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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분과 현실 사이에서

창세기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109 추천 수 0 2011.08.10 23: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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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창25:19-34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528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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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분과 현실 사이에서

창세기 25:19-34, 성령강림절후 4째 주일, 2011년 7월10일

 

야곱은 구약의 족장들 중에서 가장 파란만장하게 산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이나 요셉도 그에 못지않았지만 야곱을 따라오기는 힘듭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를 든다면 자식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아들이 12명입니다. 이 열 두 명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태두입니다. 딸도 여럿 있을 텐데, 성경에는 디나라는 이름 하나만 나옵니다. 자식 많은 집에 바람 잘 날이 없다는 말이 야곱 가족에게 딱 어울립니다. 그는 못 볼꼴을 많이 보면서 살다가 우여곡절 끝에 다 늙어서 애굽에 가서 죽었습니다. 그의 삶이 처절했다는 사실은 어르신 나이가 얼마요, 하는 바로의 질문을 받았을 때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 47:9) 하는 야곱의 대답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창 25:19-34절이 전하는 야곱의 이야기는 그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험악한 세월의 전조라 할 수 있습니다. 두 가지 에피소드가 연달아 나옵니다. 첫 이야기는 야곱의 출생 설화입니다. 야곱은 쌍둥이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 리브가의 자궁 속에서 동생과 형이 싸웠다고 합니다. 싸우는 건지 노는 건지는 표현하기 나름입니다. 이 문제를 하나님께 아뢴 이삭은 여호와로부터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는 대답을 들었다고 합니다. 출산 시에 동생이 형의 발꿈치를 잡았습니다.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질 수는 없겠지요. 태아가 어머니 자궁에서 움직이는 걸 싸운다고 말한 것처럼 형과 거의 동시에 나오는 걸 보고 발꿈치를 잡았다고 표현한 게 아니겠습니까. 성서기자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형과 동생의 위계가 역전된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사실은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구체화됩니다. 쌍둥이 형제는 무럭무럭 잘 자라서 성인이 되었습니다. 사냥꾼이 된 에서는 주로 들과 산에서 지냈고, 조용한 성품의 야곱은 주로 집안에서 지냈습니다. 집 밖이나 안이나 일거리는 많습니다. 각각 자기 취향대로 살면 됩니다. 아버지 이삭은 고기를 좋아한 탓으로 사냥꾼인 에서를 좋아했고, 어머니 리브가는 집안일을 도와주는 야곱을 좋아한 것 같습니다. 그런대로 화목한 가정입니다. 어느 날 일이 벌어집니다. 그 날도 에서는 하루 종일 사냥을 하다가 지쳐서 집에 돌아왔습니다. 야곱이 팥죽을 끓이고 있는 것을 본 에서는 팥죽을 좀 먹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야곱은 팥죽과 떡을 주는 대신 장자의 명분을 달라고 말했습니다. 에서는 배가 고파 죽게 되었으니 장자의 문명이 무슨 필요가 있나, 하면서 야곱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 거래가 성립되었습니다. 에서는 정신없이 팥죽과 떡을 얻어먹고 집밖으로 나갔습니다. 성서기자는 그를 이렇게 평가합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창 25:34)

 

토기장이의 권한

 

이 두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이야기 자체로만 보면 좀 황당합니다. 쌍둥이 형의 발꿈치를 잡는다는 것이나 형제들끼리 팥죽으로 장자의 명분을 팔고 산다는 게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더구나 형 에서와 동생 야곱을 비교해보면 에서가 인간적으로 훨씬 매력이 있습니다. 장자의 명분에 연연해하지 않는 모습이 그럴듯해 보입니다. 아버지가 큰 아들에게 장자의 축복을 해주는 의식을 야곱이 가로챘을 때 에서는 동생을 죽이겠다고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실제로 죽일 생각이 있었는지 아니면 그렇게 화를 낸 것에 불과한 것인지는 성서가 설명하지 않습니다. 야곱이 형을 피해 하란에 가서 20년간 살다가 돌아올 때 야곱은 형의 화가 풀리지 않았을까 해서 오금이 저릴 정도로 걱정했는데, 실제로 만나보니 에서는 동생을 혈육의 정으로 대했습니다. 야곱은 남의 약점을 이용하고, 속이기를 잘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삼촌 라반의 재산을 교묘한 방식으로 가로채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들은 그의 인간성이 어떤지에 대한 증거들입니다. 제가 친구를 삼는다면 당연히 에서를 선택할 겁니다. 그런데 성서기자는 하나님이 야곱을 택하셨다고 말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울은 이 사실을 롬 9장에서 언급했습니다.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 9:13) 야곱이 옳기 때문에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한 것은 아니고, 에서가 잘못이 많아서 하나님이 미워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일방적입니다. 이런 하나님은 정의롭지 못해 보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으니라.” 사람의 기준으로 하나님의 선택을 정의롭다거나 불의하다고 판단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출 33:19절을 인용한 바울의 말을 더 들어보십시오.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롬 9:15) 바울은 이 사태를 토기장이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토기장이가 자신의 생각대로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만들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사랑할 사람을 사랑하고 미워할 사람을 미워할 권한이 있다는 겁니다. 출애굽 당시에도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광야로 나가서 여호와께 제사드릴 수 있게 해달라는 모세의 요청을 바로는 끝내 듣지 않다가 결국 장자가 모두 죽는 열 번째 재앙을 맞게 되었습니다. 아홉 번째 재앙이 내릴 때까지 바로의 마음은 완고했습니다. 출애굽기 기자는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고하게 했다고 말합니다.

 

성서의 이런 진술은 자칫 오해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무조건 구원받고, 밖에 있는 사람은 구원에서 제외된다고 말입니다. 그런 생각은 잘못입니다. 토기장이의 비유나, 오늘 본문의 야곱 이야기는 일종의 일방적인 편 가르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난폭하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행위가 우리의 판단 기준을 넘어선다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는 세상을 전체적으로 대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식이 제한적입니다. 그것으로 이 세상 전체로 자신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이건 일상적으로 늘 우리가 경험하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악이 당장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으로 여전히 악을 참아내시는 하나님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얼마나 깊은지 우리는 다 알지 못합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바로 그런 속성 덕분으로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을지 모릅니다. 이는 마치 어린아이가 경험하는 부모의 행동과 비슷합니다. 동생은 형이 장난을 치다가 유리창을 깼는데도 부모가 야단치지 않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부모의 마음은 형이 다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동생은 사고 친 것만 생각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생각의 차이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행위는 우리가 보기에 일방적일 뿐이지 실제로는 더 근원적인 선이며, 더 근원적인 정의이며, 궁극적인 진리에 속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어서 행동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일까요? 답은 분명합니다. 자신의 생각에 떨어지지 말고 하나님의 생각에 마음을 여는 것, 즉 순종입니다. 에서처럼 배고프다는 현실에 떨어지지 말고 장자의 명분에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여기서 장자라는 단어에 너무 묶이지는 마십시오. 장자는 고대사회의 가족관계를 전제하는 말입니다. 고대 유대사회에서 장자의 명문은 곧 하나님의 축복과 연관됩니다. 그들은 장자의 직위가 축복의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장자의 명분을 유지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과 관계가 유지된다는 뜻이었습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볍게 여겼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에서가 부도덕했기 때문이 아니라, 또한 그의 인간성이 별 볼 일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무시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택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성서기자의 판단입니다.


현실주의자

 

장자의 명분이 아니라 배고픈 것을 당장 해결해야겠다는 에서의 논리를 좀더 생각해보십시오. 대수롭지 않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심각한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의 생각은 매우 현실적인 겁니다.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오.”(창 25:32) 여기서 장자의 명분을 하나님과의 관계로 바꿔놓고 읽어보십시오. 대단히 불경한 생각입니다. 하나님이고 뭐고 나에게는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지금 먹고 사는 게 최선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에서의 입장도 나름으로 일리가 있습니다. 두 발을 땅에 딛고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최소한 먹고 마시며 배설하고 노동하며 자식을 낳고 살아야 합니다. 가능한 대로 건강하게 살아야 합니다. 구체적인 삶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아무도 그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거기에 일방적으로 떨어진 삶의 태도입니다. 허기를 채우는 것에만 정신이 팔렸기 때문에 에서는 그 모든 삶의 근원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는 극단적인 현실론자이며, 극단적인 실용주의자입니다. 그의 영혼에는 하나님이 자리할 공간이 없습니다.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오.’ 그는 자기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것들과 함께 길을 갈 것입니다.

 

에서는 현대인의 한 전형입니다. 현대인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지를 잘 알고 있는 듯이 살아갑니다. 집을 세우고, 사업을 늘리고, 건강을 체크하고, 노후를 설계하는 것이 유익한 것입니다. 그것이 삶의 현실입니다. 거기에 몰두합니다.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사냥에서 막 돌아온 에서처럼 늘 허기가 져 있습니다. 아무리 먹어도 허기가 가시지 않는 병에 걸린 듯합니다.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심각해지다 못해 고착화되고 있습니다. 지난 6월 하순 경 홍익대학교는 대학교 건물을 청소하던 분들이 용역회사에 고용된 상태에서 시위를 통해서 노사 타협을 끝낸 다음에 2억8천만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고 합니다. 농성장의 전기요금과 농성기간 교직원의 식대까지 손해배상에 포함되었다고 합니다. 청소부들은 월 80만 원가량을 받던 이들이었습니다. 홍익대학교는 6천억 원의 적립금을 쌓아놓고 있습니다. 큰 배움의 장인 대학교가 이제는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사기업처럼 운용되고 있습니다. 교수들과 학생들을 무한경쟁의 울타리 안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병원도 완전히 영리만을 목적으로 합니다. 모두가 에서처럼 ‘내가 배고파 죽게 되었으니’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것만을 찾겠다고 아우성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런 흐름 속에서 살아갑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런 흐름을 개인들이 벗어나기는 힘들 겁니다. 장자의 명분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도 당장은 현실에 유익한 것만 눈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영적 경지가 깊어지는 길이 최선입니다. 신앙적으로 철이 드는 것입니다. 당장 유익한 것에 매몰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참된 생명에 이르는 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구도와 수행의 길을 가리킵니다.

 

이런 길을 가는 여러분들에게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그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이 다 알고 있는 것을 구하는 어리석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바로 에서와 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방인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원하고 참된 생명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그것을 믿었고, 그 생명이 실현된 날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삶의 조건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용기를 내십시오. 용기 있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넉넉하더라도 교만하지 마십시오. 교만하지 않은 사람처럼 사십시오. 우리는 어떤 형편에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만이 우리의 구원이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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