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고전15:50-58 |
---|---|
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용인) |
부활로 말미암은 성도의 궁극적 승리
고전15:50-58
오늘은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를 깨고 부활하신 부활절입니다. 죽으셨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장차 예수님 재림하실 때 부활합니다. 믿습니까? 포장하지 않고 진실로 믿습니까? 이 시대를 불신의 시대라고 합니다. 믿지를 못합니다. 거짓이 팽배합니다. 서로 믿지 못합니다. 심지어는 부부도 믿지 못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신사가 한 잔 걸치고 집으로 가는 길목에서 갑자기 강도가 튀어나와 길을 막고 섰답니다. "돈 내놔! 그렇지 않으면 각오해라!" "저. 돈. 돈이 없어요." "뭐야? 지금 장난해? 빨리 내놔!" "우. 우리 마누라는 불같은 여자예요. 집 근처에서 강도를 만났다고 하면 믿을 것 같습니까?" 그러자 강도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답니다. "아니 그럼, 내가 오늘 한 건도 못했다고 하면 우리 마누라는 믿어줄 것같냐?" 서로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보이는 인간도 믿지 못하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부부도 믿지 못하겠는데 어떻게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겠냐는냐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말로만 믿는 채 할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뻥이고 사기라는 것입니다. 저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기 전에는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지금은 부활을 확실하게 믿습니다. 우리 성도님은 부활을 믿습니까? 교회에 다니지만 아직도 믿어지지 않으신 분은 “예수는 역사다(리 스트로벨)”이나 “이래서 믿는다(폴 리틀)”라는 책을 꼭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 도서실에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 오늘 바울은 3,4절에서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고전 15:3-4)“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성도의 궁극적 승리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었습니까?
1)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로 죽음을 정복한 완전한 승리를 누리게 됩니다.(54-57)
지금까지 인류가 극복하지 못한 최대의 적은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의 가장 두려운 적은 무엇이겠습니까? 죽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마지막 남는 문제가 죽음의 문제입니다. 사망의 강력한 독화살 앞에 부자도, 권력자도, 미인도, 학자도, 젊은이도, 늙은이도 무너집니다. 누구도 죽음 앞에 예외가 없습니다.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초교파 외국 선교 연합회의 조사에 의하면 24시간에 32만 명이 출생하고 16만 명이 사망을 한다고 합니다. 매시간 7,000명 매분 120명, 매초 2명씩 사망을 합니다. 우리나라도 한해에 25만명이 죽습니다. 하루 685명입니다. 한시간에 28명입니다. 교통사고로만 하루에 26명이 죽는다고 합니다.
누가 그 대상일지 알 수는 없습니다. 다 그 죽음 앞에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건강했던 사람이 병원에 가 건강검진을 받고 죽음의 공포 앞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봅니다. 죽음이 멀리 있었던 것 같았는데 죽음만 보이게 됩니다.
그렇게도 자유를 부르짖던 죽음을 초월하여 살듯했던 싸르트르도 사망을 두려웠했다고 합니다. 1980년 3월 파리의 부르세 병원에서 죽음의 불안과 공포 때문에 병명도 묻지 않고 한 달동안 찾아온 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르다가 죽어 갔다고 합니다. 권력으로 모든 것을 정복할 듯 살았던 마르크스도 사망을 두려워했습니다. 1883년 3월 14일 칼 마르크스가 사망하던 날, 그의 하녀가 다가와서 "저에게 당신의 마지막 말을 남기시면, 제가 기록해 두겠습니다."라고 말하자 마르크스는 "시끄러워, 나가 !" 라고 소리치며 죽어갔고, 나폴레옹은 "나는 불행했다. 프랑스, 군대, 조세핀 ...." 이라며 숨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죽음이 인간에게 어떻게 들어왔습니까? 죽음이 쏘는 것이 무엇입니까?
55절을 보십시오. 사망이 쏘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사망의 승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56절을 보십시오. 죄입니다. 죄로 말이암아 죽음이 온 것입니다. 썩음과 죽음은 죄의 지배의 결과입니다. 죄를 통해서만 사망은 인간에게 권세를 휘두릅니다. 죄가 없으면 사망은 인간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죄는 율법을 통해서만 인간을 정죄하고 지배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었습니다. 죄를 효력을 상실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57절을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정복해 버린 것입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고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도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으로부터 승리한 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늙어 육신적으로 죽지만 주님의 부활로 긍극적으로 승리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전합니다. 57절을 같이 읽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전 15:57)” 부활 주일 우리에게 죽음을 정복하고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죽음을 정복한 완전한 승리를 누리게 됩니다.(54-57)
2)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로 주님 재림하실 때 영생의 부활로 참여합니다.(50-53)
50절을 보십시오. 혈과 육 즉 지금 살아 있는 죄로 오염된 육신은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을 수 없습니다. 썩는 육신은 썩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신이 죽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51절을 보십시오. 잠자는 것 같지만 마지막 나팔 소리가 들려옵니다. 우리 주님이 재림할 때입니다. 그 때 홀연히 주님의 부활한 몸처럼 우리가 신령한 몸으로 변화됩니다.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이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당시 살아 있는 자들도 신령한 몸으로 변화됩니다.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합니다. 사망을 삼키고 이깁니다. 승리의 개가를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가는 죽지만 죽음의 문을 깨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영생의 부활로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믿습니까? 우리는 죽지만 결국 부활합니다. 죽음은 잠자는 것에 불과합니다.
2. 부활을 믿는 성도의 삶
그러면 부활을 믿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1) 부활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어떤 일을 당하여도 신앙이 흔들리지 않고 더욱 견고해져야 합니다. 5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라는 말은 부활을 말씀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하고 우리의 부활이 확실하니 이렇게 살아라는 교훈입니다. 부활장인 15장의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고린도 시는 부유하지만 지극히 타락의 도시입니다. 항구도시였습니다. 이만명을 수용하는 야외극장이 있었습니다. 천명 이상의 매춘부들이 있는 아프로디테 여신전이 있었습니다. 코린티아 조마이라는 말은 고린도 사람처럼 행한다는 말인데 매춘행위를 행하는 사람을 칭하는 말입니다. 술집이 많았습니다. 자연스럽게 그 도시 사람들이 다니는 교회도 문제가 많았습니다. 오늘날 교회처럼 세속화되었습니다. 교회 내 파당문제가 있었습니다(1:11). 게바파, 아볼로파, 바울파, 예수파 등 파당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첩을 범하는 도덕적 타락이 있을 정도록 교회 내에서도 성적으로 문란하였습니다. 교회 문제를 세상 법정에 고소했습니다. 목회자의 권위를 무시하고 은사로 교회의 질서를 깨뜨리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결혼 이혼 문제, 제사 음식 문제, 예배의 질서문제 등이 있었습니다. 부활에 대한 그릇된 사상이 있었습니다. 부활신앙을 흔드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30,35절을 보십시오. 무엇보다 1세기 교회가 그렇듯 갖은 핍박과 고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현대 교인들이 처한 상황이나 비슷합니다. 이런 것을 보면 신실한 신앙인들의 부활신앙이 흔들리지 않겠습니까? 아버지가 교회에 다닌다고 합니다. 어쩌다 가정예배도 드립니다. 교회에 나가면 거룩한 것처럼 보입니다. 잘 치장합니다. 화장합니. 분장합니. 변장합니다. 위장합니다. 포장합니다. 그런데 입에는 쌍욕을 달고 다닙니다. 술먹고 주정을 합니다. 날마다 부부싸움을 하여 집안이 편할 날이 없습니다. 밤새워 컴퓨터 게임이나 합니다. 회칠한 무덤같습니다. 결국은 끝장이 납니다. 아이들이 이런 아버지가 믿는 부활을 믿겠습니까? 흔들립니다. 오늘날 언론에 보도되는 교회의 치부들을 보면 어떻습니까? 부활신앙에 회의가 생깁니다. “천국이 있다면 저렇게 할까? 부활이 있다면 저 정도 수준일까?” 신앙이 흔들입니다. 우리를 둘러싼 사회 환경은 어떻습니까?
오늘날 자연과학과 역사 비평의 합리적 사고를 추구하는 현대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역사 속에 실제적으로 일어난 유일한 사건으로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초대 교회의 신앙의 산물로서 인간의 창작에 의해 채색된 신화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학적 사고의 기초가 되는 비평의 원리, 유추의 원리, 상관의 원리에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과학 문명이 발달되지 않은 당시 제자들의 신앙 고백적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에 의하여 신화적으로 꾸며졌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부활에 대한 의심은 크게 네 가지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죽음의 역사성, 둘째, 부활 기사의 신빙성, 셋째는 빈무덤의 역사성, 넷째는 부활 후 출현의 역사성입니다. 결국 부활은 역사 속에서 일어난 실제적이고 유일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가설을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일시 기절했을 뿐이며 장사를 한 후 정신이 되돌아와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여인들이 어두운 새벽길에 잘못 찾아서 빈 무덤을 보고 주님이 부활한 것으로 오해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 옮겨 놓고는 부활했다고 거짓을 퍼트렸다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었는데 돌아가신 후 죄송한 뉘우침에 부활을 말하신 것을 굳게 믿고 심히 피곤하여 머릿속에 그리다가 마침내 환상을 보고서 이것을 실제인양 퍼트렸다는 것입니다. 바벨론 신화, 동방신화에 나오는 부활설을 예수님께 적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했다는 것이 사기이고, 환상이고, 꾸며낸 이야기이고, 신화일까요? 기절하였다가 다시 일어났겠습니까?
과학적 증명만 꼭 사실을 입증하는 방법은 아닙니다. 법적-역사적 증명도 있습니다. 법적 증명은 구두증언과 문서상의 증거 그리고 증거물에 의존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수많은 증거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성경의 증언이면서 역사적 사실입니다. 빌라도도 '빌라도 보고서'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대하여 상세하게 기록하였습니다. 초기의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그는 메시아였다. 우리 유대인들 중의 지도층 사람들이 그를 고소했기 때문에 빌라도는 그를 정죄하여 십자가의 처형을 받도록 했다."라고 기록했고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도 "이 이름의 창설자인 그리스도는 티베리우스의 통치 기간 중에 총독 빌라도에 의해 처형되었다."라고 기록함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역사적 사실인 것을 확실하게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여인들이 무덤을 잘못 찾아가서 빈무덤을 보고 착각했겠습니까? 예수님의 묘지는 공동묘지가 아니라 개인 묘지이기에 찾기에 쉬웠습니다. 여인들이 무덤의 위치를 미리 확인하여 두었습니다.(눅23:55). 제자들이 시체를 도둑질하여 옮겨놓고 거짓으로 부활했다는 소문을 퍼뜨렸겠습니까? 그럴만한 이유가 없습니다. 잡히시던 현장에서 도망하고 주님을 부인하던 제자들입니다. 또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 부활을 전했을 때, 믿지 않으려고 확인까지 하려던 제자들입니다. 설혹 그렇다 하더라도 제자들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순교하였는데 한결같이 거짓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버렸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너무 그리다가 그만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고 헛소리 한 것입니까? 여러 사람이 일시에 환상을 보고 실제적 사건으로 오인했다고 생각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후, 40일간 무려 11번 나타나셨고 갈릴리 지정된 산 위에서는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나타나셨습니다. 확실한 증거는 부활을 목격한 예수님의 가족의 변화입니다. 예수님의 가족과 친척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요7:5) 미쳤다고 했습니다.(막3:21) 그러나 그들은 부활을 목격하고 그들의 삶은 변하였습니다(행1:14) 야고보는 야고보서를 기록했고 유다는 유다서를 기록했습니다. 회의론 자들이 회심한 것입니다. 핵심적인 사회 구조가 변해 버렸습니다. 희생제사, 율법, 안식일을 기반으로 하는 유대 사회가 변했습니다. 1500여 년 동안 이어온 안식일이 예수님이 부활한 날로 예배가 바뀌었습니다. 바벨론, 앗시리아, 페르시아 등에 유대인들은 박해를 받으면서 이것을 지킨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유대를 지배한 민족은 사라졌지만 유대인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어떻게 민족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이 사회 구조가 바뀔 수 있겠습니까? 로마가 부활신앙으로 정복되었습니다. 교회가 어떻게 채 20년도 되지 않아 로마의 황실까지 들어가 로마의 권력을 지배할 수 있겠습니까? 부활 밖에 다른 설명이 없습니다.
3절 이하를 보십시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였습니다. 게바에게 열두 제자에게 오백여 형제에게 보이시고 바울에게 보이셨습니다. 이 말씀이 기록될 당시 대다수 살아있었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우리의 믿음도 뻥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어떻게 변해고 교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해도, 가정에 어떤 일이 다가 온다 해도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2) 부활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부활할 것을 확신을 가지면 주의 일에 힘쓸 수밖에 없습니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라고 하는 책을 쓴 모리 교수는 운동세포가 파괴되어 가는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사람들은 모두 다 죽게 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네. 만일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진실로 믿는다면 사람들은 금방 딴 사람이 될 걸세.'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부활만 확신한다면 우리 인생은 새로워질 것이다.”라고요. 유명한 수학자요, 과학자요, 철학자였든 파스칼은 팡세에서 "천국! 이것은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도박이다! 그냥 우리가 포기해버리기에는 너무나 어마어마한 이것은 도박이다." 파스칼은 수학자이니까 계산을 했을 것입니다. "천국이 없어도, 천국을 믿고 살았든 나에게 별로 손해볼 것은 사실은 없다. 그러나 천국이 정말 존재했다면, 준비만 했었으면 갈 수 있었든 천국, 그런데 그 천국을 내가 놓쳐버렸다면 이것은 큰일이다. 이것은 놓쳐버리기에는, 이것은 그대로 지나치기에는 너무나 어마 어마한 도박이다."
사람들은 흔히 죽음을 인생의 끝이라고 말합니다. "죽으면 다 끝났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뱃속에 있는 아니가 세상에 나오는 것이 끝이 아닙니다. 모태의 삶은 끝이지만 새로운 세계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의 삶은 끝이지만 또 다른 세계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벌레가 고치가 되고 고치가 다시 나비로 태어나는 것처럼 우리 인생을 죽음을 통하여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모든 일의 일꾼은 세 종류입니다. 첫째는 자신을 위하여 일하는 자, 둘째는 일을 위하여 일하는 자, 셋째는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자입니다. 사명자는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일상의 삶 속에서 주님께서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여 일해야 합니다. 내 일이 아니라 주의 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녀를 양육하는 일,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 사업하는 일, 교회에서 봉사하는 일 등을 내 일, 목사님의 일, 사장님의 일이 아니라 주의 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명의식입니다. 더욱 힘쓰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욱 힘쓰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자녀를 정죄하고 가르치려고만 하지 말고 나에게 적용하여 내 내부의 더러운 것을 도려내는 수술도구로 사용하는데 힘써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믿음 좋기로 소문한 두 집사님이 차를 타고 출장을 갔답니다. 친하지는 않지만 교회에서 서로 얼굴을 보아 알고 있었답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한 집사님이 빵 2개와 우유 하나를 사왔답니다. 한 집사님이 그것을 보고 “빵은 나누어 먹으면 되는데 우유는 어떻게 하려는걸까?”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빵과 우유를 혼자 다 먹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 믿는 집사가 이렇게 할 수 있나라는 생각을 한 집사님이 집사님께 말씀했답니다. "나 요즘 경건의 시간을 가지는데 오늘 아침 읽은 말씀이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라는 말씀 이었습니다. 그러자 “저도 오늘 경건의 시간을 가졌는데요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말씀을 나에게 적용하며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부모님을 섬기는 것 주의 일입니다. 힘써야 합니다. 손해되는 것 아닙니다. 효도하는 자식들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도 보면 효도하는 집사님들 참 잘 되는 것을 봅니다.
겉으로는 참 효도를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여집사님이 계셨답니다. 시어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 여행을 보내 드려야 한다고 여행을 보내 드렸습니다. 시어머니는 우리 며느리같은 아이 없다고 입에 침이 마르지 않도록 칭찬하였답니다. 그런데 시어머니가 갑자기 예수님의 빈무덤있는 곳에서 갑자기 돌아가셨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며느리는 울고불고 난리를 치며 DHL 특급배송으로 일분일초도 지체하지 말고 집으로 속히 보내 달라고 닥달을 했답니다. 사람들은 며느리가 얼마나 슬펐으면 하며 그 효심에 감동하였는데 이상하게 여긴 며느리의 친한 친구 집사님이 물었답니다. "집사님, 속으로는 시어머니 되게 싫어했잖아?" 그 때 며느리 집사님이 말했답니다. '그러니까 며칠도 지체할 수 없었지. 거긴 예수님이 부활하신 곳이잖아? 다시 부활하면 어떻게 해'
우리 우리에게 맡겨진 주의 일 무겁고 힘들지만 때로는 자존심 상하고 모든 것을 다 떨쳐 버리고 싶지만 힘쓰고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부활의 관찰자가 되지 말고 참여자가 되어 힘써야 합니다. 냉소주의 자가 되지 말고 확신을 가지고 힘써야 합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힘써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수고하는 것 중에는 헛된 것들이 있는 반면에 영원히 헛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부활이 없으면 (고전 15:12-19) 이 땅에서 하는 모든 것은 허무한 것일 것입니다. 죽음으로 끝나 버리는 공허한 것일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게 된다고 말씀합니다.(17),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 되고 만다고 말씀합니다(14,17). 모든 사람 가운데서 우리는 더욱 불쌍한 자가 된다(19)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부활이 있음으로 내세가 있음으로 천국이 있음으로 주님을 위한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주님을 위해 살다가 죽는 죽음은 그 어떤 형태를 가지고 있는 죽음일지라도 복있는 죽음이고 영광스러운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 10:42)"
우리가 교회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수고하는 모든 수고는 헛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면류관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시험을 참는 자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약1:12). 사명을 다 감당한 사람에게는 의의 면류관(딤후4:8), 믿음의 정조를 지킨 사람에게는 썩지 아니하는 면류관(고전9:25), 순교자에게 순교자의 면류관(계2:10), 목자들에게 영광의 면류관(벧전5:4), 영혼을 구원하는 자에게 기쁨의 면류관(살전2:19,20), 영적인 승리자에게 자랑의 면류관(살전2:19)을 준비해 놓고 있습니다.
눈물 흘리며 고생하는 것 언젠가 우리의 눈물을 씻어 줄 날이 오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 21:4)"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11.4.24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