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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이 고상한 기도를 드린 것이 아니다

열왕기상 박신 목사............... 조회 수 2996 추천 수 0 2011.10.02 08: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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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왕상 3:4-15 
설교자 : 박신 목사 
참고 : http://www.whyjesusonly.com/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솔로몬이 가로되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의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저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저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예비하시고 오늘날과 같이 저의 위에 앉을 아들을 저에게 주셨나이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비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주의 빼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저희는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 이에 하나님이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수(壽)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富)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을 것이라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 솔로몬이 깨어 보니 꿈이더라 이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여호와의 언약괘 앞에 서서 번제와 수은제를 드리고 모든 신복을 위하여 잔치하였더라.”(왕상3:4-15)

 

기도 응답의 두 가지 비결

“어떻게 해야 기도 응답을 잘 받을 수 있을까?” 신자가 평생을 두고 해답을 구하는 중요한 신앙 과제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래서 솔로몬이 간절히 기도했더니 구한 것은 물론이고 구하지 않은 것까지 응답을 받은 본문은 응답을 잘 받은 기도의 예로서 가장 자주 가르쳐져 왔다.

그리고 그 비결로 크게 두 가지를 들고 있다. 우선 권력, 재물, 명예 같은 세속적인 것을 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신에 백성을 다스릴 지혜를 구해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기도를 했다는 것을 첫째 원인으로 꼽는다. 또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린 그 신실한 마음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둘 다 맞다. 그러나 정확한 해석은 아니다.

어떤 진리가 진리로서 가치를 가지려면 반드시 역으로도 검증을 받아야 한다. 쉽게 말해 1+1=2가 진리가 되려면 2-1=1이 맞는 것도 입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신자가 현실의 문제가 아니라 내면적인 성장을 위해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다 들어주시는지부터 따져 보아야 한다. 그것도 다른 현실적 축복도 함께 덧붙여서 말이다. 그러나 쉬운 예로 우리 품성을 거룩하게 변화시켜 달라고 그렇게 많이 기도했어도 잘 이뤄지지 않았지 않는가?

또 일천 번제만 드리고 나면 무슨 기도를 해도 대박 같은 응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아예 말이 안 된다. 그럼 이천, 삼천,.. 만 번의 번제를 드리면 그에 비례해 더 큰 응답을 받을 수 있다는 이치가 되지 않는가? 다른 종교에선 몰라도 기독교에선 정녕 아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드린 일천 번제는 회수로, 즉 최고의 정성을 바쳐서 드린 제사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여호와 앞 곧 회막 앞에 있는 놋단에 이르러 그 위에 일천 희생으로 번제를 드렸더라.”(대하1:6) 희생 제물의 숫자가 일천이었지 회수가 일천이라는 언급은 성경에 없다.

물론 진정으로 드려진 번제라면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것은 틀림없다. 또 번제는 당연히 숨겨진 다른 의도가 없이 순수하게 자신의 전부를 드리는 제사여야 한다. 특별히 속죄가  자발적 회개의 모습으로 드러나야 한다. 번제를 드리면서 기도를 할 수 있고 또 그 기도를 응답해 주시지만, 번제와 기도 응답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기도 응답은 신자의 조건, 자격, 공로와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달렸을 뿐이다.  

어떤 경우가 되었든 이렇게 기도하면 응답을 잘 받을 뿐만 아니라 기도하지 않는 다른 것까지 함께 응답받을 수 있다는 식으로 가르쳐져선 안 된다. 사람들로 시쳇말로 제사보다 젯밥에 대한 헛된 기대를 갖게 만들 우려가 있다. 말하자면 큰 응답을 받으려고 일부러 고상한 기도를 하거나 지극 정성을 바치려 든다면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아니다.

물론 두 경우 다 하나님 보시기에 신령과 진정으로 구하는 기도라면 응답을, 그것도 크게 받을 수도 있지만 언제나 그렇지는 않다. 항상 그렇지 못하다는 것은 지금껏 가르쳐진 응답 잘 받는 기도 비결이 역으로 증명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즉 그런 가르침은 결과적으로는 맞지만 완전한 분석은 아니라는 것이다.

솔로몬의 처지

하나님이 그런 응답을 주신 이유를 정확히 알려면 먼저 솔로몬이 왜 일천번제를 드렸고 또 왜 그런 기도를 했는지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말하자면 그가 기도 응답을 크게 받으려고 의도적으로 일천 번제를 드렸거나 고상하고 선한 기도를 했다면 지금껏 가르쳐져온 두 가지 비결은 당연히 인정받을 수 있다. 반대로 본인은 그런 마음이 전혀 없었는데도 후대 사람이 그럴 것이라고 말한다면 도리어 우스운 꼴이 되지 않겠는가?

그는 알다시피 다윗과 우리야 사이에 난 아들이다. 간음죄로 태어났던 아기는 하나님의 벌을 받아 죽었다. 다윗이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성전에서 철저히 회개한 후에 얻은 아들이 그였다. 그러나 그는 서열상 왕위를 계승할 처지가 아니었으며 왕위를 이을 때 나이도 20살이 채 안된 젊은이였다. 또 왕에 즉위하기 직전에는 이복형인 아도니야의 반역사건을 겪었다. 한 마디로 왕권을 확고하게 세우기에는 아직 역부족인 상태였다.

물론 그는 왕에 즉위하자마자 다윗의 유언대로 통치에 장애가 될 만한 위험인물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그러나 대규모 숙청은 항상 희생당한 자들의 가문에 뿌리 깊은 반감을 불러올 수 있다. 그로선 백성과 함께 아주 큰 번제를 드림으로써 나라 전체의 단합된 모습을 특별히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솔로몬이 온 이스라엘의 천부장과 백부장과 재판관과 온 이스라엘의 각 방백과 족장들을 명하고 온 회중과 함께 기브온 산당으로 갔으니 하나님의 회막 곧 여호와의 종 모세가 광야에서 지은 것이 거기 있음이라.”(대하1:2,3) 그는 종교적으로는 여호와 신앙을 더욱 공고히 하고 정치적으로는 반발 세력을 무마하여 더 이상 나라의 동요가 없게 하려 번제를 드렸던 것뿐이다.  

말하자면 당시 그에게 나라를 올바르게 통치하는 것만이 초미의 관심사였다는 뜻이다. 그가 기도하고 응답 받은 것은 꿈속이었다. 그만큼 어떻게 해야 백성들을 잘 다스릴 수 있을지에 모든 생각을 집중했다는 뜻이다. 그는 도덕적으로 선하고 영적으로 심오한 기도를 드렸다기보다, 결과적으로 그런 모습이 된 것은 맞지만, 그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를 가지고 기도했던 것이다.

이제 막 왕위에 오른 약점 많은 젊은 왕에게 가장 필요하고 시급한 것이 무엇이었겠는가?  신하들이 잘 복종하며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는 통치를 해낼 수 있는 지혜가 아니겠는가?    솔로몬은 자기의 처지를 정확하게 평가하였고 그에 대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했던 것이지 스스로 더 신령해지려거나 거룩해지려는 의도는 일차적으로  없었다.

기도 응답을 잘 받을 수 있는 비결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도를 가장 기도답게 진솔하게 하면 된다. 기도의 본질은 인간이 도저히 자기 힘으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모든 능력과 선한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 오는 것임을 확신하기에 그분에게 단순히 의뢰하는 것이다.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전부 부탁하면 된다.      

응답 잘 받는 기도의 형식이나 내용이 따로 있다면 이미 그것 자체가 하나의 능력이 된다. 능력은 기도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쉽게 말해 기도에 따로 매뉴얼이 없다는 뜻이다. 복잡한 전자기기를 새로 구입하면 반드시 매뉴얼을 참조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아예 작동조차 못한다. 매뉴얼을 잘 활용하면 할수록 그 기기가 주는 모든 효력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기도에는 그런 것이 따로 없다. 아니 있을 수가 없다.  

산소와 수소로 물을 만들려면?

물은 수소와 산소가 2:1의 비율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실험실에서 그 비율로 두 분자를 섞는다고 해서 절대 물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반드시 백금이라는 촉매가 필요하다. 흔히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길은 말씀과 기도라고 생각하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촉매가 필요하다.  

다른 말로 기도를 단순히 은혜 받는 수단으로 생각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수단이란 A라는 방식을 사용하면 반드시 a라는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도에  응답 잘 받는 비결이 따로 있어서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무조건 은혜가 따라 온다는 법은 없다. 예컨대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대로 기도했다고 해서 누구나 은혜 받는다는 보장은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신자가 어떤 식으로라도 기도하지 않으면 은혜 받을 길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이 나의 사정을 다 잘 아실 텐데 꼭 기도를 해야 하는지 의아해 한다. 자칫 그럴듯한 생각 같지만 불신자의 경우와 비교해 보면 얼마나 그 생각이 잘못인지 금방 알 수 있다.

앞에서 말한 대로 기도란 한 마디로 이 일을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고백이다. 불신자는 모든 일을 자기가 하려고 들거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평생 가도 기도하지 않는다. 반면에 하나님은 신자로부터 바로 그런 고백을 듣고 싶어 하신다. 역으로 따져 신자가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일을 시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단순히 당신의 권위를 높이려는 뜻이 아니다. 신자와 교제를 나누고 싶어 하시고 또 신자의 진정한 믿음을 보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기도는 은혜를 받는 통로이지 수단은 아니다. 수소와 산소가 일정 비율로 있지 않으면 아예 물이 안 되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선 기도와 말씀은 필수적인 요소다. 그러나 수소와 산소로 물을 만들려면 백금이라는 촉매가 필요하듯이 그 통로가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려면 또 다른 요소가 있어야 한다.

바로 신자의 갈급함이다. 물론 온전하고도 진정한 믿음이 기도의 가장 필수적인 전제이긴 하다. 그러나 기도한다는 사실은 이미 믿음이 있다는 증거다. 하나님이 응답해주실 수 있다는 믿음 없이는 아무도 기도하지 않는다. 또 하나님 앞에 나오면서 그분을 우습게 알고 거짓을 아뢸 수도 없다. 신자도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기에 때때로 과장과 가식이 포함될 수는 있다. 그러나 갈급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진정성은 보장된다고 봐야 한다. 당장 긴급하게 필요하거나 꼭 해결해야 할 일을 거짓으로 아뢸 수는 없지 않겠는가?      

요컨대 기도 응답을 잘 받는 비결은 따로 없지만 갈급함이 기도를 기도답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솔로몬이 수준 높은 도덕적 기도를 했거나, 자신의 처지는 생각하지 않고 순전히 남을 위한 기도를 했거나, 나아가 물질 권세 장수 같은 세속적 관심을 표하지 않아서 기도가 크게 응답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솔로몬은 무엇보다도 자기를 위해, 그것도 현실적으로 가장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기도했다. 응답을 크게 받은 이유는 자기에게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 마침 하나님의 뜻과 정확하게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그는 현실과 자신에 대해 냉정하고도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지혜를 이미 갖고 있었다. 다른 모든 것은 제쳐두고 지혜만 구한 것 자체가 이미 지혜롭다는 반증이지 않는가? 아마 그래서 하나님은 지혜 외에 그에게 필요한 다른 것들을 주었을 것이다.

한 번 생각해보라. 왕에게 돈이 필요하겠는가, 또 권력이 필요하겠는가? 그런 것에는 전혀 아쉬울 것이 없는 위치와 신분이다. 어리석고 탐욕스런 왕은 그런 가운데도 자기 것만 챙기려 들겠지만 그러면 곧 바로 신하들과 백성들의 원성을 부른다. 역모나 혁명이 일어나 왕위가 오래 못 가는데도 자기 무덤을 자기가 파고 있는 셈이다. 현명한 왕은 잘 다스리기만 하면 나라 전부가 자기 것이나 다름없는데 따로 구할 필요는 전혀 없다.  

재물과 장수의 복도 그가 지혜로웠기 때문에 자연히 따라오는 결과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일반인도 지혜로운 자는 술 담배로 자기 몸을 망치는 우를 범하지 않으며 자금 관리도 철저하게 하며 성실히 일해 부를 축척한다. 사용 가능한 자원과 능력에 한정된 일반인도 그럴진대 모든 것을 마음껏 활용할 수 있는 왕이 조금만 지혜롭게 다스려도 나라는 금방 부강해지고 본인도 건강을 누릴 수 있다.

그렇다고 솔로몬이 독단적으로 스스로 노력해 얻은 결과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 배경에는 모든 것을 보호하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도 인간의 특성을 무시한 채 무조건 어떤 일을 이루시는 법은 거의 없다. 전지전능하신 주권으로 한 인간의 모든 장단점을 있는 그대로 전부 활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뤄내신다.

그리고 한 개인이 갖고 있는 재능도 사실은 당신께서 이미 주어놓은 선물이다. 인간은 스스로 일을 이루는 것 같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포함될 뿐이다. 솔로몬처럼 하나님을 아는 자가 기도하면서 자기 일을 이뤄나가면 그분과 동역하는 셈이라 그분의 주권적 섭리는  한층 더 잘 이루어지는 것이다.    

왜 천억 원을 달라고 기도하지 못하는가?

하나님이 신자의 모든 형편을 아시는데도 기도를 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신자는 하나님의 일을 대신 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신자의 입장에선 그 일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면 일을 해나갈 수 없다. 하나님의 입장에선 신자에게 당신의 뜻을 반드시 가르쳐 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 당연히 신자의 기도는 필수적이다.

원칙적으로 신자가 하는 모든 일을 하나님이 주관하시기에 하나님의 일이 아닌 것은 없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이 당신의 기쁘신 뜻 안에서 특별한 목적으로 신자에게 적극적으로 시키는 일이 따로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일을 시행하기 위해 신자의 기도를 우선적으로 요구하신다.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신자에게 어떤 일을 시킨다는 것은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는 뜻이 된다. 간혹 신자의 형편이 너무 딱해 하나님이 소극적으로 허용하는 일도 있다는 것이다. 흔히 기도하면 하나님의 뜻마저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하는 경우다. 물론 하나님으로선 그것마저도 당신의 오전하고도 전체적인 계획에 다 포함시켜 일관된 선으로 이루신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의 형편을 다 알고 있지만 신자는 모든 일에 관해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  

그렇지만 신자가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은 당신의 뜻에 어긋나게 행동하는 법은 없다. 이런 관점에선 불신자가 신자보다 영적으로 더 똑똑한 것 같다. 그들이 소원하는 것들, 예컨대 큰돈을 버는 일, 출세해서 세상 권력을 잡는 것, 자기를 무시한 상대에게 통쾌하게 앙갚음하는 일 등을 하나님에게 빌어봤자 들어주지 않을 것을 알기에 아예 기도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신앙 지식 하나 없어도 본성적으로 안다.  

신자들이 자신 있게 자기 소원을 무엇이든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도 동일하다. 이런 기도를 과연 들어주실지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그 소원을 하나님이 그리 기뻐하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 아니 추측이 스스로 충분히 가능하다. 만약에 자기가 기도하는 제목이 하나님의 뜻에 분명히 맞는다고 확신한다면 왜 열심히 기도하지 않겠는가?

바꿔 말해 신자가 그런 자신만 선다면 년 간 수십억 원의 수입을 달라고 기도해도 된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은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 방법도 정직하며, 번 돈을 쓰는 용도도 의롭다면 얼마든지 수십억 아니 수천억 원을 달라고 당당하게 기도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기도해야 한다. 실제로는 하나님이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말이다.  

가끔 이런 신자들이 있다. 십일조로 월간 천만 원을 바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 말은 수입이 일억이 되게 해달라는 것이다. 언뜻 보면 십일조를 천만 원이나 하겠다니 대단한 믿음이요 헌신하는 일군 같다. 그러나 십일조 천만 원을 바쳐도 자기 앞으로 구천 만원이나 떨어지니 얼마나 짭짤한 장사인가? 십일조를 더 하겠다는 명분을 동원해 자신의 수입을 늘리려고 마음먹어선 안 된다. 하나님의 힘을 빌려 종교적 업적을 크게 성취해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려는 그 심중을 하나님이 꿰뚫어 보지 못하실 리가 없지 않겠는가?  

월간 일억 원의 수입이라도 당당하게 기도하라는 것은 그만큼 갈급한지 따져보라는 뜻이다.  정말 절실하게 그 돈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예컨대 아프리카에 에이즈 치료 병원과 선교센터를 세우는 일 같은 것, 꼭 필요한 것인지의 여부다. 절실하다는 것은 그 하나만 붙들고 기도한다는 것이다. 나머지는 다 포기해도 좋다는 뜻이다. 심지어 생명마저 잃더라도 오직 그 하나만 이뤄지길 소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생명과도 바꿀 일을 두고 일천 번제를 드리는 것이지 일천 번제를 드렸다고 응답이 크게 되는 것이 아니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리소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126:4-6)고 했다. 갈급한 기도에는 반드시 눈물이 따르기 마련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는 일만큼 절실한 것이 따로 있었겠는가? 다른 모든 일이 어떻게 되던 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일이 가장 시급했다. 포로귀환이야말로 어떤 위험이 따르더라도 심지어 목숨이 달아나더라도 이루어야 할 한 가지 일이었다. 어차피 죽기는 마찬가지니까 바벨론에서 생애를 마치기는 죽기보다 싫었던 것이다.      

출애굽 후에 이스라엘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서 춤추며 먹고 마시는 배역 죄를 저질렀다. 진노하신 하나님이 그들을 진멸하겠다고 했을 때에 모세가 어떻게 기도했는가?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출32:31,32) 정말 눈물을 뿌리면서 차라리 자기를 지옥에 보내는 한이 있어도 백성들을 용서해 달라고 간구했다.

모세에게 동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일은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었다. 동시에 온갖 풍상을 겪으며 살만큼 산 80 노인인 그의 일생일대의 소원이기도 했다. 그로선 그것 외에 말년의 인생에서 의미 있는 일이라고는 없었다. 자기 삶의 전부였다. 정말 진정으로 차라리 자기가 죽더라도 동족을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해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내고 싶었다.  

솔로몬이 다른 어떤 것도 구하지 않고 지혜만 구했다고 해서 뜨겁지 않은 기도가 아니었다. 내용적으로는 모세의 이 기도와 하나 다를 바 없었다. 상황이 위급하고 평상적이라는 차이만 있었다. 지도자가 가장 절실하게 구해야 할 것은 백성들의 안락이다. 모세와 솔로몬은 각기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자기에게 가장 필요한 간구를 한 것이다. 그들은 둘 다 올바른 지도자였기에 올바른 기도를 할 수 있었던 것뿐이다.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그럼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별다른 비결이 없다. 비결을 찾는 것부터가 사실은 잘못이다. 단순히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나 소원하는 것부터 있는 그대로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솔직하게 기도하면 된다.

구태여 도덕적으로 고상하고 종교적으로 신령한 기도를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기도를 해야 응답을 받는다는 생각이 앞서면 이미 제사보다 젯밥에 마음이 가 있는 죄를 범한 셈이다. 또 솔직히 우리 대부분은 기도할 때마다 그런 거룩한 기도를 할 수 있을 만큼 의롭거나 믿음이 좋지도 않다. 하나님의 뜻에 정확하게 맞는 기도를 한다는 것은 더더욱 힘들다.

따라서 무엇이든 생각나는 대로, 심지어 자기 뜻과 계획을 고집하는 것 같더라도, 기도는 일단 하고 보아야 한다. 기도를 어떻게 하느냐 보다는 기도하는 습관이 몸에 베이는 것이 더 급하고 중요하다. 자꾸 기도하다 보면 차츰 어떤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며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인 줄 알게 된다. 또 신자라면 어떤 기도를 하나님이 좋아하시는지, 최소한도 싫어하는지는 아주 특수한 경우가 아니고는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래서 신자의 기도는 처음부터 자신 있게 하는 기도와 계속해서 주저하는 기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반복해서 기도하다 보면 어떤 기도는 분명히 응답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거나, 아무래도 이 기도는 응답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드는 것을 경험하지 않는가? 그래서 신자 스스로 불필요한 기도를 정리해 나가면서 차츰 자기가 정말로 꼭 해야 할 기도 즉 가장 갈급한 기도에만 집중하게 된다. 흔히 기도의 맥이 잡힌다고 말하는데 단순히 기도의 언변이 청산유수로 바뀐다는 의미를 넘어서 차츰 자기 기도를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솔로몬이 지혜를 구한 것은 그것이 자기에게 가장 다급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기 앞에 있었던 왕들에 비해서 특별히 나은 것이 없었다. 사울은 전투에 능했고 다윗은 믿음이 견고하고 부하들의 신임을 얻었다. 비록 모반이 실패로 끝났지만 배다른 형 압살롬의 경우마저 백성들의 큰 인기를 끌었다. 틀림없이 그는 “지혜를 주지 않으면 나로선 이 많은 백성들을 도저히 다스릴 수 없습니다. 지혜를 주시지 않을 양이면 차라리 나는 왕을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간구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끈질기게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끈질긴 기도라는 것이 단순히 끈기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갈급하다면 자연히 계속 기도하게 된다는 뜻이다. 꼭 이뤄져야만 할 소망이 있고 또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면 어느 누가 끝까지 기도하지 않겠는가?    

기독교의 기도는 반드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로 끝맺는다. 단순히 종교적인 의식이 아니다. 그 기도를 하게 된 경위와 응답이 이뤄지는 근거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은혜에 힘입었다는 표현이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던 죄인이 예수님의 의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신분이 되었고, 또 하나님이 신자를 다루시는 원리가 오직 십자가에 드러난 복음에 근거한 것이며, 그래서 기도의 응답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에 의해 이뤄질 것임을 믿는다는 고백이다.

요컨대 내 대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기도조차 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기도하는 내용마다 그분의 동일한 은혜가 다시 풍성하게 부어질 것임을 믿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사실 기도하는 내용 전부와 그분의 십자가에 돌아가신 죽음과 맞바꿈을 하는 셈이다.

그런 만큼 신자는 기도에 생명을 걸어야 한다. 우선 기도하는 내용이 이뤄지지 않으면 안 될 하나님의 일임을, 그것도 자신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확신해야 한다.  그 일을 이루시는 근거와 능력이 오직 주님의 십자가 권세로부터 기인함을 믿어야 한다. 단순히 소원하는 것을 아뢰다가 응답이 되면 좋고 안 되어도 손해 볼 것이 없다는 식은 기독교의 기도가 아니다. 끈질기게 생명을 건 기도를 할 만큼 그 소원이 강렬하고 갈급해야 한다. 또 그런 기도라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끝맺을 자격이 있다.

예수님은 또 기도할 때에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했다. 소원을 중복해서 아뢰는 것마저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갈급하면 자꾸만 아뢰게 된다. 괜히 필요 없는 가식, 미사여구, 형식을 동원해서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다. 혹시라도 그러면 기도의 응답이 잘 될 것이라고 기대해선 기도 자체가 벌써 수단으로 변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아가 사람들 앞에 자신의 종교적 실력을 뽐내려들지 말라는 것이다. 갈급하지 않으니까 중언부언하며 기도하는 법이다. 진짜 갈급하다면 긴소리 잔소리 늘어놓을 여가가 어디 있겠는가?

때로는 너무 힘들어 기도를 도저히 할 수 없을  않을 때가 있다. 그저 “주님!”이라는 말만 그것도 속으로만 기어들어가는 소리로밖에 할 수 없다. 그래도 하나님은 오히려 그런 기도에 더 귀를 기울이신다. 하나님은 여주인인 사라에게 잘못하여 아브라함의 아들을 낳고도 쫓겨났던 하갈의 신음 소리도 하늘에서 감찰하시고 들어주셨지 않는가?(창16장)  

신자가 솔로몬이 기도하지 않은 것조차 풍성하게 응답받은 모습에만 신앙 상의 관심을 모으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하갈마저 그것도 정식으로 기도하지 않고 단지 힘들어 하는 모습을 이미 다 알고 당신의 뜻대로 주관하시는 하나님 그분에게만 모든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분이 나를 선택하시고 당신의 자녀로 삼으셔서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근거와 이유가 무엇인지, 또 그래서 나를 앞으로 어떤 뜻과 계획 가운데로 이끌어 가실지를 두고 간절히 기도하고 또 말씀에 비추어 묵상해야 한다.

기도란 우리 영혼의 그분을 향한 목마른 갈증을 구체적으로 아뢰는 것이다. 그 이상이나 그 이하를 추구하려 해선 안 된다. 그분의 그분다우심을 온전히 인정하여 자신의 인생과 삶과 존재 전부를 그분께 완전히 의탁하는 것이 기도다. 신자가 세상이 줄 수 없는 그분만의 은혜와 권능을 체험하면 할수록 자꾸만 그분의 사랑에 더 목말라진다. 자연히 무엇이든 자신에게 가장 갈급한 것부터 간구하게 된다. 또 그러면 그분께서 그분의 온전한 뜻 안에서 그 간구를 당신의 뜻에 맞는 갈급함으로 바꿔 주실 뿐이다. 기도에 응답을 잘 받는, 그것도 솔로몬처럼 대박의 응답을 받을 수 있는 비결은 따로 없다.

6/4/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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