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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주 목사님의 <생각대로 성경읽기> 를 읽으면서 각 챕트마다 일부분을 옮겨적었습니다.

가능하면 읽어보는 것으로 만족하시고 죽 긁어다가 다른데로 옮기는 것은 좀 삼가해 주시길 바랍니다.

저작권 문제 때문에 글이 여기저기 복사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아시겠지요?  -최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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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지막 징소리가 울릴 때 (시73:1-20)

꿈을 꿔보면 깨어나기까지는 그토록 진(眞)하고 실(實)하기만 하던 것들이 깨어나는 순간 모두가 허(虛) 망(妄)한 것으로 돌아간다. 사필귀정이니 자업자득이니 하는 말들까지도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만다. 

 

2. 어디 한번 해 보아라 (욥40:6-14)

부시는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테러분자들을 근절하겠다고 장담했지만, 테러는 더욱 기승을 부리며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오사마 빈 라덴은 거만하고 건방진 미국의 콧대를 꺾겠다면서 뉴욕 쌍둥이빌딩을 무너뜨렸지만 바로 그 자리에 쌍둥이 빌딩보다 더 크고 완강한 빌딩이 서게 되었고 미국의 콧대는 그들의 가슴 속 두려움과 함께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높아졌다.
자칭 흠 없고 의로운 전사(戰士)인 오늘의 욥들에게 하느님은 지금도 말씀하신다. "네가 그토록 정의롭고 게다가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란 말이냐? 그렇다면 어디 해 보아라. 권세와 위엄으로 단장하고 권위와 영화를 걸치고 네 분노를 폭발시켜 보아라. 건방진 자가 모이거든 짓뭉개고, 거드럭거리는 자가 보이거든 꺾어버리고, 불의한 자는 짓밟아 한꺼번에 땅 속에 묻어버려라. 네가 과연 그럴 수 있어서 그렇게 한다면(그렇게 된다면) 하느님 자리를 너에게 넘겨주겠다!" 

 

3.다스리고 또 다시 잘 다스리라 (막11:12-24)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누군가 그것을 의심 없이 믿었기 때문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모든 것이 마음에서 빚어진 것이다.
그러니 마음을 잘 다스리라고, 생각을 잘 다스리라고, 마음도 생각도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이지만 그것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오히려 그것에 끌려다니다가 패가망신하는 수가 있다고, 이 치명적인 진실을 일깨워주고자, 스승은 제자들 앞에서 죄 없는 나무 한 그루를 무참히 꺾으셨던가?

 

4.허락하신 그대로 (마10:29-31)

참새 한 마리도 아버지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 아버지가 내 머리카락을 낱낱이 세어두셨다는 것, 그런 것은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게 그런 아버지가 계시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느냐'다. 그것도 그냥 누구한테 들어서 아는 게 아니라 본인이 알고 있는 줄도 모를 만큼 그렇게 분명히 속으로 알고 있느냐는 것이다.

 

5.참으로 살아 있었다 (민17:12-13)

아론은 모세가 시키는 대로 하였다. 염병이 자기 몸에 옮겨 붙을 수도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괘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염병을 막아보려 했지만,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죽어갔다. 그래도 괘념하지 않았다. 오로지 모세를 통해서 내리신 하나님의 명에 순종하여 그대로 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죽은 자들과 산 자들 틈에서 참으로 그는 '살아'있었다. 

 

6. 굴복하라(눅18:15-17)

어린아이는 아직 '나'라고 하는 의식이 굳어지지 않은 상태다. 그래서 자기에게 주어지는 모든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것을 거절하거나 거부할 힘이 아직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순진한 마음'으로만 맞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러는 것은 그러지 않을 수 없어서 그러는 것이지 그러지 않을 수 있는데도 그러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어린이'와 '어린이와 같은 사람'의 차이가 있다. 하나님 나라는 어린이들의 것이 아니라 어린이와 같은 사람의 것이다. 아직 단단한 에고가 형성되지 않은 미성년의 나라가 아니라 단단한 에고를 스스로 버린 어른의 나라다.
주어진 모든 상황에 조건 없이 굴복하는 일은 하나님 아버지 뜻 앞에서 자신의 '에고'가 없는 자들에게만 가능하다.  

 

7. 도로 내어 드리라 (대상29:14-17)

 알몸으로 온 세상 알몸으로 떠나는 것은 모든 사람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러지 않을 무슨 방법이 없다. 그러나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기꺼이, 사심 없이 하느님께 도로 내어드린 다음 스스로 알몸이 되어 떠나는 사람은 결코 흔치 않다.
"사심 없이 바친다"는 말은 바친 데 따라오는 보상이나 대가(代價)따위를 조금도 기대하지 않고서 그냥 바친다는 뜻이다. 바치는 일 자체보다 더 갚진 것이 바치는 자의 '사심 없는 마음'이다.
바치되 무심(無心)으로 바칠 일이다. 유심(有心)으로 바치느니 차라리 바치지 않느니만 못하다.

 

8. 무엇을 가졌는가 (약4:2)

욕심이란 말을, 무언가를 하고 싶거나 가지고 싶은 마음으로 이해한다면 세상에 욕심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겠다는 마음 그것도 욕심이니까.
문제는 욕심이 있느냐 없느냐에 있지 않고, 그것을 어떻게 부리느냐에 있다. 욕심을 잘 부리면 성인군자요, 자기 욕심한테 부림을 받으면 범부 중생이다.
사람이 무엇을 가졌다 또는 무엇을 했다는 말은 하느님이 그것을 주셨다 또는 하게 하셨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욕심을 내었지만 얻지 못했다면 하느님이 그것을 그에게 주지 않으셨다는 증거다. 따라서 사람이 무엇을 진심으로 하느님께 구한다면 그것을 받지 못할 까닭이 없다. 하늘에 돌을 던지면 그 돌이 제 머리 위로 떨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9. 온전히 열라 (신32:48-50)

사람이 죽는 것은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제가 왔던데로 돌아가는 것이다. 나무 잎이 떨어져 나무뿌리로 돌아가고 나무가 쓰러져 대지로 돌아가듯이, 사람이 죽어서 조상(祖上)으로 돌아간다. 조상의 조상...의 조상인 하느님으로 돌아간다. 달리 갈 곳이 없다.

 

10.성서가 증언하는 (대하18:18-22)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고는 그것이 거짓말임을 일러주면서 거짓말에 속든지 속지 말든지 네 맘대로 하라고 말씀하시는 분, 사람을 통해 당신 뜻을 이루시되 사람을 꼭두각시로 부리지는 않으시는 분, 그분이 성서가 증언하는 하느님이다.
하느님의 명에 순종할 수 있는 만큼 거역할 수도 있지만 하느님을 거역한다 해도 본인의 의사에 관계없이 그 거역 자체가 복종일 수밖에 없는 존재, 그것이 성서가 증언하는 인간이다.

 

11.저를 통하여 이루어지다 (신3:23-29)

모세가 왜 요단강을 건너야 하는가? 그가 강을 건너지 못한 것이 어째서 아쉬움으로 남아야 하는가? 사십 년 고생 끝에 얻는 낙(樂)이니 마땅히 누려야 한다고? 수고한 대가로라도 마땅히 챙겨야 할 것 아니냐고?
모세 본인이 그런 이유로 그렇게 생각했다면 적어도 그는 노자(老子)가 말하는 성인(聖人)에서 거리가 멀어도 한 참 먼 사람이다. 노자는 말하기를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라, 공을 이루고는 그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고 했다.

 

12.그대로 내어 맡기다 (롬7:15-25)

바울은 뜬금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 맡긴다. 이것은 논리적 귀결이 아니다. 이성적 추리의 결론도 아니다. '한 사람'을 만난 자의 터무니없는 특권이다. 훗날 사람들이 그들 성인으로 호칭하는 것은 그가 선으로 악을 이겼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그 한 사람에게 미숙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내어 맡겼기 때문이다.

 

13.내 말이니 잘 들어라.(렘7:1-16)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유다 백성을 위하여 울지도 말고 용서를 빌지도 말라고 하셨다. 그래도 예레미야는 '눈물의 예언자'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망해가는 조국과 백성을 바라보며 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하느님의 명을 어기면서까지 울면서 애원했지만 ("이 산 저 산을 보며 저는 목이 메어 웁니다. 광야에 있는 목장들을 보며 저는 슬피 웁니다. 모두 타 없어져 찾는 이 없고 양떼 울음소리도 들려오지 않습니다. 날짐승도 들짐승도  모두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예레미야9:9) 유다는 끝내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의 군대에 함락되어 망국(亡國)의 종지부를 찍었다. 

 

14. 잡을 수 있는 것은 없느니 (호2:10-12)

 집자(執者)는 실지(失之)라, 잡은 자는 그 잡은 것을 잃는다 했다. 이 말은 "잡은 줄로 아는 자는 그 잡은 줄로 아는 것을 잃는다."로 수정되어야 한다. 사람이 잡을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바알과 싸우는 것은 승산이 없는 짓이다. 어떻게 있지도 않은 것과 싸워서 이길 것인가? 풍요로움은 인간의 적이 아니다. 마찬가지 이유로, 자본주의 또한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이 아니다.
그렇다. 집착이 온갖 고통과 혼돈의 원인이다. 굳이 싸워서 물리쳐야 할 적이 있다면, 좋은 것을 붙잡아 제 것으로 삼으려는 마음, 집착하는 마음이 그것이다.

 

15.바람같은 사람 (막11:15-19)

바람은 자유롭다. 고정된 형태도 없거니와 어떤 틀에도 갖히지 않는다. 그러기에 때로는 산들바람으로 꽃잎을 간질이고 때로는 폭풍으로 거목의 뿌리를 뽑는다.
바람같은 사람, 예수가 잠시 태풍으로 성전 마당을 휩쓴다. 그러고는 언제 그랬더냐 싶게 마당을 빠져 나간다.
아무도 그의 정체를 모른다. 다만 경험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그를 제거하기로 한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모의는 허공을 칼로 자르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16. 지혜를 받아 드린다 (눅7:31-35)

철없는 아이들이 저마다 상대가 자기 장단에 춤추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슬퍼하는 자와 함께 울고 춤추는 자와 함께 노래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예수 당시에 사람들이 그랬다. 생각과 말과 행실이 영락없는 철부지 아이들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철부지 아이들은 아이들이니까 봐줄 만하지만 밤으로 낮으로 오직 제 논리만 펼치고 주장만 고집하고 저만 옳은 여야(與野)의 철부지 어른들은 봐줄 구석이 없다.

 

17. 자유를 얻기 위한 가난함 (눅6:20)

가난한 사람은 아무 가진 것이 없다, 텅 빈 항아리처럼. 하느님 나라는 자기 것을 소유한 사람에게 들어갈 수 없다. 물건으로 차 있는 항아리에 하늘이 들어갈 수 없듯이.
자기가 가질 수 있는 물건이 아무것도 없다는 진실, 무엇을 따로 가지고 살아가는 '나'라는 존재도 실은 없다는 진실, 그 진실을 깨친 사람이 진실로 가난한사람이다.
누가 그 자유로움을 간섭할 것인가?  

 

18.근본으로 돌아가라 (고전3:22-23)

내가 한 세상 살면서 겪는 모든 것들이 알고 보면 죄다 내가 있어서 있는 것들이다. 바울로를 부르는 내가 없으면 바울로도 없다. 내가 있어서 해도 있고 달도 있다. 모두가 내 것이다. 이 세상도 생명도 죽음도 현재도 미래도 모두가 내 것이다. 내가 없는데 어디에 생명이 있고 죽음이 있고 형제가 있고 미래가 있으랴?
그러나 나는 어쩔 수 없이 많고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다. 많고 많은 가지들 가운데 한 가지다. 그 모든 가지들과 함께 그리스도라는 나무에 붙어있다. 그러므로 나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함께 '사람'으로 존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다. 그리스도에 통(通)함으로써 다른 모든 사람과 통(通)하는 존재다. 그리스도가 근본의 마지막인가? 바울로의 말에 따르면, 아니다! 그리스도도 임자가 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이다. 근본의 근본이신 하느님이 있어서 '사람'이 있는 것이다.

 

19.내켜서 하는 일 (고후8:12-15)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거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은 것은, 많이 거둔 사람이 적게 거둔 사람에게 자기 것을 나눠주었기 때문이든지, 아니면, 적게 거둔 사람이 많이 거둔 사람 것을 몰래 훔쳤거나 힘으로 빼앗았기 때문이다. 앞의 경우에는 양쪽 모두에게 낙원이요 행복이지만 뒤의 경우에는 양쪽 모두에게 지옥이요 비참이다.
권력이 총구에서 나온다는 신념 아래 시도된 공산주의 혁명이 실패한 것은 인류를 위해서 다행이다. 억지로, 강제로, 가진 자의 것을 빼앗아 가지지 못한 자에게 나눠주는 방식으로는 지상낙원을 이룰 수 없다. 그래서는 사람들에게 앙심과 불안을 심어 줄 따름이다.
길은 하나 뿐이다. 많이 가진 사람이 적게 가진 사람에게 자기 것을 자발적으로, 기꺼이 내어주는 것이다. 그때에 많이 가진 사람과 적게 가진 사람 사이에 오가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물질의 모양을 한 '사랑'이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시고 사랑이 사는 곳에 하느님이 사신다. 

 

20. 복 많은 제자 (눅22:31-34)

인간의 의지란 참 대단한 물건이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 의지만으로 되지 않는 일이 있는 것이다.
키로 밀을 까부르는데 밀이 어떻게 까불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일이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을 경우가 있다. 그럴 때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경우'를 거절하면서 수용하거나 그냥 수용하거나 둘 가운데 하나가 있을 뿐이다.
사람이 햇빛을 등질 수는 있지만 제 등 위로 쏟아져 내리는 햇빛까지 등질 수는 없는 일이다.
베드로는 다만 고의로 스승을 등지지 않았기에 자기도 모르게 스승을 등졌다가도 다시 돌아설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스승의 기도 덕분임을 뒤늦게나마 알았다. 복도 많은 제자다.
놀라운 일은 스승 예수께서 당신 제자들을 오늘도 그렇게 이끌고 돌보고 지켜주신다는 사실이다. 

 

21. 평화꾼 (눅9:51-56)

길 가는 사람에게는 동행도 있지만 반대자 또는 반대 세력도 있게 마련이다. 동행이야 서로 이웃하여 가면 되겠지만 반대자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길 가는 자의 본색이 들어난다.
길 가는 자가 전사(戰士)라면 전사답게 용감히 싸울 것이요 길 가는 자가 평화꾼(peace-maker)이라면 평화꾼답게 그 자리에서 가능한 평화를 이룰 것이다. 그 자리에서 가능한 평화를 이룬다는 말은 반대자들과 맞서 싸우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모든 가능한 길을 찾아 그 길을 간다는 말이다. 도무지 어디에도 길이 없으면 거기서 죽고 만다. 골고다 언덕의 예수처럼! 

 

22. 내(內) 눅11:27-28

행복도 사람이 경험하는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그냥 거기 있는 게 아니다. 필요한 조건이 갖추어질 때 비로소 겪게 되는 것이다.
군중 속에 있던 한 여자는 그 '조건'을 밖에서 찾았다. 그래서 예수를 보며, 저처럼 훌륭한 아들을 낳아 기른 여자는 얼마나 행복할까 -하고 감탄했다.
그러나 예수는 여인의 생각에 동조하지 않는다. 그분은 행복의 조건을 '안'에서 찾았다. 그래서 '하느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대답하셨다. 하느님은 안에 계신다. 미모도 사라지고 건강한 몸도 사라지고 인기도 사라지고 인자한 부모도 사라지지만 하느님과 그분 말씀은 사라지지도 않고 이랬다저랬다 하지도 않는다. 행복도 불행도 모두 제 안에 뿌리가 있다. 

 

23. 미워도 (롬2:1)

예수께서는 심판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하셨다. 내가 누구를 심판하면 다른 누가 나를 심판한다는 말씀이 아니다. 내가 누구에게 한 바로 그 심판이 나를 심판한다는 말씀이다.
내가 누구를 사랑하면 그것은 곧 나를 사랑하는 것이요 내가 누구를 미워하면 그것은 곧 나를 미워하는 것이다. 내가 나 아닌 남으로 인식하는 모든 존재가, 비유하자면 내 눈으로 보는 내 손이요 내 손으로 만지는 내 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나를 사랑하면 그것은 곧 남을 사랑하는 것이요 내가 나를 미워하면 그것은 곧 남을 미워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진실을 알든 모르는, 그렇다.  

 

24. 가만히 추스르라 (고전13:7)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참, 엄청난 말이다. 이러니 누가,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으랴? 그러나 그래도 그래야 사랑이다.
거기까지 갈 수 있느냐 없느냐는 물을 것 없다. 모든 것을 덮어주는 하늘처럼, 모든 것을 믿고 바라는 땅처럼, 모든 것을 견디어내는 저 깊은 침묵 속으로 들어가려고 들어가 보려고 오늘도 몸과 마음을 추스를 따름이다. 

 

25. 비우라

"쉴 때가 되었다. 고단한 자는 안식을 얻으라. 이제는 안심하여라." 일찍이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사28:12)

그들은 왜 들으려 하지 않았을까? 지금은 쉴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생각이 귀를 막아 쉴 때가 되었으니 쉬라는 말을 들을 수 없게 했을 것이다.
그것이 어떤 생각이든 자기 생각을 그냥 가지고서 하느님 말씀을 그냥 들을 수는 없는 일이다. 들리지 않는 음성을 어떻게 듣는단 말인가?
회사후소(繪事後素)라 먼저 내 생각을 비우지 않고서는 내 몸에서 하느님의 그림이 그려지기를 바랄 수 없는 일이다. 

 

26. 가슴에 묻어두라 (눅9:18-21)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이렇게 질문하신 예수, 제자들의 대답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으신다. 마치 그걸 알아 무엇에 쓰겠냐는 듯이. 그러고는 곧장 묻는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여기 '사람들'과 '제자들'은 같은 사람이지만 예수와의 관계를 놓고 보면 같은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 다르니 같은 질문이라 해도 대답은 달라야 한다.
과연, 베드로의 대답은 사람들의 생각과 달랐다. 스승은 그것을 확인했고, 그로써 문답은 끝이다. 대답의 내용에 대하여 더 이상 이러니 저러니 말할 것 없다. 오히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가슴에 묻어두라 하신다.
오늘, 예수께서는 내게도 물으신다. "너에게 나는 누구냐?" 나는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교회에서 배운 교리문답대로가 아니라 내 가슴에서 우러나는 내 생각대로. 그리고 그 답을, 그분과 나의 은밀한 관계를 위해서 도로 가슴에 묻어야 한다.

 

27.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시22:1-2)

속절없이 나무에 못 박혀 내걸린다. 알몸이다.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해야 할 일도 없다. 그런데도 아직 숨은 붙어 있어서 속수무책의 고통과 괴로움을 견뎌야 한다.
더 이상 바라볼 곳도 없고 기대할 곳도 없고 희망 둘 곳도 없는 상태. 아무것도 없는데 여전히 뭔가 있는, 언어로 설명이 불가능한 상태... 아무 할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없는데 가만있을 수도 없다!
신비가들은 이런 순간을 빛으로 태어나기 위하여 반드시 거쳐야 하는 '어둔 밤'이라고 말한다.
그 겁나는 순간을 향해 이 길을 계속 걸을 것인가? 이제라도 돌아설 것인가? 결정은 내가 할 수 있지만 그만두기로 결정하는 순간, 나는 선생님을 등져야 한다.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그분께 버림받기까지는 내가 나를 그분께 버리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다! 

 

28.내 길을 내가 막았다 (히13:1-5)

형제한테 사랑받는 일은 내 능력만으로,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형제를 사랑하는 일은 내 맘대로 내 능력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다. 결코 어렵거나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나그네를 정성스레 대접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남에게서 대접받는 일은 내 맘대로 안되지만 남을 대접하는 일은 내 맘대로 할 수 있다.
감옥에 갖혀 있는 사람을 함께 갇힌 심정으로 기억하고, 학대받는 사람을 학대받는 심정으로 기억하는 것도 무슨 자격증을  취득하거나 시험에 합격한 사람만 할 수 있는 특별한 일이 아니다.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며 사는 것도 그렇다. 그러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무슨 조건이 따로 있지 않다. 그러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법이나 제도 또한 없다.
그런데 그런데 어째서 그 일이 이토록 어려운 것일까? 그러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자들이 내 힘으로 감당 못할 만큼 막강해서다. 누군가? 그 막강한 방해꾼들은? 

 

29.제발 불쌍히 (전도서28:2)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 주어라.
그러면 네가 기도할 때에 네 죄도 사해질 것이다.
-잘못을 용서해 줄 이웃이 없습니다.
그러면, 네가 기도할 때에 용서받을 죄도 없다.
-그저 모두가 불쌍할 따름입니다.
그러면 네가 기도할 때에 너 또한 불쌍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30.담대히 (행9:36-43)

베드로가 무슨 대단한 일을 했다는 착각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할 일이다. 그로서는 차려진 밥상에서 밥을 먹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일을 했을 뿐이다.
사람들의 눈에는 도르가의 시체가 보였지만 그에게는 잠들어 있는 여인이 보였다. 그래서 "다비다 살아나시오"라고 말하지 않고 "다비다 일어나시오"하고 말했다. 그뿐이다. 잠들어 있는 사람 이름 불러 깨우는 일이야 누군들 못하랴?
하지만 베드로는 참으로 대단한 일을 했다! 그는 도르가가 죽었다고 보고, 그를 시체로 대하는 다중(多衆)의 견해에 휩쓸리거나 파묻히지 않고, 도르가가 잠들어 있는 모습으로 보이는 자기 눈을 의심하지 않았다.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다.

 

31.높은 곳에서 내려오라.(사47:1-3)

거선지(居善地)라, 사람이고 물이고 거하는 데는 땅이 가장 좋다. 땅 위에 앉으면 평평하다. 굴러 떨어질 염려가 없다. 지위가 높을수록 걱정이 많고 불안한 것은 그 자리가 땅바닥에서 멀기 때문이다.
바람이 불어도, 밑기둥은 흔들리지 않는데 높은 가지로 올라갈수록 흔들림이 심하다. 나라가 망해도 백성은 도망가지 않는다. 지도층들만 난리가 난다. 꼭대기 지도층은 목숨이 위태롭다. 아무것도 없는 놈은 도둑이 겁나지 않으니 문을 잠그지 않고도 태평이다. 간디 자서전을 아무리 읽어봐도 도둑을 경계하여 문단속했다는 이야기가 없다. 복음서를 아누리 뒤져봐도 예수 일행이 강도를 당할까봐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는 대목은 없다.

 

32.문을 발로 들어선다 (신29:28)

한 번도 서울에 가보지 못한 시골 사람이 서울 시가지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것이 알고 싶어서 시골 자기 집 마루에 앉아 공상으로 세월을 보낸다면 죽을 때까지 계속해도 끝내 서울 시가지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집을 떠나 서울 가는 길로 들어선다면, 그 길을 멈추지 않고 계속 간다면, 마침내 서울 시가지를 보게 될 것이다.
하느님 나라가 어떤 나라일는지 아무리 열심히 궁리해도 궁리만으로는 그 나라를 알 수 없다. 다행히 우리 앞에는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과 지도가 놓여 있다. 누구든지 지도가 가리키는 대로 그 길을 걸으면 머잖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와 있는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지금 알고 있는 예수의 가르침만으로 충분하다. 하나라도 좋으니 그대로 실천하는 데, 거기에 진정한 예수의 길이 있다. 머리로 궁리하여 알 수 있는 신비라면 그것은 신비가 아니다. 신비의 문은 다른 모든 문이 그렇듯이 머리가 아니라 발로 들어서게 되어있다. 

 

33. 마냥 슬퍼 울었다 (막14:17)

그랬다. 닭 울음소리가 귀에 들리기 전에는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두 번째 들린 닭 울음소리가 그에게 잊고 있던 스승의 말씀을 기억나게 했고, 그때 비로소 방금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게 되었다.
사람이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면서 한 짓을 문득 알아차리게 되었을 때 어떤 모습을 연출할 수 있을까?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아담처럼 겁이 나서 숨을 수도 있고 카인처럼 오히려 성을 낼 수도 있고 유다처럼 자기 목숨을 끊어버릴 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는 땅에 쓰러져 슬피 울고 있다!
왜, 무엇 때문에 울었느냐고 물을 것 없다. 그런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도록 나약한 겁보에게 예수께서는 반석(베드로)이라는 이름을 주시며 "네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약속하셨다.

 

34. 자신을 존중하라 (딛2:15)

어떤 사람의 권위는 그 사람이 스스로 만드는 것인가? 그렇다. 예수께서 보여준 권위는 누가 그에게 준 것이 아니라 당신한테서 스스로 나오는 것이었다. 참된 권위는 겉으로 꾸미는 게 아니다. 햇살이 해에서 나오듯 속에서 저절로 나온다. 그 사람 중심에 누가 사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부리는 권위의 무게가 결정된다.
권위를 가지고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권고하고 책망하라는 말은 가슴 깊은 곳에 주님을 받들어 모시고 일하라는 얘기지 괜히 이상한 옷을 입거나 거창한 직함을 목에 주렁주렁 걸고서 일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35. 하나되어 움직이신다.(행13:9-12)

 사울이 첫 번째 전도여행을 떠나 기프로스 섬의 바포라는 곳에 갔을 때 총독이 사도를 청하여 말씀을 들으려 하자 마술사가, 중간에서 방해공작을 한다. 그러자 사울이 "성령으로 가득 차서 그 마술사를 쏘아보며" 저주를 했고 마술사는 저주를 받아 일순간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를 지켜본 총독은 감동을 받아 그리스도로 개종을 한다.
사울은 마술사가 '주님의 길'을 훼방놓는다고 생각했지만, 결국은 총독이 그리스도인 되는 데 오히려 도움을 주었으면 주었지 방해가 되지 않았다.
아직 사울은 '주님의 길'이 세상의 어떤 일로 말미암아 훼방받거나 가로막히는 그런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런데 얼마나 놀랍고 흥미로운가? 모든 것을 아시는 성령께서 짐짓 사울의 비슷한 판단과 견해에 편승하시어 마술사를 저주하신다!
성령께서(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일하시는 방식이 언제나 그러하다. 모자라는 놈하고는 모자라는 것으로, 넘치는 놈하고는 넘치는 것으로, 하나되어 움직이신다.

 

36.재대로 들어라 (막4:9)

 사람의 말이란 말하는 사람 혼자서 그 내용을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듣는 사람의 태도와 마음 상태에 따라서 같은 말이 이렇게도 들리고 저렇게도 들리는 법이다.
사람이 말을 재대로 알아듣는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구도 자기 말이 다른 사람한테 잘못 이해되거나 왜곡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말을 하면서 상대에게 "잘 들어주기를" 주문하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대개 사람이 말을 잘 못 알아듣거나 오해하는 것은, 말을 들으면서 마음이 딴 데 가 있거나 아니면 자기 생각으로 상대의 말을 판단하고 재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가 말을 할 때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고 자기 생각대로 재단하거나 판단하지만 않으면 잘못 알아듣거나 오해를 하는 일을 웬만큼 피할 수 있다. ⓒ이현주 (목사)

 

37.진실로 누가 지혜로운가

모세의 하느님은 안식일에 나무를 했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 그분의 뜻이었다. (민15:32-36)
예수님의 하느님은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고 사람을 살리는 것이 그분의 뜻이었다.(막3:1-2)
모세에서 예수로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하느님은 이렇게 달라지셨다. 그런데 하느님이 달라지는 것을 용납 못하는 인간들이 있었다. 그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나가서 즉시 헤로데 당원들과 만나 예수를 없애버릴 방도를 모의하였다"(막3:6)
예수가 다녀가신 뒤로 모세와 예수 사이의 세월보다 더 긴 세월이 흘렀건만, 아직도 모세의 하느님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시퍼렇게 살아있다.
참으로 불가사의(不可思議)다.  

 

38. 슬기로운 이 (마26:40-44)

기도하신 후 제자들에게 오셔서, 제자들이 자고 있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은 한 시간도 나와 함께 깨어 있을 수 없느냐? 깨어서 너희가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영은 원하지만 육체가 약하구나.”
예수님께서 다시 가셔서 두 번째 기도를 하셨습니다. “나의 아버지여, 이것이 제게서 지나갈 수 없고, 제가 마셔야만 한다면,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제자들에게 가셔서 제자들이 자고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들은 너무 졸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놔 두고 다시 세 번째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같은 기도를 한 번 더 하셨습니다. (마26:40-44)

그런대로 여기까지는 스승과 제자들이 함께 왔다. 그러나 이제 더는 동행이 불가능한 시점에 이르렀다. 제자들은 한자리에 머물러 움직일 줄 모르는 데 그래도 스승은 당신 길을 가야한다. 제자들이라고 해서 일부러 마음먹고 그러는 건 아니다. 마음은 스승과 함께 나아가고 싶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제 몸을 제 마음대로 움직이는 경지에 들지 못한 인간의 한계 때문이다.
어쩔 것인가? 스승은 하는 수 없이 '제자들을 놔 두고' 마저 가야 할 당신 길을 홀로 가신다.
제자들의 무능을 스승은 나무라거나 꾸짖거나 원망하지 않는다. 분노하지도 않는다. 그냥, 탄식할 뿐이다. 아마도, 그날이 '마지막 날'임을 아셨기 때문이리라. 

 

39. 기회를 주며 기다리셨다.(마9:27-31)

예수께서는 왜 당장 걸음을 멈추고 두 소경에게 "내가 너희의 소원을 들어들 수 있다고 믿느냐?" 고 묻지 않으셨을까?
왜 뒤에서 소경 둘이 소리쳐 부르는데도 계속 길을 걸어 집안으로 들어가셨을까? 그래서 그들이 집 안에까지 따라 들어오게 하셨을까?
두 사람의 믿음을 시험해보신 것일까? 아닐 것이다.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 그들의 믿음에 대하여 새삼 알아봐야 할 무엇이 있었으리라고는 보기 어렵다. 처음부터 두 소경이 집 안에까지 따라올 줄을 그분은 아셨을 것이다.
그러나 두 소경도 자기들의 믿음이 못들은 척 외면하시는 분을 포기하지 않고, 집에까지 따라 들어갈 만큼 분명하고 흔들리지 않는 것임을 알았을까? 몰랐을 것이다. 자기 마음을 꿰뚫어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길에서 자비를 구하며 시끄럽게 따라다닐 리가 없다.
예수께서는 두 소경에게 자기들의 중심에 어떤 믿음이 있는지를 확인시켜주려고, 그들이 집 안에까지 들어오도록 기회를 주고 기다리셨던 것이다. 당신을 부르는 자에 대한 배려의 친절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아, 그런 분이시다. 우리 스승님은!  

 

40. 계속 가야 하거늘 (눅13:31-33)

바리새인들 가운데에도 예수를 아끼고 그래서 도와주고 싶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왜 없었으랴? 그들이 선의를 품고 예수께 와서 도피할 것을 권한다.
바로 그 선의가 예수를 십자가의 도에서 벗어나도록 유혹한다. 예수는 사람들의 유혹과 권고에 따라 당신의 길을 바꾸거나 취소하지 않으셨다.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계속해서 가야 할 길을 갔을 뿐이다.
선의로 다가오는 사람이든 악의로 다가오는 사람이든 그분의 행선(行先)에 아무 걸림이 될 수 없었다.

 

41. 근본을 닮으라 (고전7:7)

모든 사람이 나처럼 살기를 바란다는 말은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자기 삶이 떳떳하고 자신있지 않고서는 이런 말을 할 수 없다.
그가 뜻하는 '나처럼 살라'는 말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삶의 모습을 닮으라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한 분 그리스도를 참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에 의해서 그분을 위해서 그분의 삶을 살아가는 삶의 근본을 닮으라는 권면이다.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겉으로 하는 일은 저마다 다르지만 속에서 하는 일은 '사랑의 실천'하나로 통일되는 육신의 모든 지체들처럼.

 

42. 어느 쪽을 선택할까나 (말3:23-24)

사람과 사람을 등지게 하는 마지막 장벽이 '세대차이'라는 것일까? 어른들과 자식들이 화목하면 세상은 곧 화목한 세상이 된다는걸까? 그렇다면 세상 끝날까지 사람들이 서로 화목하기는 그른 것일지도 모르겠다.
엘리야가 누군지, 그가 오면 어른들과 자식들을 화목하게 해준다니 그가 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데, 그나마 반가운 것은 야훼의 날이 오기 전에 그가 온다는 약속이다. 다행이다. 그러나 그가 왔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거나 거절 또는 외면한다면 오지 않은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런 사람에게는 엘리야가 오기 전에 무서운 야훼의 날이 닥칠 터인즉 비참하고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43. 위대함과 가련함(창30:9-13)

사람이 자기 욕구에 부림을 받지 않고 욕구를 부리면서 살아간다면, 상황에 따라서 움직이기를 거절하고 상황을 만들어가기로 한다면 어떤 역사를 이룰 수 있을까? 가끔 그런 변이(變異)가 나타나지 않는 건 아니다. 이른바 역사적 대 변혁이라고 부르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배경을 살펴보면 당대의 시대적 상황과 사고방식을 거부하고, 주어진 욕구가 아니라 속에서 신선하게 솟아나는 욕구를 능동적으로 부리면서 제 가슴 북소리로 걸어간 시대적 이단아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기는 그런 이단자의 출연 또한 시대 상황이 빚어낸 산물이요 그래서 이루어진 역사도 갈데없는 '인간의 역사'라고 한다면 더할 말이 없지만, 그러나 그럴 경우에는 '가련한'이라는 형용사 대신 '위대한'이라는 형용사를 써도 되지 않을까?
인간이란, 제가 만드는 위대함과 가련함 사이를 헤엄치는 물고기?

 

44. 때가 되지 않았기에

 인생이란 영문을 알 수 없는 일들 한 복판으로 뚫고 나아가는 배와 같다. 어떻게 저런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는 그런 일들이 사방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세상에 영문 모를 일은 있어도 영문 없는 일은 없다. 일어나는 모든 일이 일어날 만한,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영문이 있어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니 아직 때가 되지 않아서 알지 못하는 것일 뿐인 '영문'을 파느라고 어리둥절해 잇다가 더 큰 낭패를 당하지 말고 그 일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슬기롭게 결정하여 실행에 옮길 일이다.
알아야 할 것이라면 알아야 할 때에 어김없이 알게 된다. 그것은 우주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누가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면 그것을 얻을 '때'가 아직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구 한 사람 제 걸음으로 제 길을 걷지 않는 자 없다. 서두를 것도 없고 망설일 것도 없다.

 

45.깨우침(눅4:40-41)

'깨달음'이라는 것은 달걀에서 병아리가 부화되듯이, 알맞은 때에 이루어져야 한다. 아직 알 때가 되지 않았는데 무엇을 미리 알게 되면 그 '앎'이 오히려 사람을 해칠 뿐이다. 그래서 사랑은 때가 되기까지 만사에 참고 기다리라고 했다.

 

46.이루어지고 있다. (단2:45)

하느님께서는 느부갓네살에게 꿈을 주시고 다니엘에게 해몽을 주셨다. 느부갓네살은 꿈을 꾸었지만 꿈을 꾸었다는 사실만 알았지 자기가 무슨 꿈을 꾸었는지는 몰랐다.
그의 영이 '하늘에 계신 하느님'과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하느님과 통하는 사람이었기에 남이 꾼 꿈의 내용과 뜻까지 알 수 있었다.
꿈의 내용은, 인공(人工)이 조금도 섞이지 않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이 홀연 나타나 그동안 쌓아온 인간들의 번쩍이는 공적을 모두 부수어 제 본성으로 돌아가게 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바야흐로, 느부갓네살의 꿈이 오늘 우리 눈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일까? 아니다. 이미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그런 까닭에 오늘 우리한테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47.나아갈 길을 찾으라 (계9:20-21)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 이다지도 인간이 무지하고 완고하여 무엇이 백이고 무엇이 흑인지를 분간 못한단 말인가?
그렇다! 미안하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사실이 그렇다. 전쟁으로 날이 밝고 날이 저무는, 저토록 길고 어두운 역사의 터널을 통과했으면서도, 여전히 나라마다 '국방예산'이 최우선이요 비밀 무기고는 최신 살상 무기들로 그득 차 있다.
거듭되는 재앙들이 모두 자신이 저지른 과오의 열매인데 그 과오를 고치지 않고 되풀이한다. 인간이 저지르는 과오를, 비유하자면, 열매를 살린답시고 뿌리를 자르는 행위다. 제가 만든 것을 지키고자(소유하고자) 저를 만들어준 분을 무시하고 거절한 것이 인간의 과오라는 얘기다. 나무 가지 위에 올라앉아서 그 가지에 톱질을 하고 있다.

 

48.오늘 하루 (요7:37-38)

숨을 마시면 가슴으로 들어가고 물을 마시면 배로 들어간다. 숨은 하늘이 주고 물은 땅이 준다. 지금 사람의 아들 예수는 땅에 있다. 그래서 사람에게 물을 준다. 누구든지 그가 주는 물을 마시면 그 물이 그 사람 배를 채우고, 거기서 생수로 되어 강처럼 흘러나온다. 예수가 주는 물을 마시면 그 물이 예수의 물로 되어 세상을 향해 흐른다는 얘기다.
수많은 성인들의 삶이 바로 그것이었다.
가슴에는 마음이 살고 배에는 기운이 산다.
하늘 마음으로, 땅 기운으로 그렇게 살고 싶어라, 오늘 하루여! 

 

49. 씨앗 (행13:48-51)

그랬다. 모든 사람이 기쁘게 바울과 바나바의 말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말을 듣기 싫어한 자들과 그들을 미워한 자들이 그들을 환영하고 그들의 말을 듣고 싶어 한 자들보다 수도 않고 힘도 세었다. 그래서 두 사도를 자기네 마을 안디옥에서 쫓아낼 수 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거짓에 의하여 진실이 쫓겨나고 미워하는 자들이 사랑하는 자들을 누른다.
그러나 쫓겨난 사도들에 의하여 복음의 씨앗이 온 땅에 퍼졌다. 그렇듯이, 거짓에 쫓겨나는 진실, 미움에 짓눌리는 사랑이 마침내 파멸에서 건진다.

 

50.평범한 상식을 돌아보라 (행27:9-12)

선장과 선주가 항해의 전문가요 프로라면 바울은 그 방면에 평범한 상식을 가진 보통사람이요, 좋게 말하면 아마추어다. 세상 일이 늘 그래왔지만, 이번에도 결정권을 가진 자(백인대장)는 상식인보다 전문가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또 하나 '대다수의 견해'를 받아들였다.
그 결과, 순풍에 돛을 달고 항구를 떠났지만 유라퀼로라는 태풍을 만나 표류를 시작하여 마침내 살아 돌아갈 희망을 아주 잃게 되었다.
상식의 주장은 위험할 수 있으니 가지 말자는 것이었고 전문 지식의 주장은 위험할 수 있지만 사정이 이러저러하니 가보자는 것이었다.
집안 일이고 나라 일이고 결정권자들이 평범한 상식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지금보다는 훨씬 덜 낭패를 당할 것이다. 내심으로 어떤 의도를 품은 전문가들이 사심 없는 보통사람의 상식을 무시 도는 억압할 때 예외 없이 동티가 나게 돼 있다. 인심(人心)으로 천심(天心)을 어기고서 일이 잘 되기를 바랄 수는 없는 것이다. 

 

51. 모든 것이 이루어졌거늘 (고후12:4-7)

모든 것이 하나에서 나왔다가 하나로 돌아간다. 하나가 여럿인데 여전히 하나다.
사람은 하나다 얼굴이 다를 뿐이다. 저마다 제 얼굴로 살아간다, 공동의 이익 곧 하나의 이익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가 모두요 모두가 하나이니 이를 알고 이대로만 산다면 무엇을 이루지 못할까 걱정하랴?
이미 모든 것이 이루어졌거늘 무엇을 이루지 못할까 새삼스레 걱정할 것인가? 

 

52.인생은 시험(test)이다

학교에서 시험을 보는 것은 학생들을 괴롭히고 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부를 잘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바로 그 시험이 학생들을 지옥으로 몰아넣는다? 어디서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잘못된 것 없다. 시험지옥을 경험하는 것도 공부다. 공부치고는 힘들지만 그만큼 가치있는 공부다. 지옥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낙원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낙원을 한번도 떠나보지 않은 자는 거기가 낙원인 줄 모른다. 그러니 그는 시방 낙원에 있어도 낙원에 있는 게 아니다. 전쟁을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자는 평화가 얼마나 좋고 갚진 것인지를 모른다. 세상에 이른바 악(惡)이 있음은 사람들을 선(善)으로 이끌기 위해서다.
인생은 시험(test)다. 그러니 너무 떨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함부로 살 것은 더욱 아니다. 학생은 시험지를 함부로 다루면 안 된다. 시험관은 그것부터 지켜보고 있다.

 

53.나는 누구인가 (갈1: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갈1:1)

당당하다! 내가 말하는 나에 관한 사실을 인정하고 안 하고는 당신들 일이고, 나는 그에 상관없이 그렇다는 일방선언이다.
이 당당함이 사도 바울을 사도 바울로 살게 했다.
그를 그로 존재케 한 것은 그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아니라 본인에 대한 본인의 생각이었다.
너는 너를 누구로 알고 있느냐? 그것이 너로 나타난 너다. 

 

54. 깨어 있으라 (마13:9-11)

어느 시대에나 진실을 말하는 사람, 진실을 살아내는 사람은 그 시대의 대세에 거역하는 길을 걷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법정에 끌려가고 회당에서 매를 맞고 집권자들 앞에서 심문당할 것을 각오해야 한다. 오히려 그런 일을 당하지 않으면 자기가 과연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진실을 살고 있는지 의심해볼 일이다. 어리석은 자들이 조롱하지 않으면 도(道)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그런 일 당할 것을 각오하라는 말은 미리 걱정하라는 말이 아니다. 반대로 쓸데없는 걱정에 휘말려들지 않도록 정신차려 깨어있으라는 말씀이다. 정신차려 깨어있으면, 자기가 누구인지를 잊어버리고 하지 말아야 할 짓이나 하지 않아도 될 짓을 하는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다.

 

55. 바깥에는 없다 (롬8:31-39)

무엇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로막을 수 있겠는가? 지상의 그 무엇이 쏟아지는 태양에너지를 가로막거나 돌려보낼 수 있겠는가? 그런 것은 없다.
그러나 얇은 눈꺼풀 하나도 태양의 밝음을 어두움으로 만들 수 있듯이 우리 속에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는 '착각'이라는 능력이 있다. 우리가 스스로 착각을 고집하는 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몸에 아무 힘도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감히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그 '아들'을 죽이기까지 한다. 그렇지만 아무리 눈을 감아도 태양의 밝음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착각이 아무리 두터워도 그로써 하나님 사랑에서 떨어져 나올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거나 그 사랑에 우리를 이어주는 '어떤 것'은 결국 우리 안에 있다. 바깥에는 없다! 

 

56.빛이시다 희망이시다.(출20-21)

빛이신 하느님이 먹구름 속에 계신다!
도무지 되는 일이 없고 앞이 캄캄할 때, 거기에 하느님이 숨어 계신다.
도망가지 말고 곧장 먹구름 속으로 들어가라!
거기 빛이 있다.

 

57.하느님 앞에서 (막4:30-32)

 하느님 나라는 거창하게 나팔 불고 선전하는 가운데 비롯되지 않는다. 겨자씨 한 알이 땅에 묻히듯, 소리 없이 소문도 없이 하느님 나라는 시작된다.
겨자씨가 땅 속에서 어떻게 변신하는 지 아무도 모른다. 그것이 땅 거죽 위로 솟아올라 자라고 가지를 뻗어 새들이 그늘에 깃들여도 사람들은 다만 그 모양만 볼 뿐, 그게 어떻게 그리 되었는지를 모른다.
매스콤의 조명을 받으며 요란하게 시작되는 그런 하느님 나라는 없다. 있으면 가짜다.

 

58.구하는 이 (약1:5)

지혜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은 지금보다 좀 더 지혜롭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그런 사람은, 자기 스스로 지혜로워지려 애쓰지 말고 하느님께 지혜를 구하라는 얘기다.
좋은 얘기지만, 지혜의 부족을 느끼지 않는 사람하고는 상관없는 얘기다. 또, 하느님이 자기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하고도 상관없는 얘기다. ⓒ이현주 (목사) <생각대로 성경읽기/자리>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