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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3:22-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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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동호 목사 |
참고 : | 2009-02-08 |
나는 아니다.
요 3: 22 - 30.
사람들은 가난함을 못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우리를 못살게 하는 것은 죄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가난이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정말 우리가 무서워하고 두려워 하여야 할 것은 가난 보다 죄입니다. 그러므로 가난과 싸우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죄와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참 치열하게 살고 있습니다. 우리만 치열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어린 자녀들도 치열하게 살게 하고 있습니다. 대학을 가기 위하여 우리 아이들이 격어야만 하는 삶은 정말 잔인하기까지 합니다.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하여 공부하고 훈련하는 것을 생각하면 아이들이 얼마나 불쌍한지 모르겠습니다. 극소수의 사람들은 소명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그렇게 공부하고 훈련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토록 죽도록 공부하고 훈련하는 목적은 간단하게 말씀드려 가난하게 살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와 같은 인간의 노력으로 사람들은 제법 많이 가난으로부터 탈출하여 어떤 면에서 보면 지나치리만큼 부유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난함은 불행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유함이 곧 행복은 아닙니다. 우리는 불행을 뒤집으면 행복이 되는 줄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행복은 불행하지 않는 것 이상입니다. 사람들은 죽도록 가난과 싸워 가난이 주는 불행함으로부터는 벗어났지만 정작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는 참된 행복에는 도달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부귀와 영화와 쾌락을 누리는 일에 전무후무한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솔로몬만큼 가난으로부터 성공적으로 탈출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가난함이 주는 고통과 불행은 당연히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진정한 의미의 행복도 없었습니다. 그가 그와 같은 엄청난 세상적인 호강을 누린 후 내린 실존적인 고백은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였습니다.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솔로몬과는 정 반대의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고백과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고백입니다. 그 고백은 솔로몬의 헛되고 헛되다는 고백과 정말 180도 다른 고백입니다. 다윗에게 그와 같은 삶의 만족을 준 것은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부귀와 영화와 쾌락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다윗의 시편 23편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부족함이 없고 잔이 넘치는 복된 삶의 시작은 여호와가 나의 목자라는 고백적인 믿음 때문에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정말 만족하고 행복한 삶을 살려면 가난과 싸우지 말고 죄와 싸워야만 합니다. 죄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따라 살지 않으려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식과 법을 거부하고 제 욕심을 따라 멋대로 살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우리 인간은 우리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한 이후 하나님의 뜻과 식과 반대되는 마음을 갖고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을 얻으려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려면 거듭나야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남이란 하나님과 반대로 생각하고 사는 삶을 거꾸로 되 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타락과 세상과 반대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살면 죽고 망할 것 같아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타락한 우리 눈에는 그것이 좁은 길로 보이지만 그것이 생명의 길입니다. 우리 눈에는 세상식이 넓고 편해 보이지만 그것이 바로 사망의 길입니다. 생각을 바꾸어야만 합니다. 삶의 식을 바꾸어야만 합니다. 세상식대로 살면 죽고 망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식대로 살아야만 살고 흥합니다.
1973년 신학교에 다닐 때 학교 신문에 글을 하나 썼었습니다. 제목이 <여러분과 나들>이었습니다. ‘나들’이라는 말은 없는 말입니다. 제가 ‘나’의 복수형으로 억지로 만든 말입니다. ‘나’의 복수형은 ‘여러분’입니다. ‘여러분’과 ‘나들’은 나의 복수형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여러분이라는 말이 주는 뉴앙스는 객관적이고 ‘나들’이라는 말이 주는 뉴앙스는 주관적입니다. 그래서 억지로 ‘나들’이라는 말을 만들어 ‘여러분’이라는 말과 구별을 하였던 것입니다.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나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속에 숨지 말고 다 ‘나’가 되어 그 불을 꺼야만 합니다.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말고 내가 나서야 합니다. 그런 나는 아무리 많아도 아무 상관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나는 많으면 많을 수록 더 좋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모두 ‘나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여러분’이 되어야만 합니다. 모두가 다 사공이 되려고 하면 배는 정말 산으로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사공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그것은 꼭 내가 아니더라고 된다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여러분 속으로 물러서는 것입니다. 성경은 겸손을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는 마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우리 인간은 불이나면 뒤로 물러섭니다.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기 집에 불이나면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불을 끄지만 그것이 자기 집이 아니고 자기가 속해 있는 공동체와 조직에 일어난 불이라면 물러서서 구경하려고 하는 마음이 많습니다. 그러다가도 공동체와 조직이 편안해지고 크게 되면 사공이 되려고 합니다. 쉽게 말해 책임을 지는 일을 꺼려하고 주장을 하고 권력을 얻으려는 일에는 서로 다 나서려고 하는 마음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반대로 하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생각에 <여러분과 ‘나들’.>이라는 글을 썼었던 것입니다. 오늘 높은 뜻 광성교회에 설교하려고 오면서 어떤 말씀을 전해야 할까를 생각하는데 문득 30년도 넘은 그 어렸을 때의 글이 생각났습니다. 제가 생각했다기 보다는 하나님이 생각나게 해 주셨다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저는 교회에 불이 났을 때는 다 ‘나들’이 되고, 교회가 편안할 때는 다 ‘여러분’이 되는 것이 지금 우리 높은 뜻 광성교회에 품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의 세례요한이 바로 그런 삶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세례요한의 인기는 상당한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의 말을 듣기 위하여 광야로 나아갔습니다. 세례요한은 실제적으로 당시 사람들에게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사람을 미치게 하고 열광적이게 하는 것은 돈이 사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따르는 것입니다. 사람이 따르는 것은 돈이 따르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돈이 사람을 따를 때도 사람은 위험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을 따를 때 사람은 가장 위험합니다. 많은 대형교회의 목사들이 그런 위험에 가장 많이 노출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바로 거기에 넘어집니다.
세례요한에게도 그와 같은 위험이 있었습니다. 아니 많았습니다. 그 위험의 클라이막스가 오늘 본문 속에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세례요한은 찾아와 당신이 그리스도냐고 물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을 그리스도 즉 메시아로 알고 인정하려고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때 세례요한은 조금도 망설임이 없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는 따로 계신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자기는 그 분의 신들메도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더 기가 막힌 고백을 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세례요한은 그리스도가 아니었지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사공으로 오해하고 따르려는 세상에서 자기가 사공이라고 나서지 않고 조용히 ‘여러분’ 속으로 숨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의 삶은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이 썩어가서 바른 소리를 해야 할 때, 그 소리를 하는 것이 마치 불을 끄는 것과 같이 위험할 때 그는 ‘여러분’ 속에 숨지 않았습니다.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여러분’이 되지 않고 ‘나들’이 되어 외쳤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광야의 외치는 소리가 되었고 결국 그러다가 그는 목숨을 잃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게 세례요한이었습니다.
저는 세례요한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인생을 농구 경기에 비유한다면 저는 전반적 게임을 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후반전 게임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후반전을 뛰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 시간이 제법 남은 후반전 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교회를 분립하면서 제 인생은 갑자기 시간이 제법 남은 후반전이 아니라 급히 마무리를 해야만 하는 종반적이 되었습니다.
지난 주 조선일보 기자와 인터뷰가 있었습니다. 기자가 인터뷰 중에 교회를 이렇게 정리하시고 이제부터 하시고 싶어 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그것을 질문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를 분립하여 감독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냅니다. 분립된 모든 교회에 제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들을 하고 실제로 그렇게 말하고 저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섭섭하지만, 때로는 속상하기도 하지만, 예방주사처럼 생각하고 그냥 듣습니다.
인생과 목회를 근사하게 마무리해야만 하는 시점에 제가 정말 깊이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저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준 어떤 분들의 삶의 마무리들을 깊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흉내 내어 보려고 노력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97년도 브라질에 갔을 때 브라질에서 제일 큰 교회에서 집회를 했었는데 그 교회에서 참으로 충격적인 일 하나를 목격했습니다. 담임목사는 이제 갓 사십이 된 젊은 목사였고 그 담이 목사를 보좌하고 있는 부목사는 70이 다 되신 늙으신 목사이셨습니다. 더 놀라운 일은 전에는 담임목사가 지금의 부목사님의 부목사였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담임목사님이셨던 지금의 부목사님이 당시 자기를 도와주는 부목사가 가능성이 있어 보이자 그 부목사를 유학을 보내어 공부를 시키고 그가 공부를 마치자 교회로 돌아오게 하여 그를 담임목사로 앉히고 자기는 그 밑의 부목사 된 것이었습니다.
사고뭉치들만 모아 놓은 대안학교가 있었습니다. 선생님 앞에서도 담배를 피워대고 담배를 끄라고 야단치는 선생 앞에서 그 담배를 씹어 삼키는 살벌한 아이들, 심지어는 선생님을 야구 방망이로 패기 까지 하는 아이들이 그 학교에서 변하였습니다. 정신을 차렸습니다. 대학이 전부는 아니지만 상식적으로 전혀 대학과는 상관이 없어 보이던 아이들이 90%가 넘게 정규 대학을 갈 만큼 아이들이 변화하였습니다.
그 아이들이 그렇게 변하게 한 일등 공신 중에 한분은 그 학교의 수위 할아버지 였습니다. 처음에는 몰랐었는데 나중에 아이들이 그 분이 은퇴하신 전직 교장이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저들에게 큰 충격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그 수위 할아버지를 존경하게 되었고 존경하는 어른이 생기게 되자 아이들은 변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브라질의 그 부목사가 된 그 할아버지 목사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저는 수위가 되셨던 그 전직 교장선생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교회 분립을 통하여 하나의 교회로 만족하지 못하고 보다 많은 교회를 장악하고 영향력을 끼치는 감독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교회 분립을 통하여, 담임 목사 자리를 내어 놓고 내려옴을 통하여 부족하지만 세례요한을 흉내내고 싶습니다. 브라질의 목사님을 흉내 내고 싶습니다. ‘나는 높은 뜻 교회의 중심이 아닙니다.’라고 말하고 싶고 진심으로 그 중심에서 내려오고 싶습니다. 진심으로 ‘그들은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라고 말하고 싶고 정말 그렇게 되고 싶습니다. 높은 뜻 교회에서 없으면 안 되는 ‘나’에서 내려와 ‘여러분’ 속으로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으나 정말 그렇게 되고는 싶습니다.
그러나 정말 세례요한처럼 죽을 자리는 찾고 싶습니다. 남들이 서고 싶어 하는 자리에서는 물러나고 남들이 서고 싶지 않은 자리에는 서고 싶습니다. 죽을 자리에서 죽음으로 인생과 목회를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세상과 다른 하나님의 식입니다. 높은 뜻입니다. 높은 뜻 광성교회는 아주 성공적으로 분립이 되었습니다. 성공적인 분립 속에 패망의 인자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성공을 주도하려는 사공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높은 뜻 광성교회는 산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배가 산으로 가면 그 조직은 망합니다.
아무리 높은 뜻 광성교회가 성공적으로 분립이 되었다고 하여도 공짜로 높은 뜻 광성교회가 보다 좋은 교회로 발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떤 교회든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없으면, 교회를 위하여 땀흘리고 피흘리는 사람이 없으면 그 교회는 절대로 좋은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높은 뜻 광성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땀흘리고 피흘리는 일에는 여러분이 되지 말고 ‘나’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 나들이 많아져서 ‘나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몇 번 설교 중에 말씀드렸던 이야기입니다. 제가 자랐던 청량리중앙교회에 교회 재정의 1/3을 혼자서 헌금하는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당시 출석교인이 500명 정도였으니 엄청난 헌금을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 장로님에게 어느 날 제가 당회에 가셔서 어떤 발언을 좀 해 주십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저를 아주 아껴주시는 분이었기 때문에 저는 당연히 그 분이 그렇게 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고, 연보를 많이 하시는 분이 발언을 하시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그대로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로님이 사양을 하셨습니다. 자기는 당회에서 발언을 잘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가 연보를 조금 많이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발언을 조심해야만 한다고 하셨습니다. 연보를 많이 하는 사람이 말까지 많이 하면 못 쓴다고 하셨습니다. 그게 바로 오늘 세례요한과 같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연보할 때는 ‘나들’이 되고, 말을 할 때는 ‘여러분’이 되는 것입니다.
지난 7년 동안 높은 뜻 숭의교회에도 그와 같은 분들이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많지는 않았습니다. 연보는 안하고 말만 많이 하는 사람들, 연보도 안하고 말도 안하는 사람들이 주로 많았습니다.
높은 뜻 광성교회에는 세례요한과 같은 사람들이 많아지시기를 바랍니다. 주장하는 일에는 자기를 부인하고 섬기는 일에는 생명을 거는 사람들이 많아지시기를 바랍니다. 그 사람들 중에 여러분이 계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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