬하게 기도하고 싶은 사람은 먼저 진실해져야 합니다. 과거에는 어떻게 살았든지 지금 마음을 쏟아 붓는 열렬한 기도를 하고 싶으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앞에서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지적받는 일에 솔직하여야 합니다. 그것에 대하여 정직한 반응을 보여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신자는 이미 은혜의 세계가 많이 무너지고 죄의 지배의 그늘 속으로 들어가 있어서 하나님의 음성이 아예 들리지 않거나, 또 들린다 할지라도 그것에 대해서 정직하게 반응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상태에서 관심을 다른 데로 돌려 버린다든지, 혹은 세상을 사랑하는 일에 열심을 낸다든지 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어두워진 영혼이 빛을 받는 것인데, 그들은 그런 기회 자체를 자꾸 피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어도 거기에 정직하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정직해지고 진실해지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기도
죄도가 죄를 죽이기 위해서는 마음의 욕구가 충분히 반영된 기도가 하나님 앞에 드려져야 합니다. 입술에서 나오는 기도가 있는가 하면, 마음 깊은 밑바닥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도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기도시간이 입술의 기도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기도를 할 때는 항상 많은 기도를 하려고 하기보다는 머리에 떠오른 기도의 제목을 마음에 잠기게 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길어 올려진 기도가 되어서 그 기도 내용에 자신의 진액이 피같이 배게 하여야 합니다. 기도의 은혜가 메마른 상태에 있을 때, 처음에는 잘 안 되겠지만 몇 번에 걸쳐서 주님의 도움을 구하고 기도의 열렬함에 불을 붙이시는 분이 성령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붙들고 기도하면, 딱딱하게 굳어졌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신과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동화되어 있던 자기 안의 죄가 객관적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온전한 믿음
온전한 믿음으로 기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성경은 믿음을 두 가지 측면에서 함께 말합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성령님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로서의 믿음이고, 또 하나는 믿고자 하는 인간의 활동으로서의 믿음입니다. 두 가지 관점 모두 중요합니다.
기도 실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제는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에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던 우리 죄를 돌이키고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변화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기도를 위한 가장 중요한 선행 조건입니다.
기도의 열렬함의 기초는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의뢰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만이 기도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진지하고 열렬한 기도의 실천 속에서 우리가 성령의 작용을 통하여 순결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믿음 때문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어떤 곳에도 소망이 없다는 절대의존적인 믿음의 행사가 기도를 실천하는 동안 계속해서 우리를 주장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간절한 기도에는 항상 하나님만 바라는 마음의 가난함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열렬한 기도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사시는 동안 항상 자신의 진액을 모두 쏟아 부으시며, 간절함으로 열렬히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슴을 찢는 간절한 기도는 모두 자신 안의 죄와의 싸움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용서받아야 할 죄인들인 우리를 위한 중보기도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의 피어린 펌프질을 통해서 기도의 실천에 마음을 쏟고 피를 적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순례길이 무릎으로 걸어간 길이 되게 해야 합니다. 주님이 엎드리신 곳에 우리도 엎드리고, 주님이 흐느끼신 곳에서 우리도 울어야 합니다. 이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아아,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실천에 얼마나 약한지요. 입술로는 주님의 고난을 본받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만, 우리에게 정말 고난이 있습니까? 예수님처럼 아프고 가슴을 찢는 거룩한 희생이 있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더러 자신처럼 살아서 그들에게 주님을 보여 달라고 부탁하신 잃어버린 영혼들이 너무나 많은데도, 우리가 주님을 본받아 그들을 위하여 대신 울어줍니까?

제4장 죄 죽임과 지속적인 기도

기도에 대한 그릇된 통념
성화는 한두 번의 기도를 통해서 응답받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향한 매우 큰 미움의 감정 때문에 영적 생활이 지장을 받고 죄책감을 느낀다고 합시다. 그런데 어느 한순간 마음이 쏟아지면서 회개의 기도가 나왔습니다. “하나님, 제가 여태껏 누구를 미워했는데 용서해 주십시오. 미움의 감정들이 생겨나는데, 하나님, 이 모든 것들을 제 마음에서 싹 씻어 주시고 제가 그를 사랑할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그렇게 기도하는 순간, 마음에 깊은 감동이 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용서해 주셨고, 미워하는 마음도 씻어주셨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일 뿐입니다. 그런 식으로 기도가 응답되어 미워하던 사람을 저절로 사랑하게 되는 일은 일반적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신이 삶 속에서 실제적으로 그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을 죽이려고 애쓰며, 그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을 죽이려고 애쓰며, 그 사람을 사랑하려고 오랜 동안 힘쓰지 않는 한 말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으로 구하라’,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라고 합니다. 이것은 단지 심리적인 믿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의뢰이자, 절대적인 순종을 포함하는 영적 호라동을 반드시 영혼의 변화를 불러 옵니다. 참된 믿음은 늘 삶 속에서 부단히 실천되며, 순종으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미움의 죄를 짓던 신자가 어느 날 마음을 쏟아 부어 기도했고, 그 순간 하나님께서 마음을 녹이시면서 기도를 열납하시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옭아매던 미움의 문제가 모두 해결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자신 안에 미움의 감정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이때 대부분의 신자가 혼란을 경험합니다. 하지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난한 정복기를 근거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을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혼란에 빠질 이유가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화는 한번 뜨겁게 기도해서 획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가 ‘저 사람을 미워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내게서 미움을 다 지워주십시오.’라고 간절히 기도할 때 그 기도가 마음으로부터 열렬히 우러나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들으심은 “오냐, 네게서 미움을 다 지워 주겠다.”의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러한 의미입니다. “그래. 네 기도를 내가 듣는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순종하면서 그 사람을 용서하려고 애쓰고 사랑하려고 노력하거라. 그러면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은혜의 힘을 공급해 주마. 그러면 너는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나를 의지하거라.”

기쁨을 누리는 기도를 위해
이렇게 복음적인 성화의 원리를 가르쳐 주면 사람들은 부담스럽게 생각합니다. ‘아아, 이거 정말 예수 믿는 것이 장난이 아니구나. ’
그러나 그것은 죄의 지배를 받으며 그 결과인 악과 고통 가운데 사는 것보다는 훨씬 쉽고 가벼운 짐이 아닙니까? 더욱이 죄 가운데 사는 사람에게는 멸망 밖에 주어지는 것이 없지만, 이렇게 죄를 죽이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생명의 나타남이 있습니다.
기도의 은혜 가운데 있을 때는 조금만 기도해도 기도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옵니다. 은혜 가운데 있어서 마음과 영혼의 틀 자체가 기도하기에 적합하고 죄가 거하기에 좋지 않은 은혜로운 틀로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묵상하면 바로 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기도만 하면 눈물이 나오고, 간구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신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열렬히 기도하되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 무거운 부담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지금 그 기도의 감미로움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의 틀들이 너무나 육적으로 변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되는 것입니다.

지속적인 기도 실천의 장애, 게으름
죄는 기도를 죽이고 기도는 죄를 죽인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해될 것입니다.
실제적으로는 두가지, 영혼의 싫증과 육체의 게으름 때문입니다. 영혼의 싫증은 열렬함으로 극복하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여기에서 우리가 다루어야 할 것은 육체의 게으름으로, 이것이 바로 기도 생활을 지속적이지 못하는 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입니다.
이 게으름의 정체는 빗나간 자기 사랑입니다. 자기는 부패한 본성을 가진 옛 자아를 말합니다. 새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고 땀 흘리고 피 흘리기까지 예수님을 위해서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옛 본성은 여전히 자기 자신이 주인이며 왕이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성령님을 근심시키면서도 자기 자신의 좋은 것은 하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바로 게으름의 정체입니다.

하나님: “이렇게 살거라.”
우리: “싫어요”
하나님: “왜?”
우리: “힘드니까요. 내가 싫으니까요.”

게으름은 거룩한 의무를 태만히 하고 자기의 육체를 하나님보다 더 위하게 합니다. 그리고 죄는 그런 게으름을 이용하여 우리 안에 들어옵니다. 마치 적군의 병사들이 아군의 복장을 하고 문지기들이 서 있는 성문을 유유히 통과하듯이 말입니다.
육체의 게으름은 영혼의 싫증과 손잡고 우리 마음속에 있는 기도의 불을 끕니다. 그 이유는 기도가 영적인 것이긴 하지만 육체가 영혼의 요구에 응하여야 실천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실천에는 부지런한 육체와 열렬한 영혼이 하나같이 필요합니다. 지속적인 기도의 실천을 위하여 반드시 육체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육체가 은혜 안에 있을 때에는 그렇지 않지만, 은혜로부터 멀어지면 신령한 일에 대해서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육체는 죄 없으신 육체였지만 우리의 육체는 이 세상에 남아 있는 동안 구석구석 죄성이 배어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죽이는 지속적인 기도의 실천을 위하여 육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그것은 세 가지로 대답될 수 있습니다.

게으름을 물리치는 비결

육체를 가혹하게 다룸
육체를 가혹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이것은 아무 때나 육체를 가혹하게 다루라는 것이 아닙니다. 선하고 신령한 목적을 위하여 복종하지 않는 육체를 다룰 때에 한해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9:27).
성경은 우리에게 영혼을 어떻게 다루라고 말합니까?
게으른 육체는 그렇게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이에 대한 사도 바울의 단호한 모본을 가슴에 새기십시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
‘몸을 쳐 복종하게 하는 것’은 당시 로마시대에 무자비한 상전들이 노예를 다루던 방식입니다. 노예를 다루듯이 엄한 규율을 따라 다루다‘라는 뜻입니다. 신자가 죄악의 게으름에 빠지려 하는 육체를 다룰 때에 노예에게 하듯이 가혹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영혼: “기도하러 가자.”
육체: “힘들어, 나 잘래.”
영혼: “그래? 많이 힘들어? 그러면 어떻게 하지.. 기도하러 못 가겠네. 할수 없지.”

영혼과 육체 사이에 이러한 대화가 오가면 그 사람의 기도 생활은 이미 끝난 것입니다. 죄가 이기도록 길을 열어 주는 셈이 됩니다.

영혼: “기도하러 가자.”
육체: “힘들어, 나 기도하러 안 갈래.”
영혼: 뭐라고 이 망할 자식 같으니. 당장 일어나지 못해? 두들겨 맞을래?“

노예 제도가 있더 시대에 엄격한 주인과 게으른 노예 사이에 인격적인 대화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악하고 지혜로운 주인은 자유롭던 사람을 노예로 삼기 위해서 먼저 그에게 노예의 마음을 심어 주었습니다. 철저하게 채찍으로 다루어서 주인이 나타나면 두려움 때문에라도 순종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랫동안의 경험을 통해서, 새벽기도가 힘들게 느껴지는 때에 피곤을 이기고 일어나는 효과적인 방법을 터득하였습니다. 그것은 새벽에 잠자리에서 일어나기에 너무 힘들고 괴로울 때, 마음속으로 ‘충성’ 크게 외치고 벌떡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거수 경례하는 심정으로…
마가복음 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에 나아가 기도하셨다고 되어 있는데, 그 바로 앞을 보면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고, 귀신 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내쫓아 주시고, 베드로의 장모의 집을 심방해서 고쳐 주신 사건들이 나옵니다. 이 모든 일과를 끝내시고 숙소에 돌아오시니 각색 병든 사람이 가득 있는데 그 많은 사람을 위해서 하나하나 기도해 주시고 고쳐 주셨다고 나옵니다. 아마도 오늘 우리 시각으로 새벽 두 시는 넘어서 잠드셨겠지요. 그리고 성경이 말합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1:35)
저는 십여년 전에 이 성경 구절을 읽고 많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구절을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예수님의 고단한 지상 생애가 가슴에 밀려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일어나셔서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흠 없으시고 죄 없으신 그분이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안식과는 거리가 먼 생애를 사셨고, 그렇게 육체를 쳐서 복종시키시면서 우리 잘 때 안 주무시고 우리 먹을 때 굶으시고 우리가 쉴 때 기도하셨다는 사실이 해일처럼 가슴에 밀려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곤히 잠들어 있는 제자들이 깰셀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걸어 나오셔서 아직은 어두움이 도망하지 못한 캄캄한 들판 저편으로 기도 처소를 찾아서 사라지시는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스스로에게 ‘나는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다. 내게 있는 고난은 고난이 아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새벽기도에 대한 생각도 떠올랐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새벽에 기도하셨을까? 성경을 살펴보니 별 큰 뜻이 있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새벽 시간에 기도를 안하셨으면 오전이나 오후에 하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기도하시는 시간만큼 복음을 전하시고,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병자를 고치실 시간을 축내셔야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불쌍한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시간에 기도하시고 그들이 깨어있는 시간에는 자신도 깨어 있어서 그들을 섬기셨던 것입니다. 어디서 하나님의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까? 오히려 주님께서는 우리를 섬기러 오신 노예처럼 사셨습니다.
아아, 얼마나 마음 아픈 일인지요. 금마차 타고 왕의 대로로로 다니셔야 할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오사 그렇게 고단한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하며 다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고난의 길을 가심으로 구원을 얻었으니 살아 있는 동안 뼈 갈고 살 깎아 주님을 섬기리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때에 종종 사용하던 저의 아호를 버리고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노예’로 칭하기로 하였습니다. 아무리 뻔뻔스러운 육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지상 생애를 뵈면 그렇게 게으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육체에게 말할 수 있습니다.“봐라, 이놈아,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셨는지를 봐라. 이렇게 자기를 아낌없이 주심으로 널 구속해 주셨는데 게으름을 피워? 이 망할 놈 같으니라고. 당장 나오지 못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희생적인 지상 생애를 묵상하면 단숨에 게으름이 죽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성화에 이르는 지름길 같은 것은 없습니다. 쉽게 참된 신자가 될 수 있다고 제시된 길은 대부분 거짓이었습니다. 그런 길이 있었으면 예수님께서 왜 우리보고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겠습니까? 그렇게 쉬운 길이 있었으면 예수님께서 왜 우리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그런 길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묵상하는 것은 무한한 감화를 줍니다. 그리고 자기를 게으름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열렬하게 살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한 묵상은 게으름을 퇴치하는 또 하나의 특별한 비결입니다.

기도의 습관을 확립함
규칙적인 습관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눅22:39). 유대인들이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한 것도 바로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사실, 기도가 잘 되고 열렬히 기도를 실천하고 있을 때에는 그런 습관의 틀 같은 것들이 별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영혼의 열렬함이 육체의 게으름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그럴때에 무리를 지탱해 주는 좋은 방법이 습관입니다. 견고한 의무의 틀은 경건이라는 내용물을 보호하는 그릇이 됩니다. 내용물이 없을 때에는 견고하고 질 좋은 포장이 쓸모없지만, 좋은 내용물이 있을 경우에는 그러한 포장재가 내용물에 대한 아주 좋은 보호막이 됩니다.
육체가 다소 게으름을 피우려 하는데, 새벽에 기도하러 나가는 건강한 습관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럴 경우에 육체는 가혹하게 다루지 않아도 고분고분하게 영혼의 요구에 순종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습관 자체가 저절로 열렬한 기도를 유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새삼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습관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합니다. 기도의 습관조차도 형성하지 않은 것은 태만한 것입니다.
아직도 기도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까? 아직도 기도하는 장소가 확정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갑옷을 입지 않고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열심 있는 기도가 우러나오기 때문에 기도를 실천하실 것입니다만, 조금만 환경이 어려워지거나 육체가 게으름을 피우면 여러분은 꼼짝없이 당하실 것입니다.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기도 생활을 원하신다면 규칙적인 기도의 습관을 굳건히 하십시오. 그 단련된 굳건함이 여러분에게 성숙된 경건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제6장 기도의 십자가를 지고...

기도를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누구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기도를 잃어버린 신자가 되어가고 맙니다. 비만으로 배가 나오는 것은 특별한 노력이 없이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적절히 식사량을 조절하지 않고 운동도 하지 않으면 저절로 배가 나옵니다. 노력하거나 원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 없이 방탕으로 흐르는 삶은 모두 저절로 흘러나옵니다. 우리의 부패한 본성이 그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것을 거슬러 살고자 애쓰지 않는 한, 그 물결에 휩쓸려 갈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어느 날 갑자기 기도가 열렬해지기만을 기다리며 두 손 놓고 있는 것은 자신이 기도와 무관한 신자가 되어가는 것을 방관하는 행동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십자가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을 때 주님의 기대는 우리가 영원한 형벌로부터 용서받은 다음에 그냥 죄에 시달리면서 목숨을 연명하다가 천국에 간신히 턱걸이하고 들어오는 그런 삶을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기대는 우리로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자는 거듭난 즉시 아직 남아 있는 죄와 불결로부터 깨끗케 되도록 부름을 받습니다. 따라서 신자에게 있어서 성화 없이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으며,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참된 목적과 가치를 따라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 예수님의 생애는 자기를 다 드리신 희생의 생애였고, 그 희생은 자신의 온 힘을 쏟아 붓는 탁월한 기도를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복음서 어디를 넘겨봐도 눈물 흘리시는 주님의 기도의 모습이 없이는 예수님의 생애를 읽을 수 없고, 많은 시간을 열렬히 기도하신 헌신을 보면서 게으르고 나태한 우리의기도 생활에 대한 후회 없이는 주님의 생애를 묵상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을 얻은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이 바로 그런 삶이 아닐까요? 우리는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는 죽고 주님만이 홀로 충분히 사시도록 해드리는 것이 마땅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내가 걸어가는 인생의 길이 주님께서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걸어가고 싶으셨을 그런 길이 되어야 합니다.

 

[중국선교연구원 /http://www.inbor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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