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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아브람의 중보기도

창세기 박신 목사............... 조회 수 2208 추천 수 0 2011.09.28 21:2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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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창18:22-33 
설교자 : 박신 목사 
참고 : http://www.whyjesusonly.com/ 

실패한 아브람의 중보기도(창18:22-33)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오십 의인 중에 오 인이 부족할 것이면 그 오 인 부족함을 인하여 온 성을 멸하시리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사십오 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고하여 가로되 거기서 사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사십 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 주여 노하지 마옵시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삼십 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내가 감히 내 주께 고하나이다 거기서 이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이십 인을 인하여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십 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즉시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창18:16-33)

신자의 제사장적 역할

오래 전에 미국의 콜로라도 국립공원에 자동차로 여행을 간 적이 있다. 여름에도 만년설이 쌓여 있는 고산준령을 관광하고 꼬불꼬불 경사 길을 내려오는데 순간적으로 브레이크와 핸들이 말을 듣지 않아 완전히 낭떠러지로 떨어질 뻔했다. 정말 몇 초만 지나면 완전히 죽음으로 떨어지는 찰나에 옆 자리에 있던 아내가 큰 소리로 “주여! 주여!”라고 계속 고함만 질렀다. 하나님 제발 우리를 살려달라는 다급한 기도였다.

그런데 정말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계곡으로 떨어지기 직전에 사륜구동 SUV가 그 앞에 서 있었다. 길가 벼랑에 일부러 부딪히게 하는 바람에 속도가 조금 줄은 우리 차가 그 차 꽁무니를 들이박고 멈춰선 것이다. 갑자기 없던 차가 기도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꼬부랑길을 내려오느라 보이지 않던 차가 보이게 된 것이다. 그런 차가 그 장소에 하필 그 시간에 세워져 있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적이었다. 나아가 만약에 그 차가 소형차였다면 우리 모두 황천길로 갔거나 또 혹시라도 그 차에 사람이라도 타고 있었더라면 그들이 대신 떠밀려 내려가 희생당했을지 모른다.   

하나님이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19:5,6)는 언약을 맺었다. 오늘날의 신자도 이 언약에 당연히 참여하게 되어 하나님의 소유가 된 거룩한 백성으로 제사장의 역할을 해야 한다.

신약 이후의 신자가 이미 폐지된 구약의 성전의 희생 제사의 제사장 역할까지 감당하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폐지된 것은 어디까지나 율법의 외형적 제도와 관습이지 거기에 내포된 정신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십자가에 드려진 영단번의 죽음이 성전제도를 대체했지만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시키려 오셨다. 신자는 여전히 불신 세상과 하나님을 화목시키는 제사장적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제사장적 역할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중보(仲保) 기도다. 죄인을 구원하는 중보자는 물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다. 신자가 중보자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중보자 예수의 은혜가 주위의 사단에 미혹된 불쌍한 영혼에게 베풀어지게 기도는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 직접 구원을 이루시는 이는 주님이지만 신자는 그 일이 이루어지기까지 쉼 없이 기도해야 한다.  

본문은 죄인의 구원을 위한 중보기도의 가장 모범적인 예로 가르쳐져 왔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려는 하나님에게 아브라함이 조카 롯의 구원을 끈질기게 간청하여 응답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을 아무리 훑어봐도 그가 기도했다는 흔적이 없다. 또 하나님이 그의 기도에 맞추어 응답해준 사실도 없다.

물론 기도가 꼭 무릎을 꿇고 엎드려 일정한 형식을 갖추고 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잠시 지나가는 생각으로 자기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면 하나의 훌륭한 기도다. 지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직접 대면해 자기 소원을 여러 번 끈질기게 아뢰었고 또 그가 소원했던 대로 롯은 구원을 받았다. 표면적인 모습만으로는 지금껏 가르쳐 온 바가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도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찾기 전에 본인이 먼저 구체적인 소원을 갖고 자발적으로 그분께로 나가야 한다.

또 위에든 예처럼 긴급한 일을 당해 그 자리에서 “주여!”라고 고함만 질러도 기도다. 그러나 지금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려 한다는 계획을 듣고서 보인 반응이었지 기도 자체는 아니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기도라기보다는 하나님과 벌린 논쟁이다. 그것도 처음에는 그가 아주 자신 있고도 당당하게 나섰다가 차츰 꼬리를 내리면서 하나님께 한 마디 대꾸도 못하고 끝난 논쟁이다.  

아브라함의 착각

소돔을 멸망시키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 된 아브라함이 가장 먼저 보인 반응이 무엇이었는가?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의인도 악인과 함께 도매금으로 같이 쳐서 멸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 아니냐고 따진 것이다. 그는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이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라고 그런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물론 그로선 조카 롯과 그 가족의 안위가 당장 염려되어서 그들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고 싶었을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만약 롯의 구출이 가장 중요했다면 처음부터 솔직하게 간구했었어야 했다. 예컨대 “소돔에도 롯과 같은 의인들이 있으니 잘 살펴봐서 긍휼을 베풀어 달라”는 내용으로 말했어야 했다. 하나님이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창18:21)고 말씀하신 직후니까 더더욱 그래야 했다.  

아마도 그는 친척 관계인 롯을 바로 거명하기가 뭐했거나 소돔 성중에 알고 지내는 친구들과 그 가족의 숫자를 감안해 의인 오십 명을 구해달라고 했을 것이다. 어쨌든 자신이 보기에 의인이든지 아니면 개인적 관계로 멸망당하게 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구원을 염두에 두었던 것은 맞다.  

그러나 지금 그가 하나님에게 시종일관 주장한 것은 의인의 구원이 아니었다. 의인 열 명이라도 있으면 소돔을 멸하는 것 자체를 중지해 달라는 것이었다. 또 무엇보다도 그런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소돔은 결국 멸망당했다. 하나님이 의인 열 명이라도 발견하면 멸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도 멸했으니 소돔에는 의인이 열 명도 안 되었다는 말이다. 그가 기도한 것이 사실이었다 해도 그 기도가 응답이 안 되었다는 면에서 성경이 말하는 바는 전통적인 가르침과는 다르다.  

소돔의 멸망 계획을 들은 직후 그에게는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생각부터 먼저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거의 하나님께 대들듯이 당신의 공의를 걸고 넘어졌다. 소돔에도 의인이 많은 데 무조건 다 멸망시키면 하나님이 잘못하는 것이 아닌가 말하자면 무자비하고 잔인한 하나님이 아니냐라고 따진 것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선뜻 의인 오십 명이 있으면 절대로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그의 생각이 틀렸다는 뜻이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만큼 무자비한 하나님이 아니다. 그리고 네 말 대로 정말로 의인이 오십 명이 있으면 얼마든지 이 계획을 중지시키겠다.” 그 순간 그에게 어떤 생각이 들었겠는가? “어이쿠! 내가 앞뒤 구별도 못하고 엉겁결에 잘못 생각했는가 보다.” 그리고는 소돔의 형편을 곰곰이 따져 들어갔더니 의인의 숫자가 자기가 생각했던 것만큼 많지 않았던 것이다.

그 다음부터 그의 태도는 180도로 뒤바뀌었다.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27절) “내 주여 노하지 마옵시고 말씀하게 하옵소서.”(30절) “내가 감히 내 주께 고하나이다.”(31절)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시리이다.”(32절) 처음에 당당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갈수록 자신이 없어지면서 마지막에는 완전히 꼬리를 내리는 형상이다.  

간절한 기도란 갈수록 뜨거워져야 한다. 또 응답 받을 확신이 있는 기도일수록 더 그렇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서 전혀 그런 기색을 찾아볼 수가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기도가 아니라 논쟁을 벌였다가 무참하게 진 것이다. 만약 기도라 쳐도 구걸 수준에 가까운 기도다. 구걸 치고도 이렇게 치사한 구걸이 없다. 비유컨대 거지가 만원만 달라고 했다가 없다고 하니까 몇 번이나 오천, 천, 백, 십 원 씩으로 동냥 액수를 줄이다가 마지막에는 일원 동전이라도 달라고 했지만 거절당한 것과 같다.

아브라함은 크게 착각한 것이다. 하나님의 품성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했다. 소돔 성의 죄악에 대해서도 무지했다. 또 의인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아직까지도 인간적 도덕적 의에 기준한 믿음으로 하나님에게 논쟁을 걸었다가 정말 본전도 못 찾은 셈이다. 그런데 그가 정작 몰랐던 것은 따로 있었다.

아브라함의 잘못

하나님이 한 공동체의 죄악으로 인해 전부 멸망시키는 심판을 하기는 노아 홍수 이래 소돔이 처음이다. 바벨탑 사건은 인간이 죄악에 빠져 타락했다기보다는 한 곳에 모여 힘을 합쳐 제국을 건설해보자는 것이었다. 인간의 능력을 믿고 교만에 빠진 죄를 범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사람들을 지면에 흩으셨다. 또 언어가 하나라 인생을 높이는 일을 경영하기가 쉽기 때문에 언어를 혼잡케 하신 것이다.(창11:4)

반면에 노아 때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해”(창6:5) 하나님이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할”(6절) 정도였다.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했다.”(창8:21) 어린이에서 노인까지 전부 악했고 노아 가족을 제외하고는 의인이라고는 찾아 볼 길이 없었다. 지금 소돔의 경우도 의인 열 명이 없어서 결국 멸망을 당했다. 노아 때와 같이 어린이들조차 악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노아 때와 같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입장과 위치는 당시 어떠했는가? 노아 홍수 이래로 지구상에서 참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유일한 인간이라 할 수 있다. 노아의 세 아들은 노아와 함께 살았고 또 물의 심판을 보았기에 하나님을 믿었겠지만 그 후손들의 믿음에 관해서 성경은 침묵하고 있다. 그 후 세상 모든 족속이 모여서 바벨탑 사건을 벌였다. 노아가 아들 가나안이 범죄 하였을 때에 세 아들 중 셈에게만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창9:26)고 축복했다.  일차적으로 셈 본인의 믿음을 칭찬한 뜻이지만 셈의 먼 후손인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이 이어질 것이라는 예언이기도 하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아담, 아벨, 노아, 셋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인류 구속사의 핵심 인물이며 당시로는 유일하게 하나님을 알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복의 근원으로 삼았고 또 그 후손을 하늘의 뭇별처럼 많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를 통해 당신의 구원이 인류 전체에 퍼져나가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자기가 깨우쳐서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된 것이 아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조상 대대로 우상 숭배에 젖어 있던 그에게 하나님이 어느 날 나타나셔서 당신을 계시해 주셨다. 그리고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창12:10)는  구원의 약속을 주셨다. 그는 자기 세대에선 노아와 같이 유일한 의인으로 세상 앞에 서게 된 자였다. 그렇다면 당연히 노아와 같은 인생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언약을 받은 직후부터 잘못을 범했다. 친척을 떠나야 하는데 조카 롯을 데리고 나왔다. 나중에 서로 소유가 많아지고 각자의 종들이 우물과 초장을 두고 다투게 되어서야 헤어졌다. 지금 하나님이 소돔을 심판하려 함에 그 롯이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 처리해야 할 골칫거리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롯 개인의 구원을 두고 혹은 그 때문에 소돔의 심판을 연기해야 하나 고민했다는 뜻이 아니다. 롯 때문에 오히려 아브라함을 걱정한 것이다.  

“그 사람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창18:16-19)

소돔을 심판하러 가면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다. 아브라함에게 소돔의 심판을 숨기지 않겠다고 했다. 하나님으로선 어차피 소돔을 멸망시킬 계획이 세워져 있었음에도 그에게 미리 알려준 것이다. 그로 인해 그 계획이 변경되지도 않을 것이란 뜻이며 실제 그와 논쟁한 후에도 취소되지 않았다.

하나님이 왜 미리 알려주셨는가?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삼아 천하 만민이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하려는 당신의 언약을 이루려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에게 그의 입장과 역할을 다시 상기시키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 된 아브라함으로선 앞에서 말한 대로 당장 조카 롯 가족을 포함하여 소돔에 있는 몇몇 아는 사람들이 걱정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에게 그들을 구원해 달라고 간구해봐야지 하는 마음이 자연적으로 들었을 것이다. 다른 말로 하나님이 미리 찾아와서 그 계획을 통보해준 것은 그더러 당신에게 그들의 구원을 간구하라는 뜻이었다. 말하자면 복의 근원으로서 그가 해야 할 역할은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한 중보기도였던 것이다.  

그가 논쟁(기도?)을 계속하면서 깨달은 것은 소돔에는 의인이 자기 생각보다 훨씬 적고 어쩌면 열 명도 안 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차츰 “소돔이 저렇게 죄악으로 관영하는 동안에 나는 무엇을 했는가? 복의 근원으로 세워진 내가 도대체 지금까지 한 일이 무엇인가?”라는 깨우침도 함께 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진지하게 회개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조카 롯의 가족만은 내가 제대로 하나님을 알게 해 주었어야 하지 않았는가?”라는 반성은 했을 것이다.

그가 처음에 친척인 롯을 두고 오지 못한 것은 분명 하나님의 명을 어긴 잘못이었다. 그러나 부모가 없는 조카가 삼촌을 따라 오겠다고 하는데 억지로 떼버릴 수는 없다. 또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가 한두 번 잘못한 것으로 당장 벌을 주시지도 않는다. 대신에 반드시 그 잘못을 깨닫고 고치기를 바라며 기다려주신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다른 말로 세상에서 의지할 수 있는 것들은 전부 버리라는 것이다. 그것들을 소유하거나 상종조차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당신의 자녀가 되어 세상 앞에 복의 근원이 되려면 하나님 외에 세상의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 땅은 잠시 지나갈 광야이며 영원한 본향은 따로 있기에 나그네로서 하나님 가라는 곳으로 장막을 옮겨가며 살라는 것이다.

비록 아브라함이 처음에는 롯을 떠나오지 못했지만 그 이후의 여정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조카에게 알게 해주었어야 했다.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어서 조카 또한 자기처럼 광야에서 장막을 치며 나그네 같은 삶을 살면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게끔 해야 했다. 설령 조카와 의리를 상하지 않기 위해 서로 헤어졌지만 롯이 소돔 땅에까지 가서 사는 것은 말려야 했다. 아니면 소돔 땅에 가 있더라도 자주 만나 여호와 하나님을 알아서 그 죄악의 땅에서 나오도록 권했어야 했다. 최대한 양보해서 소돔 땅에 있는 롯의 구원을 위해서 계속해서 기도했었어야 했다.

아브라함이 처음에는 50명의 의인이 있으면 소돔을 멸망시키지 말라고 대들다시피 하다가 차차 줄여나가서 마지막에는 10명까지 내려갔다.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듣고 양보해준 것이 아니라 그가 아무리 해도 자신이 없어졌던 것이다. 그러는 과정에 그는 친구들은 둘 째 치고 조카 롯을 위해서도 하나님을 아는 자로서 한 일이 아무 것도 없다고 회개했을 것이다. 틀림없이 마지막 순간에는 자기의 게으름과 잘못 때문에 하나님 앞에 고개조차 들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상황을 유추하며 성경을 다시 자세히 읽어 보라. 아브라함의 자신감은 갈수록 줄었고 하나님의 자비는 전혀 줄지 않고 오히려 더 늘어났지 않는가? 이 논쟁은 하나님 쪽에서 자청해서 시작한 것이다. 기도라면 하나님이 시킨 기도였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을 당신께서 이루기 위해 그렇게 했다.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복을 주려는 것이었다.

그를 온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 다른 사람들 앞에 당신의 빛을 전하려 한 것이다. 앞으로는 지금처럼 살지 말며 최소한 자기 주위에 가까운 사람 열 명에서 시작하여 오십 명이라도 하나님을 아는 의인으로 만들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의인 50명이 있다고 큰 소리쳤지만 하나님은 거꾸로 “너는 아직도 의인 열 명도 만들지 못했지 않느냐?”라고 깨우쳐주셨다. 그가 받은 언약의 내용이 무엇인지 그로 다시 한 번 확실히 깨닫게 해서  복의 근원으로 세우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이 찾는 사람

본문의 사건이 논쟁이라면 아브라함의 일방적 패배로 끝난 것이요, 지금껏 가르쳐진 대로 중보기도였다면 그 기도는 응답이 되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 간구가 의인 열 명이 있으면 멸망시키지 말아달라고 했지만 멸망했으니 말이다. 그래도 조카 롯의 가정은 구했으니 그 기도가 응답이 되었다고 생각하는가?

그런 해석이 타당성을 가지려면 최소한 롯이 의인이었어야 한다.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보내셨더라.”(창19:20) 하나님이 롯의 구원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롯은 의인이라 구해주었다는 언급이 없었다. 다만 아브라함이 조카를 사랑하는 마음을 아름답게 받으셨던 것이다. 롯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에 의한 것이었다는 뜻이다.  

베드로 사도가 “의로운 롯”을 건지셨다고 표현할(벧후 2:7) 만큼 롯에게 최소한의 믿음은 있었다. 그러나 롯은 소돔 성에서 생명의 건짐을 받고도 영원한 구원을 얻을 만큼의 의인은 되지 못했다. 비록 취중에 한 행동이지만 두 딸과 근친상간의 죄를 범했고 이스라엘 민족의 대적이 된 모압과 암몬의 선조가 되는 벌을 받았다. 결국 롯이 소돔에서 구원 받은 것은 그가 하나님을 믿는 의인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했기 때문에 단지 소돔의 멸망에서 면제된 것뿐이었다.

어쩌면 하나님은 롯이 소돔에서 나오면 아브라함이 그를 찾아가서 다시 당신을 믿도록 가르칠 것을 기대했을지 모른다. 너무나 엄청난 하나님의 심판을 목도했고 그 심판에서 구사일생한 롯에게 하나님을 증거할 절호의 찬스였지 않는가? 그러나 성경에 아브라함이 롯을 찾아갔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오히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즉시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창18:33)고 기록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정말 롯이 의인이라고 생각해 자신의 간구를 하나님이 들어주셨다는 확신이 있었다면 최소한 그 뒤에 롯을 찾아가 보았어야 했다. 그는 아마도 마지막 순간에 가서는 마음 속으로 롯의 구원을 포기했는지도 모른다.
      
죄악이 관영한 유다를 심판하려 할 때에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렘5:1) 하나님은 예레미야 외에 의인이 단 한 명이라도 남아 있으면 심판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롯이라도 진정한 의인이었다면 소돔도 멸망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이지 않는가?

심지어 하나님은 의인이라고는 단 한 명도 없는 악한 성 니느웨를 구원하셨다. 어떻게 구원했는가? 땅 끝까지 도망간 당신의 백성 요나가 전하는 회개의 메시지를 통해서였다. 의인은 죄인의 도성에 들어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보여야 한다. 만약 그 의인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요나의 경우처럼 하나님은 강권적으로 시키신다.

노아와 아브라함은 당대에 하나님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노아는 평생을 두고 조롱과 멸시를 당했지만 “오직 의를 전파”(벧후2:4)했다. 그 긴 세월 동안 방주를 지으면서 세상 사람들 앞에 그들이 믿든 안 믿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했다. 반면에 아브라함은 세상 사람의 조롱과 멸시가 싫어서 아내를 여동생이라고 두 번이나 속였다.

또 조카가 “무법한 자의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고, 또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도록”(벧후2:7,8) 방치했다. 롯이 그 큰 심판을 보고는 얼마나 두려웠으면 성읍에 거하기를 두려워하여 산에 들어가 굴에서 살면서 아예 아무도 만나지 않았지 않는가? 롯 혼자 땅을 치며 후회해도 이미 늦었고 결국 롯은 멸망했다.  아브라함이 정말 하나님에게 떼쓰듯이 롯의 구원을 위해 기도했다면 하나님의 사자를 따라서 소돔에 갔어야 했고 최소한 유황불이 떨어진 후에라도 찾아가서 생사 여부를 확인했어야 했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이 무법한 세상에서 오직 한 사람의 의인이라도 찾고 있다. 이 세대에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한 사람도 없다는 뜻이 아니다. 모든 신자가 하나님 앞에 그분이 찾으시는 최후의 한 사람으로 서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정말로 복의 근원이 되어서 주위에 그분을 증거하고 그 은혜를 나눠주어서 그 사람들도 하나님을 알게 해야 한다. 말하자면 신자가 속한 공동체가 그 신자가 속해 있음으로써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면하게 해야 한다. 신자는 자기 주위에 의인 열 명, 아니 최소한 단 한 명이라도 있게 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미루고 구원을 앞당길 책임이 있다.

하나님이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어떻게 한탄하셨는가?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 고로 내가 내 분으로 그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22:30,31) 소돔 사건에 적용시키면 아브라함이나 롯이 그 땅에 가서 막아서지 못해 멸망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신자들은 소돔 땅 같은 곳을 멀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 혼자 고상해져 천국도 혼자만 가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히려 신자더러 소돔에 가라고 하신다. 소돔 같은 땅에 신자가 가서 막지 못하면 자연적으로 더 무너지게 마련이다. 그 땅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길은 진짜로 없어지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요나더러 니느웨에 가서 무너진 성벽을 막으라고 했을 때에 그는 “왜 내가 가야 합니까? 그놈들은 지옥 가도 쌀 놈들인 데요!”라고 원망했다. 그 말은 “빨리 니느웨를 멸망시켜 주세요. 그럼 제가 하나님의 크신 영광을 박수치며 신나게 구경할께요”라는 뜻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좌우를 분변치 못해 악한 니느웨 사람뿐 아니라 그 육축과 심지어 호박덩굴까지 아끼셨다.  

신자들이 소돔 땅을 멀리하고 교회에만 모여서 성경공부, 기도회, 찬양예배만 드리고 있으면 하나님이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해 줄 것 같은가? 천만의 말씀이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으로 세웠나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겔3:18)이라고 했다. 소돔 땅은 심판 받겠지만 그곳에 찾아가 성벽을 막아서지 못한 엉터리 파숫군도 반드시 심판하리라고 했다.  

신자는 세상 앞에 파숫군으로 부름 받은 자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모든 신자는 자기를 통해 열방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구원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 단지 예수 잘 믿어 천국 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도처에서 무너져 내리는 성벽을 막아서야 한다. 거창하게 멀리까지 갈 필요가 없다. 꼭 우상 숭배하는 미개지를 찾아가는 선교사가 될 필요가 없다. 가장 가까운 곳에도 무너지고 있는 성벽은 너무나 많다.

부부 사이에 그것도 둘 다 신자인데도 서로 자존심 조금 상한 것 가지고 다투다가 종내는 헤어지지 않는가? 가정이라는 성의 벽이 무너진 것이다. 자녀를 말로 상처 주고 열등감을 불러일으킨 적은 얼마나 많은가? 형제들 간에 돈 때문에 시기와 질투는 또 얼마나 심한가? 직장의 동료, 부하, 상사를 사랑으로 존경하고 섬기는가? 교회 안에서도 체면과 위신을 세우기 위해 경쟁하지 않는가?

그 무엇보다도 아직 예수를 모르는 영혼을 보면 정말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라도 하는가?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소명을 확신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이라도 하는가?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어떤 모습이라도 쓰임 받기를 소원하고 실제로 쓰임을 받고 있는가? 아니 나 자신의 내면과 심령에서부터 소리 없이 무너져 내리는 것은 없는가? 그래서 내 영혼에 죄가 스며들어 소돔처럼 죄악이 관영하는 땅으로 변하지 않는가? 성벽을 막아설 곳은 너무나 많은데 제대로 막아서는 자는 찾아보기 너무 힘들다. 신자들이 전부 어디에 가 있는가? 교회 안에서 종교 사업을 크게 벌려 자기 혼자 복 받으려고 정신을 못 차려 그렇다.

신자가 천국에 가면 이 문답의 주체가 서로 바뀔 것이다. 하나님이 먼저 신자에게 “네가 속한 성읍에서 네로 인해 의인 오십 명이라도 생겼는가?”라고 물을 것이다. 그럼 신자는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주여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오니 오십에서 오 인 부족함을 인하여 제 상급이 줄어들지는 않겠지요?” 그러다 자꾸 신자가 꽁무니를 빼면서 열 명까지 내려갔지만 여전히 자신이 없어지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래서 천국에서마저 하나님과 신자의 만남이 그것으로 끝이 나고 각자 헤어져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물론 이미 천국에 들어와 있는 이상 그럴 리는 없겠지만 부끄러운 구원이 될 것은 틀림없다. 계시록에 보면 이십사 장로들이 천국 보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각 자가 가진 면류관을 그 보좌를 향해 던지는 모습이 있다.(계4:10) 그런데 혹시 면류관의 숫자가 이 땅에서 신자로 인해 바뀐 의인의 숫자만큼 주시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어떤 신자는 오십 개나 던지는데 두서너 개 혹은 전혀 던질 것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무너진 성벽을 막아서지 않는 신자는 구원을 받되 정말 부끄러운 구원을 받은 것이다. 어쩌면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일 수 있다. 하나님의 일이 실패로 끝나거나 낭비하는 법은 없으니까 말이다. 아브라함은 분명 롯에 대한 인간적 애정은 대단했다. 또 분명히 하나님께 간구하여 롯을 구해보려는 노력도 했다. 그러나 그 노력이 기도 하나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가 평소에 복의 근원으로 바로 서 있을 때에만 롯을 구할 수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하나님의 교훈이자 또 바로 그것이 아브라함의 간구의 응답이었다.  

지금 혹시 하나님이 당신과 연관이 있는 공동체를 멸망시키려 하면서 당신에게 먼저 그 계획을 알려주려고 왔다고 가정해보자. 그 때에 당신이 하나님에게 보일 반응이 과연 어떠할지 곰곰이 생각해보라. 도무지 할 말이 없어서 큰일 났다 싶은가?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세상 앞에 진정한 의인으로 서있으라고 다시 깨우쳐 주려고 오셨기 때문이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주위에 당신이 막아서지 않으면 무너져 내릴 성벽이 꼭 한 군데 이상은 있게 마련이니까 말이다.

10/30/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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