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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딤전1:9-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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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용인) |
삶을 아름답게 지키려면
디모데후서1:9-14
어떤 집사님이 아들 졸업식에 학교에 가야 하는데 화장품이 다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화장품을 좀 사달라고 하니까 남편이 " 당신처럼 예쁜 여자가 무슨 화장품이 필요해." 라고 했답니다. 그러자 아내가 한참을 배꼽잡고 웃더니 “요즘처럼 험악한 세상엔 이쁜 얼굴 조금 감추고 살아야 한다네요....”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누구나 사람들은 아름다워 지고 싶어 합니다. 특히 여성들은 더 그런 것같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얼굴에 화장을 합니다. 10대는 치장이라고 하고 20대는 화장, 30대는 분장, 40대는 변장, 50대는 위장, 60대는 포장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름다움이란 얼굴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아름다움이 더 고귀한 아름다움이고 신앙의 아름다움은 더 귀하고 무엇보다 삶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보면 참 추하고 더러운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을 보면 참 우아하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이 세상 잠깐 살다 가는데 추하고 더러운 인생보다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신앙인으로 마지막까지 아름다운 인생을 사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오늘 하나님이 주신 본문 말씀을 통해 그 비결을 깨닫고 실천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1. 삶을 아름답게 지키려면 하나님께 대하여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기록할 때는 로마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1:8,17; 2:9). 2차로 투옥이 된 것입니다. 아마 67년 68년 경일 것입니다. 4:6절에 보면 형이 집행될 날이 얼마 남지 않는 때입니다. 64년에 로마시의 대 화재로 인하여 네로가 기독교를 박해할 때입니다. 이 박해를 인하여 순교를 당할 순간에 와 있는 것입니다. 고난을 견디지 못하여 배교하는 사람도 있었고 세상의 악한 세력과 결부되어 고의적으로 기독교 진리를 해치는 이단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자신의 동역자이며 아들처럼 아끼는 후계자인 디모데에게 아름다운 신앙인생을 살려면 끝까지 믿음을 지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5). 믿음을 자신의 이익의 방편으로 삼던 거짓교사들이나 삯꾼 목자들과 달리 불순한 동기에 기초하지 않는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와 외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믿음이었습니다.
당신 거짓교사들이 있었습니다. 2장 18절을 보십시오. 대표적인 사람이 후메내오와 빌레도입니다. 이들은 믿음과 착한 양심을 버린 자들입니다(딤전1:19,20) 망령되고 헛된 것으로 전합니다. 성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부활은 예수님으로 이미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견디지 못하고 믿음을 버린 자들이 있었습니다. 3장 8절을 보십시오.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받은 자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양심에 화인 맞아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경건하게 살려고 하면 박해는 당연히 따라 오는 것입니다.(3:12) 이 박해를 믿음으로 이겨야 합니다. 이것이 아름다움 신앙인생입니다. 배신자, 변절자는 아름다운 인생을 살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요즈음 불륜을 자꾸 미화시켜 아름다운 인생처럼 드라마에서 꾸미는데 사랑하는 아내와 남편을 놓아두고 불륜을 행하는 사람 결코 아름다운 인생을 산 사람들이 아닙니다. 신앙의 불륜 결쿄 아름답지 않습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바울은 어떤 박해에서도 믿음을 지켰습니다(4:7).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장 10절을 보십시오. 사망을 패하고 부활하여 승리하신 분이십니다. 2장 8절을 보십시오. 사망권세를 깨고 죽음에서 일어나신 분이십니다.
끝까지 변질되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이 아름답습니다. 변절자 결코 아름다운 인생이 아닙니다. 나라에서도 충신을 최고로 취급해 주고 후대의 사람들이 존경합니다. 원균 같은 사람, 이완용 같은 사람 사람들이 아름다운 인생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끝까지 믿음을 배신하거나 믿음을 버리는 자들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지난해 통계(2010년)를 보니까 지금도 신앙을 지키려다 순교한 기독교인이 무려 2,175명이나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지키려다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조선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왔다 1866년 9월 2일 27세 젊은 나이로 모래사장에서 박춘권에게 참수형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피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초석이 된다." 는 터툴리안의 말대로 그의 순교의 피는 한국교회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그에게 성경을 받은 토마스를 죽인 박춘권은 나중에 변화되어 장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구경나왔던 12세 소년 하나는 토마스 목사가 던져 준 성경 세 권을 주워 갖고 있었는데, 몰래 숨겨 갖고 있다가 그 중 한 권을 박영식이라는 지방 관리에게 주었답니다. 박영식은 성경을 다 뜯어서 방에 벽지로 발랐고 그의 조카가 집에 놀러왔다가 벽에 바른 성경을 읽고 감동을 받아 예수를 믿었습니다. 후에 평양 숭실전문을 졸업하고 미국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한국인 성서 번역위원의 한 사람으로 성경번역에 큰 공헌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박영식이란 사람의 집은 후에 널다리 교회가 되어 평양 대 부흥 운동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선교사 2만 여명을 보내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다니엘과 다니엘의 세친구의 인생이 얼마나 멋이 있습니까? 왕이 금신상 앞에 절하기를 강요당하지만 그들은 극렬한 풀무불 앞에서도 절하지 않으며 "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단 3:17-18)"라고 고백했습니다. 서울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를 낸 곳이 서소문밖 형장입니다. 예수 믿는 다는 이유로 참수형을 하였습니다. 붉게 달군 부젖가락으로 급소 열여섯 군데를 지져대고 알몸으로 투옥하기까지 했습니다. 여신자의 아들을 데려다 보는 앞에서 난장을 쳐 피를 흘리게 하는 간접고문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배교하지 않고 순교자로서 천국에 갔습니다. 끝까지 신사참배를 하지 않고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의 인생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갖은 회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김일성 공산 정권에 협조하지 안다가 순교한 김관주목사님의 인생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우리는 심각한 믿음의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1999년4월20일 콜로라도 덴버의 고등학교에서 두 학생의 총기 난사로 13명의 학생과 교사가 사망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사건을 저지른 이들은 히틀러의 생일을 맞아, 이런 광기 어린 학살을 감행했다고 합니다. 해리스와 클리볼드는 학생들을 캠퍼스의 한군데에 모아놓고, 한 사람씩 총구를 갖다대며 이렇게 물었답니다. “너는 하나님을 믿느냐?” 이 질문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살기 위해서 “믿지 않는다”라고 대답했답니다. 그러면 해리스와 클리볼드는 음흉한 미소를 띠며 그들을 살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공포 분위기 가운데서도 확실한 신앙의 결단을 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학생의 이름은 캐시 버낼입니다. 그는 죽음의 총구 앞에서도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그래,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신다. 그리고 너희도 역시 하나님의 길을 따라야만 한다.” 이 말을 들은 해리스와 클리볼드는 “네가 믿는 하나님의 곁으로 가라” 하며 총을 쏘았고, 결국 캐시 버낼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있은 후 미국의 십대들 사이에서 엄청난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캐시 버낼의 순교 앞에서 자신들의 비겁함을 한없이 부끄러워했습니다. 남아 있던 학생들 사이에서 자신들도 캐시 버낼과 같은 담대한 증인으로 서야 되겠다는 신앙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급기야 미국 전역의 각 학교에서는 ‘우리도 캐시 버낼의 길을 따르자’라는 운동이 벌어지게 되었고, 캐시 버낼의 순교적 결단을 기념하는 국기 게양대 앞 기도회는 인산인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믿음을 지키는 삶 추하고 초라한 삶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삶은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2. 삶을 아름답게 지키려면 사람에 대하여 사랑을 지키는 것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사랑을 지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사람에 대하여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어려움을 당하면 사람들이 이 사랑을 배신합니다. 1장 15절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감옥에 들어가 있으니까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바울을 버렸습니다. 특히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었습니다(1:15). 17절을 보십시오. 후메내오와 빌레도는 악성 종양처럼 말을 퍼뜨렸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2장 18절을 보십시오.
4장 10절을 보십시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습니다.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알렉산더는 해를 많이 입혔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없이 다 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네시보로는 어떻습니까? 감옥에 갇혀있는 바울을 자주 방문하여 격려해 주었습니다. 바울이 사슬에 매여 감옥에 갇힌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부지런히 찾아가 만났습니다. 에베소 교회에서도 많이 봉사를 하였습니다. 누가는 끝까지 바울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인간관계에서 사랑만큼 고귀한 단어가 어디있겠습니까? 어려울 때 사람은 사랑을 알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1-3)”
사랑에는 자기로부터 시작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이런 사랑은 철저히 이기적인 사랑이요, 자기 욕망에서 시작되는 에로스적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은 이용가치가 있으면 사랑하고 이용 가치가 없으면 버립니다. 사랑에는 상대방으로부터 시작되는 사랑이 있습니다. 상대가 나를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로의 이익을 위하여 아끼는 필리아적인 사랑입니다. 사랑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성경은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할 만한 가치가 없고, 사랑해도 그 보상을 기대할 수 없음에도 먼저 사랑하여 주신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폐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 본성이 사랑이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나셨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4:9-10)" 끝까지 아름다운 인생을 지키려면 이 사랑으로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여야 합니다. 끝까지 사랑을 지킨 아름다운 인생을 산 손양원 목사님을 보십시오.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살인마를 자신의 양자로 삼았습니다. 다미엔 신부는 하와이 군도 몰리카 섬에서 문둥이들과 함께 살기 위해 자신도 문둥이가 되었습니다. 크롬웰 시대, 병사 한 사람이 죄를 지어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사형은 교회당 옆 광장에서 저녁 종소리와 함께 집행될 예정이었습니다. 마침 그 병사에게는 사랑하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여인은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크롬웰 장군을 찾아가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러나 엄격한 장군은 그 여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곧바로 교회로 달려가 종치기에게 오늘밤은 종을 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그 종치기는 귀머거리였습니다. 종치기는 자신의 의무대로 종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사형장에는 종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장군이 이상히 여겨 종탑에 가보니 종 앞에 피투성이의 한 여인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여인은 종소리를 막기 위해 온몸으로 종에 맞선 것입니다. 장군은 감동했고 사형수는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작가 '조창인'의 '등대지기'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주인공 재우는 부모의 사랑을 느껴본 적이 없었습니다. 두메산골 농사꾼이었던 아버지는 특용작물 재배의 실패로 그가 태어나기 석달 열흘만에 제초제 한 병을 삼키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머니는 식모살이하면서 삼남매를 공부를 시켰습니다. 어머니는 부업으로 구슬꿰기를 하였는데 재우는 고등학생이 되어서까지 구슬꿰는 일을 도와 주었습니다.
어머니는‘한 집안에서는 한 사람만 성공하면 된다.’라고 말씀하시며 재우의 형에게 집중했고 주인공은 형의 성공을 위한 조력자로 만족해야만 했습니다. 주인공은 어머니 때문에 괴로웠고, 자신조차도 참을 수 없이 미워졌습니다. 그는 집을 떠나 8년 동안 외딴섬 구명도에서 등댓불을 밝히는 등대지기로 살았습니다. 8년 만에 형은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구명도에 있는 동생에게 맡기고 캐나다로 이민을 가버렸습니다. 행여나 어머니를 다시 데려 올까봐 미국으로 발령이 났다는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응어리진 마음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강풍이 불던 어느날이었습니다. 재우는 등대에 올라가 수리를 하다가 등대에 뚫렸던 구멍으로 벼락을 맞아 하반신 마비가 되었습니다. 추석이라 아무도 그를 구해 줄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등탑 위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셨습니다. 협심증으로 세 걸음만 걸어도 헐떡이는 어머니가 199개의 계단을 올라오신 것입니다. 재우는 번개에 맞아 어머니가 올라오시는 것을 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주인공이 의식을 찾았을 때는 어머니 무릎에서였습니다. 어머니의 무릎에 재우의 얼굴을 올려놓고 손에 빗물을 받아 입가에 대어주었습니다.
사흘이 지나고 나흘째 낮 어머니는 속옷을 벗어 빗물을 받아 주인공의 입에 대 주었고 주인공을 그걸 마시고서 겨우겨우 입을 떼어 어머니에게 `난 이제 됐어요. 엄마 차례예요.‘라고 더듬거리며 말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속옷을 당신의 입술로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팔을 움직일 만한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은 듯, 주인공 쪽으로 마냥 손을 내민 채였습니다. 그 순간, 어머니의 눈꺼풀이 힘없이 닫혔습니다. “엄마‥‥사랑해요. 재우가 엄마를 사랑하는 거 처음부터 알고 있었죠?”이렇게 말하는 주인공을 뒤로 어머니의 얼굴에 고요한 미소가 번졌습니다.
주인공의 어머니는 제 등에 산란해놓고, 부화된 새끼들에게 몸을 마지막까지 주는 어미 거미였습니다. 새끼 거미는 어미의 등에 촉수를 박아 진액을 빼먹으며 자라고, 어미 거미는 자신들에게 전부를 주고 껍질만 남아 버립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죄인인 우리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이 사랑으로 우리가 사람들을 사랑하면 우리는 마지막까지 아름다운 인생을 지킬 수 있습니다.
3. 일에 대하여 사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고 말씀합니다. 이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복음입니다. 13절의 내게 들은 바 바른 말도 복음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이 복음을 위해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9절에 보십시오. 이것을 전하는 것은 거룩산 소명입니다. 우리의 행위를 보고 부탁한 것이 아니고 은혜로 우리에게 맡겨준 사명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이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혔지만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믿은 자는 예수님을 말씀합니다. 그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이방인과 임금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능히 바울을 지켜 주실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복음 전하는 사명을 디모데에게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4장 2절을 보세요.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힘써라고 말씀합니다. 바울 스스로은 어떻게 하는가를 보십시오. 4장 4절을 보십시오. 죽을 때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렇다고 포기한 것이 아닙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달려 간다고 말씀합니다. 면류관을 바라보고 사명을 이루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핍박과 고난을 받자 사명을 포기하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남아 있는 신실한 종들이 있습니다. 지지해 주고 따라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4장 17절을 보십시오. 다 떠난다 해도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사자의 입에서 건져 주십니다. 모든 악에서 건져 주십니다.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해 주십니다. 결국 영광을 돌리도록 해 주실 것입니다. 믿습니까? 우리가 아름다운 인생을 살려면 사명을 지켜야 합니다. 사명이 인생을 아름답게 합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세계 최고 갑부 스타 연예인입니다. 한 해에 우리 나라 돈으로 약 3,600 억 원 정도의 수입을 올리는 사람입니다. 그녀는 불행한 과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녀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어린 시절 엄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슬하에서 자랐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파출부 일을 하였고 9살 때 삼촌에게 처음 성폭행을 당한 뒤로 몇 명의 친척들과 주변인들에게 성폭행을 당했으며, 14살의 나이에 아이를 낳기까지 했습니다. 그녀는 마약을 하기도 했고 비만으로 고통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이렇게 된 그녀의 힘의 원동력은 가난과 아픔을 자신에게 준 하나님의 사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성경을 읽으며 모세를 자신의 모델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네 가지 사명을 말합니다. "첫째, 남보다 더 가졌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사명이다. 둘째 남보다 아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사명이다. 아파 본 사람만이 아픔을 겪는 사람에게 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남보다 설레는 꿈이 있다면 그것은 망상이 아니라 사명이다. 넷째, 남보다 부담되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명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익이나 의무 책임을 뛰어 넘는 사명은 힘이 있습니다.신앙인은 사명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업도, 자녀 양육도, 사회봉사도, 보모 섬김도, 교회 선택과 봉사도...사명으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일평생 이루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좀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평생 사명을 가지고 그것이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가게 하는 것입니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30세 때 "이제 나는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나이였던 30살이다. 더 이상은 어린애 같은 짓과 헛된 일을 하지 말자. 주여, 오직 당신의 뜻만을 생각하게 하소서!" 라고 일기에 기록하고 그녀의 삶을 불태웠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외과 의사이자 부인과 의사인 하워드 A. 켈리 박사는 의과대학을 졸업한 날 밤, "나는 나 자신과 시간과 재능과 야망, 그리고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립니다. 복되신 주님, 주께서 쓰시도록 나를 성결케 하소서. 주님께로 나를 가까이 이끌지 못할 것이라면, 세상적인 어떤 성공도 내게 허락하지 마옵소서." 라고 일기에 기록하고 자신의 평생 목표를 세웠다고 합니다. 조나단 애드워즈는 평생을 다해 이루어야할 사명을 "이제부터 나는 나 자신을 내 것으로 알고 행하지 않는다. 만일 내 능력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일이 아닌 데에 사용하거나, 전심 전력을 기울여 그분을 영화롭게 하지 않으면 나 자신을 위해 일하는 것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스탠리 탬이라는 미국인 사업가가 있습니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20세 되던 해에 사업에 뛰어들었는데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크게 낙심되어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의 마음에 말씀하셨습니다. "실망할 필요가 없느니라. 네 사업을 나에게 넘겨주면 내가 성공시켜 주리라." 그러자 그는 하나님께 서약했습니다. "하나님, 만일 하나님이 제 사업을 맡아서 성공시켜 주신다면 저는 사업하면서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면에서 하나님께 경의를 표하겠습니다." 그는 37달러로 다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사업이 점차 풀려갔습니다. 그는 결혼하고 돈도 벌고 집도 장만하고 네 딸도 낳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그가 하나님께 드렸던 서약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그는 그 서약을 지키기 위해 기도하던 중에 감동을 받아 하나님을 자기 사업의 고참 동업자로 모시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서 그는 아주 과감하게 자기 사업의 51%를 하나님께 드리기로 약속합니다. 그러다가 1952년에 그는 한국의 선교지를 방문하게 됩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묵고 있던 곳에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잃은 영혼들을 생각하면서 애타는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무엇을 하기 원하십니까. 제가 지금보다 선교를 두 배로 더 할까요." 그가 계속 기도하는데 갑자가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에 감동을 주십니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시2:8). 그는 구했습니다. "하나님, 제게 열방을 주옵소서." 그리고는 하나님께 다시 한번 굳은 약속을 드립니다. "하나님, 제 사업의 51%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그 이후에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에 힘입어 사업을 잘 해 나갔습니다.예수님께서 그의 마음에 감동을 주십니다. "스탠리,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이 무엇이지." "예,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스탠리, 100년 후에 가장 크게 남는 투자는 무엇이지." "예, 영원한 것에 대한 투자입니다." "그렇다면 너의 모든 사업을 다 내게 넘겨주지 않겠니." "아니 주님, 이미 51%를 드렸잖아요." "스탠리, 나는 너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을 다 지불했지 않니. 그런데도 너는 너의 모든 사업을 내게 넘겨주지 않겠다는 말이니. 나를 위해 그러는 것이 아니야. 언젠가는 썩어 없어질 너의 사업을 영원한 보물로 만들어 주려고 그러는 것이야." "주님, 감사합니다. 제게 있는 모든 것을 다 드리겠습니다." 그는 정말로 모든 사업을 예수님께 다 드렸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처음보다 4배나 더 큰 공장을 새로 지을 수 있었습니다. 그의 미국플라스틱회사는 계속 번창했습니다. 더 큰 공장을 또 지어야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이미 서약한 대로 미국플라스틱회사의 전체 수익금으로 450명이 넘는 전임 선교사들을 후원했습니다. 그 결과 해마다 2만5천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기로 결단하고 있고 해마다 85개의 교회가 새로 개척된다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3가지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데 그 첫 번째는 매일 세 사람을 예수님께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일생 동안 100만명에게 예수님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해마다 선교사역에 100만달러를 헌금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사명붙들고 삶을 아름다운 명품으로 만들었습니다. 명품만 부러워하지 말고 내 삶을 사명붙들고 아름다운 명품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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