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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관상기도란 무엇입니까?

수도관상피정 최용우............... 조회 수 3076 추천 수 0 2011.09.02 06:0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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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최용우가 여기저기 글을 짜집기해서 만듬 

관상기도란 무엇입니까? 천주교의관상과 기독교의 관상은 매우 다릅니다.

 

기독교의 관상 -주부적관상 -수동적관상

 

관상기도란 ?

교회사의 전통 안에 있는 기도로서 기도의 최고봉이라고도 합니다. 우리가 배우지 않아서 모를 뿐이지, 제가 관상기도를 가르쳤을 때 많은 성도들이 이미 그 체험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깊은 기도에 들어갔을 때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성도들이 관상기도로 들어가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부드러운 사랑의 이끄심에 침묵 안으로 이끌려갑니다.

 

요즘 영성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면서,여러가지 관상기도법들이 소개되고 있는데, 이냐시오의 방법으로는 상상력을 이용해서 성경 안으로 들어가서 느끼고, 대화하고 경험해보는 것들도 <관상기도>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 침묵기도가 생소한 개혁교회 전통 안에 있는 신자들에게는 상상을 통해 성경말씀 안으로 들어가는 경험은 쉽게 접근 가능한 것입니다. 이 기도를 통해서도 관상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매우 유익한 기도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의미에서 관상은 상상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조차도 침묵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지와 인지능력은 완전히 수동이 되어서, 그 분의 처분에 맡겨지는 상태가 됩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앞에서 사랑을 받고 있는데,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무슨 이미지가 필요하겠습니까 ? 우린 그저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죠. 잠잠히 사랑에 잠겨 안겨있을 따름입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편46:10)

 

토마스 키팅은 관상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관상은 우리의 마음과 전 존재를 우리의 사고와 언어와 정서를 넘어서(정신적 기능을 초월) 하나님께 열어 드리는 것입니다.. 관상기도는 내 안에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성장해가는,내적변형과정입니다. 관상기도는 하나님의 선물인데, 우리가 동의하기만 하면, 하나님께 나를 전적으로 열어드리기로 동의하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시작하셔서 거룩한 관계로 이끄시는 관계입니다..

-토마스 키팅의 책 [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 참고하시면 도움이 됩니다.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 목적은 하느님과의 일치에 있습니다.(요14:20)
관상은 하나님 안에서 일치되어서 그 분 안에서 쉼을 누리는 기도입니다.

 

이 때 우리의 혀만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도 침묵하고, 우리의 정서도 침묵하고, 우리의 모든 기능을 넘어서서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힘으로 되지 않고 전적으로 그 분의 선물입니다.

 

그러니까 주시지 않으면 받을 수 없는 기도입니다. 관상기도는 내가 하는 기도가 아니라, 성령께서 하시는 기도이고, 우리는 그저 받는 은총이요, 선물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에게 믿음으로 우리 전부를 드리려고 하고, 우리의 가슴을 열면 사랑많으신 하나님께선 결코 지나치지 않으실 것입니다.

관상을 가슴의 기도, 단순성의 기도, 순수한 기도, 믿음의 기도,하느님안의 쉼이라 표현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지켜야할 첫번째 계명은  바로 하나님을 전인격적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열렬히 열망하며 사랑하는 것 !

이것이 관상으로 들어가는 사람의 전제조건입니다.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주님만이 내 삶의 도움이시니 주의 얼굴 보기 원합니다.

주님 사랑해요. 온맘과 정성다해 하나님의 신실한 친구되길 원합니다.~

 

이런 복음송이 있지요 ?  바로 관상으로 들어가고자 열망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온몸과 마음으로 받고, 그 분의 사랑에 잠기고 싶은 그리스도인의 마음입니다.
그것은 종의 단계가 아니라, 이제는 친구라 불리는 관계입니다.(요15:15) 아니,친구보다...나의 사랑, 나의 신부, 나의 누이라 불리우는 관계입니다. 관상기도는 하나님과 사랑의 밀월관계로 들어가는 기도입니다.

관상기도는 하나님만을 사랑으로 바라보며 의지하며 일치되어 기도하는 것을 말하고,

관상이란 그러한 일치된 삶, 온전한 의탁의 삶, 오로지 "아멘"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갈2:20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분으로 살아가는 삶을 말하지요. 성화의 삶을 말합니다.

이 길은 좁은 문이어서 찾는 이가 적으나 이 길은 너무나 아름다운 길입니다. 사랑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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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의 관상 -습득적관상 이냐시오식 관상

 

관상기도(meditation prayer)는 세례의 은혜와 영적 독서의 규칙적인 실천이 정상적으로 발달한 것이다. 기도란, 말로 표현되는 생각이나 감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 가지 표현에 불과하다. 관상기도는 생각과 말과 감정을 초월하는 궁극적인 신비(Ultimate Mystery)이신 하나님께 우리의 정신과 마음―전인―을 개방하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에 의해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 우리의 호흡보다 더 가까이에, 생각보다 더 가까이에, 우리의 선택보다 더 가까이에―우리의 의식(意識) 자체보다 더 가까이에 계시다는 것을 믿음에 의해서 알고 있으며, 이 하나님께 자신의 의식을 개방한다. 관상기도는 우리가 동의하기만 하면 신적인 합일로 이어지는 내적 정화(淨化)의 과정이다.
아래 글은 신앙인들이 이냐시오적인 관상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영적 길잡이가 알아야할 지침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일반 신자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1)관상하는 사람(활동 중의 관상과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
관상하는 사람이란 남자든 여자든, 성직자든 평신도든 간에 하나님과 친밀하고 인격적인 관계에 바탕을 둔 구체적인 기도 방식으로 기도하고, 또 기도하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확연히 구분된다. 왜냐하면 이들의 기도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 자체이며 내적 침묵 가운데 많은 움직임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관심은 성경 보다는 오로지 하나님 자체에만 쏠려 있다.
은혜가 살아있는 우리 본성 위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관상 기도는 유한한 과거를 가진 인간이 드리는 기도다. 이 글은 관상적인 태도를 성장시킴으로써 과거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하는 것으로 관상한다는 것은 활동 중에 관상한다는 의미을 내포하고 있다. 즉 여기서 관상하는 사람이란 세상을 등지지 않고 일상 안에서 사는 사람들을 말한다. 따라서 이 글은 이런 사람들에게 영적인 방향을 주기 위한 것이다.

은혜는 본성에 의지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길잡이는 개인을 이끄는데 있어 우선적으로 개인의 기도 체험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들을 수밖에 없다. 관상 기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나 지식은 한 예술 작품을 평가하는 과정과도 비슷하다. 예술 작품을 볼 때 사람들은 전경(前景, 앞그림, foreground)에서 배경(background)으로 시선을 움직여 간다. 이렇게 서로 다른 초점에서 작품을 본 인상이 서로 교감하면서 우리는 전체 작품의 의미를 통찰하고 파악하게 된다. 그 작품의 중요한 부분을 파악하지 못하면 혼란이 생기고 오해가 생긴다.

관상 기도에서 배경을 이루는 것은 이제까지 하나님을 향해 걸어왔던 개인의 역사이며 그 동안 살아온 체험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런 역사를 통해 이 사람이 과거에 어떻게 살아왔는지 주의 깊게 살피게 되고, 현재 이 사람이 무엇을 열망하고 있는지, 또 앞으로 무엇을 하기 원하는지 살피게 된다. 전경(前景)을 이루는 것은 현재의 기도와 삶의 체험이다. 이 둘이 합쳐져서 구체적인 상황을 만든다. 이 전경과 배경을 모두 고려함으로써 기존의 상황에 바탕을 두고 더 성장할 수 있도록 지침을 준다. 이럴 때 그 사람의 개인 역사와는 무관한, 의미 없는 방향을 제시해 주는 오류를 피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관상 기도를 하는 사람들의 삶 속에는 어떤 것이 들어있는 것인가? 하나님과의 관계는 기도와 삶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체험에 바탕을 두고 성장한다. 이는 이냐시오의 영성 훈련 둘째, 셋째, 넷째 주간에서 체험할 수 있는 것과 어느 정도 비슷하다. 다시 말해 개인은 이미 사도적인 열정을 지니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서고 싶은 불타는 열정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관상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만약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데 필요하다면 고통 속에서도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이미 부활의 희망 속에 살고 있고, 그럼으로써 사도적인 활동이나, 삶 자체에서 마주하는 어려움이 갖는 의미를 변화시킨다.

관상 기도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체험이 있다고 추정할 수 있고, 이 체험이 바로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The Contemplatio ad amorem)의 실제 내용을 보다 깊게 살아 가려는 열망의 바탕을 이룬다. 즉 각자는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을 통해서 점점 더 모든 것 안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고, 자신을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있는 사람으로 인식하며 항상 감사하는 사람이 되는 이런 전망을 얻을 수 있다. 영적 길잡이는 하나님만을 가장 소중하게 여길 수 있는 전망과 열망이 커져갈 수 있도록 돕는다. 그렇지만 이 목적을 깨닫기 위해서는 영적이든 물질적이든 모든 피조물에서부터 점점 더 거리를 두는 훈련을 해야 한다. 또한 자신을 온전히 비워야 한다. 그럴 때 우리들의 열망과 선택은 우리의 창조 목적에 보다 가깝게 된다. 이 길을 갈 수 있도록 주위의 격려가 필요하다. 우리는 자신을 비우는 여정에 동참함으로써 하나님만을 보고자 하는 우리의 목적에 다다를 수 있다.

2)영적 움직임(영적 위안과 영적 고독, 하나님의 힘)
하나님에 대한 관상적인 체험의 기반을 마련하지 못한 사람은 삶에서 새로운 상황이 발생하면 ‘왜’라는 질문을 자주 하게 된다. 이런 경우 이 사람들은 세가지 영적 의식을 갖게 되는데, 이는 영적 위안, 영적 고독, 그리고 우리를 지탱하는 하나님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다. 길잡이는 각 사람의 상태를 식별에 필요한 초석으로 활용한다. 따라서 실제 상황 안에서 이들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식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영적 위안은 오직 하나님만이 줄 수 있는 선물이다. 영적 위안기에는 낙관적인 태도를 갖게되고 생기를 얻는다. 또한 삶에 대해 뜨거운 열망을 갖게 되고 자기를 벗어난 사랑의 활동을 통해서 모든 사물과 사람을 품어 안고자 하는 외적인 태도가 드러난다. 이런 위안의 체험은 보다 구체적으로는 두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우선 ‘가벼운 영적 위안’이 있다. 가벼운 영적 위안의 경우 모든 것이 희망 차고 즐거우며, 자신의 본래의 모습과 일치를 이루고 어떤 두려움도 사라지는 경우다. 따라서 자발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한편 ‘무거운 영적 위안’이 있다. 이는 죄에 대한 슬픔, 회개, 그리고 그리스도의 수난을 깊이 인식하게 되는 경우다. 하지만 극심한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이 솟아나는 체험을 한다.

반면에 영적인 고독은 영적 위안과는 반대다. 영적 고독은 자신이 무너져 내리고 무기력해지는 체험을 한다. 허무주의에 빠지고, 희망도 사라지고, 믿음도 없어지며,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에 빠져든다. 더 나아가 절망감에 사로잡혀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일어난다. 삶의 모든 것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영적 위안과 영적 고독 외에 세 번째 가능성으로 영적 고독을 거스르시는 하나님의 활동이 있다. 우리를 지탱하는 하나님의 힘은 언제나 상존한다. 이냐시오 성인은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충분하다는 점을 계속해서 강조했다. ‘우리 각자는 비록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악에 맞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현실이 닥쳤을 때 일어나는 질문은 “도대체 이 일이 내 성장에서 어떤 의미일까?”라는 점이다. 영적 고독, 영적 위안, 우리를 지탱하는 하나님의 힘을 파악하는 초석은 변화된 각자이며 이는 두 가지이다. 이 양자는 모두 움직임과 관계가 있으며 각 개인의 방향을 살펴봄으로써만 이해될 수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가벼운’ 혹은 ‘무거운’ 길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다면 영적 위안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한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있다면 바로 영적 고독기인 것이다. 하나님께 ‘나아가는지’ ‘멀어지는지’를 중심으로 이들이 가는 방향과 움직임이 중요한 요인이다.

관상 기도를 하는 사람이 겪는 영적 위안은 체험의 내용에 관계없이 각 개인이 하나님과 보다 일치하는 데로 나아가고 있다는 인식이다. 이런 인식을 통해 모든 사람과 사물을 하나님의 선물로 여길 수 있게 된다. 영적 위안기에 생기는 내적인 평화를 통해 ‘정의로운’ 모든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되고 ‘불의하고’ 하나님의 창조 계획에 거스르는 현실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대항해 나가게 된다. 두 경우 모두 낙관적인 입장을 갖게되며 사랑 안에서 응답하게 된다.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죄밖에 없고, 한 인간의 상황이 죄에 물들었다는 사실조차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도움이 된다면 선한 것이다.

‘가볍고’ ‘무거운’ 영적 위안기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이 관상 기도를 하는 사람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하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 관상 기도를 하는 사람의 체험은 하나님이 함께 하느냐 하지 않느냐로 구분된다. 그렇지만 이 두 체험 모두 하나님을 향한 열망을 크게 한다. 하나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을 때가 ‘가벼운’ 위안의 상태이며 내적 외적 평화 사이에 조화가 일어난다.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지 못하는 체험의 경우가 ‘무거운’ 위안의 상태이며 이 경우 내적으로는 평화롭지만 외적으로는 힘들다. 이때의 내적 평화는 오직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계속해서 기억함으로써 얻어진다. .

종종 지금 어떤 위안의 상태에 있는지를 판단한다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영적 상태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는 길이 있다. 마음 안에 있는 여러 사건들의 의미를 보면서 영적 위안과 영적 고독을 알 수 있기도 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영적 위안기에 있을 때 자신의 체험을 나누는 순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가득한 열정으로 나를 둘러싼 사물이 자신을 하나님께 어떻게 이끌어가는지를 나누고 나서 지금 일어나는 여러 어려움을 말한다고 하자. 이럴 때 이 사람은 ‘가벼운’ 영적 위안기를 보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이 먼저 현재 처해있는 상황의 어려움을 먼저 이야기하고 이어서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평안하다고 말한다면 분명 ‘무거운’ 위안기라고 생각할 수 있다.
관상 기도를 하는 사람에게는 영적 고독도 약간 차이가 있다. 이 역시 영적 위안과 정 반대이다. 이 경우는 현재 일어나는 상황을 통해서는 성장할 수 있는 조그만 긍정적인 인식도 없는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영적 고독기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약해지고 하나님의 현존을 의식하려는 열망까지 사라진다. 자신과는 무관한 행동을 하게 되고 철저하게 부정적이며 절망에 빠진다.

영적인 여정은 각자 고유하다. 하지만 ‘가볍고’ ‘무거운’ 영적 고독을 구분할 수 있게 하는 몇 가지 전형적인 틀이 있다. 즉, 긍정의 길(kataphtic)과 부정의 길(apophatic) 전통이 있다. 하나님은 이 두 가지 방법 모두를 통해 우리를 이끄시고, 변화시키고, 우리를 비우게 하신다. 긍정의 길은 체험을 통해 자신을 비우는 것으로 쉽고 즐거워 보인다. 이 길을 통해 우리안에 깊이 계시는 하나님의 현존을 강하게 인식하고, 다른 사람 안에서 하나님을 느끼는 감각이 성장한다.

반면 부정의 길은 하나님이 없는 체험을 통해 일어난다. 이 체험을 통해 우리는 어둡고 건조하고 메마른 느낌을 느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안 계실 경우 일어날 고통과 십자가, 버려졌다는 느낌을 더 깊이 깨닫게 한다. 이 전통 안에서 먼저 인식해야 하는 것은 다른 사람안에서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깊이 계시다는 인식이다.
길잡이는 개개인의 역사를 파악함으로써 각자가 어떤 전통 안에 있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이를 이해할 때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만 사로잡히지 않고 자신을 비우는 과정을 포기하지 않도록 이끌어줄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깊이 현존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다른 사람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확신함으로써 우리는 점점 자신을 비울 수 있게 된다. 이 둘 중 어느 것 하나라도 인식하지 못할 때 잘못된 것이며 더 성장해야 한다.

3)관상 기도의 의미와 내용
이제까지 기본적이고 잘 알려진 영적인 움직임을 설명했고, 이를 통해 한 개인의 여정에 대한 이해를 높이려고 했다. 여기서는 초점을 바꿔서 관상 기도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고, 길잡이들에게 이와같은 움직임들의 의미를 파악하는 방법을 알려주려 한다. 길잡이가 관상적인 열망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신앙 체험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줌으로써 영적 여정에서 능동적인 참여자의 입장이 된다.

관상 기도를 하는 사람은 신앙적인 전망을 가진다. 신비에 대해서 깊게 받아드리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하나님을 통해 자신을 비운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과 보다 일치할 수 있는 가능성은 커진다. 결국 신앙적인 전망이란 자기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께 자신을 내어 맡기려는 열망이다. 길잡이의 역할은 관상 기도를 하는 사람이 갖는 이런 특성이 정화의 과정을 통해서 드러나도록 분명히 해주는 것이다. 이중 하나라도 빠져 있다면 길잡이는 그 빠진 부분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도록 도와주고 왜 이것이 빠졌는지 생각해 보도록 도우며 각자가 쉼없이 하나님을 통해 자신을 비워나갈 수 있도록 격려한다.

‘하나님만이 아무런 이유 없이 각 영혼에게 영적 위안을 줄 수 있다’ 관상 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런 영적 위안을 찾는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 유래한 영적 위안을 체험하는 것은 그리 중요치 않으며 곧 벗어나야 한다. 길잡이는 이점을 깨닫도록 도우며 격려하고 지지해준다.
길잡이는 신앙적 전망이 사라진다거나 신비에 대해서 불편해 하거나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게 하고, 무엇인가 자기 중심적으로 홀로 서고 싶어하는 기미가 보이는지, 또 하나님을 통해 자신을 비우는 방법이나 과정에 조바심을 내는지, 하나님과 일치하고자 하는 열망이 약화되지는 않는지 주의깊게 관심을 기울인다. 이런 조짐을 알아내는 방법을 설명한다.

이 문제에 대해 설명하기 전에 먼저 길잡이가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이런 조짐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그 사람의 영혼 어디에선가 자신을 비우는 과정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거나 혹은 이것 자체가 자신을 더욱 비우는 과정임을 알려 준다. 이런 조짐을 느끼게 되면 길잡이는 두 가지 방식으로 도울 수 있다. 먼저, 이 구체적인 체험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도와준다. 특히 이 체험의 의미가 자신을 비웠으면 좋겠다고 했던 그들의 고백에 바탕을 두고 이해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두 번째로, 계속해서 이 방향으로 향하도록 노력할 수 있게 격려하고 지지를 보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길은 항상 자신에서 시작해서 어느 단계에 이르면 그리스도와 함께 움직이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성삼위에게로 나아가게 된다. 바로 자신의 본성이나 실재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은혜의 원천임과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나아가는 길이요, 바로 우리가 닮아야 할 최상의 표상이다.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야말로 우리 자신의 인간성을 온전히 성숙시키는 것이며 보다 더 하나님과 일치하고 궁극적으로는 그분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예수는 완전한 인간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를 닮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라는 부름을 받고 있다. 관상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행동으로써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말은 어느 정도는 규범적인 차원에만 머무르게 된다. ‘해야 한다’ 혹은 ‘필요하다’라는 사고 방식이 여전히 깊이 자리잡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명령이나 가르침에 복종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활동 중에 관상을 하는 사람들은 이미 그리스도의 계명과 가르침을 자신의 마음 속 깊이 새기고 있고, 사랑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리스도를 따르게 된다.

그리스도를 닮을 때 실천에만 중점을 두는 것은 조금 부족하다. 관상 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주님을 보다 가깝게 따르고 보다 완전하게 협력하기를 바라고 갈망한다. 하지만 이런 갈망은 행동만으로 성취될 수 없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보다 온전하게 하나님과 하나 되기 위해서는 바로 그리스도의 존재 전체를 닮아야 한다. 즉,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 모두를 닮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길잡이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관상 기도 방식으로 변화해 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직을 행할 때 일어나는 불만족스러운 점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길잡이는 누군가 이런 좌절감을 느끼고 있다면 이는 그 사람에게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존재 자체를 닮아가도록 초대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일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완전하게 자신을 내맡겨야 한다. 관상 기도를 통해 사람들은 더 이상 자기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통제하려 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자신을 비워나가기를 선택한다. 많은 사람들이 영적 여정에서 이 단계까지 온다. 하지만 두려움과 적절한 방향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내맡기지 못하게 된다.

활동 중에 관상이 의미하는 것은 각자의 본성 안에서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이며 실천적으로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다. 존재로써의 자신을 점점 비워나가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더욱 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게 되고, 어떤 상황에서도 이를 잃지 않게 된다. 누군가 관상 기도를 길잡이 할 때,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확인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스도의 온 존재를 닮아나가는 것은 두 가지 부분이 있다. 먼저 그리스도의 신성을 닮는 것이고 또한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인성을 닮는 것이다. 인성을 닮아감으로서 각자는 자신을 비우게 되고, 자신이 창조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며,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개개인의 구체적인 상황을 받아들이게 된다. 또한 우리 이웃들도 받아들이며,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받아들인다. 이런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신의 존재 안에 ‘주어진’ 것을 받아드린다는 것이다. 이는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무조건적으로 경직되게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각자에게 주어진 실제 삶 안에는 깊은 희망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받아들이는 것에는 낙관적이며 긍정적인 응답을 함께 담고 있다.

두 번째로 자신을 비우는 유형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닮고자 하는 열망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순수하게 된다. 또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우리는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해왔던 것, 예를 들어 기억, 이해 혹은 사랑 등 모든 것에서 자유로와지는 것이다. 한 사람의 정체성을 이루는 모든 측면이 주님에 의해 온전히 비워져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과의 일치가 가능하다.

먼저 개인의 존재에 ‘주어진’ 것에 대한 집착을 비우는 구체적인 방법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인간 본성을 이해하는 데는 여러 가지 원천들이 있다. 그리나 우리 모두가 공통으로 갖고 있는 것은 각자의 체험이다. 나 자신을 성찰함으로써 나는 우리 인간이 매우 역동적이고 항상 변하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우리의 사회 환경은 항상 변하며 은총 역시 늘 변한다. 이런 역동성을 깨닫고, 관상 기도를 하는 사람이 갖는 신앙적 전망을 인식하면서, 인간 존재를 이루고 있는 구성 요소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리고 나서 길잡이들은 계속해서 각자에게 이 사람이 현실을 거부하려고 하는지, 혹은 물이 흐르는 대로 자신을 하나님께 내맡기고 있는지 혹은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믿음을 통해서만 우리는 물이 흐르는 대로 자신을 내맡길 수 있고, 역설적인 신비에 평화를 느낄 수 있으며, 하나님의 열망에 부응할 수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현실을 거부하려고 하고 있다면, 즉, ‘자신의 현실’ 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이 사람들은 더 이상 신앙의 전망을 유지할 수 없다. 이런 사람들은 인간의 이성만을 사용하며, 자신의 삶 속에 신비가 들어오게 한다기보다는 문제를 맞닥뜨리고 해결하려고 한다.

신앙의 전망을 통해 개개인은 인간 현실의 역동적인 특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드리게 되고 하나님 안에서 쉴 때까지 인간의 체험 속에는 불완전한 것이 있음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되면 관상 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삶의 변화가 생기더라도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고,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도 자유로워지며, 비록 앞으로 육체는 죽을 지라도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된다. 거부당하더라도 그다지 개의치 않게 되는데, 그 이유는 이미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뿌리박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인간적으로 온전하게 산다는 데에 대해 만족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즉각 신적으로 완전해지기 바라지 않는다. 이런 인간적인 완전함은 매우 역동적이며 많은 실패를 겪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하며 온갖 흥망성쇠를 체험하게 된다.


역설(paradox)
나에 대한 하나님의 열망 나의 열망 나의 현실
성장 안정 변화
자유 완전한 자유 자유롭지 못함
삶 불멸 죽음
사랑 나와 다른 사람으로부터 타인, 심지어는 자신
사랑받는 것 에게 조차 거절당함


신앙의 전망이 없어지면 쉽게 현실을 거스르려 하게 되고 인간 존재 안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역설적인 상황에 대해 편안해질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를 꼭 부정적인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비우시고 계시는 조짐이며 이 영역에서 계속해서 우리 각자를 비워나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계속해서 신앙의 전망이 사라지게 되면서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무기력한지, 얼마나 약한지, 결국 자신의 본성은 죄인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신앙이 선물이며, 우리 각자가 죄인임을 더 깊이 깨닫게 되고 사랑이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키워나갈 수 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써 항상 그분께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럼으로써 결국 우리들의 순례 여정을 하나님께서 이끄시게 된다.

4)사랑 받는 죄인(자신을 비움)
우리는 두 가지 체험을 통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언제나 확고한 믿음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우리는 결국 원죄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 하나님께서 외적으로 우리를 도와주셔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또한 자신이 과거에 저질렀던, 현재의 삶 속에서 저지르고 있는 죄를 깨달음으로써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던 바로 그 죄인임을 알게 된다. 이런 두 체험을 통해서 각자는 온전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신뢰하는, 마음이 ‘편안한’ 죄인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은 각자가 죄인이라는 것을 부인하지도 않는다.

죄를 제외하고, 예수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 같았다. 다시 말해 예수의 인성은 항상 하나님과 일치 되었고, 언제나 자기 전 존재를 완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또한 이 세상 속에서 어떤 상황에 부닥치더라도 그의 열망과 하나님의 열망 사이의 조화를 해치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닮은 우리들은 죄를 짓는, 불완전한 존재다. 이는 인간의 특성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각자의 존재란 주어진 것임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는 모든 인간과 모든 사물, 이 세상이 우리 앞에 놓여있으며 또 언제나 죄의 상황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자신을 애착하는 노예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우리가 자유로와지는 것을 막는 여러 거짓된 상황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들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과 조화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일단 이 차원에서 자신을 비우게 되면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간다. 이 단계는 자신을 정화하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신성을 가지신 예수는 자신의 인성이 낳은 모든 것에서부터 자유로웠으며, 예수가 살아가는 근원적인 동기는 오직 성부를 향한 사랑뿐이었다. 이 사랑이 어느 정도는 예수의 인성을 변화시키고 또 넘어서게 하지만 그렇다고 인성 자체를 없애버리지 않는다. 예수의 신성을 닮아가면서 우리들은 우리가 일궈놓은 것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워진다. 이를 통해 우리도 예수처럼 오로지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의해서 움직이게 된다. 하나님만이 절대적이고, 그분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은 중요치 않다.

십자가의 성 요한과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는 이렇게 자신을 비워나가는 과정에 탁월했던 사람들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세속을 떠난 상황에서 관상 기도를 했다면 이냐시오는 활동중에 관상을 한 사람이다. 두 사람 모두 하나님께 완전하게 응답하려 했고, 온전히 자기 자신을 비웠으며, 자신을 완전히 내 맡겼다. 그렇지만 그들은 우리에게 제시한 방법은 서로 달랐다. 물론, 이 두 가지 방법 모두 당대 사람들에게 자신을 완전하게 비운다는 것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영혼의 세 가지 능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에 대해 기술하였다. 이는 세 가지 신학적인 덕과 일맥 상통한다. 그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서 오늘의 용어가 아닌 그 당시의 언어를 사용하려고 한다.

기억을 비우는 과정은 희망을 비우는 과정이다. 개개인의 정체성은 그 사람의 전 역사 즉, 은총의 역사, 죄의 역사를 포함하는 전 생애로 구성된다. 자신을 비우게 되면 매일을 놀라움 속에서 새롭게 살게되고, 과거를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나가면서도 그것에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나가려고 노력한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과거에 가졌던 믿음, 소망 또는 사랑에 의존하지 않고, 오히려 날마다 주님께 의지하는 것이다.

자신의 이해를 비워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각자는 믿음이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된다. 이런 인식을 통해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신비에 대해 자신을 열고, 모든 인간의 지적인 활동이 절대적인 것이 아닌 서로 상대적이라는 사실에 온전히 감사한다. 이를 통해서 각자는 편안하게 하나님께 내맡길 수 있고, 단순히 자기 자신의 노력에만 의지하려는 태도를 버리게 된다.

정신적인 능력으로서 의지를 정화한다는 의미는 지적인 의지와 감정적인 의지를 모두 비우는 것이다. 오늘날 이 힘은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이 안에는 열망, 감정, 모든 형태의 사랑이 다 포함된다. 이 의지를 정화함으로써 하나님의 위안과 같은 좋은 체험만을 바라지 않게 되고 오직 영적 위안을 주시는 하나님만을 사랑하도록 변화한다.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사랑은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을 위한 사랑이 되고, 더 이상 결과에 얽매이지 않게 된다. 다시 말해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며 아무런 조건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열망이다.

이 전에 이미 관상 기도를 하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만을 찾고, 하나님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은 그저 평범한 것으로써 중심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한 바 있다. 자신을 비우는 과정에서 이 단계에 이른 사람의 경우, 길잡이들은 자신이 집착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도록 돕는다.
활동 중에 관상이라는 차원에서는 성 이냐시오가 단연 탁월했다. 과연 이냐시오가 얘기하는 완전한 내맡김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영성 훈련에 나와 있는 그의 기도를 살펴보자.

받으소서, 주님, 나의 모든 자유와 나의 기억과 지력 나의 의지를.
내게는 당신 사랑과 은혜만을 주소서. 그것이 내게 족하나이다.

이냐시오 역시 앞에서 언급한 영혼의 세 가지 힘을 얘기했다. 그러나 그는 활동 중에 관상을 위하여 중요한 요소를 첨가했다. 그것은 바로 개개인의 자유이다. 자신의 자유 의지를 통해서 각자는 살아있는 사람이 되고, 역동적인 인간이 된다. 이는 한 개인의 인간성이 충만해지는 것을 의미하며 한 개인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온전해진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한 개인의 과거를 통합하는 것이며 지금에 현존하는 것이며 미래에 대해서 희망을 갖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관상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완전하게 자신을 비움으로써 전 존재로써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또 다른 차원에서 중요하다. 단지 우리의 자유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만이 아니라 그분의 자유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이 원하시는 것만을 원한다. 각자를 그분이 이끄시는 대로 내맡기고, 그저 기다리면서 그분이 선택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아들인다. 역설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소유할 수 있도록 나를 내맡겨 드리면, 같은 방법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얻게 된다.(progressio에 실린 John Govan신부의 글을 옮김)


댓글 '1'

와룡선생

2015.01.20 14:54:04

이냐시오(예수회)의 영신수련은 기도의 한 방법이며, 예수회는 관상수도회가 아닙니다.
물론 이냐시오의 영신수련도좋은 방법입니다만,
천주교의 관상기도를 이해 하시려면 관상(봉쇄)수도회: 예를 들면 트라피스트회, 가르멜 회 등의
서적이나 기도 방법을 알아보시는 것이 제대로 된 이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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