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
출처 : |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5257 |
---|
[류기종의 영성강좌3]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지구촌(Global Village) 시대를 지나 우주적 시대(Cosmic Age)에 접어들어 있다. 이것은 이소연 우주비행사가 우리 한국인 최초로 우주 정거장에 다녀온 사실로 한층 더 실감나게 하였다. 이소연 우주 비행사가 우주 공간에서 한 말이 인상깊다. 우주에서 보니까 지구가 너무나 아름답다는 것과 또한 지구라는 작은 공간 안에서 아귀다툼을 하는 좁은 생각을 뛰어넘어 지구/우주 전체와 인류 전체를 생각하는 활짝 열린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술회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열린 마음을 가지고, 열린 사상을 가지고 사신 분은 누구일까? 아마도 그분은 바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된다. 여기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는 “다” 내게로 오라고 한 “다”는 모든 사람을 다 포함한다. 즉 인간의 무거운 질고와 멍에를 안고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 곧 이 지구상의 모든 사람을 지칭한다. 여기에는 어떤 제한이나 조건이 없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동서고금을 물론하고, 생로병사의 질고와 생존경쟁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태도를 보면, 그는 남녀노유의 구별이나, 빈부귀천의 차별이나, 민족이나 국가나 사회적 관습이나 전통 그리고 심지어 문화와 종교의 벽까지를 뛰어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적대시하는 사마리아 사람도, 가나안 지방 사람도, 수리아(시리아)인도, 로마인도, 그리스인도, 아무런 차별을 두지 않았다. 그들의 전통이나 관습이나 종교가 무엇인지도 상관하지 않았다. 즉 그들의 사회적 배경이나 종교적 배경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 모두를 친구로 대했고 형제로 대했고 하나님의 자녀로 대했다.
예수의 이런 포용적 태도, 즉 그의 초 민족적/초 종교적 열린 마음은 그가 탄생할 당시, 그를 경배하기 위해 동방에서 온 박사들의 내방과 경배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아기 예수를 방문한 동방의 박사들은 유대교나 기독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기록을 남긴 마태는 예수와 그의 복음이 유대 나라라고 하는 한 나라의 경계를 넘어서 전 지구적/우주적 성격을 띠고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전 인류 공동체적 사상은 그의 만인 형제자매 사상에서도 엿볼 수 있다.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를 만나려고 찾아 왔을 때, 한 사람이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당신을 만나려고 밖에 와 있다고 알려 주었다.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누가 내 어머니고 형제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12:48-50). 여기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란 예수의 말씀은 사람의 형제나 자매됨의 조건이 혈족이나 민족(종족)이나 혹은 종교적 전통이나 교리나 소속 공동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만물과 만인의 창조주(아버지) 이신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준수하는 일 즉 인류애의 정신을 가지고, 인간으로서의 아름답고 선량한 도덕적/윤리적 삶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다 진정한 의미의 형제자매가 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또한 예수의 초종교적 혹은 초민족적 포용의 사상, 즉 전 지구적(인류적) 관용과 개방의 사상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한 유대인이 강도를 만나 중상을 입고 길가에 쓸어져 있을 때, 동족의 종교적 지도자인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모르는 체 방관하고 지나갔지만, 한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다가 이 광경을 보고 그 중상자를 치유해 준 이야기이다. 이 비유 속에는 진정한 “이웃”(neighbor)이란 민족(종족)이나 종교적 신념이나 혹은 신분의 차이 등을 모두 초월하여 선행(자비)을 실천하는 사람이란 뜻이 담겨져 있다. 여기서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참된 이웃이란 종교적 신념의 차이나 민족이나 종족적 차이를 초월한다는 사상을 암시해 주고 있다.
예수의 이런 포용력과 관용사상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것은 바로 그의 만유의 창조주 하나님 인식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Abba Father)라고 불렀다. “아바 아버지”란 모든 인류와 피조물을 친 자녀처럼 차별없이 사랑하신다는 포용정신을 내포하고 있다. 만유/민인의 아버지 하나님은 어느 특정한 민족이나 어느 특정 종교인들에게 국한된 하나님이 아니라 온 인류/만인과 만유를 차별 없이 보호하시고 돌보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임을 말씀해 주셨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 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삼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지극한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꼿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6:26-30)
위의 말씀을 잘 음미해 보면, 공중에 날아가는 이름 모를 새도 하나님이 먹이시고 들에 핀 야생화 한 송이도 하나님이 아름답게 옷 입히신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만물의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 하나 하나를 보호하시고 생장케 하시며 돌보시는 하나님이란 뜻을 나타내고 있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고 자신의 형상(영적 존재)으로 창조된 인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는 것이다. 즉 모든 인간 곧 전 인류는 모두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보호의 대상이란 것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자처하는 유대인만 지칭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또한 오늘날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기독교인만을 지칭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 곧 만유와 만인의 창조주시요, 그들에게 생명(존재)을 부여하시고, 순간순간을 그의 은혜로 살아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우주 공동체적 사상 곧 그의 한없는 포용과 관용의 정신은 바로 이러한 만유의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인식 곧 그의 신관(神觀)에서 비롯한 것이다. 예수가 이해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관대와 포용의 하나님이며, 만인과 만유를 차별 없이 사랑하시고 그들의 과오를 용서하시며 길이 참으시고 인내하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돌보시는 하나님이시다. 또한 그들도 자신(하나님)처럼 포용심과 관대함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며 서로 도우며 남을 이해하고 용납하며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 큰 하나가 되기를 원하시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시다. 예수의 복음은 바로 이러한 포용과 관용의 하나님을 우리 인류에게 알려주심으로 온 인류와 전 창조세계에 참 평화를 실현시키려 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주기도문에서 명시하신 하나님의 뜻의 실현이며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의 복음의 깊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포용과 관용의 정신과 그의 하나님 관을 바로/깊이 이해한 이는 사도 바울이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뜻의 실현인 만유와 만인의 아름다운 조화와 궁극적 통합(하나 됨)의 원리로 이해한 것이다.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8-10)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도 하나이요 성령도 한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오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엡4:2-6)
사도 바울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주 만물의 창조주인 하나님 한분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분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바로 “만유의 아버지”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만유의 아버지란 뭇은 의미일까? 하나님이 만유의 아버지란 하나님이 바로 모든 만물의 창조주시며, 따라서 만물이 그에게서 비롯되고, 그의 가호를 받으며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고 말한 것이다(롬11:36).
바울은 계속해서 만물의 창조주/아버지인 하나님은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통일하시고, 만물 안에 계시다”고 주장한 것이다(엡4:6). 즉 만물의 아버지 곧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은 만물과 멀리 떨어져 있는 분리된 실재가 아니라, 만물 안에 내재하여, 모든 피조물들에게 존재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제공하며, 그들 상호간에 상의(相依), 상보(相補), 상혜(相惠)의 관계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조화와 질서를 부여하며, 또한 만물을 뿔뿔이 흩어져 나가지 않고 전체가 서로 연결되어 큰 조화를 이루워서 한 통일체로 존재하도록 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사도 바울은 만물의 아버지(창조주)로서의 만유의 통합화 작업의 사역을 그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대행하고 있다고 역설한다. 그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서 하신 가장 중요한 역할은 다름 아니라, 바로 만유의 창조주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에 의한 계획(경륜)을 성취하기 위한 것으로서, 그것은 바로 천상천하, 즉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두를 하나로 연결시키고 통합시키는 일, 곧 “하나” 되게 하는 일이었다고 말하고 있다(엡1:10, 4:6).
여기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란, 정신적(비물질적)인 존재든 물질적인 존재든 그들 모두를 지칭하는 것으로서, 온 인류와 온 우주 만물을 다 지칭하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은 바로 모든 피조물과 온 인류를 하나로 통합시키는 일 즉 한 가족, 한 공동체, 다시 말하면, 한 몸 되게 하는 일이란 말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새로운 영적 공동체 즉 만인과 만유를 하나로 연결시키는 “우주적 공동체”란 신령한 건물을 세우는 “모퉁이 돌”(corner stone)로 묘사했으며(엡2:20-22), 또한 우주 공동체란 한 “특이한 몸”(special body)의 “머리”로도 묘사하였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4:15-16)
물론 사도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몸이란 여러 상이한 배경의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의 몸과 같은 특이한 공동체를 이루는 교회를 염두에 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특이한 공동체로서의 교회란 바로 만유와 만물을 통일하시는 하나님의 통합작용의 최상의 수단이 됨을 역설하고 있다. 즉 교회의 역할이란 바로 만유의 창조주 하나님과 또한 만유를 하나 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통합작용과 충만 작용의 최상의 도구라는 것이다.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 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 이니라"(엡1:22-23)
교회를 지칭하는 그리스어 “에크레시아”(ekklesia)란 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 보여준 것과 같이 “신의 부름” 곧 만유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의도인 특별한 사명 곧 하나님 나라의 실현과 목적을 위해서 불려나온 사람들의 모임 즉 하나의 특수한 공동체란 말이다. 여기에는 인종이나 신분이나 남녀노유의 어떠한 구분도 존재하지 아니한다. 이 안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완전히 평등하며 그리고 성삼위일체 하나님을 중심점으로 해서 모두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심지어 여기에는 오랜 세월을 통하여 형성된 어떤 특정 지역과 시대의 전통(관습)이나 문화나 이념(사상)이나 종교의 차별까지도 뛰어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만유의 창조주 하나님의 뜻(만유와 만인의 아름다운 조화와 하나 됨)의 실현을 위해 활동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었으며, 그 사역의 계승을 이어받은 교회의 본질이며 사명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교회란 전 인류와 모든 피조물이 하나가 되는 통합의 모형(model)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이라”고 역설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1장에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기 위함이라”(10절)고 말한 의미인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특정 신학이나 사상이나 교리에 집착하거나 얽매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가 품었던 마음 곧 만인과 만유를 끌어안는 넓은 포용적과 관대한 마음(mind of tolerance)의 소유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준 일을 가지고 트집을 잡는 유대인(바리세파인)들을 향해서, “내 아버지(하나님)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여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내 아버지께서 일하신다는 일”, 즉 하나님이 지금 하고 계시는 일이란 뭇은 일을 지칭하는 것일까? 바로 만유를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일, 만유를 서로 협력하며 조화롭게 살게 하는 일, 서로 간에 마음을 열게 하는 일, 그리고 모두가 큰 하나가 되게 하는 일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게 하시오며,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이 주기도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교의 목적과 뜻이 잘 나타나 있는 기도의 내용이다. 이 기도는 어는 개인이나 교회나 종교집단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전 지구적이며, 전 인류적이며, 더 나아가 전 우주적이다. 그런 면에서 이 주기도문은 가장 포괄적인 기도, 곧 하나의 “우주적 기도”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에게, 우리 자신들이나, 내 교회나, 내 종파나 내 종교만을 위해서 기도하라 하시지 않고, 온 인류를 위해서, 이 땅 전체 곧 온 누리에 천국 곧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그리하여 만민과 만유가 조화롭게 어우러져서 하나를 이룸으로 평화를 누리게 되는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게 해달고 기도하게 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 일 곧 하나님의 일, 하나님이 하고 계시는 일, 하나님이 원하시고 뜻하시는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는 바로 이 일(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천국복음을 주신 것이며, 그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고난까지 당하시고 자기 생명까지를 바치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를 바로 앞에 놓고 기도하기를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라고 기도했으며,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 가 말씀한 다 이루었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원하시는 일 곧 하나님이 하시고자 뜻하시는 바를 다 이루어 드렸다는 말씀이다.
실제로, 예수님의 천국 복음은 자기 제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으며,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오늘의 우리들의 교회나 기독교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지구상의 모든 사람 곧 전 인류와 모든 피조물 즉 만인과 만유를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복음은 어는 특정 집단이나 특정한 종교인 즉 특정한 교파와 종파나 혹은 특정한 종교(기독교) 만을 위한 복음이 아니고, 만인과 만유를 하나 되게 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은 초 민족적, 초 종교적, 더 나가서는 초 인류적 즉 “우주적”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20세기의 탁월한 영성가이며 신학자인 떼야르 드 샤르댕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주적 그리스도라고 말한 바 있다. 뿐만 아리라, 고대 교회의 교부들인 오리겐이나 그의 제자 닛사의 그레고리 그리고 6세기의 대 영성가 막시무스(Maximus the Confessor)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유를 통합하는 “우주적 그리스도”라고 말한 바 있다. 그들은 일직이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온 목적과 그가 행한 일이 바로 하나님의 뜻인 온 인류와 만유를 통합시켜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함이었음과 또한 만유의 통합 곧 하나 됨의 원리로서의 천국복음을 전해 주셨음을 간파하였던 것이다.
특히 샤르댕에 따르면, 로고스(Logos) 곧 신적 지혜의 화육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 안에 있는 영적 생명과 사랑과 지혜로부터 발산되는 “신비한 힘”(mystical energy)으로서 인간들뿐만 아니라 만물 속에 스며들며, 만물을 비추며, 통일시키며, 만유의 근원자이신 하나님께로 인도한다. 즉 “로고스”(진리/지혜)와 “아가페”(사랑)로서의 그리스도는 물질세계인 분자나 원자의 운동으로 부터 지고한 신비적 명상이나 기도에 이르기까지, 또한 공기의 미동이나 미풍에서부터 생명체의 운동이나 사유의 흐름에까지, 전 우주의 과정에 영향을 미치고, 그들을 변화시키며, 풍성케 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완성시킨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의 현시자 및 실현자로서의 그리스도는 양면 운동으로, 즉 물질적으로와 정신적으로, 전 지구와 전 우주 만물, 그리고 인간 영혼에 관계하며, 영향을 주며, 그들을 통합하며, 영성화하여, 하나님 안에서 하나(통합)되게 한다. 그래서 샤르댕은 예수 그리스도를 특정한 인간들만이 아니라 전 인류와 온 우주 만물에 관계되는 “우주적 그리스도”(Cosmic Christ)라고 부른 것이다. (참조, Teilhard de Chardin, The Prayer of the Universe, Harper & Row, 1968, pp. 99ff.). 샤르댕의 이러한 견해는 21세기의 우주 공동체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 믿어진다.
오늘날 우리는 지구촌 시대를 넘어 우주촌(Cosmic Village) 시대에 들어와 있다. 그런데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인류는 하나가 되지 못하고, 민족주의, 국가주의, 지역 이기주의, 집단/그룹 이기주의, 종교 이기주의 혹은 종파 이기주의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인류는 각 종교끼리 심각한 배타주의에 빠져 있으며, 군비경쟁, 자원경쟁, 영토경쟁에 몰두해 있다. 이러다가는 우리 인류는 예수님이 이룩하려던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평화가 실현되는 “하나 됨”의 꿈은 참으로 요원하게 될지 모른다.
이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우리 교회는 어떤 길을 택해야 할까?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의 진리/복음을 지닌 교회는 어떤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선포해야 할 것인가? 오늘의 우리 인류는 어떻게 해야 대립(싸움)과 경쟁으로 인한 자기분열과 쇠태와 파멸의 늪에서 건짐을 받을 수 있을까? 그 해법은 바로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그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와 그의 복음의 참 의미를 다시 새롭게 이해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교회는 바로 만유를 하나 되게 하시며 또한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을 가지고 우리 사회와 이 시대에 부과된 교회의 사명을 새롭게 이해하고, 또한 그 사명을 잘 감당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넓은 마음 곧 그의 한없는 포용력과 관대한 마음과 화합(통합)의 정신을 가져야 할 것이다.
아무리 크고 중대한 일도 단번에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아주 작은 일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이 땅 위의 하나님 나라의 실현, 세계평화, 일류의 통합과 하나 됨도 결코 단번에 이룩될 수 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열린 마음 그의 한없이 크고 넒은 마음을 가짐으로써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를 닮은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하며, 예수를 닮는 다는 것은 바로 예수의 마음(얼)을 소유한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예수의 마음을 소유한다는 것은 바로 그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과 한없이 넓은 "관용/포용의 정신"(the spirit of tolerance)의 소유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rkchg
예수의 포용주의: 우주적 그리스도
(Cosmic Christ)
이 세상에서 가장 열린 마음을 가지고, 열린 사상을 가지고 사신 분은 누구일까? 아마도 그분은 바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된다. 여기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는 “다” 내게로 오라고 한 “다”는 모든 사람을 다 포함한다. 즉 인간의 무거운 질고와 멍에를 안고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 곧 이 지구상의 모든 사람을 지칭한다. 여기에는 어떤 제한이나 조건이 없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동서고금을 물론하고, 생로병사의 질고와 생존경쟁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태도를 보면, 그는 남녀노유의 구별이나, 빈부귀천의 차별이나, 민족이나 국가나 사회적 관습이나 전통 그리고 심지어 문화와 종교의 벽까지를 뛰어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적대시하는 사마리아 사람도, 가나안 지방 사람도, 수리아(시리아)인도, 로마인도, 그리스인도, 아무런 차별을 두지 않았다. 그들의 전통이나 관습이나 종교가 무엇인지도 상관하지 않았다. 즉 그들의 사회적 배경이나 종교적 배경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 모두를 친구로 대했고 형제로 대했고 하나님의 자녀로 대했다.
예수의 이런 포용적 태도, 즉 그의 초 민족적/초 종교적 열린 마음은 그가 탄생할 당시, 그를 경배하기 위해 동방에서 온 박사들의 내방과 경배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아기 예수를 방문한 동방의 박사들은 유대교나 기독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기록을 남긴 마태는 예수와 그의 복음이 유대 나라라고 하는 한 나라의 경계를 넘어서 전 지구적/우주적 성격을 띠고 있음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전 인류 공동체적 사상은 그의 만인 형제자매 사상에서도 엿볼 수 있다.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를 만나려고 찾아 왔을 때, 한 사람이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당신을 만나려고 밖에 와 있다고 알려 주었다.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누가 내 어머니고 형제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12:48-50). 여기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란 예수의 말씀은 사람의 형제나 자매됨의 조건이 혈족이나 민족(종족)이나 혹은 종교적 전통이나 교리나 소속 공동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만물과 만인의 창조주(아버지) 이신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준수하는 일 즉 인류애의 정신을 가지고, 인간으로서의 아름답고 선량한 도덕적/윤리적 삶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다 진정한 의미의 형제자매가 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또한 예수의 초종교적 혹은 초민족적 포용의 사상, 즉 전 지구적(인류적) 관용과 개방의 사상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한 유대인이 강도를 만나 중상을 입고 길가에 쓸어져 있을 때, 동족의 종교적 지도자인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모르는 체 방관하고 지나갔지만, 한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다가 이 광경을 보고 그 중상자를 치유해 준 이야기이다. 이 비유 속에는 진정한 “이웃”(neighbor)이란 민족(종족)이나 종교적 신념이나 혹은 신분의 차이 등을 모두 초월하여 선행(자비)을 실천하는 사람이란 뜻이 담겨져 있다. 여기서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참된 이웃이란 종교적 신념의 차이나 민족이나 종족적 차이를 초월한다는 사상을 암시해 주고 있다.
예수의 이런 포용력과 관용사상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것은 바로 그의 만유의 창조주 하나님 인식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Abba Father)라고 불렀다. “아바 아버지”란 모든 인류와 피조물을 친 자녀처럼 차별없이 사랑하신다는 포용정신을 내포하고 있다. 만유/민인의 아버지 하나님은 어느 특정한 민족이나 어느 특정 종교인들에게 국한된 하나님이 아니라 온 인류/만인과 만유를 차별 없이 보호하시고 돌보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임을 말씀해 주셨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 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삼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지극한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꼿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6:26-30)
위의 말씀을 잘 음미해 보면, 공중에 날아가는 이름 모를 새도 하나님이 먹이시고 들에 핀 야생화 한 송이도 하나님이 아름답게 옷 입히신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만물의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 하나 하나를 보호하시고 생장케 하시며 돌보시는 하나님이란 뜻을 나타내고 있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고 자신의 형상(영적 존재)으로 창조된 인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는 것이다. 즉 모든 인간 곧 전 인류는 모두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보호의 대상이란 것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자처하는 유대인만 지칭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또한 오늘날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기독교인만을 지칭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 곧 만유와 만인의 창조주시요, 그들에게 생명(존재)을 부여하시고, 순간순간을 그의 은혜로 살아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우주 공동체적 사상 곧 그의 한없는 포용과 관용의 정신은 바로 이러한 만유의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인식 곧 그의 신관(神觀)에서 비롯한 것이다. 예수가 이해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관대와 포용의 하나님이며, 만인과 만유를 차별 없이 사랑하시고 그들의 과오를 용서하시며 길이 참으시고 인내하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돌보시는 하나님이시다. 또한 그들도 자신(하나님)처럼 포용심과 관대함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며 서로 도우며 남을 이해하고 용납하며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 큰 하나가 되기를 원하시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시다. 예수의 복음은 바로 이러한 포용과 관용의 하나님을 우리 인류에게 알려주심으로 온 인류와 전 창조세계에 참 평화를 실현시키려 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주기도문에서 명시하신 하나님의 뜻의 실현이며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의 복음의 깊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포용과 관용의 정신과 그의 하나님 관을 바로/깊이 이해한 이는 사도 바울이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뜻의 실현인 만유와 만인의 아름다운 조화와 궁극적 통합(하나 됨)의 원리로 이해한 것이다.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8-10)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도 하나이요 성령도 한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오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엡4:2-6)
사도 바울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주 만물의 창조주인 하나님 한분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분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바로 “만유의 아버지”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만유의 아버지란 뭇은 의미일까? 하나님이 만유의 아버지란 하나님이 바로 모든 만물의 창조주시며, 따라서 만물이 그에게서 비롯되고, 그의 가호를 받으며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고 말한 것이다(롬11:36).
바울은 계속해서 만물의 창조주/아버지인 하나님은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통일하시고, 만물 안에 계시다”고 주장한 것이다(엡4:6). 즉 만물의 아버지 곧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은 만물과 멀리 떨어져 있는 분리된 실재가 아니라, 만물 안에 내재하여, 모든 피조물들에게 존재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제공하며, 그들 상호간에 상의(相依), 상보(相補), 상혜(相惠)의 관계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조화와 질서를 부여하며, 또한 만물을 뿔뿔이 흩어져 나가지 않고 전체가 서로 연결되어 큰 조화를 이루워서 한 통일체로 존재하도록 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사도 바울은 만물의 아버지(창조주)로서의 만유의 통합화 작업의 사역을 그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대행하고 있다고 역설한다. 그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서 하신 가장 중요한 역할은 다름 아니라, 바로 만유의 창조주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에 의한 계획(경륜)을 성취하기 위한 것으로서, 그것은 바로 천상천하, 즉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두를 하나로 연결시키고 통합시키는 일, 곧 “하나” 되게 하는 일이었다고 말하고 있다(엡1:10, 4:6).
여기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란, 정신적(비물질적)인 존재든 물질적인 존재든 그들 모두를 지칭하는 것으로서, 온 인류와 온 우주 만물을 다 지칭하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은 바로 모든 피조물과 온 인류를 하나로 통합시키는 일 즉 한 가족, 한 공동체, 다시 말하면, 한 몸 되게 하는 일이란 말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새로운 영적 공동체 즉 만인과 만유를 하나로 연결시키는 “우주적 공동체”란 신령한 건물을 세우는 “모퉁이 돌”(corner stone)로 묘사했으며(엡2:20-22), 또한 우주 공동체란 한 “특이한 몸”(special body)의 “머리”로도 묘사하였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4:15-16)
물론 사도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몸이란 여러 상이한 배경의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의 몸과 같은 특이한 공동체를 이루는 교회를 염두에 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특이한 공동체로서의 교회란 바로 만유와 만물을 통일하시는 하나님의 통합작용의 최상의 수단이 됨을 역설하고 있다. 즉 교회의 역할이란 바로 만유의 창조주 하나님과 또한 만유를 하나 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통합작용과 충만 작용의 최상의 도구라는 것이다.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 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 이니라"(엡1:22-23)
교회를 지칭하는 그리스어 “에크레시아”(ekklesia)란 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 보여준 것과 같이 “신의 부름” 곧 만유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의도인 특별한 사명 곧 하나님 나라의 실현과 목적을 위해서 불려나온 사람들의 모임 즉 하나의 특수한 공동체란 말이다. 여기에는 인종이나 신분이나 남녀노유의 어떠한 구분도 존재하지 아니한다. 이 안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완전히 평등하며 그리고 성삼위일체 하나님을 중심점으로 해서 모두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심지어 여기에는 오랜 세월을 통하여 형성된 어떤 특정 지역과 시대의 전통(관습)이나 문화나 이념(사상)이나 종교의 차별까지도 뛰어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만유의 창조주 하나님의 뜻(만유와 만인의 아름다운 조화와 하나 됨)의 실현을 위해 활동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었으며, 그 사역의 계승을 이어받은 교회의 본질이며 사명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교회란 전 인류와 모든 피조물이 하나가 되는 통합의 모형(model)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이라”고 역설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1장에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기 위함이라”(10절)고 말한 의미인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특정 신학이나 사상이나 교리에 집착하거나 얽매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가 품었던 마음 곧 만인과 만유를 끌어안는 넓은 포용적과 관대한 마음(mind of tolerance)의 소유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준 일을 가지고 트집을 잡는 유대인(바리세파인)들을 향해서, “내 아버지(하나님)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여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내 아버지께서 일하신다는 일”, 즉 하나님이 지금 하고 계시는 일이란 뭇은 일을 지칭하는 것일까? 바로 만유를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일, 만유를 서로 협력하며 조화롭게 살게 하는 일, 서로 간에 마음을 열게 하는 일, 그리고 모두가 큰 하나가 되게 하는 일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게 하시오며,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이 주기도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교의 목적과 뜻이 잘 나타나 있는 기도의 내용이다. 이 기도는 어는 개인이나 교회나 종교집단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전 지구적이며, 전 인류적이며, 더 나아가 전 우주적이다. 그런 면에서 이 주기도문은 가장 포괄적인 기도, 곧 하나의 “우주적 기도”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에게, 우리 자신들이나, 내 교회나, 내 종파나 내 종교만을 위해서 기도하라 하시지 않고, 온 인류를 위해서, 이 땅 전체 곧 온 누리에 천국 곧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그리하여 만민과 만유가 조화롭게 어우러져서 하나를 이룸으로 평화를 누리게 되는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게 해달고 기도하게 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 일 곧 하나님의 일, 하나님이 하고 계시는 일, 하나님이 원하시고 뜻하시는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는 바로 이 일(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천국복음을 주신 것이며, 그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고난까지 당하시고 자기 생명까지를 바치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를 바로 앞에 놓고 기도하기를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라고 기도했으며,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 가 말씀한 다 이루었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원하시는 일 곧 하나님이 하시고자 뜻하시는 바를 다 이루어 드렸다는 말씀이다.
실제로, 예수님의 천국 복음은 자기 제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으며,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오늘의 우리들의 교회나 기독교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지구상의 모든 사람 곧 전 인류와 모든 피조물 즉 만인과 만유를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복음은 어는 특정 집단이나 특정한 종교인 즉 특정한 교파와 종파나 혹은 특정한 종교(기독교) 만을 위한 복음이 아니고, 만인과 만유를 하나 되게 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은 초 민족적, 초 종교적, 더 나가서는 초 인류적 즉 “우주적”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20세기의 탁월한 영성가이며 신학자인 떼야르 드 샤르댕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주적 그리스도라고 말한 바 있다. 뿐만 아리라, 고대 교회의 교부들인 오리겐이나 그의 제자 닛사의 그레고리 그리고 6세기의 대 영성가 막시무스(Maximus the Confessor)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유를 통합하는 “우주적 그리스도”라고 말한 바 있다. 그들은 일직이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온 목적과 그가 행한 일이 바로 하나님의 뜻인 온 인류와 만유를 통합시켜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함이었음과 또한 만유의 통합 곧 하나 됨의 원리로서의 천국복음을 전해 주셨음을 간파하였던 것이다.
특히 샤르댕에 따르면, 로고스(Logos) 곧 신적 지혜의 화육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 안에 있는 영적 생명과 사랑과 지혜로부터 발산되는 “신비한 힘”(mystical energy)으로서 인간들뿐만 아니라 만물 속에 스며들며, 만물을 비추며, 통일시키며, 만유의 근원자이신 하나님께로 인도한다. 즉 “로고스”(진리/지혜)와 “아가페”(사랑)로서의 그리스도는 물질세계인 분자나 원자의 운동으로 부터 지고한 신비적 명상이나 기도에 이르기까지, 또한 공기의 미동이나 미풍에서부터 생명체의 운동이나 사유의 흐름에까지, 전 우주의 과정에 영향을 미치고, 그들을 변화시키며, 풍성케 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완성시킨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의 현시자 및 실현자로서의 그리스도는 양면 운동으로, 즉 물질적으로와 정신적으로, 전 지구와 전 우주 만물, 그리고 인간 영혼에 관계하며, 영향을 주며, 그들을 통합하며, 영성화하여, 하나님 안에서 하나(통합)되게 한다. 그래서 샤르댕은 예수 그리스도를 특정한 인간들만이 아니라 전 인류와 온 우주 만물에 관계되는 “우주적 그리스도”(Cosmic Christ)라고 부른 것이다. (참조, Teilhard de Chardin, The Prayer of the Universe, Harper & Row, 1968, pp. 99ff.). 샤르댕의 이러한 견해는 21세기의 우주 공동체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 믿어진다.
오늘날 우리는 지구촌 시대를 넘어 우주촌(Cosmic Village) 시대에 들어와 있다. 그런데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인류는 하나가 되지 못하고, 민족주의, 국가주의, 지역 이기주의, 집단/그룹 이기주의, 종교 이기주의 혹은 종파 이기주의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인류는 각 종교끼리 심각한 배타주의에 빠져 있으며, 군비경쟁, 자원경쟁, 영토경쟁에 몰두해 있다. 이러다가는 우리 인류는 예수님이 이룩하려던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평화가 실현되는 “하나 됨”의 꿈은 참으로 요원하게 될지 모른다.
이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우리 교회는 어떤 길을 택해야 할까?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의 진리/복음을 지닌 교회는 어떤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선포해야 할 것인가? 오늘의 우리 인류는 어떻게 해야 대립(싸움)과 경쟁으로 인한 자기분열과 쇠태와 파멸의 늪에서 건짐을 받을 수 있을까? 그 해법은 바로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그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와 그의 복음의 참 의미를 다시 새롭게 이해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교회는 바로 만유를 하나 되게 하시며 또한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을 가지고 우리 사회와 이 시대에 부과된 교회의 사명을 새롭게 이해하고, 또한 그 사명을 잘 감당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넓은 마음 곧 그의 한없는 포용력과 관대한 마음과 화합(통합)의 정신을 가져야 할 것이다.
아무리 크고 중대한 일도 단번에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아주 작은 일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이 땅 위의 하나님 나라의 실현, 세계평화, 일류의 통합과 하나 됨도 결코 단번에 이룩될 수 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열린 마음 그의 한없이 크고 넒은 마음을 가짐으로써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를 닮은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하며, 예수를 닮는 다는 것은 바로 예수의 마음(얼)을 소유한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예수의 마음을 소유한다는 것은 바로 그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과 한없이 넓은 "관용/포용의 정신"(the spirit of tolerance)의 소유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rkchg
|
혹 글을 퍼오실 때는 경로 (url)까지 함께 퍼와서 올려 주세요 |
자료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 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