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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순전한 신앙 이야기<http://cafe.naver.com/ghkdqndl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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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별나게 우리는 큰 것들을 좋아합니다. 작고 좁은 땅에서 대대로 살아 와서인지 몰라도 우리네 어른들부터 그것은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너는 큰 인물이 되라, 큰 사람이 되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당부했습니다. 신앙의 부모들은 그것이 기도의 제목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더욱 큰 것만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온통 큰 것으로 가고 큰 것을 가지는 것이 인생의 목표요 성공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큰 것은 으뜸이고 자랑이고 영광이고 대단한 자존심이 된 것입니다. 좀 더 큰집, 좀 더 평수가 큰 아파트, 좋고 큰 차, 큰 사업, 큰 회사, 대기업, 큰 학교, 대도시 심지어 큰 묘지까지가 우리들의 기대요 꿈인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외형적인 수준이 되어서는 안 될 교회마저 보기에 큰 것을 구합니다. 작은 교회는 큰 교회가 되려하고 큰 교회는 더 큰 교회가 되려합니다. 교인들은 하나님을 통해 세상에서 알아주는 큰 자가 되려 하고 지도자들은 교계에서 큰 그릇이 되려 합니다. 그런 기대의 비젼은 대단합니다. 전국적이고 세계적입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에서의 강조가 큰 믿음을 가지고 큰 그릇이 되고 크게 성공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큰 자만이 인정받고 대우받고 존경받고 자랑이 되었고 작은 것은 부끄럽고 우습게 여겨지는 교계가 되었습니다.
어떤 크게 성공(?)한 큰 교회 목회자는 설교시간에 노골적으로 하나님의 큰 능력의 역사가 나를 큰 능력의 그릇으로 만드셨고 큰 교회를 이루어 주셨다면서 하나님의 큰 능력의 역사를 입고 큰 자가 되고 크게 성공하려면 큰 교회를 다녀야 한다며 황당한 논리를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교인들은 큰 교회를 선호하고 그런 교회 다님을 자랑하고 작은 교회 교인들은 어느 교회 다니는지도 잘 밝히지도 않는 실태입니다. 작은 교회 목회자는 가장 가까운 아내로부터 그릇이 작다는 말을 들어야 하고 주변 형제친척 친구들로 부터는 큰 능력이 없는 작은 그릇으로 눈총 받으며 주눅들어가고 스스로도 움츠려 들고 있음을 봅니다.
큰 것만 선호 한다는 것은 욕망이고 어떤 면에서 볼 때 허망한 것입니다. 그러면 작은 것은 소홀히 하고 우습게 여기는 심각한 문제가 뒤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더욱이 교회된 자들이 그렇다면 이건 탄식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실현된 하나님 나라로서 세상처럼 크고 작은 상태나 형편의 차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의 말씀을 잘 압니다.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받은 자 중에 당연히 우리의 기준은 다섯 달란트가 크고 많고 해서 다섯 달란트를 가지는 큰 일군 됨을 선호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다섯 달란트 받은 자나 두 달란트 받은 자나 똑같이 “네가 작은 일에 충성 하였다”고 역설 하셨습니다.(마25:19-23) 그러니까 우리 수준의 큰 것은 하나님 앞에 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은 지극히 작을 뿐입니다. 세상 나라의 그 어떤 크고 높은 것도 하나님 나라에 비하면 극히 작고 협소할 뿐입니다. 주님은 크고 작은 것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맡겨 주심에 얼마나 충성 했느냐에 따라 칭찬 하시고 반면에 책망 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크다는 단어가 많이 나오는데 일반적인 것을 빼고 진정한 의미에서 크다는 말을 보면 하나님이 온 우주만물 위에 제일로 크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학개서2:9절에 보면 “이전의 나중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고 말씀 했는데 여기서 앞의 이전은 회복될 새 성전을 말하고 뒤의 이전영광은 옛 성전을 말합니다. 유다나라가 포로에서 해방되어 고국으로 돌아와 무너진 성전을 재건했는데 그때 나이 많은 자들 중에 무너지기전 솔로몬의 화려하고 웅장했던 성전을 보았던 자들이 재건한 스룹바벨 성전의 초라함을 보고 슬퍼하며 보잘것없게 여겼는데(학2:3) 학개 선지자는 증거 하기를 너희가 보기에 작고 보잘것없이 여겨지지만 새 성전의 영광이 이전 큰 솔로몬 성전의 영광보다 더 크리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새 성전은 더 나아가 건물 성전은 무너지고 그리스도의 몸된 성전으로서의 교회가 하나님 나라로 실현 될 것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에서와 야곱에 대해 말씀하는 것을 보면 큰 자 에서가 작은 자 야곱을 섬길 것이며 작은 족속이 큰 족속보다 더 강할 것을 언약했습니다.(창25:26)
우리 인간 기준으로 볼 때 분명 에서가 큰 자이나 하나님은 야곱을 진정한 큰 자로 예고하신 것은 그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 기업된 자로 하나님께서 선택 하셨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오늘날 교회가 영원히 크신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 됨을 안다면 교회된 자들은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차원에서 외적으로 크고자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의 본질을 모르는 자들이 교회 사업을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깨닫는 단계가 못 되었을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서로 크고자 다투기도 했는데 그것을 보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크고자 하느냐 으뜸이 되고자 하느냐 그러면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0:26-27)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라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 권세를 가진 하나님 자녀가 맞는다면 더 나가 하나님 자녀들을 앞서 인도하며 가르치는 지도자가 맞는다면 일반 사람들이 인정하는 외형적 큰 것을 선호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어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존귀한 성도된 자들에게 있어 세상 보이는 차원의 일시적인 것에 불과한 형편 적이고 외적으로 크고 작은 것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비유해 본다면 이것은 마치 큰 나라에 왕의 자녀로서 그 큰 영광과 권세를 가졌는데도 그것을 모르고 지극히 작은 촌락의 촌장이나 거기서 으시댈 수 있는 자가 되려하는 어리석은 자와 같은 것입니다.
모세는 당시 애굽의 보화와 거기서 낙을 누리는 것보다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능욕을 더 큰 재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히11:25-26) 우리는 왜 하나님 나라의 존귀한 백성이면서 하나님 나라된 상태와 그 모습과 삶에서 보이지 않는 참으로 큰 것을 선호하지 못하고 세상 적이고 인간적으로 크고 큰 자가 되는 것만 구하려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는 욕망이 있다는 증거요 보는데 문제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어린아이 같이 자기를 겸손히 낮추는 자가 큰 자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마18:1-4) 또한 사도바울은 경건의 비밀이 크다 했고(딤전3:16) 그리스도와 그 교회에 대한 비밀이 크다 했고(엡5:32)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크다 했고(고후12:7) 예수님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지 않고 행하며 가르치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라고 말씀했습니다.(마5:19)
종합해 볼 때 복음의 비밀을 먼저 밝히 알고 그것을 변질 시키지 않고 진리로 파수하며 바르게 가르치는 자가 참으로 큰 자요 그 복음에 합당한 순전한 신앙으로 경건하게 살아가는 자가 큰 자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본질을 알고 교회 모습이 그리스도로 서갈 때 진정으로 크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참으로 크시고 왕되신 분이니까 오직 그를 드러내며 낮아지는 자가 큰 자며 보이는 규모적인 것과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통치가 살아 역사되고 점진적으로 그리스도로 서 가는 교회가 참으로 큰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땅에 많은 교회들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기준해 주는 진실로 큰 자와 참으로 큰 교회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많은 교인들이 하나님을 통해 세상에서 큰 것을 소망하고 교회는 외형적으로 커야만 큰 교회로 여기고 있는 것을 볼 때 그렇습니다. 또한 그런 교회에 지도자만이 큰 그릇이요 큰 자라고 높이고 인정되는 교계를 볼 때 그렇습니다. 사무엘에게 외모로 보지말고 하나님처럼 중심을 보라는 말씀대로 눈을 뜬 자들이 많지 않은 것입니다.
러시아 정교회가 몰락해가던 때에 당시 교계에 큰 자들은 바늘 위에 천사가 몇 명이나 올라갈까 따지고 논쟁하던 시기에 쓴 토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보면 신실한 신앙의 조시마 장로가 나오는데 그는 이런 말을 합니다. 세계를 품고 온 인류를 사랑하겠다는 자는 한 사람을 참으로 사랑할 수 없고 내게 주어진 혹은 가까운 한 사람을 참 사랑하는 자가 진정으로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정말 이런 자가 큰 자로 느껴지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 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16:10) 예수님께서 교회된 우리에게 요구 하시는 거룩한 모습과 삶과 일들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큰 것과 거리가 먼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협착하고 좁은 길만 있고 내 큰 욕망의 소욕은 작아지고 죽어지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커지고 존귀케 되는 힘들지만 선한 싸움만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지극히 작은 것에서 어떻게 하면 빨리 큰 것으로 될까 고민하며 수단 방법을 찾을 것이 아니라 그 작은 것에서 본질을 찾고 진리를 찾는데 전심해야 합니다. 그래야 작은 것에서 보이지 않는 진실의 큰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보화를 밝히 보며 주 앞에 부끄러움 없이 서는 자들이 많아지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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