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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본질로 돌아가자!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비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마태복음 7: 24~27)
예수님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므로 공생애를 시작하십니다. 이후 40일간 금식하신 후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십니다. 마귀의 시험에서 승리하신 직후 입을 열어 가르치신 것이 저 유명한 ‘산상보훈’입니다.
산상보훈이란 이 산에서의 가르침을 한자로 표기한 말로서 산 위에서 가르쳐진 보석과 같은 교훈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 산상보훈의 결론에 해당합니다.
다같이 본문을 읽었습니다. 읽은 본문 중에서 핵심이 무엇인 것 같나요? 제가 보기엔 “행함”으로 보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야고보 2:24)”라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복음의 결국은 온전한 사랑의 실천로 마무리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천국시민에 걸맞는 온전한 사랑의 실천을 행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요? 이 실천적 삶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도 이것이 없이는 하나님을 뵙지 못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자리에 누가 과연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마더테레사, 고 이태석 신부님, 슈바이쳐 박사님, 김요석 목사님 정도가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말로 예수님은 이것이 '구원의 길'이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주님이 오시는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깝게 들리는 요즘입니다. “말세다, 말세!”이는 믿는 사람뿐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런 시대적 상황에 맞는 진리의 말씀들이 많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칫 본질을 벗어나 사람들의 공포심을 자극한다든지, 군중심리를 따라 소동하게 할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회개하라고 합니다. 천국시민에 걸맞는 삶의 본질을 회복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는 자칫 율법의 짐보다 더 무거운 짊을 짊어지게 만드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자유의 종교입니다. 진리를 알 때 진리가 자유케 하며,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바울과 유대인 기독교도간에 ‘할례’ 등의 율법을 지키는 문제로 첨예한 대립이 계속 나타납니다. 까짓 할례가 무슨 대수라고 하면 될 것 아닙니까? 하지만 사도바울은 절대로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할례 하나를 양보하면 결국에는 660가지 율법조문 전체를 지켜야 하게 되고, 복음은 율법 아래로 돌아가 버릴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지상에 우리만 유일한 교회라고 각자의 명분을 가지고 주장합니다.
카톨릭은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주가 되신다, 7성례가 집행되는가, 교황의 자리가 유지되고 있는가를 기준 삼습니다. 반면에 개신교는 카톨릭의 부패와 잘못으로 자신들이 개혁을 했으므로 본질적 교회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부모없이 자식이 태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카톨릭이 되었든, 개신교가 되었든지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과 맞느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그 근거가 되는 성경이 과연 애초 정통성을 부여 받은 성경인가가 중요합니다.
진정 거듭난 성도에게는 주일성수의 의무나 십일조를 드려야 할 의무도 없습니다. (여기에 대해 달리 생각하실 것이 있으실 것입니다. 존중합니다. 이것이 십계명으로, 다른 계명들로 나아가는 거치는 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1세기 이후 목사(장로, 감독)는 사도들에게 가르침을 받고, 사도들이 장로회에서 세웠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그 사도권, 장로회는 어디로 갔습니까? 카톨릭의 사도권 승계를 부정한다면, 개신교는 이를 승계 받은 것인지요?
그러면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한 성경말씀은 도대체 뭐란 말인지요? 논쟁을 하려고 이 말을 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며, 이 말이 논쟁이 되기도 원치 않습니다. 논쟁은 아무런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야기가 좀 빗나간 듯 싶습니다. 말하고 싶었던 것은 정말 주님이 복음의 귀결로 온전한 행함을 말씀하셨는가?라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그렇다’고 자신있게 말씀하실 수 있으신지요? 만일 그렇다면 그 사람은 양심을 속이는 사람이든지, 정말 성령으로 거듭나 온전케 된 사람일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고 하면 주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주님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라 치라” 하셨던 말씀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이 질문이 맞는듯 싶은데 대답을 망설이는 진짜 이유가 무엇일까요? 산상보훈의 결론은 온전한 행함이다는 말은 맞지만, 실상 나는 그렇게 살 수가 없기 때문에 긍정도, 부정도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오해가 생기는 근본적인 이유는 ‘거듭남’을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산상보훈을 다른 말로는 천국율이라고 합니다. 즉, 이 말씀은 표면적으로는 육신에 속한 사람들에게 주는 말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거듭난 천국백성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이를 쉽게 말하면 너희가 만일 거듭나 천국백성이 되면 너희는 이렇게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이 말씀을 너희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해석하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애초부터 모세의 율법도 온전히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찌 온전한 천국율을 지킬 수 있을까요? 그것은 흑인이 백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표범의 검은 점이 흰 점이 되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를 거듭나지도 못한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거기에 다른 율법까지 보태어 배나 지옥자식들로 만들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 분별해야 합니다. 사실은 이 말씀 뿐 아니라 모든 성경말씀이 그렇습니다.
거듭난 새 생명의 결과로 나타나는 삶의 모습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육신에 속한 사람을 두고 말씀하시는 것인지 분별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능력도, 성경도 모르므로 크게 오해하게 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분명히 천국율입니다. 즉 거듭난 성도의 삶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렇게 하라”가 아니라 “이렇게 되어진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리될 수 있을까요? 그 비밀은 거듭남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육으로 난 것을 가지고는 천국시민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오직 하늘로부터 오는 새 생명이 내속에 임해야 하며, 그 생명으로 살 때 천국시민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죄짓고 그때마다 예수의 피를 뿌리고 회개하므로 예수님의 피를 구약의 짐승의 피처럼 사용하게 됩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아무리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예수의 피로 씻어도 변화되지 않습니다. 천국율을 지키는 존재가 되지 않습니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많이 내 육신의 힘으로 이 천국율을 지켜보려고 발버둥을 치셨는지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혈기를 참아보려고 했습니다. 진실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떠 했나요? 실패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생각하셨나요? 주님은 하루에 같은 죄를 반복하더라도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시니 그 용서를 믿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 믿음이라 여기고 또 다시 시작하곤 하지 않았나요? 그리고 그 결과도 실패했지요?
그로 인해 ‘그래 인간은 근본 죄인이야, 우리는 모두 주님의 은혜로 살 뿐이야! 애시당초 완벽해 지고자 한 것이 욕심이고 잘못이야!’라는 회의에 멍이 들지 않으셨는지요?
저는 초등학교 시절에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중학교때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교회에 들러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가 물이 흐르는 것처럼 속에서 쏟아졌습니다. 속에서 저절로 찬양이 만들어져 나왔습니다. 정말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은밀히 행하는 자위행위가 극복이 되질 않았습니다. 분명 마태복음 5:28에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죄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요, 그 사랑을 배반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정욕에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된 천국율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율법과 매일 범죄하는 자신 사이에서 갈등으로 미칠 것 같았습니다.
결국 신앙을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비록 교회는 나가지 않았지만, 정말 주님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시절에는 아무도 없는 평일 밤 빨간 교회의 십자가 아래 홀로 나가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이라는 노래를 속으로 부르며, 눈물짓곤 했었습니다.
그러다 대학생이 되어 제 신앙의 고향이 된 UBF 모임을 통해 다시금 죄사함의 체험과 주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어 신앙을 회복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후 어떤 때는 순결함으로 하늘에 떠다니는 흰 구름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하고, 말 그대로 천국생활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다시 육신에 져서 옛 습관을 따라 정욕에 넘어지는 일이 있고, 그것이 마음에서 더 큰 갈망으로 자라는 것을 보면서 너무도 괴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지금은 확실히 이리 된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혹 짐작이 가시는지요? 거듭남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에 대해 사람들이 갖는 가장 위험한 생각은 이원론적 사고입니다. 육은 무익하고, 영만이 진실하다 혹은 육은 이제 나의 실체가 아니고, 영에 속한 것만이 나의 실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맞는 듯 싶지만 정확한 정답은 아닙니다.
사람은 전인적인 존재입니다. 거듭나면 진실로 육신의 몸도 있고, 새 생명의 몸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게 있는 것이로다-로마서 7:21-,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 요한일서 5장 6-8
하지만 육신의 몸도 분명 나요, 나의 것입니다. 그러기에 육신으로 범하는 죄는 나와 상관없는 것이 아닌 바로 나의 죄입니다. 그런데 니골라 당, 영지주의, 어떤 잘못된 가르침을 주는 사람은 이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나면 절대로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분들의 말씀대로 거듭난 새 생명은 절대로 범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붕어빵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생명이 이 질그릇 속에 있고, 나라는 존재는 “질그릇+새생명”(한 몸에 두 생명)인 까닭에 비록 새 생명은 죄를 범지도, 범할 수도 없지만, 육신으로 인해 나는 범죄하게 되고, 범죄할 수도 있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성경은 나를 말할 때 거듭난 새 생명과 육신의 생명으로 구분하여 말하지 않고, 전 인격으로 말씀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어떤 말씀은 새 생명에 해당되는 말씀을, 어떤 말씀은 육에 속한 생명에게 하시는 말씀이 구분되기도 합니다. 이를 정말 잘 분별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구약 레위기에서 굽이 갈라지고, 되 새김질을 하는 것만 정한 짐승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거듭나는 것은 한 몸에 두 생명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의 가정에 믿음의 아들 이삭이 태어났을 때 이스마엘이 함께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이로 인해 육신으로는 범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육신은 나의 일부이므로 내가 범죄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나면 절대로 범죄하지 않는다는 말은 새 생명만을 생각할 때는 맞는 말이지만 전 인격적으로는 맞는 말이 아닙니다.
간혹, 장성하여 어린 아이때의 일을 온전히 버려 전인격적으로 범죄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면 게바는 거듭난 후 갈라디아 교회에 와 외식하는 범죄를 저질러 바나바까지 미혹에 빠지게 했습니다.
바울은 거듭난 후 2차전도여행 중에 마가 요한의 문제로 바나바와 크게 다투었습니다. 그 결과 선교팀이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이를 비춰볼 때도 거듭나 장성하면 전인격적으로 범죄하지 않게 될 수는 있지만, 그 이전에는 얼마든지 범죄할 수 있고, 범죄하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거듭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3:5)”
물과 성령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어떻게 임하셨나요? 마리아를 통해 물과 피로써, 즉 온전한 육신을 입고 임하셨습니다. 우리의 거듭남도 그와 같이 영,혼,몸의 새로운 생명이 내 속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이 세상에 어떻게 생겨났습니까? 아랫물로 말미암아 생겨났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씨로 말미암아 자궁의 양수 가운데서 영혼과 몸을 가진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새생명의 탄생도 그와 같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피를 믿을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새로운 영,혼,몸의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는 신비입니다. 사실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게 하나님의 뜻이 있는지 없는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솔직히 알 수가 없는 것이지요. 하여 거듭남의 과정은 신비지만 우리는 결과를 가지고 거듭남을 확인합니다. 마치 바람이 임의로 불므로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지만 바람이 지나고 가면 남는 흔적을 통해 바람의 역사를 확인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면 거듭남의 결과는 무엇인가요? 첫째, 말씀을 통해 죄인된 내가 인정되는 것입니다. 둘째, 나의 힘과 노력으로는 도저히 천국율을 지킬 수 없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천국에 들어가는 기준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시오,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로 나의 모든 죄가 해결되었고, 그 십자가에서 나의 옛 사람이 죽고, 그의 부활에 나의 새 생명이 함께 있는 것이 믿어져 이를 시인하는 것입니다. 이를 시인하는 것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면 걸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넷째, 그 결과로 새 생명의 열매가 점진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거듭나는 첫째 조건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내 맘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나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거듭난 후 내게 이뤄진 결과를 통해서 거꾸로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만할 수 없는 것이요, 그러므로 자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이 원리이지만, 약속된 하나님의 말씀(너희가 간절히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을 따라 긍휼을 구할 뿐입니다.
내가 죄인인 것이 인정 되십니까? 아니 머리에서 발끝까지 나병균으로 꽃이 피어 그 어디 하나도 성한 곳이 없는 것과 같이 정말 그러한 죄인이라는 것이 인정이 되시는지요,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다음,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시오, 그 안에 성부와 성령이 함께 거하시는 것이 인정되십니까? 그다음, 이 영광의 하나님이 나를 인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는 것이 보이십니까? 그 속에 죄인된 나를 품고 돌무덤에 묻히신 것이 인정되십니까? 다시 사신 주님의 생명속에 내 생명이 함께 있음이 믿어지시는지요?
그러면 입으로 시인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거듭난 것입니다. 이제 당신의 속에서 그 생명이 흘러나와 천국율을 행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거듭나면 확실히 이를 안다고 하지만 아닐수도 있습니다. 처음에 내속에 새 생명이 있음을 모를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 요한일서 5:13
하지만 거듭났다면 그 생명은 반드시 자랍니다. 겨자씨가 모든 나물보다 작지만 이후에는 모든 나물보다 커져 공중의 새들이 깃들게 되는 것처럼, 가루서말 속에 누룩이 온 가루를 부풀게 하는 것처럼 그리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거듭나셨습니까? 이는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요, 이는 진정 우주적 교회(하나님이 총 회장이시오, 예수님은 담임목사요, 사도바울은 성경선생이시며, 이사야는 안수집사, 십자가의 강도는 성전문지기인 교회)에 일원된 증거입니다.
아직 거듭나지 못하셨나요? 이를 우리가 어찌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약속의 말씀을 믿고 사모하며, 원하며, 그를 향해 가난하며, 그를 향해 주림으로 구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말씀 듣는 것을 멈추지 마십시오. 그러면 죄인된 나를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내 힘과 의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고자 했던 것을 회개케 되실 것입니다. 거듭나면 육신은 점점 후패해 질 것입니다. 장성할수록 어린 아이의 길을 버리게 됩니다. 내가 거듭났는지 잘 모르시겠습니까? 혹은 거듭난 것이 분명하십니까?
그러면 그 생명을 날마다 확인하시며 예수님께 뿌리를 내리고 그 가운데서 그리스도 예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성장해 가셔야 합니다. 이를 위해 영으로 기도하십니다. (무시로 방언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신령한 젖을 사모하십시오. 말씀을 읽으십시오, 육신을 제어하십시오. 믿음으로 날마다 육신의 죽음을 확인하며 영의 생명으로 돌이키십시오. 그러면 천국율이 지켜 지는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넉넉히 그의 나라에 들어가시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돌려 드립니다.
댓글 '2'
한사람
교회는 주님이 머리가 되시고 성도는 몸이요 각 지체라고 했는데 자유는 머리되신 주님과 성도가 아무 관계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물론 자유가 방종은 아니겠지만 질서있는 신앙생활을 무시하는 결과를 낳기가 쉽습니다. 자유가 거룩함이 상실되고 구별된 영적 생활을 무너뜨리는 것이 되지 않으려면 예배가 바로 세워져야 하고 또한 주일성수가 이루어지면서 신앙생활이 바로 세워져야 합니다.
주일성수와 십일조는 성도가 교회를 세워가는 사명을 다하기 위해 당연히 감당하되 기쁨으로 감당할 부분입니다. 주일성수와 십일조는 무거운 짐도 율법도 아닌 것입니다. 주일은 주님 부활하신 기쁨의 날에 모여 초대교회로부터 예배드려온 전통의 예배드리는 날이요 십일조는 모든 것을 주신 분은 하나님임을 인정하는 행동이요 감사함으로 바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았으니 "자유"를 누리기 위해 무엇이든 자유하다면 이것은 비 성경적이고 교회를 무너뜨리는 엄청난 잘못을 불러오고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글을 읽는 초신자나 어떤이에게 악한 영향을 끼치는글이기에 수정해서 다시 올려야 마땅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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