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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저는 야곱

창세기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717 추천 수 0 2011.08.10 23: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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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창32:22-31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533375 

jys.jpg 정용섭 목사

다리 저는 야곱

창세기 32:22-31, 성령강림절후 7째 주일, 2011년 7월31일

 

지난 7월10일 설교의 본문은 창 25:19-34절이었습니다. 야곱이 쌍둥이로 태어난 형 에서로부터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샀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구절부터 창세기 마지막 50장까지 야곱의 대서사가 계속됩니다. 창세기의 대부분이 야곱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창세기가 설명하는 야곱의 일생을 연극 형식으로 정리하면 4장입니다. 1장은 태어나서 아버지 이삭에게 장자의 축복을 받을 때까지이고, 2장은 장자의 축복 문제로 형을 피해 삼촌이 사는 하란에서 살던 20년의 세월이고, 3장은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서 늙을 때까지 살던 시기이고, 4장은 늘그막에 흉년으로 인해서 요셉이 국무총리로 있는 애굽으로 가서 산 세월입니다. 오늘 설교의 본문은 2장에서 3장으로 넘어가는 순간에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브니엘

 

야곱은 삼촌 라반의 집에서 살던 20년 동안 크게 성공했습니다. 네 명의 아내로부터 11명의 아들을 얻었습니다. 재테크에 능한 탓인지 야곱은 재산도 크게 일구었습니다. 남부러울 게 없을 정도로 기반을 닦은 겁니다. 미국으로 이민 간 교포가 사업에 크게 성공한 것과 비슷합니다. 고향 생각이 났습니다.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주저하게 만드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일종의 트라우마로 작용했습니다. 형 에서와의 갈등입니다. 그 사정은 여러분들도 잘 알 겁니다. 고향으로 가는 길목의 얍복나루에 도달했습니다. 나루에서 시내를 건너기만 하면 이제 가나안입니다. 건너편에서는 400명의 부하를 거느린 형 에서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형이 어떤 태도로 나올지 아직 감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형에게 줄 선물은 미리 보냈습니다. 밤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습니다. 야곱은 종들을 시켜서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안전하게 시내를 건너게 하고, 양과 소와 나귀 등등의 가축도 다 건너게 했습니다. 이제 루비콘 강을 건넌 셈입니다. 다시 하란으로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야곱은 혼자 남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을 했다고 합니다.(24절) 우리는 이 어떤 사람을 천사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생각으로 비겁하게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쳤다고 합니다. 그래도 야곱은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날이 새려고 하자 이 사람이 다급해졌습니다. 그만 놓아달라고 말했지만 야곱은 축복을 받기 전에는 놓아주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야곱에게 이름을 물었습니다. 야곱이라는 대답을 들고 이렇게 말합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창 32:28) 만화 같은 장면입니다. 아무리 야곱이 힘이 세다고 하더라도 천사를 완력으로 이길 수는 없습니다. 날이 새려고 할 때 다급해졌다는 것은 악령 이야기에서나 나올만한 장면입니다. 구약성서에 신화적인 요소가 있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성서기자들도 당시의 세계관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자들도 천동설을 믿었던 것과 비슷합니다. 중요한 것은 성서기자들과 신학자들이 말하려는 근본 의미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에서 ‘이름’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제시됩니다. 야곱은 이제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었습니다. 야곱은 발꿈치를 잡았다는 뜻이고,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야곱이라는 자연인의 이름에 머물지 않고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이름을 가리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곱의 이 이야기를 통해서 자기 민족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이해한 것입니다. 남의 발꿈치나 잡는 야비한 삶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을 이기는 차원으로 올라 선 것입니다. 이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사람이 하나님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그건 아예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져주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아빠가 5살 아들과의 씨름에서 져주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나님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야곱과의 씨름에서 져준 것은 아닙니다. 야곱은 허벅지 관절이 어긋나는 상황에서도 천사와의 씨름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예술가가 배를 곯으면서도 예술에 천착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남의 발꿈치를 잡는 것과 같은 실수를 저지르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깊이 들어가려고 부단히 노력했다는 뜻입니다. 거기서 하나님 경험이 가능했습니다.

 

야곱은 20년 전 고향을 떠날 때도 특별한 경험을 한 사람입니다. 그는 동생을 잡아 죽이겠다고 길길이 뛰는 형 에서를 피해서 삼촌 라반이 살고 있는 하란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들판에서 돌을 베게 삼아 자다가 꿈을 꾸었습니다. 하늘까지 닿아 있는 사닥다리가 보였고, 그 위를 오르내리는 천사들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하늘로부터 말씀이 들렸습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지켜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야곱은 그곳 이름을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의 벧엘로 지었습니다.(창 28장) 당시에도 야곱은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렸다가 하나님을 경험했고, 이제 20년 만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 순간에도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렸다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았습니다. 야곱에 관한 대서사는 이 두 전승을 기둥으로 해서 세워진 집과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은 야곱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자신들과도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본문의 핵심은 이름에 있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천사가 야곱에게 이름을 묻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야곱은 다시 천사에게 당신 이름을 알려달라고 요청합니다.(29절) 이름을 알려달라는 말은 정체성을 알려달라는 뜻입니다. 천사는 야곱에게 이름을 알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대신 축복했습니다. 축복이 바로 천사의 이름에 담긴 의미라는 뜻이겠지요. 야곱은 천사와 씨름하여 축복받은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붙였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 모세는 출애굽 소명을 받은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다가 이름이 없다는 말을 들었고, 율법을 받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얼굴)을 보고 싶다고 했다가 얼굴은 못 보고 등만 보았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여기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고 합니다. 야곱이 모세보다 더 위대하다는 뜻일까요?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는 말은 상징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볼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는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얍복나루 같은 이야기는 경우에 따라서 좀 당혹스럽게 읽힙니다. 우리도 야곱처럼 천사와 씨름을 하고, 이름을 새롭게 받고 축복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냐, 하고 말입니다. 구약의 하나님 경험을 방법적으로 똑같이 해야 한다는 생각은 버리십시오. 신약성경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바울처럼 될 수도 없습니다. 모두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똑같은 방언의 방식으로 성령 임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런 방식의 경험으로 돌아가려는 것은 일종의 종교적 퇴행입니다. 아무리 어머니가 그리워도 세 살짜리 아이의 행동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경험의 형식이 아니라 내용입니다. 절대 생명 경험입니다. 루돌프 오토의 표현을 빌리면 거룩한 두려움이라는 뜻의 누미노제 경험입니다. 자기의 실존 전체를 화염으로 감싸는 궁극적인 존재에 대한 경험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한 사람들입니다. 그의 운명에서 우리는 절대적인 생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경험했습니다.

 

그런 경험이 없거나 희미한 분들도 있을 겁니다. 교회에 오래 다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분들에게 조언을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일단 ‘홀로’ 남는 일이 중요합니다. 야곱은 얍복나루에서 아내, 자식, 재산을 다 건너보내고 홀로 남았습니다. 하나님 경험은 홀로 남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죽을 때 홀로 죽어야 하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숨을 쉴 때 홀로 쉬어야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중요한 것일수록 홀로 해야 합니다. 절대적인 생명의 주인인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홀로 서야만 합니다. 이것을 무조건 고독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님도 홀로 기도하기도 하셨지만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지내셨습니다. 홀로 남는다는 말의 궁극적인 의미는 영적인 겁입니다. 오직 한 가지 사실인 하나님의 생명 사건에 집중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에 비추면 밥을 하던 마르다보다는 예수님 앞에서 말씀에 귀를 기울였던 마리아의 태도가 그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곱은 얍복나루에서 홀로 밤을 지새우다가 이스라엘이라는 경험을, 그리고 브니엘이라는 경험을 했습니다.

 

야곱의 허벅다리

 

오늘 본문은 마지막 구절에서 별로 중요해보이지 않는 말을 덧붙입니다. 야곱이 브니엘을 지날 때 해가 돋았고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다고 합니다.(31절) 그 장면이 머리에 그려집니다. 밤을 새웠으니까 피곤했겠지요. 다리를 절고 있으니까 어떤 사람들에게는 불쌍해보였을 겁니다. 그러나 실제로 야곱의 영혼은 이전에 비해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로워졌습니다. 그의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은 그의 영적 실존이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얼굴과 직면할 정도로 궁극적인 생명의 깊이를 경험한 것입니다. 아내와 자식과 재산이 제공하지 못한 영적인 깊이를 경험한 것입니다. 다리를 저는 것은 이제 그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영적인 차원에서 다리를 저는 사람입니다.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저는 다리는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로 들어갔다는 상흔(傷痕), 즉 스티그마(stigma)입니다. 바울은 갈 6:17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스티그마)를 지니고 있노라.” 바울은 이 말을 통해서 할례와 무할례의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할례는 몸에 상처를 내는 의식입니다. 그것의 유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새로 지음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할례의 스티그마에 머물지 않고 예수의 스티그마에 마음을 두었습니다. 그 스티그마는 구체적으로 복음을 전하면서 당한 온갖 고초일 수도 있고, 지병일 수도 있고, 독신의 삶일 수도 있고, 왕땅 당한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스티그마를 두려워합니다. 불편한 삶을 두려워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보다 더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매달립니다. 그런 증거를 보여야겠다고 조바심을 낼 지경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사람은 넉넉하게 살기도 하고, 부족하게 살기도 합니다. 건강하기도 하고, 병약하기도 합니다. 사람의 행복은 그것을 결정되지 않습니다. 몽고나 티베트의 유목민들, 에베레스트의 고산족, 북극의 에스키모들의 삶은 우리의 기준으로 볼 때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물량적인 것이 행복의 척도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다시, 본문에 나오는 야곱의 마지막 모습을 보십시오. 밤을 새운 그는 다리를 절면서 브니엘을 지나고 있습니다. 그가 그 순간에 얼마나 행복했을지 상상이 갑니다. 다리를 저는 모습이 전혀 애처로워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그가 부럽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만이 참여할 수 있는 행복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리를 저는 삶의 불편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그걸 피하려고 해도 결국 언젠가 우리는 총체적으로 다리를 절게 될 겁니다. 그리고 죽습니다. 참된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만 주어집니다. 하나님에게 더 집중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 통치에 더 집중하십시오. 그게 생명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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