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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2: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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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상호 목사 |
참고 : | 세광교회 http://sk8404.or.kr |
기적과 기쁨의 종교
요 2:1-11
2005. 4. 3, 오전
오늘 말씀을 보면 큰 걱정과 염려 속에 빠져있는 한 가정이 나옵니다. 기쁜 혼인 잔치를 하는데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이 가정에 도착한 것은, 유대인들의 풍습대로 1주일간 계속되는 결혼 잔치의 거의 마지막 날 어느 때인 것 같습니다.
이 잔치집에는 예상한 손님보다 더 많은 사람이 다녀가 준비한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시편 104편 15절에 보면, "포도주는 우리 마음을 기쁘게 하고, 기름은 우리 얼굴을 윤택하게 하며, 곡식은 우리의 마음에 힘이 솟게 한다"고 했습니다. 랍비 문서를 보아도 포도주는 기쁨을 상징하며, 결혼식을 거룩하게 만드는 종교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준비는 못해도 포도주만은 7일간이나 계속되는 잔치에 넉넉하도록 준비해 손님들을 대접하는데, 이 기쁨의 혼인 잔치에 그만 꼭 있어야 할 포도주가 떨어져 큰 걱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나는 작은 마을이어서 가게에 가서 얼른 사올 형편이 되지 않았습니다. 혹은 이 집 주인은 가난해서 이미 준비했던 포도주가 최선을 다했거나, 더 살만한 능력이 없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잔치집에 기쁨이 사라졌습니다. 걱정과 염려와 한숨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런 잔치집에 큰 변화가 왔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기적은 잔치집에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고, 물이 담긴 항아리에서는 최고급 포도주의 달콤한 향기가 온 집안에 은은히 퍼졌습니다.
이 잔치집은 마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사회의 모습과 그리도 흡사합니다. 마치 기대와 희망 속에서 내일을 열어 나가던 우리들의 생활이, 한숨의 골짜기가 된 것과 비슷합니다. 이 가나 잔치집이 예기치 못한 일에 당황했듯이 오늘 우리들도 예상치 못한 여러 과제 앞에 두려움과 걱정을 안고 살아갑니다.
우리 건강에 있어서나 사업에 있어서나 가정에서 예기치 못한 일들을 많이 겪으며 오늘까지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가나 잔치집에 예수님이 오셔서 문제를 해결하신 것 같이, 오늘 우리들의 삶 속에도 예수님이 찾아오실 때, 예수님을 모실 때, 문제는 해결되고, 슬픔이 기쁨이 되고, 염려가 즐거움으로 변하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잔치의 종교입니다. 기쁨의 종교입니다. 물론 신앙 생활을 하다보면, 금식해야 할 때도 있고, 울며 통회 자복하며 회개해야 할 때도 있으며, 금욕적인 생활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우리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입니다. 풍성케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종교이며, 우리 얼굴에 웃음을 주는 하나님을 믿는 종교입니다. 그리고 이 기쁨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실 때 이루어집니다. 바라기는 우리 성도님들 이 예수님을 모셔서 기쁨 속에 살아가는 부활절기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첫째로 우리 기독교는 역사 속의 종교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저 높은 곳, 하늘 보좌에 앉아서 우리를 내려다보고만 계신 분이 아닙니다. 이 우주에 법칙을 부여하시고, 그 법칙이 운용되도록 방관하고 계신 분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 역사 한복판에 찾아오시는 분이시오, 우리 인생의 문제와 씨름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깊은 산에 올라 기도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세상을 관조하며 고귀한 깨달음만을 전하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 역사 속에 찾아 오셔서, 함께 웃고 함께 울며, 생활과 삶을 나누는 분이십니다. 우리와 함께 고민하시고, 함께 안타까와 하시며, 그래서 인간 세상의 문제와 아픔과 갈등을 해결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실 우리가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 이루어놓은 이 세상에는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어려움이 있습니다. 해결해 나가야 할 과제가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문제 속에 지낸다는 것은 사실 어찌보면 역설적으로 은혜요, 축복입니다.
만일 사람에게 모자람이 없었다면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을 신으로 착각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려운 일에 부딪칠 때마다 인간의 한계를 깨닫고 부족함을 인정하며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우리를 도우실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 축복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을 더욱 붙들게 만든다면 우리의 약함이 도리어 은혜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너무 건강하고 똑똑하고 부유해서 하나님이 필요없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반대로 병약하고 생활이 어려워 하나님을 갈급하게 찾는다면 그런 생활의 악조건이 복된 역할을 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닥친 문제들은 인간의 한계를 깨닫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게 만드는 전환점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이 잔칫집의 문제를 알았습니다. 나아가서는 문제 해결 방도까지 알았습니다. 마리아는 문제를 딴 곳에서 해결하려 들지 않고 예수님께로 가져갔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 포도주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의논드리나마나 한 일입니다. 무슨 진리의 말씀이라든지, 성경에 대한 지식이라든지 하면 몰라도 지금 포도주 문제입니다. 예수님하고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예수님께 그 문제를 가지고 옵니다. 이점을 우리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흔히 보는 일입니다마는 사람들은 너무 똑똑해서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를 어찌 감히 하나님 앞에 기도드려 해결해 달라고 그래? 그래 그동안 얼렁뚱땅 신앙 생활했는데, 문제가 있다고 어찌 뻔뻔스럽게 기도를 해? 또는 이런 문제는 하나님도 어쩔 수 없어. 다 끝난 일인데 하나님인들 어떻게 하겠어" 하며 기도를 포기합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합니다. 할 수 있고 없고는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우리에게는 문제를 가지고 나아갈 책임과 특권만이 있을 뿐입니다. 큰 문제든 작은 문제든 우리는 문제를 있는 그대로 가지고 나아가 주님께 의논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는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께 문제를 맡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역사 속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문제를 안고 걱정하는 가정에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해 걱정을 기쁨으로 염려를 즐거움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을 꼭 만나야 하겠으며, 예수님을 모셔들이는 신앙의 가정을 이루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기독교는 변화를 일으키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종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공급해 주신 포도주는 포도로 담은 포도주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 돌항아리에 부어진 물이 변하여 된 포도주입니다.
이 변화는 양적 변화가 아니라, 질적 변화입니다. 그래서 이 기적은 신령한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질적인 변화를 주시는 분입니다. 내 삶이, 내 인간됨이 질적으로 변화되는 기적의 역사를 주님은 오늘도 내 속에서 이루시고 계신줄 믿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예수믿고 거듭났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 사람의 행동거지가 좀 나아졌다는 말입니까? 단순히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생활을 한다는 말입니까? 아니죠. 질적으로 사람이 변화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에는 마귀의 자녀, 진노의 자녀였던 존재가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전에는 세상에 속했던 자가 이제 하나님께 속한 자로 된 것입니다. 죄인이 의인이 된 것입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이 영생을 누리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유한한 생명이 영원에 접붙임을 받아 영생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를 변화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변화의 축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평범한 사람이 변해 맛을 내는 사람이 됩니다. 어부가 변해 사도가 되고, 세리가 변해 복음 증거자가 되며, 부끄러워 말 못하던 마틴 루터를 대 설교가로 변화시켜 줍니다.
우리는 바로 이 예수님의 손에 붙들려 진정 변화받은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살아가는 귀한 역사가 이 한해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셋째로 기독교는 맛을 더해주는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 만들어주신 포도주를 둘러싸고 신랑과 손님들 사이에 주고받은 대화는 기독교의 비밀을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세상의 관습으로는 먼저 좋은 것을 내어놓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점점 흥이 나면 공급되는 음식의 질이 떨어지고, 많은 경우 흥이 깨지고 마는 것으로 끝납니다. 세상 일들은 웃고 시작해서 별 재미를 못보고 끝나는 것이 많습니다. 희망으로 시작해서 절망으로 끝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이런 인생의 모습을 깨달은 지혜자들은 일장춘몽이라는 말로 우리가 사는 세상의 정체를 밝히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단의 역사입니다. 사단은 언제나 맛좋은 것으로 우리를 유혹하고 꾀어서는 마지막에는 가장 쓰라린 고통을 우리에게 주고는, 그 종으로 우리를 만들어 버립니다. 속담에 "생선장수 웃덮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작 혹은 겉은 화려하지만, 그 속을 드려다보면 썩어서 냄새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중심이 되는 우리 기독교는 처음에는 무미건조한 것 같은데, 세월이 더할수록 그 참 가치가 빛납니다. 맛을 보면 볼수록 그 맛의 깊이가 더해집니다. 갈수록 좋고, 갈수록 은혜스러워 집니다.
우리 기독교는 절망 속에 희망을 주는 종교입니다. 십자가의 처절함 속에서도 부활의 승리를 주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해의 시작보다 끝을 잘 맺는 신앙인이 되기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넷째로 우리 기독교는 기적의 종교입니다.
말씀대로 하면 기적이 나타납니다.
1. 장소에 관계없이 말씀에 순종하라.
하나님의 역사는 때와 장소에 상관없이 일어납니다.
결핍이 축복의 통로입니다.
2. 여건에 관계없이 순종하라.
결핍, 문제의 크기에 상관없이 순종하라.
3. 실망되는 상황에서도 그대로 순종하라.
장애, 상처, 낙심, 어려운 가운데서도 순종하라.
예) 수로보니게 여인
4. 전과정을 이해하지 못해도 순종하라.
기독교는 논리지만 논리에 묶여있는 것이 아니라 논리를 넘어서는 종교입니다.
이해해야만 순종한다면 기독교가 아닙니다. 십자가, 원죄, 등을 논리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선포해야 합니다. 전도의 본질은 선포입니다. 이해하려 말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기적과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하면 기적이 나타납니다.
1) 선입견을 버리라.
2) 문제가 크면 더 큰 기적을 기대하라.
3) 실망스러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순종하라.
4) 이해하지 못해도 그대로 순종하라.
예수님은 나의 삶을 주목하고 계십니다. 곤고함과 문제로 뒤덮인 삶이지만, 그 삶을 새롭게 하시고, 변화시키고, 사는 맛을 더해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 앞에 나아가, 주님을 내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 때 주님 주시는 풍성함과 기쁨을 누리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는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돌보시는 예수님의 보호함을 받고 사는 존재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그 기적 안으로 이끄십니다. 믿음 안에 주님을 모시고 기적의 품안에서 즐거움을 회복하시고, 모두 기쁨을 누리는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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