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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은 꿈꾸는 자가 아니었다

창세기 박신 목사............... 조회 수 2844 추천 수 0 2011.09.28 21: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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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창37:5-11 
설교자 : 박신 목사 
참고 : http://www.whyjesusonly.com/ 

요셉은 꿈꾸는 자가 아니었다.(창37:5-11)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컨대 나의 꾼 꿈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그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 꿈과 그 말을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그가 그 꿈으로 부형에게 고하매 아비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너의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모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그 형들은 시기하되 그 아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더라.”(창37:5-11)

실패한 인생 모세?

성경의 인물 중에 모세만큼 특이한 일생을 보낸 자도 드물다. 총 120년을 살면서 초반 40년은 이교도로 민족의 대적이자 당시 최강국 애굽의 궁정에서 왕자로 화려한 삶을 누렸다. 인생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 중반 40년은 졸지에 살인범 도망자 신세가 되어 자기 민족과 키워준 나라 둘 다에서 버림받아 광야에서 양이나 치는 쓸쓸한 패배자로 지샜다. 종반 40년은 하나님과 맞대면 하여 그분의 구체적인 인도를 받으며 자기 민족을 애굽에서 구원해내는 인도자로 알차고도 영광스럽게 보냈다.

그러나 그가 인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순간은 비장하고 안타깝기만 하다. 평생 동안 그리던 젓과 꿀이 흐르는 땅을 바로 눈앞에 두고도 자기 혼자 들어가 보지 못하고 죽었다. 그것도 광야에서 물을 달라고 계속 아우성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에 견디다 못해 하나님 앞에 딱 한 번 화를 냈었던 일 때문에 말이다.(민20:1-13)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 산에 올라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 산 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신34:1,4,5)

그럼 그의 인생은 실패로 끝났는가? 그렇지 않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신34:10)라고 성경은 그를 평가하고 있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영웅이자 구약의 가장 위대한 인물이 되었다.

개인적으로도 결코 실패가 아니라 완전히 성공한 인생이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3:10) 그는 하나님이 주신 이 커다란 꿈을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고 자기 개인의 영달과 상관없이 그 소명을 결국 완수했다. 마지막 순간에도 약속의 땅을 직접 보면서 수일 내에 사랑하는 자기 민족이 그 땅으로 들어갈 것을 생각하며 평온과 만족 가운데 눈을 감을 수 있었다.    

그런데 떨기나무 불꽃으로 나타나신 여호와를 만나 구체적으로 소명을 받기 전에도 사실 모세는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되는 꿈을 키웠다. 그는 생모에 의해 키워졌기 때문(출2:7-10)에  어느 시점엔가 자신이 유대인임을 알았다. 바로가 유대인 신생 남아를 다 죽이라고 명령했음에도 자기가 어떻게 기적적으로 살아났으며 도리어 바로의 궁에서 왕자로 양육되게 된 경위를 다 들었을 것이다. 또 여호와 신앙과 그분이 자기 민족에게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대한 소망도 생모에게서 물러 받았음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는 “한 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고역함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어떤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좌우로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에 감출”(출2:11,12) 수는 없지 않겠는가? 최소한 자기를 바로의 궁정에서 자라게 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심각하게 고뇌했고 또 그런 위치를 이용해 동족을 도우겠다는 마음을 먹은 것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구체적인 부르심을 받기 전이라 인간적 의분과 방법으로 동족을 도우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첫 시도는 완전한 실패로 돌아가고 오히려 살인범이 되어 처량하게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다. 동족으로부턴 동포의 고역과는 상관없이 궁정에서 호의호식하는 자로 간주되어 버림을 받았고, 애굽에선 수배현상범이 되었다. 그 후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기로 보낸 40년은 왜 바로의 궁정에 보내어 놓고도 시작부터 아무 일도 못하게 막았는지 그 이유와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알고자 몸부림치는 시기였을 것이다.

그가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을 대면하게 되었을 때쯤에는 어쩌면 아무리 기도해도 명확한 응답이 없어 자기 인생이 이렇게 허비되나보다 반쯤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80 노인이 되기까지 마음 한 구석으로 동족에 대한 책임감을 떨쳐버린 적은 없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의 전 평생은 하나님께 꿈을 받아 그 꿈을 이루려고 완전히 바쳐졌다. 모세야말로 하나님의 비전을 꿈 꾸며 실천한 자였다.  

요셉의 꿈(Dream)

그런데 지금껏 교회에선 엉뚱하게도 요셉을 꿈을 꾸는 사람, 큰 비전을 이뤄낸 자의 대표로 가르쳐져 오고 있다. 요셉의 경우는 모세와는 전혀 달랐다. 그가 꾼 꿈은 문자 그대로 꿈(Dream)이었지 하나님이 주신 소명으로서의 꿈(Vision)은 아니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우리말의 꿈에 대한 정의(定意 Definition)부터 정확히 해둘 필요가 있다.

우선 가장 보편적이자 문자적 의미로 사람이 자면서 자기도 모르게 꾸게 되는 꿈(Dream)이 있다. 누워 자는 동안 무의식의 상태에서 사고 활동을 계속한 것이 깨고 나서도 기억에 남은 것이다.  
  
꿈의 두 번째 의미는 자기가 이루고 싶은 소망이다. 한국 월드컵 때에 “꿈은 이뤄진다”라는 캣치프레이즈가 큰 인기를 끌었다. 최초로 세계 16강에 진출하려는 전 국민의 염원을 한 마디로 나타낸 말이다. 자기 소망을 이뤄가고 또 이뤄진 모습을 혼자 연상하는 것이 마치 자면서 꿈꾸는 것과 같아서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게 된 것 같다.

마지막으로 두 번째와 비슷하지만 신자들의 경우에 하나님이 심어주는 꿈이 있다. 신자의 삶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항상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특별히 어떤 일을 하면서 그 증거를 할 것인가는 하나님이 주신 꿈에 따라야 한다. 불신자의 삶이 자기의 소원을 자기가 이루는 것이라면, 신자의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그분의 소원을 평생에 걸쳐 그분과 함께 실현해 나가는 것이다.  

우리말로는 이 셋 다 ‘꿈’이지만 혼동을 피하기 위해 각기 다르게 표현하는 것이 좋다. 즉 누워 자면서 꾸는 꿈은 문자 그대로 ‘꿈(Dream)’, 신자 불신자를 막론하고 자기 인생에서 이루고자 스스로 세운 계획은 ‘소망(Hope)’, 하나님이 신자에게 심어준 소명은 ‘비전(Vision)'이라고 구별해야 한다.  

꿈은 주로 그 날 혹은 최근에 있었던 일에 대한 자신의 평소 생각과 감정 등이 반영된다. 그런 경우는 대개 “아직도 그 일을 내가 꿈에서까지 계속 고민하고 있었구나!”라고 스스로 알 수 있다.

그러나 꿈은 무의식 상태에서 꾸게 되고 또 무의식의 상태란 아주 심오하고 신비한 것이라 자기가 전혀 알지 못하는 신비한 현상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 중에 스토리가 뒤죽박죽으로 연결이 전혀 되지 않고 심지어 잘 기억해내지 못하는 것은 일종의 환상(Fantasy)으로 흔히 말하는 개꿈이다.

반면에 줄거리가 분명히 기억나면서 특별한 일에 대한 징조(Sign) 내지 경고(Warning)로서 꾸는 꿈도 있다. 나중에 그런 꿈들은 현실에 그대로 일어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래서 그런 특별한 꿈은 심각하게 받아들여서 그대로 따르며 조심하려고 노력한다.  

그런 징조 내지 경고를 주는 꿈에는 심지어 사단으로부터 오는 경우도 있다. 흔히 가위 눌리는 꿈을 필두로 꿈에 돼지나 용을 보고 복권을 샀더니 당첨되었다는 것들이다. 하나님은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일확천금을 노리는 일을 결코 돕지 않는다. 불신자가 주로 사단이 주는 꿈을 꾼다면 하나님의 자녀들도 당연히 그분으로부터 오는 징조와 계시를 꿈을 통해 받을 수 있다. 요셉이 꾼 꿈이 바로 그것으로서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꿈으로 계시(啓示 Revelation)한 것이다.

요셉이 꾼 꿈은 소망이나 비전이 아니라 단순히 꿈이었다. 하나님이 그의 일생을 통해 당신께서 이루실 당신의 일을 계시로 꿈을 통해 미리 보여준 것뿐이다. 요셉이 그 꿈을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소명이라고 인식하여 그 꿈을 성취하려는 뜻을 품지 않았다. 만약 정말로 그가 형들을 다스리는 왕이 될 큰 꿈을 꾸었다면 아무리 어려서 철이 없어도 형들에게 쉽게 꿈 이야기를 해서 미움을 살 리가 없다. 비록 전후 판단력이 조금 부족하긴 했지만 이미 열  일곱 살이나 되었다. 그는 하도 신기한 꿈인지라 단순히 자랑 반 호기심 반으로 이야기 한 것뿐이다.

그런데도 지금껏 교회에선 마치 요셉이 하나님의 큰 비전을 품고 살면서 그것을 이뤄낸 믿음의 영웅으로, 그것도 세계최고 강국이자 이국땅에서 노예 신분의 외국인이 그 나라 총리대신까지 올라갔다는 입지전적인 인물로 잘못 소개되어 왔다.  

비전과 소망의 차이

하나님의 뜻은 당신 쪽에서 먼저 보여주지 않는 한 인간 스스로는 도저히 알 수 없다. 비유컨대 아버지가 어떤 물건을 주먹 안에 움켜쥐고 있으면 한두 살짜리 어린 아들은 아무리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도 그 주먹을 열고 속을 들여다 볼 수 없다. 아빠가 스스로 손을 펴주어야 그 속에 동전 혹은 사탕이 들었는지 비로소 알 수 있다. 이처럼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당신께서 먼저 인간에게 드러내 보이시는 것이 계시다.

그 계시는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신자에게 전달된다. 기도, 성경 말씀, 환경, 성도들의 권면을 통해서 또는 하나님이 직접 음성을 들려주거나 환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물론 꿈도 그 통로 중의 하나이며 특별히 요셉에게는 꿈을 계시의 수단으로 자주 쓰셨다.      

인간이 스스로 자기 인생을 계획하면 소망이 되고 그것을 이루는 일정과 방법도 인간이 정한다. 또 그 계획을 오직 자기 책임 하에 이루려고 노력한다. 반면에 하나님이 어떤 신자에 대한 평생의 계획을 갖고 계시다면 당연히 그것을 이뤄나가는 모든 일정과 방법도 하나님이 주관하신다. 신자가 자신이 소망한 적이 없는 계획을 스스로 이뤄나갈 수는 당연히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이 세우신 계획을 그 본인에게 계시해주시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며 또 한 개인에게도 시기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계시를 한 날 한 시에 구체적으로 주는 경우도 있지만 점진적으로 구체화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말이다. 처음에는 막연하고도 우연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 같다가 차츰 특정한 한 쪽 방향으로 좁혀 주신다. 하나님이 주시는 소명인지라 반드시 당신께서 구체화(具體化 Visualize)시키는 작업을 하신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구체화가 완성된 하나님의 계획을 신자가 인식하게 되어 기꺼이 이루겠다는 헌신이 따르면 비전(Vision)이 된다. 그 비전은 당연히 신자 개인의 평생의 소망으로 대체된다. 때로는 그 반대로 신자가 기왕에 갖고 있던 개인적 소망이 사실은 이미 하나님의 소명이었던 경우도 있다. 어쨌든 하나님이 주시는 소명은 일시적 혹은 점진적 계시를 통해 신자 본인이 분명히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모세의 경우 첫 80년은 동족을 위해서 자신이 할 어떤 역할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만 했다. 그러다 떨기나무 불꽃에서 하나님이 그것을 이룰 동역자(아론)와 수단(지팡이)을 포함해 분명한 일정과 방법까지 가르쳐 주었다. 그의 개인적 소망이 하나님의 비전으로 바뀐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하나님의 계시가 그 80년 동안에 계속 점진적으로 있어 왔지만 최종적으로 구체화 되면서 하나님의 비전과 모세 개인의 소망이 동일화 된 것이다.

따라서 비전은 반드시 하나님이 신자에게 심어준 것이어야 한다. 또 문자 그대로 소명자가 자기기 이룰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시각화(visualize) 할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한 계획을 가져야 한다. 모세는 마음속으로만 시각화 해왔던 비전을 마지막 죽는 순간에 직접 육안의 눈으로 볼 수 있었다. 그야말로 평생의 비전을 달성한 것이다.

반면에 요셉에게는 이런 과정이 전혀 없었다. 말하자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애굽 백성과 동족을 기근에서 건져내며 자신의 형들이 자기를 둘러싸고 절을 하게 될 것이라는 구체적인 비전을 전혀 갖지 않았다. 꿈도 꾸지 않은 일을 실현하려고 준비하고 노력할 리는 더더욱 없었다. 한 마디로 그는 개인적인 소망만 갖고 있었고 그 소망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뤄지기만 기도했던 자였지 하나님이 주신 비전의 사람이 아니었다.    

요셉의 거듭남

요셉은 야곱이 가장 사랑했던 아내 라헬에게서 난 첫 아들이었다.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선 열한 번째이지만 사실은 첫째와 같은 아들이었다. 그래서 야곱은 장자에게나 입혀야 할 채색 옷을 입히고 다른 아들들보다 더 사랑했다. 그렇게 자란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만 믿고 형들의 잘못을 아비에게 고자질이나 하는 철없는 아이였다.

십칠 세라면 옛날에는 어른이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을 나이다. 상식적으로도 형들의 잘못을 눈감아 주거나 아니면 함께 동참해야 함에도 아버지에게 고자질이나 할 정도였다면 얼마나 철부지였는지 짐작이 간다. 형들이 양을 칠 때에 저지른 과실이라고 해 봐야 그리 큰 죄도 아니었을 텐데도 그랬다. 그러니 형들의 눈 밖에 난 지는 오래였다.

그런 지경에 형들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을 두 번이나 자랑하니 얼마나 더 미웠겠는가? 요셉을 편애 하는 아버지 야곱마저 참다 못 해 꾸짖었다. 그 사건을 두고 성경은 “그 형들은 시기하되 그 아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형들이 시기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인생과 신앙 연륜이 깊은 야곱으로선 예사롭지 않은 꿈을 두 번씩이나 꾸었기에 뭔가 하나님이 주신 계시로 생각했다는 뜻이다. 다른 아들들을 생각해 요셉을 야단은 쳤지만 안 그래도 그를 가장 사랑하는 참이라 내심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마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요셉의 반응에 대해선 침묵하고 있다. 거기에는 두 가지 가능성 밖에 없다.  너무 철부지인지라 그런 꿈을 꾼 것과, 형들에게 떠벌인 것과, 나아가 아버지에게서 야단맞은 것, 모두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당장에는 몰라도 금방 아무 것도 아닌 양 잊어버렸다는 뜻이다. 아니면 어차피 처음부터 자기는 형들을 다스릴 사람이라고 굳게 믿고 있어서 아주 당연한 것으로 치부했던지...

그러나 아무래도 후자일 가능성은 없다. 형들이 시기하고 아버지는 마음에 두었다. 요셉을 제외한 모든 식구가 그 사건을 두고두고 기억했다는 뜻이다. 만약 요셉도 자기 소망이나 비전으로 생각했다면 성경이 요셉의 반응에 대해 침묵할 리가 없다. 최소한 이 사건과는 별도로라도 그에게 그런 소망이 있었다는 단서라도 기록했어야 했다. 요셉은 이때까지도 전혀 자기 인생에 대한 개인적인 청운의 푸른 꿈조차 없었다. 심지어 그 두 꿈이 하나님이 자기 인생에 대해 갖고 계신 계획을 계시해주신 것이라는 인식마저 없었다.  

그러다 드디어 요셉의 인생이 뒤집어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다시 야곱은 요셉더러 형들이 양을 잘 치고 있는지 가서 보고 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다. 그런데 형들은 요셉이 자꾸 자기들 과실을 아버지에게 일러바치는 것이 싫어서 그랬는지 그가 잘 찾아오지 못하게 평소 가던 장소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겨서 양을 치고 있었다.(37:15-17) 그런데도 기어이 그곳까지 찾아오는 요셉을 보니 얼마나 더 미웠겠는가?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서로 이르되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 꿈이 어떻게 되는 것을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18,19절)

성경은 형들이 요셉을 죽인 근본 이유가 오직 그 꿈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엉터리 같은 꿈이나 꾸면서 매번 잘난 척하는 미운 동생을 이참에 그런 꿈을 아예 못 꾸게 죽여 버리자고 모의했다.

나아가 양을 칠 나이가 훨씬 넘었는데도(소년 다윗이 골리앗과 싸웠을 때의 나이를 13살 정도로 추측하는 것과 비교해보라) 자기들을 감독(?)하게만 하는 아버지의 의도가 미심쩍었다. 채색 옷은 단순히 총애하는 표시이기도 하지만 장차 그에게 장자권을 줄 것이라는 야곱의 무언의 시위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다. 요셉을 장자로 세운다는 것을 다른 아들들에게 미리부터 기정사실화해서 나중에 반발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을 수 있다.

물론 요셉이 꾼 꿈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였다. 그러나 평소의 그런 집안 분위기가 요셉의 잠재의식에 반영되어 있었고 그 잠재의식을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계시하는 도구로 사용한 것이다. 또 바로 그런 이유로 야곱은 자기의 속내가 들킨 것 같아 일부러 형들 앞에서 요셉을 더 야단치면서도 내심으로는 난감했을 것이다.

장자인 르우벤이 그 살인 모의를 듣고선 죽이지는 말고 그냥 구덩이에 던져 넣자고 설득했다. 성경은 그 이유로 “그가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여 그 아비에게로 돌리려 함이었더라”고 말하고 있다. 그로선 장자의 책임을 다한 모습을 아비에게 보여 신임을 회복하려 했는지 모른다.   장자였기에 속으로는 요셉을 가장 미워했을지 모르지만 오히려 그가 나서서 죽이자고 하면 다른 형제들에게 장자권 때문에 그랬다는 오해를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유다도 손에 피를 묻히는 대신에 마침 지나가던 미디안 상고에게 노예로 팔아넘기기로 제안했다. 아버지 편애만 믿고 철없이 설치는 배 다른 동생이 죽도록 밉기는 모든 형제들이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같은 아비를 둔 형제를 직접 죽이려니 아무래도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때까지도 요셉을 비롯한 모든 형제들과 야곱은 그 꿈을 장자권 다툼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런 살인 모의를 옆에서 꼼짝 없이 듣다가 결국에는 구덩이에 던져 넣어진 요셉의 심정은 과연 어떠했을까? 처음에는 굉장히 당혹하고 의심했을 것이다. 도대체 형들이 하는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분간이 안 갔을 수 있다. 어쩌면 요셉을 멀찍이 떼어 놓고 형들끼리만 모의했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과 그것이 절대로 자기에게 유리한 것이 아니라는 정도는 본능적으로 감을 잡고 불안에 잠겼을 것이다.

차츰 불안의 강도가 심해지다가 구덩이에 던져 넣어졌을 때에 얼마나 참담하며 공포에 휩싸였겠는가? 혼자서는 절대로 빠져 나올 수 없고 지나가는 사람조차 하나 없는 광야 한 복판의 깊은 구덩이였을 테니까 말이다. 이제 꼼짝 없이 굶어 죽게 생겼지 살아날 가능성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공포는 곧 형들에 대한 원망과 분노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적으로 도저히 살아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되면 진지하게 죽음을 대비했을 것이다. 그 동안 형들에게 저질렀던 일이 얼마나 형들의 분노를 사는 철부지 짓이며 잘못이었는지 비로소 뼈저리게 후회했을 것이다. 다른 한 편으로는 실 날 같은 소망으로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우심을 간구했을 것이다. 정말 태어나서 그렇게 진정으로 절박하게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매달려 보기는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 구덩이에서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몰라도 공포, 분노, 회개, 하나님에 대한 간구 등 온갖 감정과 상념이 교차하며 절망의 나락에서 몸부림 쳤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위에서 밧줄이 내려와 형들이 자기들을 끌어 올리는 것이 아닌가? 살려주려나 보다 고마워하기 보다는 위로 끌어올려져 칼로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아닌지 더 큰 의심과 불안이 들었을 수 있다.

결국 이방 족속에게 노예로 팔리게 되자 모르긴 몰라도 바지에 오줌이라도 살 만큼 그 동안의 긴장이 풀렸을 것이다. 형들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 사라지지는 않았겠지만 우선 목숨이라도 건졌다는 안도감에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구덩이 속에서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했던 것이 응답되었음에 너무나 감사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또 앞날이 더 걱정되었다. 집안에서 막내로 험한 일, 심지어 양치는 일도 하지 않고 아무 걱정 없이 지내다 갑자기 노예 신세로 전락했다. 그것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우상을 섬기는 이방 땅에서 말이다. 고향땅을 등지고 미디안 상고를 따라 남쪽으로 가면서 형들의 모습이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눈물이 앞을 가렸을 것이다. 아버지 총애만 믿고 형들에게 아무 생각 없이 까불었던 지난 세월이 너무 후회되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제는 정말로 붙들 것이라곤 온 천하에 하나님 한분 말고는 없었다.  

그의 인생이 완전히 뒤집어졌다. 철부지 막내아들에서 험한 세상 풍파를 스스로 맞서 싸워야 하는 한 사람의 온전한 성인으로 거듭났다. 주일 학교에서 배우는 정도의 착하면 상주고 죄지으면 벌주는 하나님이 이제 고난 가운데서 일대일로 만난 후로는 오직 순복함으로 전적으로 의지해야할 살아 있는 하나님으로 변했다. 아버지 야곱이 베델에서 절망의 나락 가운데서 만났고 또 얍복 강가에서 밤새 씨름했던 그 여호와 하나님을 아들 요셉도 직접 만난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놀랍지 않는가? 자기 형을 속여서 장자권을 빼앗은 아버지 야곱은 비록 외삼촌이지만 라반의 집에서 노임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노예 같은 생활을 20년 넘게 했다. 그 아들 요셉은 형들을 우습게 알다가 애굽으로 노예로 17살에 팔려가 우여곡절 끝에 총리가 되는 30살까지 노예 생활을 했다. 아버지의 잘못으로 아들이 벌을 받았다는 말이 아니다. 닮을 수밖에 없는 아버지와 아들이 범한 동일한 잘못을 동일한 방법으로 벌주시는 하나님의 신실한 공의가 놀랍지 않는가 말이다. 야곱이 요셉을 총애한 것이 가장 사랑하는 아내에게서 난 첫아들일 뿐 아니라 이처럼 바로 자기를 가장 많이 빼닮았기 때문이 아닐까?

요셉의 개인적 소망

노예로 팔려간 요셉이 애굽에 있을 동안에 가졌던 개인적인 소망이 무엇이었겠는가? 한번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라. 이제 겨우 17살에 천애고아처럼 이방 땅 그것도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곳에 노예로 팔려갔다면 상식적으로 무엇을 소망하고 하나님께 무엇을 간구하겠는가? 당연히 고향 땅에 있는 부모에게로 무사히 귀환하는 문제 아니겠는가? 또 그러기 위해선 이국땅에서 어떻게 하면 생명을 안전하게 유지할 것인지가 가장  긴급한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생존과 귀향이라는 절실한 두 과제만을 두고 밤낮으로 간절히 기도하지 않았겠는가?

물론 그의 믿음은 이제 상당히 성숙해진 상태였다. 미디안 상고의 낙타를 타고 애굽으로 향하면서 얼마나 회개하며 뒤를 돌아보았겠는가? 자기를 노예로 팔아넘긴 형들이 밉긴 해도 노예로 팔려 가느니 그들에게 구박을 받으며 함께 있는 것이 훨씬 좋고 감사할 일이라는 것을 그때서야 절실히 깨달았을 것이다. 인생에는 얼마든지 예상 밖의 곤경이 닥칠 수 있지만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구원해 주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바로 그런 믿음으로 애굽의 험한 노예 생활을 하는 동안에 어떻게 하든 그 힘든 일을 잘 견뎌내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했을 것이다. 만약 고향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형들에게 자신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부모에게 효도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요컨대 그는 어렸을 때 꾸었던 꿈을 하나님이 주신 비전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이루려 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꿈과는 정반대로 자기 인생이 진행되어 형들에 의해 구덩이에 빠졌고 또 기약 없이 노예로 팔려가자 그 꿈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아예 기대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꿈이 뜻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이며 구체적으로 언제 어떻게 이뤄질지 궁금한 호기심까지 없어지지는 않았겠지만 그냥 평생토록 풀지 못할 숙제로 마음 한쪽 구석으로 밀어내었을 것이다. 어쩌면 꿈과 정반대로 진행되어진 상황을 보고 아예 엉터리 꿈이라고 단정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애굽의 두 관원에 대해 꿈을 해석해주면서 술 맡은 관원장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당신이 득의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 내 사정을 바로에게 고하여 이 집에서 나를 건져내소서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 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치 아니하였나이다.”(창40:14,15) 감옥에서 풀어주어 고향으로 돌아가게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관원이 그 부탁을 잊어버렸다. 요셉은 감옥에서 나가기를 계속 간절히 기도했겠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절망 가운데로 빠져들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만 이 년 후에 정말 꿈도 꾸지 못한 경우가 생겼다. 그야말로 그저 굴러들어온 복이었다. 애굽 왕 바로가 거푸 두 번 꾼 이상야릇한 꿈을 아무도 해석하지 못한 것이다. 그때서야 술 관원장이 감옥에서 만났던 요셉을 기억해내어 바로에게 천거하였고 요셉은 애굽의 총리대신으로 발탁되는 행운을 잡게 된 것이다. 비유컨대 그야말로 어느 날 갑자기 슈퍼로토에 걸리는 대박이었다. 인간이 한 일이 아니라 그 배경에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는 뜻이다.  

만약 술 관원이 복직하자마자 요셉을 옥에서 꺼내어 고향으로 돌려보냈다면 애굽의 총리대신 요셉은 역사상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요셉이 더 낮아지기를 원하셨다. 정말 완전히 깨어져 자신의 모든 욕심을 버리는 단계에까지 이르도록 기다리셨다. 그 때쯤의 요셉은 모든 소망이 사라지고 정말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겠다는 전적인 헌신의 단계에 이르렀을 것이다. 조부 아브라함이 믿음의 여정의 종국에 자기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외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쳤듯이, 아비 야곱이 얍복강 가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며 평생 모은 모든 재물을 형 에서에게 주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만 소원하는 자리에까지 낮아졌듯이 말이다.  

모든 전후 상황을 살펴 보건대 요셉이 자신의 소망이든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든 애굽의 총리가 되려는 꿈을 품고 그 꿈을 이루려고 노력한 적이라고는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도 왜 목사들은 요셉을 꿈을 꾸는 자요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이뤄낸 자라고 가르치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는 단지 고향에 돌아갈 개인적 소망만 갖고 있었고 하나님께 그 소망을 이루어달라고 간구한 것 뿐이었다. 어렸을 때 꾼 꿈은 하나님 쪽에선 요셉에 대한 당신의 계획이었을지라도 막상 요셉에게는 단지 꿈이었을 뿐이다. 나이가 근 40이 되도록 20년이 넘게 도무지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하나님이 붙들어주신 요셉의 인생

요셉의 아비 야곱도 요셉만한 나이에 기약 없이 혈혈단신으로 고향을 등져야 했던 적이 있었다. 너무나 낙심해 있을 때에 꿈에서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를 오르락내리락 하던 하나님의 사자가 그에게 말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28:15) 꿈을 깬 야곱은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라고 고백했다.

그는 비록 장자권을 차지했지만 아버지 이삭의 집을 떠나 낯선 곳으로 가면 과연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가 있을지 걱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그가 어디로 가든지 그를 떠나지 않을 것이며 또 고향으로 되돌아오게 하겠다는 분명한 약속을 받았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자기만 온전한 믿음 위에 서 있으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게 되었고 또 그 믿음이 그 오랜 기간의 험한 고생을 견딜 수 있게 했다.

요셉의 꿈꾸는 사건에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 야곱이 베델에서 꿈으로 계시를 받았듯이 그 아들 요셉도 어렸을 때에 꿈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는 것뿐이다. 야곱의 경우는 하나님이 직접 그 뜻을 풀어서 설명해주었다. 그러나 요셉의 경우는 오직 그림으로만 보여준 계시였다. 그 그림이 너무 선명해 그 뜻을 비교적 쉽게 알 수 있었지만 당시로선 도저히 말도 안 되는 것이었고 또 그 이후의 현실은 완전히 그 반대로 진행되었다.

인생에서 가장 우연하게 일어난 것 같은 사건일수록 하나님의 섭리가 가장 많이 작용된 것이다. 우연의 요소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의 노력이 적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애굽에서 정말 기막힌 우연으로 요셉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였을 뿐이다.

총리가 된 요셉으로선 그 당장에 고향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지만 최소한 이제는 잘하면 돌아갈 수 있는 위치에는 올랐다. 그래서 틀림없이 바로에게 큰 공을 세운 후에 그 공에 대한 보상으로 고향으로 돌아갈 구실로 삼을 참이었을 것이다. 마침 하나님이 그럴 수 있는 절호의 여건을 이미 다 마련해 놓았다.  

그런 어느 날 정말로 우연찮게 꿈에도 잊지 못하던 형들이 곡물을 사려고 자신 앞에 고개를 조아리며 나타났다. 그의 심경이 어떠했겠는가? 그야말로 필설로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 미묘하지 않았겠는가? 반가움, 미움, 안타까움, 통쾌함, 복수심, 죄책감, 향수,  기쁨 등 온갖 감정들이 뒤섞였을 것이다. 그 때 비로소 어렸을 때의 그 꿈이 다시 떠오르면서 그 꿈처럼 뭔가 일이 진행될 것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어렴풋이 믿게 되었을 것이다.

요셉의 파란만장한 일생은 결국에 그가 토설한 이 한 마디에 다 녹아져 있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에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45:5,7,8)

하나님의 너무나 원대한 계획과 섭리를 확인한 요셉의 믿음 안에서 형들에 대한 모든 원망은 완전히 사라졌다. 마찬가지로 형들의 죄책감도 오묘한 하나님의 간섭 안에서 씻어 없앨 수 있었다. 이제 그 형제들 사이에는 오직 하나님을 찬양하는 고백만이 남게 되었다. 하나님은 당신 안에서 새로운 믿음으로 하나가 된 그들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우두머리가 되게 하셨다.

베델에서 아비 야곱의 꿈에서 고향 땅으로 되돌아오게 해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재확인된 하나님의 언약이 무엇이었는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찌며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창28:13,14)      

애굽에서 형제들과 재상봉했을 때에 요셉이 마지막으로 한 고백이 무엇이었는가?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하나님이 자기를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로 삼으셨다는 것이다.(창45:8)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계획이며 그 목적은 자기들 가문을 땅의 티끌같이 만드셔서 모든 민족의 복의 근원으로 삼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자기로 그 말도 안 되는 꿈을 꾸게 한 것, 그것을 철없이 형들에게 자랑한 것, 그래서 형들이 자기를 죽이려다 노예로 팔아버린 것까지 다 포함해서 오직 하나님의 계획이었다는 뜻이다.    

요셉에게 꿈을 꾸게 한 자도 하나님이며 심지어 그것을 자랑삼아 발설케 해 온갖 곤경을 겪게 한 자도 하나님이다. 요셉이 자신의 비전을 간직해 실현한 것이 아니다. 그는 단지 꿈을 잘 꾸는 아버지를 닮아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을 뿐이다. 그 계시를 받은 이후에도 그 계시를 해석하여 그대로 따르려 한 적이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거대한 드라마에 주인공을 발탁되어 그분의 연출대로 그 인생이 진행된 것뿐이다.

하나님의 큰 비전을 받아 그 비전을 이루려 평생을 두고 노력하여 결국 이룬 자의 대표는  모세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꿈을 꾸는 자는 요셉이 아니라 모세가 되어야 한다. 반면에 요셉을 통해 배울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난 이후로는 그 분의 원대한 계획을 구체적으로는 알지 못해도 전적으로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믿음이다.  

신자라면 밤에 무의식적으로 꾸는 꿈(Dream)과 개인적으로 자기 일생에 대해 세운 소망(Hope)과 하나님이 당신의 일에 일군으로 쓰려고 구체적으로 보여준 그분의 계획인 비전(Vision)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꿈이라는 수단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이 뜻을 계시해 줄 수 있고 경고의 사인을 보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해석은 정말로 신중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성령의 지혜를 구해야 한다.  

모든 신자는 하나님께 자기를 향한 당신의 비전을 보여주시기를 진정으로 소원하고 간구해야 한다. 그것도 구체적으로 시각화 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 전까지는 계시나 소망의 단계에 머무를 수 있다. 그러나 요셉처럼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과 절대적 순종의 자세로 기도하며 의롭게 살 때에 그 계시와 소망이 현실에서 차츰 더 구체화 되어서 실현되기 시작한다.

자기 소원을 크게 키운다고 비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또 비전이 아닌 소망을 붙들고 기도한다고 하나님이 다 이뤄주시는 법은 더더욱 없다. 하나님의 비전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 하나님이 정하신 일정과 방법대로 진행되어져 갈 뿐이다. 신자는 언제 어디서나 그분의 신실하심만을 믿고 무엇을 먹든 마시든 그분의 영광이 자시 삶을 통해 드러나기만 소원하면 된다. 그러면 종국에 가선 요셉이 한 것처럼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바로 이 영광스런 자리에 이르게 하려고 그 모든 고난을 허락하셨군요. 주님 정말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이 저절로 나오게 될 것이다.

11/22/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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