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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삼상17:45-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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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신 목사 |
참고 : | http://www.whyjesusonly.com/ |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삼상17:45-47)
도깨비 방망이 신앙
신자란 하나님이 모든 인류 역사뿐 아니라 개인의 일상사까지 세밀하게 주관하신다는 것을 믿는 자다. 자기는 너무나 연약하고 불완전하며 무능하다는 것을 철저하게 깨달았기에 오직 하나님께 자신의 존재, 삶, 인생 전체를 온전히 내어 맡기는 자다. 그래서 신자가 그분께 더 많이 아니 전부를 내려놓을수록 그분의 권능은 신자의 삶을 통해 더 드러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신자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만 바라보라고 하니까 기도만 하면 모든 것을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주신다고 착각을 한다. 두 손 두 발을 다 내려놓고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램프를 슬슬 문지르면 나타나는 거인처럼 신자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좋은 신앙인 것처럼 되었다. 신자가 기도라는 도깨비 방망이를 흔들면 하나님은 뚝딱하고 그 신자가 원하는 것을 이뤄져야 한다고 기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얼마나 기도를 뜨겁고도 간절하게 하느냐로 믿음이 좋고 나쁨의 기준이 되어버렸다. 또 자기가 기도한 대로 응답을 많이 받을수록 교회 내에서 더 신령한 자로 대접받는다. 나아가 그런 자랑을 늘어놓은 것이 성도 간에 서로 은혜를 나누는 것이며 그렇지 못한 신자는 열등한 신앙으로 취급당한다.
물론 하나님은 신자가 진정으로 간구하는 모든 기도에 응답하신다. 정말 당신만이 하실 수 있는 섭리와 권능으로 신자의 간절한 소원을 어떤 형태로든 반드시 이뤄주신다. 그러나 신자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손을 완전히 놓고 있어도 신자가 기도한 대로 이뤄준다는 보장은 절대 없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기도를 많이 잘하느냐 만이 믿음의 전부가 되어버린다. 또 신자는 소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기도만 하면 이뤄낼 수 있는 슈퍼맨이 된다는 이상한 결론에 이르지 않겠는가?
기도란 신자의 호흡이다. 쉬지 말고 무엇이든 기도해야 함은 분명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뜻 안에서 신자의 소원을 조정하고 합력하여 궁극적이고도 영원한 선으로 이끄는 방향으로만 기도에 응답하신다. 신자가 기도한 대로와는 완전히 다르게 응답이 되는 수가 있으며, 심지어 전혀 응답이 안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가 되었든 내용적으로는 신자의 모든 상황에 가장 유익하게 하나님은 응답하신 것이다.
쉽게 말해 신자의 모든 기도를 하나님이 응답은 하시되 당신의 때와 방법으로 응답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자가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의 가장 중요한 의미가 밝혀졌다. 자기 소원을 가지고 기도는 하되 자신이 원하는 때와 방법과 모습으로 응답되어져야 한다는 고집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자가 가진 모든 계획과 뜻마저 완전히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뜻과 계획을 세울 수 있고 나아가 그것을 두고 간절히 기도할 수 있다. 단지 꼭 그대로 되어져야 한다는 고집은 부리지 말라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을 역으로 말하면 오히려 현실의 일을 더욱 열심히 수행하는 모습이어야 한다. 또 그 일을 위해 자기 소원대로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내가 기도한 것과 어떻게 조화되어 나타나는지 꼭 헤아려 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자기를 이끌더라도 순종하되 그 인도를 기도한 것과 연결시켜 보아야 한다. 그래서 이제는 신자 쪽에서 자기 소원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조정 작업을 해야 하고 또 바로 그것이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는 실질적인 의미다.
그럼에도 모든 것을 내려놓는 신앙이 마치 도깨비 뚝딱하는 신앙으로 변질 된 것은 성경의 표현이나, 하나님의 역사가 그런 것 같이 보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그럴지라도 가르치는 자들이 바로 풀어서 그런 오해를 불식시켜야 하는데도 오히려 그렇지 못하거나 심지어 더 조장하는 경우마저 있다. 그런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소년 다윗이 장사 골리앗을 물리친 내용이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투를 이겼고 성경도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이 다해준 것 같다.
나아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를 이겼으니 하나님이 문제만 해결해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수십 배의 축복을 더해준 것 같다. 한 마디로 신자가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이 ‘뚝딱 신앙’과 ‘대박 신앙’의 짬뽕이 되었다. 하나님께 모두 내려놓는 신앙은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르다. 다윗과 골리앗의 전투에도 그런 내용이 사실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천하무적 여포와 골리앗
삼국지의 여포는 대단한 장수였다. 관우, 장비, 유비 세 사람과 상대해서도 하나도 꿀리지 않다가 조자룡까지 가세하자 할 수 없이 퇴각했다. 일대일의 전투에서 그를 당해낼 장수는 아무도 없었다. 말하자면 골리앗은 삼국지의 여포 같은 장수였다. 성경에 언급한 대로 따져보면 그의 키는 2m 93cm, 몸을 두른 갑옷의 무게는 57 kg, 놋 단창의 창날만 7kg이 되었다.(삼상17:4-7) 이스라엘 최고의 용사 사울도 보통 사람보다 어깨 위나 더 컸음(키가 약 2m / 삼상10:23)에도 상대가 안 되니 이스라엘 중에는 어느 누구도 맞설 자가 없었다.
그런 골리앗을 군대에 갈 나이도 안 된 소년이 이겼으니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믿음으로 담대하게 전투에 임했더니 하나님이 큰 능력으로 기적 같은 승리를 얻게 해 준 것으로만 흔히들 이해한다. 그래서 객관적으로 도저히 해결책이 안 보이는 어떤 위급한 상황에서도 신자는 믿음으로 무조건 밀고 나가면 하나님이 알아서 다 해주는 생생한 예로 제시된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 뚝딱하고 대박이 터진 대표적인 케이스다.
그러나 조금만 이성적으로 따져도 너무 말이 안 되는 해석이 아닌가? 우선 다윗은 실제로 자신의 생명을 걸고서 혼신의 힘을 다해 전투에 임했다. 실제 전투는 하나님이 한 것이 아니라 다윗이 했다. 물론 그 배경에서 승패를 확실하게 보장한 분이 하나님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이길 확률이라고는 제로였던 싸움을 하나님이 개입하여 완전한 승리로 바꾼 것이 아니다. 요컨대 실제 전투도 다윗이 했고 또 다윗의 실력도 90% 이상 작용됐다. 다윗은 하나님의 기적에 힘입은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기 실력으로 골리앗을 물리친 것이다.
고대의 전투는 최고 장수들이 나와 먼저 한번 붙은 후에 전 군대가 나와 싸우거나 아니면 그 대표끼리의 싸움으로 아예 전쟁의 승패까지 결정할 때도 있었다. 골리앗도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내게로 내려 보내라. 그가 능히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기어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삼상17:8,9)고 이스라엘에게 도전했다.
사울과 온 이스라엘은 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하였다. 심지어 할례 없는 자가 여호와의 군대를 모욕했어도 싸울 생각을 못하고 40일이 지나도록 진에서 꼼짝도 않고 아무도 응전하지 못했다. 그런 판국에 겨우 양치기 소년인 다윗이 실력으로 이겼다고 하니까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가?
당시 다윗의 나이는 겨우 열 서넛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다윗의 아비 이새에게는 여덟 아들이 있었고 다윗은 막내였는데 셋째 아들까지 징집되었다. 남자가 이십 세가 되면 군대에 갔기 때문에 막내인 다윗의 나이를 역산해 볼 때 많아야 그 정도였을 것이다. 사울이 마련해준 갑옷, 창, 방패는 너무 커서 다 버리고 아무런 보호 장치 없이 맨몸으로 나서야 할 정도였다. 그래서 겨우 물매 돌 다섯 개만으로 골리앗과 싸우러 나갔는데 다윗이 자기 실력으로 이겼다니 도대체 무슨 뜻인가?
당대 최고의 장수 네 명과도 맞서 싸울 정도로 천하무적이었던 여포에게도 결정적인 약점은 하나 있었는데 여자에게 약한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아챈 한나라의 충신 왕윤은 초선이라는 절세미녀를 이용해 여포와 그 대장 동탁 사이를 이간시켰고 결국 여포도 그녀로 인해 조조에게 패배하게 되었다.
골리앗도 마찬가지였다. 갑옷 입고 창 들고 하는 정식 싸움으로 그와 맞서서는 아무도 이길 수 없었다. 아마 여포가 골리앗과 동시대에 살았다 해도 상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골리앗에게도 결정적인 약점은 하나 있었다. 갑옷으로 무장하지 않은 얼굴 부분이다. 골리앗은 그런 면에서 삼국지의 여포보다는 사실은 그리스 신화의 아킬레스와 더 유사하다.
아킬레스의 엄마 테티스가 신비의 물로 그의 전신을 목욕시켜 불사(不死)의 장수로, 즉 전신을 어떤 창도 뚫을 수 없는 갑옷으로 무장한 것과 같게 만들었다. 그러나 발뒤꿈치를 손으로 붙들고 목욕시키는 바람에 그 부분만은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다. 완전 무장한 무려 3미터에 가까운 거구 골리앗에게는 갑옷으로 덥히지 않는 얼굴 부문만이 아킬레스의 발뒤꿈치처럼 유일하게 손상을 입을 수 있는 약점이었다. 소년 다윗은 골리앗의 약점을 한 눈에 알아보고는 급소에 물매 돌로 정통으로 타격을 가했던 것이다.
다윗의 실력
다윗이 아직 어려서 그런 신기(神技)에 가까운 돌팔매 실력을 도저히 갖출 수 없었고 또 골리앗의 치명적 약점을 눈치 챌 만큼 지혜롭지 못했을 것이라고 섣불리 판단해선 안 된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기적적인 간섭이 작용한 것이지 다윗의 실력은 아니었다고 고집한다면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만약에 다윗의 실력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이 그의 믿음과 담대함을 보고 이루신 기적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럼 전후 사정이 어떻게 되어야 하겠는가? 다윗은 아무리 힘든 일도 앞 장 서서 자기를 희생하며 봉사할 만큼 담대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면 어떤 큰일도 일으켜 주실 줄 확신하는 아이다.
그런 믿음으로 이스라엘의 모든 어른들이 그것도 형님들이 아이가 올 곳이 못된다고 야단을 치는 데도 골리앗을 향해 담대히 싸우러 나갔다. 자기가 가진 유일한 무기인 돌을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서 던진 후에 하나님의 처분만 기다렸다. 소년이 던진 돌은 당연히 힘없이 날아가고 있었는데 눈에 안 보이는 천사가 그 돌에 힘과 속력을 붙여서 골리앗의 면상에 정확하게 꽂히게 해주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상상하는 이 전투의 모습이다.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키질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 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었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삼상17:34-37)
다윗은 양을 치면서 사자와 곰의 습격을 무수히 받았지만 그 때마다 물리치고 양 떼를 구했다고 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겠는가? 하나님이 레이져 빔 같은 것으로 울타리를 쳐서 아예 맹수의 접근을 차단시켰는가? 사자와 곰의 발톱에서 구해주었다고 말했으니 양을 잡아먹으려는 순간 갑자기 맹수가 죽거나 물러가는 기적이 일어났는가?
맹수가 새끼를 움키면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새끼를 구했다고 했다. 막대기로 사자와 곰을 상대할 수는 없으니 당연히 양치는 막대기가 아니라 물매 돌로 쳤을 것이다. 그것도 맹수의 급소를 단 방에 맞혀야 했다. 말하자면 다윗은 양을 치면서 물매둘 던지는 데는 프로급 선수가 되었다. 요즘으로 치면 올림픽 경기 양궁이나 사격 금메달리스트의 솜씨를 가지게 된 것이다. 맹수들은 단 번에 급소를 치지 못하면 더 사나워지고 날쌔진다. 그야말로 귀신같은 솜씨라야 사자와 곰을 물리칠 수 있지 않겠는가?
사자와 곰(우리 생각보다 훨씬 재빠름) 같은 맹수를 단 방에 맞추는 솜씨라면 인간의 급소는 너무나 쉽게 맞힐 수 있다. 그것도 무거운 무장을 한 거인이 어기적거리는 것은 어쩌면 눈감고도 맞힐 것이다. 골리앗으로선 정말 한 주먹도 안 되어 훅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소년이 이스라엘의 대표 장수로 나섰으니, 그것도 칼과 창과 갑옷 방패를 전혀 갖추지 않은 채 나섰으니 아예 무시했을 것이다. 다른 말로 얼굴을 방어할 태세는 전혀 갖추지 않고 고개를 오히려 빳빳이 쳐들고 걸어 나왔을 것이다. 그런 약점을 다윗이 발견 못할 리가 없고 또 한 방에 못 맞힐 리도 없었다. 이 싸움은 사실상 하기 전부터 승부는 이미 결정나있었고 다윗은 전적으로 자기 실력으로 이겼던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
그럼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고 한 다윗의 고백은 무슨 뜻인가? 그가 실력으로 이겼다면 여호와를 믿는 믿음은 없었다는 뜻인가? 또 이 전투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하신 일은 없거나 아주 미약하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다시 말하거니와 다윗이 자기 실력으로 골리앗을 이긴 것만은 분명하다. 이스라엘에선 다윗 외에는 어느 누가 나서도 절대 골리앗을 이길 수 없었다. 그리고 다윗이 골리앗을 처음 보는 순간 사자나 곰보다 느린데다 얼굴에 보호막이 없는 것을 한눈에 알아채고는 충분히 이길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들었다. 말하자면 다윗이 담대히 싸우러 나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나 계시를 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판단하여 자원한 싸움이었다.
그럼에도 다윗은 만에 하나 첫 돌이 급소에 명중하지 못하면 그 다음에는 자기가 죽는다는 사실도 알았다. 사자와 곰은 첫발이 실패해도 네 발로 기는 짐승이라 더 포악해지기는 해도 얼굴의 급소를 가리며 공격해 오지는 않는다. 그래서 여러 발을 연발로 맞추다보면 결국에는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은 다르다. 특별히 전투에 익숙한 골리앗이 상황을 알아채고는 곧바로 방패로 얼굴을 가리며 다가오면 소년 다윗은 뼈도 못 추릴 만큼 순식간에 전황은 역전되어 버린다.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로 마주 그 항오를 향하여 빨리 달리며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취하여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삼상17:40,48,49)
다윗은 전투하기 전에 시냇가에 가서 맹수들과의 싸움에서 체득한 지식과 경험을 살려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랐다. 말하자면 가장 손 안에 쥐기 좋고 던지기에 적합하면서도 맞으면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 있는 돌이었다.
돌을 다섯 개 고른 이유로 어떤 성경주석가들은 “이 네 사람 가드의 장대한 자의 소생이 다윗의 손과 그 신복의 손에서 죽었더라”(삼상21:22)는 구절과 연결시켜 해석하기도 한다. 즉 다윗이 아예 골리앗의 동생 네 명까지 모두 합쳐 다섯 명을 상대할 것을 각오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무리한 해석이다. 우선 다윗이 그 당시에 골리앗의 동생이 네 명이나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가능성이 적고 또 앞에서 말한 대로 일단 얼굴을 향해 돌을 던진다는 사실을 눈치 채면 다들 그 즉시 방패로 막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아마도 다윗은 연발소총처럼 아주 재빠르게 던질 수 있는 실력을 가졌던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다윗이 사람을 죽이기 위해 돌을 던지기는 처음이었다. 또 아무리 적국의 장수이지만 어른이자 엄청난 거인을 상대로 해야 한다는 부담감 또한 어린 그로선 대단했을 것이다. 시냇가에서 돌을 고를 때의 그의 심경을 추측해보면 참으로 복잡다단했지 않았겠는가? 생전 처음 살인을 해야 하는 부담감과 혹시라도 실패할 지도 모른다는 염려와 또 그렇게 되면 자기는 바로 창에 찔려 죽어야 한다는 것까지 각오했어야 했다.
다윗으로선 훈련 받은 정식 군인이 전쟁터에 나온 것과는 사정이 전혀 달랐다. 전혀 전투 준비 없이 형들의 안부를 알아보고 부친이 준 치스를 전하러 왔다가 얼떨결에 일생일대의 고비를 맞닥뜨린 셈이다. 비록 그가 한 눈에도 골리앗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은 얻었지만 그래도 막상 출진을 앞두고는 심장이 뛰고 안절부절 했을 것이다.
아마도 돌을 줍는 사이에 마음속으로 하나님에게 간절히 기도를 드렸을 것이다. 우선 한 방으로 급소에 정통으로 맞히게 해주고, 혹시라도 첫발이 실수해도 둘째 셋째 돌을 던지기 전에 골리앗이 미처 방어태세를 갖추지 못하게 해주고, 또 비록 적국의 장수지만 살인을 하는 부담감을 덜고 또 그 죄를 용서해주고, 최악의 경우 싸움에 지더라도 이스라엘의 할례 받은 자녀답게 당당하게 죽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것이다. 전투는 그가 기대하고 또 기도한대로 결말이 났다. 하나님이 함께 하였고 다윗의 기도에 응답한 것이다.
그럼 이 전투에서 하나님이 역사한 것은 다윗의 충심어린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신 것뿐인가? 첫 돌팔매가 실수하지 않고 정통으로 맞히도록 해 주신 것인가? 그래서 신자가 간절히 기도한 후에 나가 싸우는 전투는 다 승리하게 해주시는 것인가?
물론 다윗이 실수하지 않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의 간섭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혹시 첫 발이 실패해도 다섯 개의 돌을 연속해서 던질 정도의 실력이라면 두세 번째의 돌로도 사망시키거나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었다. 싸움의 승패는 다윗이 실수만하지 않는 한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정작 하나님이 하신 더 중요한 일은 이 싸움의 승패보다는 다윗으로 그런 실력을 갖추도록 해준 것이었다. 말하자면 이 싸움이 있기 훨씬 이전 다윗이 양치기할 때부터 하나님은 이 전투에 대비해 사자나 곰을 보내어 훈련시켰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사실상 이 전투는 다윗이 맡도록 그래서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려고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이었다. 당연히 그의 승리는 따 논 당상이었다. 다윗이 자기 실력을 십분 발휘해 이겼지만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섭리와 권능 또한 십분 발휘된 것이다.
그야말로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는 다윗이 고백한 그대로 되었다. 간절히 기도하고 믿음으로 나가면 하나님이 기적적인 승리를 주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신자가 겪는 모든 싸움이 사실은 하나님이 이미 계획해 놓으신 것이며 심지어 그 전쟁을 이길 수 있는 실력까지 평소에 쌓도록 해 주셨다는 것이다.
믿음이 만능이 아니다.
대부분의 신자가 ‘믿음’을 오직 자기 내면에 형성된 하나님을 신뢰하여 의탁하고자 하는 마음의 세기로만 이해한다. 나아가 현실의 어려운 문제들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 해결 받을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만약 어떤 문제가 아무리 기도해도 해결이 안 되면 자신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마음이 아직 최고조에 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믿고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의 상태를 절정으로 끌어 올리려 애를 쓰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믿음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신자가 겪고 있는 문제를 당신을 얼마나 잘 믿는지 못 믿는지 심사해서 그 믿은 상태가 100% 완벽한 수준에 다다라야만 해결해 주시겠는가? 그렇다면 하나님과 신자 간에는 오직 믿음 외에는, 아무리 믿음이 신자가 가장 먼저 갖추어야 할 핵심이라고 해도,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또 그 믿음이 문제 해결의 공로이자 조건이 되어버리지 않는가?
믿음이란 상대를 그냥 단순하게 믿는 것이다. 더 믿으려고, 더 의지하려고 노력한다면 이미 사실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다. 솔직히 신자가 어떤 문제를 두고 기도한다는 자체만으로 하나님에 대한 거의 완벽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다. 믿음이 없는 자는 기도 자체를 하지 못하고 또 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100% 완벽한 믿음, 즉 어떤 의심, 불만, 불안, 염려가 하나도 없는 상태에 도달하기는 불가능하다. 물론 하나님은 신자가 진실 된 마음과 간절한 소원을 갖고 기도하는 것만으로 너무나 기뻐하신다. 그러나 기도 응답의 근거가 신자가 갖고 있는 믿음의 세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컨대 하나님이 이스라엘 모든 사람 중에서 다윗이 100% 순전하고도 가장 강한 믿음이라서 골리앗을 이기게 해 준 것이 아니지 않는가? 다른 사람의 믿음이 다윗에 비해 훨씬 못 미쳐서 골리앗에게 졌거나 상대를 못한 것은 아니다. 단순히 전투 능력이 모자랐을 뿐이다. 아무리 궁리해도 일대일로 그와 상대해선 이길 재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스라엘 중에서 어떤 자가 어차피 실력으로 안 될 것은 빤하지만 하나님만 믿고 생명을 버리더라도 담대하게 나갔더라면 하나님이 골리앗이 걸어오다 돌부리에 넘어지게 해서라도 이기게 해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에게도 비상하고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잘 사용하지 않는 방법이다.
만약에 하나님이 매번 그런 방법을 동원하면 신자는 현실적으로 실력을 쌓지 않고 그야말로 우리가 지금껏 오해했던 식의 믿음만 열심히 키우면 된다. “믿~슙~니다!!”를 얼마나 강하고도 자주 고백할 수 있느냐가 만사형통의 열쇠가 된다. 하나님은 신자더러 그렇게 오해하게끔 하고 싶지 않아서라도 그런 방법을 여간해선 쓰지 않는다. 그런데도 신자는 오히려 그렇게 오해 하는 것이 좋은 믿음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우리 기대대로 신자 쪽의 믿음이 세어야만 하나님이 응답해주는 것이 아니라면 당신 쪽의 다른 뜻과 계획이 있다는 뜻이다. 또 만약에 하나님이 비상하고 특별한 경우에만 기적적인 방법을 동원한다면 당신이 강조하고자 하는 초점이 그 방법에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신자로선 정상적이든 혹은 기적적인 방법으로 역사가 일어났든 그 일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당신의 뜻과 계획에 더 관심을 쏟아야 한다.
솔직히 어지간한 신자는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이 안 되고 당신의 뜻에 맞는 기도라야 응답이 된다고 잘 알고 있다. 그러면 신앙의 초점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당연히 자신의 믿음을 키워 응답을 받아내는 쪽 대신에 더더욱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아나가는 데여야 하지 않는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아는 일을 너무 신령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분의 뜻과 계획이란 결국 신자 본인에 대한 것이다. 그럼 신자가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과 그 동안 이뤄진 경과를 곰곰이 묵상해보면 알 수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뜻대로 어떤 신자를 인도하신다면 실제 그에게 과거나 현재 일어난 일 가운데 그 뜻이 어떤 모습으로든 반영되어 있을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다윗의 경우 기도원에 가서 금식 기도를 수십일 간 한 것도 아니고, 당시에는 새벽기도 매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모세 오경을 알아도 얼마나 알았겠는가? 단순히 암송하는 수준이라도 되었겠는가? 우리가 말하는 식의 믿음으로 치면 너무나 연약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는 골리앗을 보는 순간 그 약점을 알아챘다. 아니 하나님의 자기를 향한 계획을 깨달았다. 바로 이 싸움을 위해서 양치는 동안 맹수를 그렇게 자주 마주치게 해서 자기로 물매 돌 던지기의 최고수로 만들어 놓으셨다는 것을 말이다.
믿음의 본질
믿음이란 신자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마음의 상태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또 그 마음 상태를 끌어올린다고 어떤 문제가 해결되거나 믿음이 좋아지는 것도 아니다. 믿음이 성립되려면 반드시 믿음의 대상이 있어야 하고 또 그 상대를 잘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도 당연히 그분을 잘 알아나가는 것이 급선무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다, 영원하시고 변개가 없이 신실하시다, 사랑과 긍휼에 다함이 없다, 같은 일반적 속성들을 더 많이 안다고 믿음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분의 나를 향한 뜻과 계획을 알아나가되 그분의 관점에서 살펴보아야만 한다.
다른 말로 내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마음 상태가 믿음을 이루는 필요조건이라면 그분의 나를 향한 뜻과 계획을 아는 것은 믿음이 믿음으로서 완성되는 충분조건이다. 그런데 신자 쪽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어지간한 신자라면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다. 그럼에도 자꾸만 그 필요조건만 키우려 드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대신에 충분조건을 더 채워야만 믿음이 실제 삶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믿음이란 정지된 순간의 마음의 상태가 아니라는 말이다. 말씀과 기도에 능해 신자의 내면의 상태만 충만하게 고양 시킨다고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다. 항상 유동적으로 변화 발전해 나가는 과정이 믿음이다. 하나님의 나를 향한 뜻과 계획을 알아서 그 바탕 위에서 그분과의 일상적인 관계를 계속 이어나가는 작업이다. 하나님과 신자가 함께 손잡고 계속해서 걸어가고 있는 관계 그 자체가 믿음이다. 신자는 그 관계가 중단 없이 장애 없이 하나님의 의도대로 이어지도록 실제 삶의 모든 부분에서 반응해야 한다. 또 그것이 모든 것을 그분께 내려놓는다는 참 의미다.
하나님은 모세를 애굽의 왕자로 40년을, 미디안의 양치기로 40년을 보내게 한 후에 그 민족의 구원자로 세웠다. 하나님으로선 모세를 바로와 맞상대하고 또 출애굽한 그 수많은 무리를 광야로 인도하기 위해서 각 분야의 최고 전문가로 준비시킬 필요가 있었다. 애굽에서 400년간 노예 생활만 한 이스라엘 민족 스스로는 바로를 상대하고 또 광야를 통과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모세 개인으로선 초반과 중반의 황금 같은 80년의 인생이 완전한 실패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전혀 실패가 아니었다. 모세는 아마도 소명을 받아 실제로 바로와 맞대결하고 또 광야로 동족을 이끌고 나온 한참 후에서야 지난 80년이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나 큰 승리의 영광을 위한 준비 기간이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모세가 그런 큰 승리를 맛보게 된 것이 자신의 믿음을 즉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마음의 상태를 절정에 끌어 올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가끔은 그런 때도 있었겠지만 사실 80년 동안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불만으로 가득 찬 세월을 보냈을 것이다. 그래도 그는 어쨌든 하나님을 경외하는 기본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고 또 자기 인생에 대한 당신의 뜻을 알고자 계속 씨름했을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은 모세의 믿음과는 도저히 비교도 안 되는 열심과 권능으로 모세를 단 한 시도 떠나지 않고 붙들고 계셨다. 또 놀랍게도 그를 당신만의 계획과 뜻을 위해 온갖 고난의 훈련을 통해 한 걸음씩 준비시켰다. 애굽 왕자로 최고의 세상적 실력을 갖추었고 광야에서 생존하고 여행하는 전문가가 되었다. 다른 말로 그가 바로와 맞대면 한 것이나 광야를 통과한 것도 자신의 실력이 십분 발휘된 것이었다. 또 그 배경에는 사실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섭리가 계셨기에 그분의 은혜도 십분 발휘된 것이다.
이미 살펴본 대로 다윗의 경우, 특별히 골리앗과의 싸움도 마찬가지다. 양치기를 하는 동안 수시로 나타나는 맹수로 인해 온갖 고초를 겪었고 어쩌면 하나님에 대해 원망도 많이 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물매 돌 던지는 분야에선 최고의 명사수가 되었다. 그리고 골리앗을 보는 순간 하나님이 그동안 허락하신 연단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채었다. 비록 어린 소년에 불과했지만 정말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과 신비로운 섭리 앞에 온전히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또 그로선 자기 실력으로도 충분히 이길 자신이 있었지만 하나님이 선하게 인도해 달라고 전투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하나님께 의탁했다. 나아가 그 일이 하나님의 일임을 확신하기에 자기 생명까지 기꺼이 바치기로 헌신했다. 단순히 열심히 믿으면 신자는 가만히 있어도 그분이 다 알아서 대박을 터트려주기를 기대한 믿음은 그에게는 눈곱만치도 없었다.
신자가 강한 믿음으로 나가면 전쟁을 이기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일어나는 어떤 전쟁도 하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마련해 놓으셨기에 승리는 이미 나의 것이라고 확신하고 결연히 나아가는 신자에게만 승리를 주시는 것이다. 또 그것이 전쟁은 여호와에게 속한 것이며 그분의 이름으로 전쟁에 나아간다는 참된 의미다.
1/9/2007 -->
도깨비 방망이 신앙
신자란 하나님이 모든 인류 역사뿐 아니라 개인의 일상사까지 세밀하게 주관하신다는 것을 믿는 자다. 자기는 너무나 연약하고 불완전하며 무능하다는 것을 철저하게 깨달았기에 오직 하나님께 자신의 존재, 삶, 인생 전체를 온전히 내어 맡기는 자다. 그래서 신자가 그분께 더 많이 아니 전부를 내려놓을수록 그분의 권능은 신자의 삶을 통해 더 드러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신자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만 바라보라고 하니까 기도만 하면 모든 것을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주신다고 착각을 한다. 두 손 두 발을 다 내려놓고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램프를 슬슬 문지르면 나타나는 거인처럼 신자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좋은 신앙인 것처럼 되었다. 신자가 기도라는 도깨비 방망이를 흔들면 하나님은 뚝딱하고 그 신자가 원하는 것을 이뤄져야 한다고 기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얼마나 기도를 뜨겁고도 간절하게 하느냐로 믿음이 좋고 나쁨의 기준이 되어버렸다. 또 자기가 기도한 대로 응답을 많이 받을수록 교회 내에서 더 신령한 자로 대접받는다. 나아가 그런 자랑을 늘어놓은 것이 성도 간에 서로 은혜를 나누는 것이며 그렇지 못한 신자는 열등한 신앙으로 취급당한다.
물론 하나님은 신자가 진정으로 간구하는 모든 기도에 응답하신다. 정말 당신만이 하실 수 있는 섭리와 권능으로 신자의 간절한 소원을 어떤 형태로든 반드시 이뤄주신다. 그러나 신자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손을 완전히 놓고 있어도 신자가 기도한 대로 이뤄준다는 보장은 절대 없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기도를 많이 잘하느냐 만이 믿음의 전부가 되어버린다. 또 신자는 소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기도만 하면 이뤄낼 수 있는 슈퍼맨이 된다는 이상한 결론에 이르지 않겠는가?
기도란 신자의 호흡이다. 쉬지 말고 무엇이든 기도해야 함은 분명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뜻 안에서 신자의 소원을 조정하고 합력하여 궁극적이고도 영원한 선으로 이끄는 방향으로만 기도에 응답하신다. 신자가 기도한 대로와는 완전히 다르게 응답이 되는 수가 있으며, 심지어 전혀 응답이 안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가 되었든 내용적으로는 신자의 모든 상황에 가장 유익하게 하나님은 응답하신 것이다.
쉽게 말해 신자의 모든 기도를 하나님이 응답은 하시되 당신의 때와 방법으로 응답하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자가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의 가장 중요한 의미가 밝혀졌다. 자기 소원을 가지고 기도는 하되 자신이 원하는 때와 방법과 모습으로 응답되어져야 한다는 고집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자가 가진 모든 계획과 뜻마저 완전히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뜻과 계획을 세울 수 있고 나아가 그것을 두고 간절히 기도할 수 있다. 단지 꼭 그대로 되어져야 한다는 고집은 부리지 말라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을 역으로 말하면 오히려 현실의 일을 더욱 열심히 수행하는 모습이어야 한다. 또 그 일을 위해 자기 소원대로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내가 기도한 것과 어떻게 조화되어 나타나는지 꼭 헤아려 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자기를 이끌더라도 순종하되 그 인도를 기도한 것과 연결시켜 보아야 한다. 그래서 이제는 신자 쪽에서 자기 소원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조정 작업을 해야 하고 또 바로 그것이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는 실질적인 의미다.
그럼에도 모든 것을 내려놓는 신앙이 마치 도깨비 뚝딱하는 신앙으로 변질 된 것은 성경의 표현이나, 하나님의 역사가 그런 것 같이 보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그럴지라도 가르치는 자들이 바로 풀어서 그런 오해를 불식시켜야 하는데도 오히려 그렇지 못하거나 심지어 더 조장하는 경우마저 있다. 그런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소년 다윗이 장사 골리앗을 물리친 내용이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투를 이겼고 성경도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이 다해준 것 같다.
나아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를 이겼으니 하나님이 문제만 해결해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수십 배의 축복을 더해준 것 같다. 한 마디로 신자가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이 ‘뚝딱 신앙’과 ‘대박 신앙’의 짬뽕이 되었다. 하나님께 모두 내려놓는 신앙은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르다. 다윗과 골리앗의 전투에도 그런 내용이 사실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천하무적 여포와 골리앗
삼국지의 여포는 대단한 장수였다. 관우, 장비, 유비 세 사람과 상대해서도 하나도 꿀리지 않다가 조자룡까지 가세하자 할 수 없이 퇴각했다. 일대일의 전투에서 그를 당해낼 장수는 아무도 없었다. 말하자면 골리앗은 삼국지의 여포 같은 장수였다. 성경에 언급한 대로 따져보면 그의 키는 2m 93cm, 몸을 두른 갑옷의 무게는 57 kg, 놋 단창의 창날만 7kg이 되었다.(삼상17:4-7) 이스라엘 최고의 용사 사울도 보통 사람보다 어깨 위나 더 컸음(키가 약 2m / 삼상10:23)에도 상대가 안 되니 이스라엘 중에는 어느 누구도 맞설 자가 없었다.
그런 골리앗을 군대에 갈 나이도 안 된 소년이 이겼으니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믿음으로 담대하게 전투에 임했더니 하나님이 큰 능력으로 기적 같은 승리를 얻게 해 준 것으로만 흔히들 이해한다. 그래서 객관적으로 도저히 해결책이 안 보이는 어떤 위급한 상황에서도 신자는 믿음으로 무조건 밀고 나가면 하나님이 알아서 다 해주는 생생한 예로 제시된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 뚝딱하고 대박이 터진 대표적인 케이스다.
그러나 조금만 이성적으로 따져도 너무 말이 안 되는 해석이 아닌가? 우선 다윗은 실제로 자신의 생명을 걸고서 혼신의 힘을 다해 전투에 임했다. 실제 전투는 하나님이 한 것이 아니라 다윗이 했다. 물론 그 배경에서 승패를 확실하게 보장한 분이 하나님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이길 확률이라고는 제로였던 싸움을 하나님이 개입하여 완전한 승리로 바꾼 것이 아니다. 요컨대 실제 전투도 다윗이 했고 또 다윗의 실력도 90% 이상 작용됐다. 다윗은 하나님의 기적에 힘입은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기 실력으로 골리앗을 물리친 것이다.
고대의 전투는 최고 장수들이 나와 먼저 한번 붙은 후에 전 군대가 나와 싸우거나 아니면 그 대표끼리의 싸움으로 아예 전쟁의 승패까지 결정할 때도 있었다. 골리앗도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내게로 내려 보내라. 그가 능히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기어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삼상17:8,9)고 이스라엘에게 도전했다.
사울과 온 이스라엘은 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하였다. 심지어 할례 없는 자가 여호와의 군대를 모욕했어도 싸울 생각을 못하고 40일이 지나도록 진에서 꼼짝도 않고 아무도 응전하지 못했다. 그런 판국에 겨우 양치기 소년인 다윗이 실력으로 이겼다고 하니까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가?
당시 다윗의 나이는 겨우 열 서넛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다윗의 아비 이새에게는 여덟 아들이 있었고 다윗은 막내였는데 셋째 아들까지 징집되었다. 남자가 이십 세가 되면 군대에 갔기 때문에 막내인 다윗의 나이를 역산해 볼 때 많아야 그 정도였을 것이다. 사울이 마련해준 갑옷, 창, 방패는 너무 커서 다 버리고 아무런 보호 장치 없이 맨몸으로 나서야 할 정도였다. 그래서 겨우 물매 돌 다섯 개만으로 골리앗과 싸우러 나갔는데 다윗이 자기 실력으로 이겼다니 도대체 무슨 뜻인가?
당대 최고의 장수 네 명과도 맞서 싸울 정도로 천하무적이었던 여포에게도 결정적인 약점은 하나 있었는데 여자에게 약한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아챈 한나라의 충신 왕윤은 초선이라는 절세미녀를 이용해 여포와 그 대장 동탁 사이를 이간시켰고 결국 여포도 그녀로 인해 조조에게 패배하게 되었다.
골리앗도 마찬가지였다. 갑옷 입고 창 들고 하는 정식 싸움으로 그와 맞서서는 아무도 이길 수 없었다. 아마 여포가 골리앗과 동시대에 살았다 해도 상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골리앗에게도 결정적인 약점은 하나 있었다. 갑옷으로 무장하지 않은 얼굴 부분이다. 골리앗은 그런 면에서 삼국지의 여포보다는 사실은 그리스 신화의 아킬레스와 더 유사하다.
아킬레스의 엄마 테티스가 신비의 물로 그의 전신을 목욕시켜 불사(不死)의 장수로, 즉 전신을 어떤 창도 뚫을 수 없는 갑옷으로 무장한 것과 같게 만들었다. 그러나 발뒤꿈치를 손으로 붙들고 목욕시키는 바람에 그 부분만은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다. 완전 무장한 무려 3미터에 가까운 거구 골리앗에게는 갑옷으로 덥히지 않는 얼굴 부문만이 아킬레스의 발뒤꿈치처럼 유일하게 손상을 입을 수 있는 약점이었다. 소년 다윗은 골리앗의 약점을 한 눈에 알아보고는 급소에 물매 돌로 정통으로 타격을 가했던 것이다.
다윗의 실력
다윗이 아직 어려서 그런 신기(神技)에 가까운 돌팔매 실력을 도저히 갖출 수 없었고 또 골리앗의 치명적 약점을 눈치 챌 만큼 지혜롭지 못했을 것이라고 섣불리 판단해선 안 된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기적적인 간섭이 작용한 것이지 다윗의 실력은 아니었다고 고집한다면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만약에 다윗의 실력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이 그의 믿음과 담대함을 보고 이루신 기적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럼 전후 사정이 어떻게 되어야 하겠는가? 다윗은 아무리 힘든 일도 앞 장 서서 자기를 희생하며 봉사할 만큼 담대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면 어떤 큰일도 일으켜 주실 줄 확신하는 아이다.
그런 믿음으로 이스라엘의 모든 어른들이 그것도 형님들이 아이가 올 곳이 못된다고 야단을 치는 데도 골리앗을 향해 담대히 싸우러 나갔다. 자기가 가진 유일한 무기인 돌을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서 던진 후에 하나님의 처분만 기다렸다. 소년이 던진 돌은 당연히 힘없이 날아가고 있었는데 눈에 안 보이는 천사가 그 돌에 힘과 속력을 붙여서 골리앗의 면상에 정확하게 꽂히게 해주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상상하는 이 전투의 모습이다.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키질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 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었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삼상17:34-37)
다윗은 양을 치면서 사자와 곰의 습격을 무수히 받았지만 그 때마다 물리치고 양 떼를 구했다고 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겠는가? 하나님이 레이져 빔 같은 것으로 울타리를 쳐서 아예 맹수의 접근을 차단시켰는가? 사자와 곰의 발톱에서 구해주었다고 말했으니 양을 잡아먹으려는 순간 갑자기 맹수가 죽거나 물러가는 기적이 일어났는가?
맹수가 새끼를 움키면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새끼를 구했다고 했다. 막대기로 사자와 곰을 상대할 수는 없으니 당연히 양치는 막대기가 아니라 물매 돌로 쳤을 것이다. 그것도 맹수의 급소를 단 방에 맞혀야 했다. 말하자면 다윗은 양을 치면서 물매둘 던지는 데는 프로급 선수가 되었다. 요즘으로 치면 올림픽 경기 양궁이나 사격 금메달리스트의 솜씨를 가지게 된 것이다. 맹수들은 단 번에 급소를 치지 못하면 더 사나워지고 날쌔진다. 그야말로 귀신같은 솜씨라야 사자와 곰을 물리칠 수 있지 않겠는가?
사자와 곰(우리 생각보다 훨씬 재빠름) 같은 맹수를 단 방에 맞추는 솜씨라면 인간의 급소는 너무나 쉽게 맞힐 수 있다. 그것도 무거운 무장을 한 거인이 어기적거리는 것은 어쩌면 눈감고도 맞힐 것이다. 골리앗으로선 정말 한 주먹도 안 되어 훅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소년이 이스라엘의 대표 장수로 나섰으니, 그것도 칼과 창과 갑옷 방패를 전혀 갖추지 않은 채 나섰으니 아예 무시했을 것이다. 다른 말로 얼굴을 방어할 태세는 전혀 갖추지 않고 고개를 오히려 빳빳이 쳐들고 걸어 나왔을 것이다. 그런 약점을 다윗이 발견 못할 리가 없고 또 한 방에 못 맞힐 리도 없었다. 이 싸움은 사실상 하기 전부터 승부는 이미 결정나있었고 다윗은 전적으로 자기 실력으로 이겼던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
그럼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고 한 다윗의 고백은 무슨 뜻인가? 그가 실력으로 이겼다면 여호와를 믿는 믿음은 없었다는 뜻인가? 또 이 전투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하신 일은 없거나 아주 미약하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다시 말하거니와 다윗이 자기 실력으로 골리앗을 이긴 것만은 분명하다. 이스라엘에선 다윗 외에는 어느 누가 나서도 절대 골리앗을 이길 수 없었다. 그리고 다윗이 골리앗을 처음 보는 순간 사자나 곰보다 느린데다 얼굴에 보호막이 없는 것을 한눈에 알아채고는 충분히 이길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들었다. 말하자면 다윗이 담대히 싸우러 나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나 계시를 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판단하여 자원한 싸움이었다.
그럼에도 다윗은 만에 하나 첫 돌이 급소에 명중하지 못하면 그 다음에는 자기가 죽는다는 사실도 알았다. 사자와 곰은 첫발이 실패해도 네 발로 기는 짐승이라 더 포악해지기는 해도 얼굴의 급소를 가리며 공격해 오지는 않는다. 그래서 여러 발을 연발로 맞추다보면 결국에는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은 다르다. 특별히 전투에 익숙한 골리앗이 상황을 알아채고는 곧바로 방패로 얼굴을 가리며 다가오면 소년 다윗은 뼈도 못 추릴 만큼 순식간에 전황은 역전되어 버린다.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로 마주 그 항오를 향하여 빨리 달리며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취하여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삼상17:40,48,49)
다윗은 전투하기 전에 시냇가에 가서 맹수들과의 싸움에서 체득한 지식과 경험을 살려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랐다. 말하자면 가장 손 안에 쥐기 좋고 던지기에 적합하면서도 맞으면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 있는 돌이었다.
돌을 다섯 개 고른 이유로 어떤 성경주석가들은 “이 네 사람 가드의 장대한 자의 소생이 다윗의 손과 그 신복의 손에서 죽었더라”(삼상21:22)는 구절과 연결시켜 해석하기도 한다. 즉 다윗이 아예 골리앗의 동생 네 명까지 모두 합쳐 다섯 명을 상대할 것을 각오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무리한 해석이다. 우선 다윗이 그 당시에 골리앗의 동생이 네 명이나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가능성이 적고 또 앞에서 말한 대로 일단 얼굴을 향해 돌을 던진다는 사실을 눈치 채면 다들 그 즉시 방패로 막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아마도 다윗은 연발소총처럼 아주 재빠르게 던질 수 있는 실력을 가졌던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다윗이 사람을 죽이기 위해 돌을 던지기는 처음이었다. 또 아무리 적국의 장수이지만 어른이자 엄청난 거인을 상대로 해야 한다는 부담감 또한 어린 그로선 대단했을 것이다. 시냇가에서 돌을 고를 때의 그의 심경을 추측해보면 참으로 복잡다단했지 않았겠는가? 생전 처음 살인을 해야 하는 부담감과 혹시라도 실패할 지도 모른다는 염려와 또 그렇게 되면 자기는 바로 창에 찔려 죽어야 한다는 것까지 각오했어야 했다.
다윗으로선 훈련 받은 정식 군인이 전쟁터에 나온 것과는 사정이 전혀 달랐다. 전혀 전투 준비 없이 형들의 안부를 알아보고 부친이 준 치스를 전하러 왔다가 얼떨결에 일생일대의 고비를 맞닥뜨린 셈이다. 비록 그가 한 눈에도 골리앗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은 얻었지만 그래도 막상 출진을 앞두고는 심장이 뛰고 안절부절 했을 것이다.
아마도 돌을 줍는 사이에 마음속으로 하나님에게 간절히 기도를 드렸을 것이다. 우선 한 방으로 급소에 정통으로 맞히게 해주고, 혹시라도 첫발이 실수해도 둘째 셋째 돌을 던지기 전에 골리앗이 미처 방어태세를 갖추지 못하게 해주고, 또 비록 적국의 장수지만 살인을 하는 부담감을 덜고 또 그 죄를 용서해주고, 최악의 경우 싸움에 지더라도 이스라엘의 할례 받은 자녀답게 당당하게 죽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것이다. 전투는 그가 기대하고 또 기도한대로 결말이 났다. 하나님이 함께 하였고 다윗의 기도에 응답한 것이다.
그럼 이 전투에서 하나님이 역사한 것은 다윗의 충심어린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신 것뿐인가? 첫 돌팔매가 실수하지 않고 정통으로 맞히도록 해 주신 것인가? 그래서 신자가 간절히 기도한 후에 나가 싸우는 전투는 다 승리하게 해주시는 것인가?
물론 다윗이 실수하지 않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의 간섭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혹시 첫 발이 실패해도 다섯 개의 돌을 연속해서 던질 정도의 실력이라면 두세 번째의 돌로도 사망시키거나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었다. 싸움의 승패는 다윗이 실수만하지 않는 한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정작 하나님이 하신 더 중요한 일은 이 싸움의 승패보다는 다윗으로 그런 실력을 갖추도록 해준 것이었다. 말하자면 이 싸움이 있기 훨씬 이전 다윗이 양치기할 때부터 하나님은 이 전투에 대비해 사자나 곰을 보내어 훈련시켰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사실상 이 전투는 다윗이 맡도록 그래서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려고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이었다. 당연히 그의 승리는 따 논 당상이었다. 다윗이 자기 실력을 십분 발휘해 이겼지만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섭리와 권능 또한 십분 발휘된 것이다.
그야말로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는 다윗이 고백한 그대로 되었다. 간절히 기도하고 믿음으로 나가면 하나님이 기적적인 승리를 주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신자가 겪는 모든 싸움이 사실은 하나님이 이미 계획해 놓으신 것이며 심지어 그 전쟁을 이길 수 있는 실력까지 평소에 쌓도록 해 주셨다는 것이다.
믿음이 만능이 아니다.
대부분의 신자가 ‘믿음’을 오직 자기 내면에 형성된 하나님을 신뢰하여 의탁하고자 하는 마음의 세기로만 이해한다. 나아가 현실의 어려운 문제들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 해결 받을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만약 어떤 문제가 아무리 기도해도 해결이 안 되면 자신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마음이 아직 최고조에 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믿고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의 상태를 절정으로 끌어 올리려 애를 쓰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믿음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신자가 겪고 있는 문제를 당신을 얼마나 잘 믿는지 못 믿는지 심사해서 그 믿은 상태가 100% 완벽한 수준에 다다라야만 해결해 주시겠는가? 그렇다면 하나님과 신자 간에는 오직 믿음 외에는, 아무리 믿음이 신자가 가장 먼저 갖추어야 할 핵심이라고 해도,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또 그 믿음이 문제 해결의 공로이자 조건이 되어버리지 않는가?
믿음이란 상대를 그냥 단순하게 믿는 것이다. 더 믿으려고, 더 의지하려고 노력한다면 이미 사실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다. 솔직히 신자가 어떤 문제를 두고 기도한다는 자체만으로 하나님에 대한 거의 완벽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다. 믿음이 없는 자는 기도 자체를 하지 못하고 또 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100% 완벽한 믿음, 즉 어떤 의심, 불만, 불안, 염려가 하나도 없는 상태에 도달하기는 불가능하다. 물론 하나님은 신자가 진실 된 마음과 간절한 소원을 갖고 기도하는 것만으로 너무나 기뻐하신다. 그러나 기도 응답의 근거가 신자가 갖고 있는 믿음의 세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컨대 하나님이 이스라엘 모든 사람 중에서 다윗이 100% 순전하고도 가장 강한 믿음이라서 골리앗을 이기게 해 준 것이 아니지 않는가? 다른 사람의 믿음이 다윗에 비해 훨씬 못 미쳐서 골리앗에게 졌거나 상대를 못한 것은 아니다. 단순히 전투 능력이 모자랐을 뿐이다. 아무리 궁리해도 일대일로 그와 상대해선 이길 재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스라엘 중에서 어떤 자가 어차피 실력으로 안 될 것은 빤하지만 하나님만 믿고 생명을 버리더라도 담대하게 나갔더라면 하나님이 골리앗이 걸어오다 돌부리에 넘어지게 해서라도 이기게 해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에게도 비상하고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잘 사용하지 않는 방법이다.
만약에 하나님이 매번 그런 방법을 동원하면 신자는 현실적으로 실력을 쌓지 않고 그야말로 우리가 지금껏 오해했던 식의 믿음만 열심히 키우면 된다. “믿~슙~니다!!”를 얼마나 강하고도 자주 고백할 수 있느냐가 만사형통의 열쇠가 된다. 하나님은 신자더러 그렇게 오해하게끔 하고 싶지 않아서라도 그런 방법을 여간해선 쓰지 않는다. 그런데도 신자는 오히려 그렇게 오해 하는 것이 좋은 믿음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우리 기대대로 신자 쪽의 믿음이 세어야만 하나님이 응답해주는 것이 아니라면 당신 쪽의 다른 뜻과 계획이 있다는 뜻이다. 또 만약에 하나님이 비상하고 특별한 경우에만 기적적인 방법을 동원한다면 당신이 강조하고자 하는 초점이 그 방법에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신자로선 정상적이든 혹은 기적적인 방법으로 역사가 일어났든 그 일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당신의 뜻과 계획에 더 관심을 쏟아야 한다.
솔직히 어지간한 신자는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이 안 되고 당신의 뜻에 맞는 기도라야 응답이 된다고 잘 알고 있다. 그러면 신앙의 초점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당연히 자신의 믿음을 키워 응답을 받아내는 쪽 대신에 더더욱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아나가는 데여야 하지 않는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아는 일을 너무 신령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분의 뜻과 계획이란 결국 신자 본인에 대한 것이다. 그럼 신자가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과 그 동안 이뤄진 경과를 곰곰이 묵상해보면 알 수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뜻대로 어떤 신자를 인도하신다면 실제 그에게 과거나 현재 일어난 일 가운데 그 뜻이 어떤 모습으로든 반영되어 있을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다윗의 경우 기도원에 가서 금식 기도를 수십일 간 한 것도 아니고, 당시에는 새벽기도 매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모세 오경을 알아도 얼마나 알았겠는가? 단순히 암송하는 수준이라도 되었겠는가? 우리가 말하는 식의 믿음으로 치면 너무나 연약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는 골리앗을 보는 순간 그 약점을 알아챘다. 아니 하나님의 자기를 향한 계획을 깨달았다. 바로 이 싸움을 위해서 양치는 동안 맹수를 그렇게 자주 마주치게 해서 자기로 물매 돌 던지기의 최고수로 만들어 놓으셨다는 것을 말이다.
믿음의 본질
믿음이란 신자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마음의 상태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또 그 마음 상태를 끌어올린다고 어떤 문제가 해결되거나 믿음이 좋아지는 것도 아니다. 믿음이 성립되려면 반드시 믿음의 대상이 있어야 하고 또 그 상대를 잘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도 당연히 그분을 잘 알아나가는 것이 급선무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다, 영원하시고 변개가 없이 신실하시다, 사랑과 긍휼에 다함이 없다, 같은 일반적 속성들을 더 많이 안다고 믿음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분의 나를 향한 뜻과 계획을 알아나가되 그분의 관점에서 살펴보아야만 한다.
다른 말로 내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마음 상태가 믿음을 이루는 필요조건이라면 그분의 나를 향한 뜻과 계획을 아는 것은 믿음이 믿음으로서 완성되는 충분조건이다. 그런데 신자 쪽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어지간한 신자라면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다. 그럼에도 자꾸만 그 필요조건만 키우려 드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대신에 충분조건을 더 채워야만 믿음이 실제 삶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믿음이란 정지된 순간의 마음의 상태가 아니라는 말이다. 말씀과 기도에 능해 신자의 내면의 상태만 충만하게 고양 시킨다고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다. 항상 유동적으로 변화 발전해 나가는 과정이 믿음이다. 하나님의 나를 향한 뜻과 계획을 알아서 그 바탕 위에서 그분과의 일상적인 관계를 계속 이어나가는 작업이다. 하나님과 신자가 함께 손잡고 계속해서 걸어가고 있는 관계 그 자체가 믿음이다. 신자는 그 관계가 중단 없이 장애 없이 하나님의 의도대로 이어지도록 실제 삶의 모든 부분에서 반응해야 한다. 또 그것이 모든 것을 그분께 내려놓는다는 참 의미다.
하나님은 모세를 애굽의 왕자로 40년을, 미디안의 양치기로 40년을 보내게 한 후에 그 민족의 구원자로 세웠다. 하나님으로선 모세를 바로와 맞상대하고 또 출애굽한 그 수많은 무리를 광야로 인도하기 위해서 각 분야의 최고 전문가로 준비시킬 필요가 있었다. 애굽에서 400년간 노예 생활만 한 이스라엘 민족 스스로는 바로를 상대하고 또 광야를 통과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모세 개인으로선 초반과 중반의 황금 같은 80년의 인생이 완전한 실패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전혀 실패가 아니었다. 모세는 아마도 소명을 받아 실제로 바로와 맞대결하고 또 광야로 동족을 이끌고 나온 한참 후에서야 지난 80년이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나 큰 승리의 영광을 위한 준비 기간이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모세가 그런 큰 승리를 맛보게 된 것이 자신의 믿음을 즉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마음의 상태를 절정에 끌어 올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가끔은 그런 때도 있었겠지만 사실 80년 동안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불만으로 가득 찬 세월을 보냈을 것이다. 그래도 그는 어쨌든 하나님을 경외하는 기본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고 또 자기 인생에 대한 당신의 뜻을 알고자 계속 씨름했을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은 모세의 믿음과는 도저히 비교도 안 되는 열심과 권능으로 모세를 단 한 시도 떠나지 않고 붙들고 계셨다. 또 놀랍게도 그를 당신만의 계획과 뜻을 위해 온갖 고난의 훈련을 통해 한 걸음씩 준비시켰다. 애굽 왕자로 최고의 세상적 실력을 갖추었고 광야에서 생존하고 여행하는 전문가가 되었다. 다른 말로 그가 바로와 맞대면 한 것이나 광야를 통과한 것도 자신의 실력이 십분 발휘된 것이었다. 또 그 배경에는 사실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섭리가 계셨기에 그분의 은혜도 십분 발휘된 것이다.
이미 살펴본 대로 다윗의 경우, 특별히 골리앗과의 싸움도 마찬가지다. 양치기를 하는 동안 수시로 나타나는 맹수로 인해 온갖 고초를 겪었고 어쩌면 하나님에 대해 원망도 많이 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물매 돌 던지는 분야에선 최고의 명사수가 되었다. 그리고 골리앗을 보는 순간 하나님이 그동안 허락하신 연단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채었다. 비록 어린 소년에 불과했지만 정말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과 신비로운 섭리 앞에 온전히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또 그로선 자기 실력으로도 충분히 이길 자신이 있었지만 하나님이 선하게 인도해 달라고 전투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하나님께 의탁했다. 나아가 그 일이 하나님의 일임을 확신하기에 자기 생명까지 기꺼이 바치기로 헌신했다. 단순히 열심히 믿으면 신자는 가만히 있어도 그분이 다 알아서 대박을 터트려주기를 기대한 믿음은 그에게는 눈곱만치도 없었다.
신자가 강한 믿음으로 나가면 전쟁을 이기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일어나는 어떤 전쟁도 하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마련해 놓으셨기에 승리는 이미 나의 것이라고 확신하고 결연히 나아가는 신자에게만 승리를 주시는 것이다. 또 그것이 전쟁은 여호와에게 속한 것이며 그분의 이름으로 전쟁에 나아간다는 참된 의미다.
1/9/2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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