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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19:7-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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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용인) |
말씀이 주는 유익
시편19:7-11
우리 교회 교인들은 지혜와 매너를 동시에 갖추고 있어 예배 시간에 핸드폰이 울리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매너와 지혜가 없는 교인들이 많이 모인 교회에서는 예배 시간에 핸드폰이 자주 울린답니다. 한 시골 교회 담임목사님이 할머니들이 많기 때문에 예배시간에 핸드폰을 가져 오시지 말라고 누누이 광고를 했답니다. 그런데 도시에 나가 있는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어머니가 걱정이 되어 핸드폰을 사주고 어디에 가든지 꼭 가지고 다니라고 신신 당부를 받은 할머니가 어디에 가든 핸드폰을 챙겼답니다. 이 할머니는 교회에 갈 때 성경은 안 챙겨도 핸드폰만은 꼭 챙겨 갔답니다. 목사님이 하도 강조를 해서 핸드폰을 가지고 가지 말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또 깜박 잊고 핸드폰을 가지고 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설교 시간에 핸드폰이 울린 것입니다. 컬러링을 해 놓아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노래 리듬이 울렸답니다. 성도들이 배꼽잡고 웃고 있는데 목사님이 내가 그렇게 신신 당부하였는데 말을 듣지 않고 왜 예배 시간에 핸드폰을 가지고 들어 왔느냐고 야단을 쳤다고 합니다. 할머님이 얼마나 무안하겠어요. 나이들면 자주 잊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진짜 꽃은 시드는 것처럼 어쩔 수 없는 것이 인생이 아닙니까? 이 때 어떤 목사님처럼 우리 “날 좀 보소” 노래 한곡 부르고 설교 들읍시다라고 하며 여유를 가졌으면 좋았을텐데 할머니가 잊어버리고 핸드폰을 가져온 것을 목사님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야단을 친 것입니다.
갑자기 예배당은 써늘해졌고 할머니는 쥐구멍이라도 찾으려고 하는데 강대상에서 또다시 핸드폰이 울렸답니다. “늴리리야 늴리리야...”라는 컬러링 소리였답니다. 범인은 목사님이었답니다. 60대인 목사님도 깜빡 잊고 호주머니에 핸드폰을 넣고 강대상에 올라온 것입니다. 온 교인들이 목사님이 어떻게 하시는가 주시하고 있었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핸드폰을 열어서 전화를 받더라는 것입니다. "예, 하나님 말씀하시지요. 잘못했습니다."
남에게 말하고 가르치기는 쉬워도 자신이 실천하기란 참 쉽지 않습니다. 다음 주 가족별 성구 암송 대회가 있으니 성경구절을 외우라고 책자를 만들어 드리고 여러 차례 광고를 하였습니다. 많이들 외웠습니까? 저도 강조하며 광고를 했지만 많이 외우지 못했습니다. 주변에 보니 많이 외우신 분들도 있습니다. 영어로 외우시는 분들도 있다고 합니다. 아직도 일주일 남았습니다. 포기하지 마시고 자녀들과 이번 기회에 성경을 외우는 아름다운 신앙 추억을 만드시기 바랍니다. 왜 우리가 성경을 읽고, 듣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암송합니까?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운 디모데에게 성경의 유익에 대하여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 3:16)” 다른 책과 달리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즉 영감을 받아 기록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무엇보다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딤후3:15)”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책이 인간을 구원시키는 지혜가 담겨있겠습니까? 성경에는 구원의 지혜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딤후 3:17)”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구약 성경에도 말씀의 유익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지혜의 사람이었습니다. 40년간 왕으로 있으면서 삼권을 휘두른 사람입니다. 부와 권력과 명예, 지혜를 가지고 산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어떤 것보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성경이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소성시켜 주십니다.
말씀이 우리게 주시는 유익을 7절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켜주십니다. 9절까지에서 율법은 여섯 가지 이름으로 달리 표현되어 있습니다. 모세 오경을 말하지만 넓은 의미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모두 동의어입니다. 인간을 위한 말씀의 다양한 기능을 보여 줍니다. 완전하다는 말은 흠없고, 점없는 제물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성경의 충족성(充足性)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영혼을 소성시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완전하다는 말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제물이 되어 우리를 의롭게 하신 우리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혼을 살려 줍니다. 말씀만이 완벽하게 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책도 교훈도 영혼을 소성시키지는 못합니다. 영혼이 사는 것만큼 귀중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습니다. 육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죽으면 지옥과 천국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자와 나사로 비유를 통하여 확실하게 말씀해 주시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진화론자들이나 유물주의 자들은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다름없이 원소로 구성되어 영혼이 없다고 합니다. 의식이나 정신작용은 단지 물질의 부수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보이는 물질이 실재의 전부이고 궁극적인 실재는 '물질'이라고 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으며 영혼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인간의 감정과 마음까지도 물질 작용에 의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있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셨고 인간을 창조했다는 사실을 믿고 있습니다. 인간의 기원이나 우주의 기원에 대하여 진화론은 가설을 말하고 우리 신앙인은 믿음을 말하고 있는데 어떤 학설이 더 합리적이겠습니까?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비행기가 우연히 되었다는 말과 누군가 고도의 지적 능력이 있는 사람이 설계하고 만들어 졌다는 말과 어떤 것이 더 타당하겠습니까? 원숭이가 인간이 되었다는 말과 인간은 처음부터 고도의 지적 설계자인 하나님이 창조하여 인간으로 존재하였다는 말 중에 어떤 것이 더 합리적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흙으로 만들어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니까 생령이 되었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네페슈, 루하흐, 퓨슈케, 프뉴마’를 불어 넣으신 것입니다. 동물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영적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 영혼이 있습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도 있는 것입니다. 바람이 보이지 않는다고 바람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보이지 않는다고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현상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바람이 보이지 않지만 낙엽이 날리고 나무가 흔들리는 것을 보면 바람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혼은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며 결코 물질로 환원될 수 없는 비물질적 기본요소가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1900년에 호기심 많은 덩컨 맥두걸이라는 이름의 이 의사는 영혼이 존재하면 영혼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를 실험해 보았답니다. 임종을 맞는 결핵환자를 특별히 만든 저울 위에 올려 놓고 죽기를 기다렸답니다. 3시간 40분이 지난 뒤 환자는 마지막 숨을 내쉬었고 맥두걸은 그 순간 "눈금 막대가 분명한 소리를 내며 아래 칸으로 뚝 떨어진 후 다시 올라오지 않았답니다. 줄어든 무게는 0.75온스(약 21g)였답니다. 그래서 영혼의 무게가 21그램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영혼이 무게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영적 존재로 창조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영혼의 만족함을 누리지 못하면 무엇을 하든 공허합니다. 영원한 세계에 대한 관심이 있습니다. 심리학자 헤르만 파이펄은 심상 투사 테스트를 해 본 결과 "쉰을 넘은 사람에게 잠재해 있는 가장 기본적인 관심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몰두"였다고 합니다.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입니다. 죽음으면 끝이 아닙니다. 영혼이 사는 영원한 세계가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우리 영혼이 영원히 사는 세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믿으면 영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무엇이 알려 주십니까? 하나님의 말씀 성경입니다. 성경만이 이 진리를 알려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물은 말씀을 말합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말씀은 영혼이 구원받는 객관적 요소이고 성령은 주관적 요소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옵니다. 말씀을 들을 때 성령님께서 은혜를 주어 말씀을 깨닫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고 중생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새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우둔한 자에게 지혜를 줍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유익이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에게 지혜를 주십니다. 여기서 '우둔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페티'는 일반적으로 무엇이든 믿는 경향이 있는 순진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말씀을 통해 지혜를 얻으면 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지혜를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투자를 하고 공부를 합니까? 지혜에는 크게 두 가지 지혜가 있습니다. 인간의 이성을 기반으로 하는 상대적 지혜가 있습니다. 단순한 지식이 아닙니다. 폭넓은 독서를 통해 얻습니다. 열린 자세로 토론을 통해 얻습니다. 직접 경험을 통해 얻습니다. 성찰을 통해 얻습니다. 그런데 이 지혜는 유익을 주는 지혜가 있고 꾀로 써먹는 지혜가 있습니다. 선하게 써 먹으면 자신과 타인에게 유익을 주는데 이기적으로 써먹으면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손해를 끼칩니다. 옛날에 동네에서 똑소리 나는 똑순이 할머니가 계셨답니다. 아들이 함께 살자고 하는데 가야 식모살이 할 것같아 가지 않았답니다. 며느리도 똑 소리 나는 며느리였는데 어머니를 모셔야 될 것같아 같은 꾀를 내어 어머니를 설득했답니다. 그런데 듣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프다고 한 달만 손자를 돌보아 달라고 간청하였답니다. 아들도 아내가 아프다고 오시라고 사정 사정하여 서울에 올라왔답니다. 택시를 탔는데 만원이 나왔답니다. 할머니가 택시를 내리면서 7800원을 내시는 것입니다. 운전기사가 할머니에게 정중하게 만원이라고 말하자 할머니가 "야 이놈아 2,200원부터 시작했잖아. 누굴 속이려고 해!"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아니 그것은 기본요금이라고 설명을 하니까 더 주는 것이 아니라 2800원을 내 달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만원이라고 계속 말하니까 할머니가 계산을 하여 말하기를 화를 내면서 "야 이놈아 너랑 같이타고 왔잖아!"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아들 집에 가서 보니 며느리가 아쁜 것이 아니었습니다. 며느리가 직장에 다니기 위해 아들 며느리가 꾀를 낸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할머니도 똑 소리 나는 지혜로 꾀를 내었답니다. 말을 가르쳐주는데 그림책을 보여 주며 닭을 가리키며 손자에게 물었답니다. “이게 뭐지?” 손자에게 가르쳐주기를 “달구새끼”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이번에는 토끼를 가리키며 “퇴끼새끼”가르쳤답니다. 강지를 “개새끼”로 가르쳤답니다. 며느리가 집에 와서 이렇게 말하는 아들을 보고 화를 벌컥 나서 “누구한테 그렇게 나쁜 말버릇을 배웠어?’라고 하자 아이가 “할마시”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며느리가 두 손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성에 기반을 둔 지혜들이 있습니다. 이 지혜는 한계가 있습니다. 자기중심으로 모든 것을 봅니다. 360도를 보지 못합니다. 아집과 편견의 늪에 갇히기 쉽습니다. 때로 그 지혜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이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도구로 쓰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지혜를 가졌다 해도 이런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영적 세계에 대하여 알 수 없습니다. 얼마 전 신문을 보니까 스티븐 호킹 박사가 천국과 지옥은 없고 죽음을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동화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우주는 신이 창조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우주의 기원으로 여겨지는 대폭발인 ‘빅뱅’이 신적 존재의 개입이 아닌 중력의 법칙에 의해 불가피하게 발생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또 외계 생명체가 존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외계 생명체가 존재하지만 접촉은 피하라고 친절하게 권면도 했습니다. 이렇게 연구하는 것을 우리는 상대적 지혜라고 말합니다. 이성을 기반으로 하여 가정을 세우고 연구하여 어떤 학설을 발표할 수 있습니다. 원리를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신학적 용어로는 일반계시, 자연계시라고 말합니다. 다윗도 시편 19편 1절에서 6절까지 그 말씀을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엘로 나옵니다. 7절부터는 '여호와'로 나옵니다. '엘'은 온 우주의 창조자이심을 나타내는 이름입니다. '여호와'는 언약의 하나님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1-6절까지는 인간의 이성으로 탐구할 수 있는 자연 계시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지혜로는 하나님의 세계를 완전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영적 세계에 대한 계시를 해 주었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절대적 지혜라고 합니다. 계시를 기반으로 한 지혜입니다. 특별계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습니다. 천지 창조를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가장 가치 있는 삶에 대하여 알 수 있습니다. 죽음 후의 세계를 알 수 있습니다. 역사의 종말을 알 수 있습니다. 행복한 삶의 원리를 알 수 있습니다. 과학보다 더 큰 지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존재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분명하게 알려 줍니다. 어떻게 알려 줍니까? 8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순결하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라'는 주로 '깨끗한'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때로 '빛나게 하다'라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아 6:10;사 49:2). 여기서는 빛나게 한다는 의미가 가깝습니다. 깨끗한 유리창이면 밝이 환하게 보이듯 순결하게 함으로 하나님의 세계를 밝게 보게 하는 것입니다. 중생함을 받으면 영안이 열립니다. 그래서 눈이 뜨이는 것입니다. 참된 진리를 이해할 수 있게 하고 선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합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을 기쁘게 해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유익이 무엇입니까? 8절을 보십시오.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정직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솨르'는 옳고 바른 것을 의미합니다. 옳고 바르기 때문에 마음에 진정한 기쁨을 줍니다. 사람은 그릇되고 바르지 못한 것을 통해 기쁨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순식간에 살아집니다. 신문을 보니까 스트로스-칸 국제통화기금(IMF) 전 총재가 '성폭행 미수범'으로 수갑을 차고 잡혀가는 모습이 실렸습니다. 차기 대통령감으로 꼽히던 사람입니다. 순간적 기쁨을 누리기 위해 인간들이 얼마나 허무하게 살아갑니까? 기쁨은 옳음 속에 갇혀있을 때 진정한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 진정한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재미를 좇는 시대입니다. '심심한 천국보다 즐거운 지옥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꿀 냄새를 맡고 몰려든 파리 때처럼 넋을 잃고 쾌락에 파묻히다가 날개까지 젖어 버려 다시는 날지 못한다 해도 그 속에 살기를 좋아합니다. 사람을 파괴하는 가장 강력한 욕망 중의 하나는 쾌락입니다. 쾌락은 마약 성분이 있어 계속 유지하려면 쾌락을 주는 것들을 끝없이 찾아 다녀야 하고 더 강력한 것을 요구합니다. 쾌락은 사람의 손에 노예가 되기를 원치 않고 사람을 노예로 삼고 싶어 합니다. 쾌락의 순간은 가장 아름다운 도취요, 혼신을 맡기는 행위가 될 수 있어 그 안에는 시간도 세월도 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쾌락은 쾌감만 주는 것이 아니라 허탈을 늘 꼬리표로 달아 줍니다. 양심을 외출시키는 쾌락은 이슬방울처럼 덧없고 결국 상처에 소금을 뿌리듯 욕망의 덧에 방치되면 삶은 파괴되고 맙니다. 돈으로 쉽게 재미를 사고 쾌락으로 지루함이 추방될 것같지만 쾌락은 임시적인 아편의 역할을 할 뿐 습관이 되면 파멸의 독약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쾌락은 갈수록 약해지고 쾌락 욕구는 갈수록 강해져 다시 권태와 공허를 채우기 위해서 강도 높은 파괴적인 방식으로 쾌락을 추구하지만 쾌락은 신기루와 같아 늘 강박관념과 공허감을 주는 가짜 신에 불과합니다.
말씀을 떠나 기쁨을 추구하는 삼손을 보십시오. 얼마나 비참하게 됩니까? 말씀을 떠나 쾌락만 추구하는 소돔과 고모라를 보십시오. 말씀을 떠나 쾌락의 늪속에 빠진 노아 시대를 보십시오. 진정한 즐거움은 말씀과 함께 살 때 누리는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할 때 하나님은 혼돈과 공허 속에서 말씀으로 질서와 채움을 주셨습니다. 말씀으로 무질서한 세계에 질서를 주시고 공허한 세상에 채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만족해 하셨습니다. 말씀을 떠나면 다시 혼돈과 공허가 찾아 옵니다. 노아 시대가 그랬고, 소돔과 고모라가 그랬고, 애굽 시대가 그랬고 바벨론 시대가 그랬고 로마 시대가 그랬습니다. 말씀을 떠나면 오늘의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영적 무질서를 바로 잡아 주셨고, 인생의 공허를 몰아 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오늘도 말씀으로 감화 감동을 시키며 공허를 몰아내고 질서를 회복시켜 주시고 있습니다.
말씀을 붙들면 인생의 공허함이 살아집니다. 절망에서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한계 앞에서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기쁨은 소비의 기쁨, 성취의 기쁨, 나눔의 기쁨, 누림의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진정한 성취의 기쁨, 주는 기쁨, 누리는 기쁨을 줍니다. 성취의 기쁨보다 오래가고 더 즐거운 것은 주는 기쁨입니다. 주는 것보다 더 기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은 누림의 기쁨입니다. 이미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 모든 죄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용서를 누려야 합니다. 이미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우리는 천국 백성이 되었고 이 땅에서 천국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천국같은 생활을 누려야 합니다. 이 즐거움을 소유한 자들은 능욕을 받아도 기뻐했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행 5:41)"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도 즐거워했습니다.
바울을 죽을 지라도 기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빌 2:17)" 스데반은 순교를 당하면서도 천사의 얼굴을 하고 죽습니다. 마게도냐 교회는 환난의 많은 시련 극한 가난 가운데서도 넘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고후 7 : 4).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여호와를 인하여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유의 기쁨 정도가 아닙니다. 도덕적으로 베푸는 것으로 오는 기쁨이 아닙니다. 존재의 기쁨이고 영적인 기쁨이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령한 기쁨입니다. 신앙 생활하면서도 이 기쁨이 없이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인이 되어서도 이런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기뻐하지 못하는 것은 죄입니다. 단테의 { 신곡} 에 보면 지옥 맨 밑바닥에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무슨 죄를 짓고 여기 왔느냐?"고 물으니까 안내하는 사람의 말이 "다른 죄가 아니라 이 사람들은 세상에 살 때 믿는다고 하면서 기쁘게 살지 못하고 늘 우울하게 한숨만 쉬며 산 죄 때문에 여기에 왔다"고 하더랍니다. 신앙인이란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무신론적 철학자 니체는 본래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지만 무신론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예수를 믿을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생활에서 기쁨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에서 한평생을 산 슈바이쳐 박사는 "물 없는 강처럼 기쁨 없는 그리스도인, 기쁨 없는 신앙, 기쁨이 없는 사랑이 세상을 피곤하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그 어려운 피난 생활에서도 여호와로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다윗이나 전쟁의 위험 속에서도 여호와를 즐거워하는 하박국 선지자나 이사야, 예레미야 선지자 등은 모두 이 경지에 이른 사람들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을 보십시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합 3:17-19)"
다윗의 고백을 보십시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시 16:8-9)"
환경이 문제가 아닙니다. 조건이 문제가 아닙니다. 승리가 문제가 아닙니다. 욕구 충족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살전 5:16) 쉬지 말고 기도하라 (살전 5:17)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8)”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고, 확실하고, 정직하고, 순결하며, 정결하고 진실하고 의로우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원토록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순금보다 더 사모해야 합니다.
2.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3. 지킴으로 상을 받아야 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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