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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엡2:1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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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용인) |
우리의 화평 예수 그리스도
엡2:11-22
사람은 친구를 몇 명이나 사귈 수 있을까요? 옥스퍼드대학의 진화인류학 교수인 로빈 던바(Robin Dunbar)는 대체로 150명 정도라고 추정하였습니다. 이것을 던바 넘버(dunbar's number)라고 합니다. 대뇌의 신피질의 크기와 친구의 숫자가 관련이 있있는데 침팬지의 경우는 30마리가 상한선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알고 지내는 전체 친구의 수는 평균적으로 던바 수인 150명 정도라고 합니다. 교회에서 마음 터놓고 이야기할 친구가 얼마나 됩니까? 건강하게 오래 살려면 친구가 많아야 한다고 합니다. 호주에서 노인들을 대상으로 10년간 추적해온 한 연구에 따르면, 친구가 많은 노인들은 친구가 없거나 적은 노인에 비해 10년 후 사망률이 22% 감소했다고 합니다. 하버드 의대에서 실시한 연구에 따르면, 친구가 많은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대뇌 건강 상태가 양호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2006년 간호사 3000여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친한 친구가 없는 여성은 10명 이상의 친구가 있는 여성에 비해 유방암으로 사망할 확률이 4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좋은 친구가 있다는 것은 인생의 복입니다. 매주 마다 교인들을 만나는데 좋은 친구가 될 수 없을까요?
일평생 살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는데 어떻게 친해 질 수 있습니까?
심리학자들은 4가지 조건에 의해 친해지고 친구가 된다고 합니다.
첫째가 근접(proximity)입니다. 사람들은 먼 곳에 있는 사람보다 가까운 데 있는 사람과 친해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주 만나면 가까워진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유사성(simlarity)입니다. 사람은 비슷한 사람끼리 친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을 한 방에 살게 하고 서로 친해지는 것을 조사해 보니 비슷한 사람끼리 친해지더라는 것입니다. 성격, 기질, 사회적 지위, 경제적 능력, 학교 동문, 같은 지역 출신 등이 더욱 친해지더라는 것입니다.
셋째가 보상(rewardingness)입니다. 아무리 가까운 곳에 살며 늘 접촉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모두 친구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상대가 항상 나에게 친절히 대해 준다든지 칭찬의 말을 던져 준다든지, 도와준다든지 또는 어떤 다른 모양으로 보상을 주면 우리는 그런 상대를 좋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넷째가 외모(physical attractivess)입니다. 성격이나 지능과는 상관없이 오직 상대의 용모에 따라 친해진다는 것입니다. 대학생들 남녀에게 댄스파티를 열게 하고 다시 데이트를 하는가를 조사해 보았답니다. 그런데 외모가 가장 많은 영향을 주더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후광 효과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 가지 좋은 점을 가지고 모든 것을 좋게 보는 것이 후광 효과입니다.
이와같은 인간의 심리적 특징은 좋은 점도 있지만 나쁜 점도 있습니다. 서로 친하게 되면 동종의식이 생겨 자기들만 어울리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게 됩니다. 배타적이 됩니다. 상대를 적으로 삼아 버립니다. 동종의식의 잘못되면 패거리 의식, 지역주의, 이기주의로 발전하고, 그릇된 선민의식, 국주주의, 그릇된 민족주의, 혈통 우월주의, 인종주의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것들이 다툼과 전쟁을 만들어 내고 사회적 갈등과 분쟁을 만들어 냅니다.
오늘 성경이 기록될 당시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그랬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나름대로 선민이라고 우월주의에 사로잡혀있었습니다. 헬라인들은 헬라인들 나름대로 자기들은 문화민족이라고 우월감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유대인은 이방인을 개처럼 취급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지옥불의 연료로 삼기 위해 하나님께서 창조했다고 말합니다. 이방인 산모가 산고로 고통받을 때 그녀를 도와주는 것은 율법을 거슬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만 다른 이방인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유대인 청년이 이방인 처녀와 결혼하거나 유대인 처녀가 이방인 청년과 결혼하면 그 유대인 청년과 처녀의 장례식을 치렀다고 합니다.
반면에 헬라인도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온 세계를 헬라인과 이방인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지식있는 자요, 철학자로 생각하고 그 외는 무식한 사람 문맹인, 야만인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두 부류가 함께 하나되고 화목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보였습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담(partition-wall)이었습니다. 유대인이 들어갈 수 있는 곳과 이방인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을 구분하고 그 담벽에는 '이방인으로서 이 담을 넘어오면 죽임을 당한다'라는 글을 써 놓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 이 담을 헐어 버렸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피의 대가를 지불하시고 막힌 담을 헐어 벌였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막힌 담, 인종과 인종의 막힌 담, 사람과 사람의 막힌 담, 지역과 지역의 막힌 담, 남녀의 막힌 담, 부한 자와 가난한 자의 막힌 담, 자유인과 노예의 막힌 담을 헐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화평을 주셨습니다.
1. 소외된 인류(11-12)/담이 무너지기 전/그때에
우리의 화평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막힌 담을 허시기 전에는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11,12절을 보십시오.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 '그 때에' 에베소 사람들은 6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11-12) ①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무할례 당이었습니다. ② 그리스도 밖에 있었습니다. ③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습니다. ④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었습니다. 언약 밖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⑤ 세상에서 소망이 없었습니다. ⑥ 하나님도 없는 자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주관적 체험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이것을 바울은 한마디로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멀리 있던 너희’라고 말씀합니다. 소외되었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소외되었다는 말입니다. ‘왕따’ 당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막힌 담을 허시기 전까지는 우리가 ①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에서 소외/ 무관심 ② 하나님의 백성의 대상에서 소외 ③ 약속의 축복들로부터 소외 ④ 세상에서 소망으로 소외 ⑤ 하나님의 교제로부터 소외되었습니다.
2. 화평케 하신 그리스도(13-18)/이제는/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심
1) 누가 이 거대하고 견고한 담을 헐 수 있겠습니까?
14절을 보십시오. 우리의 화평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원수된 것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2) 어떻게 헐어 버렸습니까?
(1) 자기의 육체로 헐어 버렸습니다(14).
십자가에서 화목제물이 되어 헐어 버렸습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 진노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습니다. 공중권세 잡을 자를 따르고, 세상 풍조를 따르고, 욕심에 다라 살았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마땅히 그 대가를 치루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단번에 화목제물로 드린 것입니다.
(2) 계명의 율법을 폐지해 버렸습니다.(15上)
율법은 도덕법, 의식법, 시민법 등으로 크게 나눕니다. 예수님은 단번에 화목제물이 됨으로 죄를 지으면 용서받는 제사법을 폐지해 버렸습니다. 이제는 다시 죄의 댓가로 치르는 동물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의식상의 법을 폐하였습니다. 정결 부정에 관한 규정들 구약 제사제도 등을 폐하였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을 예수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케 하였습니다. 믿음으로 하나가 되게 한 것입니다.
(3) 십자가를 통해 원수된 것을 소멸해 버렸습니다(16)
십자가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존재를 만들었습니다. “(갈3:28)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하나니라.” 하나님 앞에서 불평등은 폐지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연합하였습니다.
3)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1)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습니다(13)
(2)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되었습니다(18)
우리 사이의 모든 적대감을 십자가를 통하여 죽으심으로서 새롭게 연합된 인류가 되었습니다.
3.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2:19-22)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었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세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① 동일한 시민(19上) ② 하나님의 권속(19下) ③ 하나님의 성전(20-22)입니다. 우리가 어떤 교회를 만들어야 합니까? 어떻게 교회생활을 하여야 하겠습니까?
1)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로서의 새로운 사회, 교회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19上)
우리는 동일한 시민(19하)입니다. 이제는 나라가 다르고 민족이 다르지만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동일한 시민이 된 것입니다. 영적으로 한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이 된 것입니다. 피부가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지식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부가 다르더라도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를 받는 동일한 시민이 된 것입니다. 로마인이아 유대인이나, 미국 사람이나 일본 사람이나 북한 사람이나 동남아 사람이나 동일한 시민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한 시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새로운 공동체를 탄생시켰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이런 공동체는 없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공동체가 탄생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 공동체입니다. 에클레시아 부름받은 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는 이런 공동체가 없었습니다.
(1) 사람에 의해 통치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에 의해 통치되는 공동체입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통치되는 공동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교회를 "진리의 기둥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리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요17:7).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딤전 3:15)"
(2)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천국이란 어떤 곳입니까? 죽음도 죄도, 슬픔도 눈물도 없는 곳입니다. 이미 우리에게 천국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삶이란 가난도 병도, 고통도 눈물도 죽음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우리는 천국적 삶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영적 치유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배드림으로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됩니다. 기도함으로 질병에서 치유되는 역사를 체험받을 수있습니다. 말씀을 배움으로 참 자유의 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근신 걱정이 물러갑니다. 증오와 미움이 변하여 용서화 화평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 예배드릴 때, 말씀배울 때, 찬양할 때, 기도할 때, 봉사할 때, 전도하며 친교할 때 삶이 치유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는 능력을 체험받아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막 11:17) 교회에 나와 기도함으로 영적, 정신적, 육체적 치유가 있기를 바랍니다.
막힌 담을 다시 세워서는 안됩니다. 지연, 학연, 혈연, 교파, 인종, 성별에 따라 다시 담을 막아서는 안됩니다. 어느 목사님의 친척 장로님이 계셨다고 합니다. 그 가문에서 목사 장로만 30여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모두 경상도 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친척 장로님이 아들과 딸을 두고 살았는데 자녀에 대한 기도 제목이 두 가지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도 했답니다. 첫째는 예수 믿는 며느리와 사위를 얻게 해 달라는 것이었고 둘째는 전라도 며느리와 사위가 되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막상 결혼을 하였는데 아들 딸 모두 이 두 가지 기도 제목이 응답되지 않았답니다. 우리 교회가 분당에 있을 때 한 장애인이 등록을 하였습니다. 그 때 한 돈많은 부자 집사님이 “왜 우리 교회에 저런 성도가 등록해야 하느냐?”고 저에게 불평을 하였습니다. 교회가 계층화 되어서 되겠습니까?
2)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새로운 사회 교회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19下)
우리는 하나님과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계급공동체가 아닙니다. 이익공동체도 아닙니다. 가족 공동체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참으로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공동체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과 한 가족이 될 수 있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우리끼리 형제라고 부르는 새로운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신분이 상승한 것입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아들딸이 된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아들 딸들이 사는 곳입니다.
중세 교회는 이것을 잘못 이해했습니다. 가족 보다는 구조, 제도, 조직으로 교회를 이해하였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가문에 권속"이라고 말씀합니다. 권속(오이케이오스) 하나님의 한 가족이라는 말입니다. 특별한 관계, 생명, 피의 관계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법률적 관계를 넘어서서 생명적이고 살아있는 피의 관계입니다. "(요1:12)영접하는자 곧 그이름을 믿는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아들이란 대단한 특권이며 유업을 받을 자입니다.
교회가 가족같아야 한다는 말은
(1)가족같은 친밀감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가정같이 포근해야 합니다. 가족처럼, 한 식구처럼 한 시대를 서로 사랑하고 위로하고 도와주고 기도해 주면 살아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사업보다는 삶을 위해 있어야 합니다. 선교 사업, 구제사업, 장학 사업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우선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받은 공동체로 삶을 서로 가족처럼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보십시오(행2:42-47).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열심히 기도합니다. 믿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서로 통용합니다. 서로 필요를 나눕니다. 말씀을 통하여 교훈받고 그 교훈에 따라 삶을 나누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설립할 때 설립 취지에 우리가 지향하는 교회의 형태를 세가지로 만들었습니다. 가족교회, 열린교회, 연합교회 형태를 추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란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산 유기적 생명체입니다. 비록 성도 다르고 지역도 다르고 학력도 다르고 재력도 다르지만 교회의 영적 용광로에 들어와 영적 한 가족이 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2)가족같은 책임감이 있어야 합니다.
가족은 서로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문제가 있다고 가족을 버리는 것 아닙니다. 서로의 단점을 받아주고 세워주고 존경해주고 용서해주고 격려해 주면서 사는 것이 가족입니다. 서로 연약한 부분을 감당하는 책임을 가진 식구들이 되어야 합니다. 온전한 교회란 이 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조금은 불완전하여도 서로 가족같이 섬기고 사랑하는 교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우리가 한 가족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 나라 교회 역사 속에서 참 아름다운 가족 공동체의 교회의 모습을 실천한 교회가 있습니다. 1908년에 설립된 금산 교회입니다. 전북에 있는 교회입니다. < ㄱ >자 교회입니다. 남녀를 구별하기 위해 커텐을 쳤습니다. 1920년 커텐을 없애 남녀의 담을 헐러 버렸습니다. 개척한 분은 조 덕삼 장로님입니다. 부자였는데 마부로 이자익이라는 청년이 들어왔습니다. 경상도 청년입니다. 그런데 머슴과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함께 집사 임명되었습니다. 그런데 장로 투표를 하는데 머슴은 장로가 되고 주인은 떨어진 것입니다. 전라도 사람들이 경상도 사람 이자익을 장로로 찍어 준 것입니다. 주인이 아니라 종을 장로로 선출해 준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막힌 담을 헐어버리신 예수님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이 때 주인이 조덕삼 집사가 일어나 "우리 금산 교회 교인들은 오늘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당선될 분이 당선된 것입니다.)참으로 감사합니다." 물론 그후 조덕삼씨도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인 이자익 장로를 신학교에 보내어 목사가 되도록 지원하여 그는 그를 다시 자기 교회 담임 목사로 청빙하여 그를 섬겨 지역 복음화에 헌신합니다. 이자익 목사는 세 번에 걸쳐 장로교 총회장으로 봉사하였습니다. 이것이 모든 담을 헐어 버리는 참된 가족 공동체입니다. 2005년 4월 29일에 대전 신학교에서 이자익 목사님의 전기 출판 식이 있었답니다. 강당에 초만원을 이룬 가운데 조덕삼 장로님의 손자 조세형 장로님(금산 교회 3대 째 장로, 국회의원, 주일대사)이 축사를 한 후 이어서 인사말을 이자익 목사님의 손자인 이규완 장로님(대전 제일 교회 장로, 카이스트 대 고분자 화학 교수)이 하셨다고 합니다. 그는 조세형 장로님 앞에 먼저 머리숙여 인사를 한 후 이렇게 인사말을 하셨다고 합니다. "우리 할아버지께서는 주인을 잘 만나셨습니다. 만약 우리 할아버지께서 주인을 잘못 만났다면 우리들도 없고 우리 할아버지도 안계셨을 것입니다"고 했답니다. 모든 막힌 담을 헐어 버리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셨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합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새로운 가족 공동체입니다.
3)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새로운 사회 교회 공동체이어야 합니다(20-22).
성전은 하나님의 거하시는 처소입니다. 과거 성전에만 하나님이 거하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공동체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고 우리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고 성도의 모임이 거룩한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전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성전의 기초는 이제 모리아 산이 아닙니다. 기초(20)는 사도들 선지자들의 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그들의 교훈을 말합니다. "(고전3:11) 이 닦아 둔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그들이 가르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교훈을 기초로 교회가 세워졌다는 말입니다. 모퉁이돌은 예수님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말은
(1)교회의 주인은 삼위 일체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모퉁이돌은 건물 기초의 일부로, 건물의 본질, 건물의 위치 건물의 배열을 결정합니다. 건물의 벽과 벽이 만나는 지점에 세워지는 것으로 여기서부터 건물의 벽을 쌓아 나가기 때문에 건물의 기초가 될 뿐 아니라 벽과 벽을 연결하는 까닭에 건물의 중심이 됩니다. 여기에 건물의 소유주의 이름을 새겨 건물의 소유권을 표시합니다. 그리스도는 성도와 성도를 연결하여 우주적 교회를 세워 나가게 하는 중심이요 기초이며 그 교회의 소유주입니다. 모퉁이돌은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건물이 되어 서로 연결하여 우주적인 교회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어져 간다(21)는 말은 한 번 짓고 끝난다는 말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지어저 간다는 말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구속의 역사가 계속 진행된다는 말입니다. 성령은 성도들 속에 역사하시므로, 성자는 구원받은 성도들로 구성된 성전의 모퉁이 돌로, 성부는 성도들로 구성된 성전에 거하시는 분으로 교회의 주인이 되어 교회를 이루어 가십니다.
물질이 교회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중세 교회는 성직자가 교회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목사나 장로나 권사가 아닙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 교회이 주인입니다. 처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교회를 세울 것을 말씀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 16:18)" 여기서 내 교회는 베드로의 교회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교회의 기초는 목사님도 초기 개척자도, 장로님도, 돈이 많아 교회를 짓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자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고전3:11에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그리스도라"라고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대하여 주인의식은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주인 행세를 해서는 안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큰 문제들이 무엇입니까? 교회에 갈등이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자기 소유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업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것입니다. 마치 자기 재산 불리듯 목회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전폭적으로 추앙하던 빌리 그래함 목사나, 적극적 사고방식의 로버트 슐러 목사 등이 자식에게 세습을 했고 서울에 유명 교회 목사들이 자식에게 세습을 해서 잘들 하고 있는데 무엇이 잘못되었냐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신차려야 합니다. 교회는 결코 이익집단도 아니고 사기업도 아닙니다. 목사가 회장도 사장도 아니고 장로가 이사도 아니고 교인이 주주도 아닙니다. 중세 교회를 보십시오. 결국 망했습니다. 역사적으로 교회 안에서 성직 세급이 문제된 것은 11세기 초엽 프랑스 교회에서입니다. 귀족가문에서 감독직을 독점하다 보니 어린 소년을 감독으로 세운 일도 있었습니다. 서방교회의 경우 15세기의 교황 인노센트 8세는 자기 형의 사생아를 추기경직으로 임명하기도 했습니다. 성직매매와 성직의 세습화가 극심해지자 12세기의 로마교회는 제2차 라테란(Lateran)회의(1139년)에서 성직자의 독신제도를 채택, 선포했습니다.
성직매매로 엄청난 부를 취득하고, 성직세습으로 교회의 권위를 독점하는 일들이 교회발전에 치명적인 타격이 되고 있음을 알고 교황 펠리기우스(PelagiusⅠ세, 556년-561년)는 성직자는 결혼하였을지라도 자기 자손들에게 교회의 재산을 상속시키지 못하도록 법을 만든 일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나가다는 한국 교회도 목사는 독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법을 만들 줄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런 세습을 하는 목회자들만 탓할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교회에 소속된 사람들의 의식입니다. 정치인들이 잘못되었다고 사람들은 욕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정치인들도 문제가 있겠지만 더 심각한 것은 유권자 백성들입니다. 유권자의 수준이 정치인의 수준인 것입니다. 교인의 수준이 교역자의 수준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피값으로 세운 이 교회는 오직 하나님만 영광을 받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롬 11:36)"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 (딤전 1:17)"
(2)교회는 완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져 간다는 말입니다.
이 땅의 교회는 완전한 교회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루어가야 할 교회입니다. 그 성전은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치와 성장(21)이 이루어 집니다. 새성전의 목적(22)은 하나님의 처소가 되기 위하여 함께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생명력이 없는 것은 문제가 없을 수 있습니다. 무덤에 가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죄인들이 모인 교회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교회를 세우시고 완성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끝까지 이루어가야 합니다. 부족한 사람들이지만 세상을 교회처럼 만들어내야할 사명감을 가지고 세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결국 바벨론은 무너집니다. 그리고 새예루살렘이 임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로서의 새로운 사회, 교회 공동체가 되기를(19上)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새로운 사회 교회 공동체가 되기를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새로운 사회 교회 공동체가 되기를 위해 기도하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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