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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32: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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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창인 목사 |
참고 : | 광성교회 - 김창인 목사 제3설교집 <하늘농사꾼/모퉁이돌> 에서 |
다윗의 교훈(시편 32: 1-11)
시편 32편 1절부터 11절에 있는 말씀을 가지고 "다윗의 교훈"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립니다. 32편이라는 그 32자 밑에 보면 다윗의 마스길이라 그랬습니다. 마스길 옆에는 1자를 쓰고 1자 맨 밑으로 내려와 보면 교훈이라고 씌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스길이란 말은 교훈이라는 말로 번역을 해도 되고, 또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32편의 제목은 "다윗의 교훈"으로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언젠가 한 번 말씀 드렸습니다. 어느 수필을 읽다가 이런 말을 발견했다고. 내용이 뭐냐 하면 예수 믿으나, 안 믿으나 죄 되는 것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로는 모르면서 배우지 않는 것 그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아는 것처럼 거들먹거리며 배우지 않는 것, 성경은 읽지도 않고 배우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엔 알면서 가르치지 않는 죄입니다. '저렇게 하면 안 되는데,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저러면 안 되는데, 교회 봉사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닌데' 분명히 저렇게 하면 안 되는 줄 알면서 가르쳐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듣기 싫은 소리하기 싫다해서 ... 그것은 듣기 싫은 소리가 아닙니다. 바로 가르쳐 바른 일꾼 될 때 그것이 귀한 것 아니겠습니까? 또 성경을 가르쳐 줄 수 있는데 나와서 교사하라 하면 안 한다는 것 그것도 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할 수 있으면서도 안 하는 죄입니다. 할 수 있으면서도, 주일날 교회 나올 수 있으면서도 안 나오는 것 죄라는 것입니다. 구역장 권찰 할 수 있는데도 안 하는 것, 성가대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 죄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때문에 모르면서 배우지 않는 것 죄이고, 알면서 가르치지 않는 것 죄이며 할 수 있으면서도 안 하는 것 죄입니다. 다윗을 보면 다윗은 배울 것 다 배운 사람이고 가르칠 사람에게 열심히 가르친 사람이고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우리에게 베푸는 교훈을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I. 복있는 사람의 교훈(1-5절)
1. 사죄의 복(1절)
분명히 허물의 사함을 얻고,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사죄의 복입니다. 이 시편은 아마도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지은 시편 중의 하나인 것 같습니다. 다윗은 밧세바라고 하는 여자를 범합니다. 전쟁이 한창 심해서 죽느냐 사느냐 밤낮 싸우고 있는데 전쟁에 나가지도 않은 다윗은 더운지라 낮잠 실컷 자고 누각에 올라앉아 저녁때가 되어서 사방을 보는 중에 바로 자기 왕궁 담 너머에 아주 젊디젊은 여자가 해도 넘어가기 전에, 그것도 집안에서도 아니고 뜨락에 나와 다 보란듯이 목욕을 합니다. 왕이 데려다가 범했습니다. 왕의 잘못인지 혹은 그 여자가 왕을 유혹하려고, 해도 넘어가기 전에 목욕을 했는지 그건 내가 알 수 없습니다. 임신을 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그 여자가 신랑에게 매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알아보니 그 집이 우리야라고 하는 장군의 집입니다. 지금 전쟁에 나가 있습니다. 왕명으로 불러다가 네 집에 가서 네 아내와 실컷 놀고 가라고 보냈습니다. 보내니까 아내의 방엔 안 들어가고 왕궁 처마 밑에서 밤을 꼬박 새운 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 동료들을 전쟁터에 있는데 내가 어떻게 편히 쉴 수가 잇느냐 그런 의미로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때 왕은 안되겠다 그 여자를 살리기 위해선 이 사람을 없애야겠다고 생각하여 야전 사령관에게 명령을 해서 특공대로 보내 죽여 버립니다. 하나님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했을 때까지만 해도 잠자코 계셨습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런 상황에선 좀 실수도 있겠지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남자를 죽여버리고 여자를 빼앗아 온 다음엔 성경에 기록하기를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단 선지자를 보내서 책망을 합니다. 나단 선지자가 하나님의 뜻을 다윗에게 전합니다. 그 때 다윗이 엎드려 얼마나 통회를 했는지요.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다시 보내, '회개하니 하나님이 용서했다'라고 전하여라 하셨습니다. 나단이 가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죄를 용서했습니다'라고 합니다. 그 말을 전해 듣자 너무너무 기뻐서 이제는 살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고서는 하는 얘기가 복 있는 사람, 복 있는 사람이야 그저 죄와 허물을 용서받은 이 사죄의 복이 최고의 복이라고 말입니다. 이 세상사는 동안 죄 많이 지었을 것입니다. 그 죄를 이 시간에 다 내놓고 가십시오. 도로 가져가지 마십시오.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버리면 청소부 아저씨가 쳐가듯이 우리 예수님 다가지고 가십니다. 마음속에 사죄의 평안함을 얻고 돌아가길 원합니다.
2. 무죄의 복
마음속에 간사한 죄가 없다는 말입니다. 행동은 말 할 것도 없고 마음에 간사한 죄도 없다는 말입니다. 정죄를 당치 않는다는 말은 두 가지 경우에 해당됩니다. 내가 도둑질한 죄를 지었는데도 용서해 주고 정죄하지 않는 경우가 그것이고, 도둑질한 일이 평생에 한 번도 없는 것이 그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죄가 없어 정죄치 않을 수가 있고, 죄가 있어도 용서받고 정죄치 않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보니 마음에 간사가 없으니 정죄 당할 것이 없다 했습니다. 그러니 사람이 죄 짓고 용서함 받는 것도 복이지만, 아예 죄 안 짓는 것이 큰복이라는 말입니다. 욥이라고 하는 사람, 10남매의 자녀가 하루아침에 죽고, 그 많은 재산이 불타거나, 도둑 맞고 자기는 상피 병에 걸리고 하지 않습니까? 그럴 때 아내가 와서 얘기합니다. '당신 이런 지경에도 하나님 믿느냐. 그 따위 하나님 저주하고 당신은 나가서 자살해 죽어 버리라' 그리고는 떠납니다. 이 상황 하에서 아내는 죄를 짓습니다. '그 따위 하나님 지금도 믿느냐 저주하고 죽으라'하나님 저주하는 죄입니다. 자기 남편이 고생할 대 위로는 못 해줄망정 버리고 가는 죄입니다. 그러나 욥은 '당신 어떻게 그렇게 어리석소'하면서 더 찬송 부르고 더 열심히 기도하니, 나중에는 모든 곤고를 하나님이 다 거두어 가시고 갑절의 축복을 주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죄 짓고 회개하는 것도 복이지만, 죄와 더불어 싸워서 승리하고, 죄 짓지 않는 생활에 갑절의 축복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평안의 복(3-5절)
마음의 평안이 큰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야를 죽이고 그 아내를 빼앗아 왔는데, 누가 죽이겠다고 하지 않는데도 죽을 지경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 그러니까, 내가 먹은 것 토해 내듯 말로 이 죄를 토해내기 전에는 죽을 지경이더라.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막 쇠해 진다는 것입니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는데 너 죽어 죽어 하고 누르시는 것 같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다는 것이며, 낮에는 밥도 목 먹겠고, 밤에는 잠도 못 자겠다는 것입니다. 사람 미칠 지경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 내가 자복하리이다 하고 하나님께 자복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안 믿다가 예수 믿을 때에는 통회-회개에는 구원을 위한 회개-가 있고 그 다음에 짓는 죄는 하나님께 자복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자복하리라 하고 자복했더니 깨끗이 사해 주셔서 "야, 이젠 살았구나!" 하는 마음의 평안이 오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마음만 평안하면 채소를 먹고도 만족합니다, 기쁩니다. 내가 마음이 불안하고 고통스러우면 소고기를 갖다 놓고도 먹지를 못합니다. 먹어도 살이 되질 않습니다. 그러기에 내 마음이 평안하면 집안에 들어가도 그렇게 좋기만 하고, 직장에 나가도 좋기만 하고 교회에 나와도 좋기만 합니다. 왜? 마음이 평안하고 즐겁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고통스럽고 괴로우면 무엇을 해도 괴롭고 어딜 가도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집에 들어가도 귀찮고, 직장에 나가도 귀찮고 도무지 평안한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천국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것이 아니라 네 마음 속에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 마음속에 천국이 이루어지는 평안이 있어야 됩니다. 마음의 평안이 큰 복입니다.
II. 경건한 사람의 교훈 (6-7절)
1. 기도하는 경건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어떻게 되냐 하면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하십니다. 주를 만날 기회라 하는 말은'야 이건 기도할 문제다 이건 누굴 찾아가도 안 되겠다, 기도할 문제다'라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때는 꼭 기도해야 됩니다. 그렇게되면 모든 것을 싹싹 쓸어 가는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온다 싶었는데 물러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 와서 하나님에게 매달려 결사적으로 기도한 적이 두 번입니다. 새벽이나, 가끔 철야하는 것 그런 것이 아닙니다. 결사적으로 붙들고 늘어진 것이 두 번입니다. 한번은 내가 폐에 구멍 두 개가 뚫어져 중증이 되고 또 거기다가 위장병에 걸려 밥 한 숟갈에 백 번을 씹어 먹어야 소화가 조금 되는데 그러고도 한 공기를 못 먹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때 얼마나 씹었는지, 아랫니가 절반이나 닳았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한테 3년을 두고 기도했습니다. 처음에 백일 철야부터 식자했는데 목사가 백일 철야하면 무엇인가 있어야 될 텐데, 얼마나 심령이 완악한지 백일 철야했는데도 소식이 없습니다. 목사라고 해서 다 잘 믿는 것은 아닙니다. 장로라고 해서 다 잘 믿는 것 아닙니다. 어림도 없는 소리입니다. 목사라 해서 천국 가고 장로라 해서 천국 간다는 성경 구절 하나도 없습니다. 3년 동안을 그렇게 붙잡고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3년 만에 내 병을 전부 쓸어 가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 한번은 우리 교회 장로 한 분 때문이었습니다. 얼마나 지독히 못되게 굴던지 녹음기 들고 나한테 달려 왔습니다. 싸워 보자고 말입니다. 말을 그것으로 끝내니까 그렇지 그동안에 얼마나 괴롭혔겠습니까. 그럴 때 목사가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할 것밖에 더 있습니까?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깨끗이 처리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기도할 문제다' 할 때가 바로 주를 만날 기회를 타는 할 때요, 기도하게 되면 홍수가 오는 것 같아도 다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경건입니다. 경건한 사람은 기도하고, 기도하면 경건해지고, 경건하면 기도하고, 또 기도하면 도 경건해진다는 말입니다.
2. 더 잘 믿는 경건(7상반절)
은식처란 말은 피난처란 말인데, 피난처를 평안할 때 찾아갑니까? 평안할 때 피난처에 가서 사는 사람 있으면 어딘가 잘못된 사람입니다. 은신처나, 피난처라 하는 것은 내 생명이 위급했을 때, 내가 정말 극한 상황에 이르렀을 때, 그럴 때 제일 안전하다고 찾아가는 곳이 피난처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런 상황에 누구를 찾아갔는고 하니 하나님을 찾아갔다는 말입니다. 주는 나의 피난처이다, 은신처이다라고 한 말은 바꾸어 말하면 그렇게 죽어죽어 하는 정말 위급한 상황, 이제는 어쩔 수 없다는 극한 상황에 이르렀을 때 주님을 더 열심히 찾고, 더 가까이 가더라 즉 더 잘 믿더라 그 말입니다. 어려운 일 당할수록 껄렁껄렁하게 믿는 사람은 예수 믿고 되는 일 없다고 안 나옵니다. 떠나가 버립니다. 그러나 어려운 일 당할수록 더 잘 믿어야 합니다. 다윗은 사울의 난, 그 어려운 일 당할 때 하나님 품에 피하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도우시사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온갖 좋은 조건 다 갖추었던 사울, 그러나 하나님과 멀리 살던 사울, 그가 승리할 것 같아도 어려운 일 당할 때 더 잘 믿는 다윗이 승리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찬송하는 경건(7하반절)
구원의 노래는 바꾸어 말하면 찬송입니다. 찬송으로 나를 둘러싸 주신다 그 말입니다. 사실 사철 그리고 밤낮 눈만 떳다 하면 찬송이 입에서 떠나지 않는다 바로 그 말을 이렇게 쓴 것입니다.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워 주시리라.' 그러니까 경건한 사람은 찬송 부르게 되고 찬송 부르는 사람은 경건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찬송이 얼마나 좋으냐 하는 예는 바울에게서 찾을 수 있겠습니다. 바울이 저 헬라 나라 빌립보라고 하는 곳에 갔습니다. 거기는 아는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열심히 전도했더니 전도가 죄가 되어서 붙잡아다 죽으라고 얼마나 매를 때렸는지 터지고 찢어지고 피투성이가 되고... 그 다음엔 감옥에 갖다 넣고 쇠고랑을 채워 놓은 것입니다. 바울은 어느 한 사람 도움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아는 사람 하나도 없는데, 누가 꺼내 주리라고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죽기 전에 찬송이나 실컷 불러 보자 하고 찬송을 불렀더니 하늘에서 응답이 오지 않겠습니까? 옥문이 다 열리고, 차고 있던 착고가 부서지고 벗어지고 맙니다. 꾸벅꾸벅 졸고 있던 간수장이 죄수 다 도망간 줄 알고 자결 해 죽으려고 할 때 '그런 짓 하지 말라 우리 다 여기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너무 너무 혼이 난 간수장이 엎드리어 '선생님 내가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하니 '뭐 다른 것 없다, 예수 믿으라'고 합니다. '그럼 우리 집에 갑시다' 그리고는 매 맞아 상처 난 자리를 자기가 다 씻어주고 싸매 주고 그 다음엔 밤참을 잘 차려 대접하고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예수 믿으라' 그 다음엔 다 세례 받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 집에서부터 빌립보 교회가 시작된 것입니다. '감옥으로 다시 가 계시면 내가 정식으로 내 보내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감옥에 가 있는 동안 노자 두둑이 주어 보내지 않았습니까? 그런 것 보면 한 번 두들겨 맞을 만도 한 것 같습니다. 하여튼 죽기 전에 찬송을 실컷 불렀더니 그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경건한 사람은 극한 상황에서도 찬송 부르는 것입니다. 찬송의 경건입니다.
III. 신뢰하는 사람의 교훈
1. 체험적인 신회
그런 말 들어 보지 못하셨지요? 예배당 터, 성전 터 바치고 자자손손 축복 받았다는 얘기 말입니다. 내가 여기서 발견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짓 또 한번 했습니다. 그것은 인구 조사였지요. 인구 조사는 남자 20세에서 60세까지만 하는 것입니다. 여자들은 하는 것 아닙니다. 그러니까 군대가 얼마나 되는가를 계수하는 것입니다. 숫자가 많이 늘어나면 하나님보다 군대를 더 많이 믿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런 것 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내가 다 해 줄테니까 하지 말라는 것을 기어이 세어 놓았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이 너무너무 꼴보기 싫어서 세 가지를 '갓이'라는 선지자를 통해서 선택하라 했습니다. '7년 동안 원수 앞에 쫓겨다니겠느냐, 3년 동안 흉년 들어서 고생하겠느냐, 아니면 3일 동안 온역이 퍼져서 죽는 것을 보겠느냐 어떻게 하겠느냐.' 그러니까 다윗이 내가 죽을 짓 했으니 할 수 없죠 그러나 사람의 손에 빠져서 사람에게 쫓겨다니긴 싫습니다. 온역으로 나를 쳐서 하나님이 죽이든 살리든 하나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온역이 쫙 퍼지니 7만 명이 하루에 죽어 갑니다. 그때 온역으로 재앙을 내리는 천사를 붙잡고 하는 얘기가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잘못했으면 내가 잘못했지 백성들이 뭐 잘못해서 죽입니까. 나 죽이고 내 가족 죽이지 왜 백성을 죽입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렇지' 그리하고는 하루만에 그치시고 '그러면 네가 제사 드리되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 가서 번제를 드리라는 명령을 받고 아라우나라고 하는 사람을 찾아갔습니다. 임금님이 오니 왜 오냐고 물었습니다. 번제를 들리려 온다니까 여기서 드리십시오. 우리 소도 있고 나무도 있습니다. 모두 쓰십시오. 할 때 안 받겠다는 아라우나에게 땅값으로 은 50세겔을 주고 분명히 샀습니다. 그 다음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사를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모든 진노를 거두시고 여전히 복을 주십니다. 그런데 아셔야 될 것은 그 아들 솔로몬이 예배당 지은 터가 바로 그 땅입니다. 옛날 아브라함 자기의 아들 이삭을 제가 드렸던 자리가 바로 그 자리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에 있는 바로 그 성전 터가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드렸던 자리이고, 다윗이 은 50세겔을 주고 사서 제사 드렸던 그 자리, 분명히 이것은 다윗의 땅입니다. 이것을 하나님 앞에 바치고 자자손손 4백년 왕통에 지금까지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의 별을 기다립니다. 이렇게 주의 성전 터를 바쳐서 축복을 받습니다. 다윗이 '내가 너에게 가르쳐 주겠다. 교훈을 말하겠다. 절대 무지한 말, 길들지 않는 말이나 노새같이 그렇게 놀지 말라'고 합니다. 그렇게 놀아 보았자 하나님한테 매 맞는 것밖에 없으니, 나를 보라는 것입니다. 나 때문에 7만 명이 죽지 않았느냐... 그러므로 모든 것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잘 받들어 살아가면 이렇게 축복 받는다는 것입니다. 체험적으로 우리들에게 주는 신뢰, 체험적인 신뢰를 교훈 합니다. 여러분들은 다윗처럼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 순종하고,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가운데 축복 받으시길 바랍니다.
2. 하나님께 맡기는 신뢰(10절)
여기 신뢰한다고 하는 말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저 갖다 맡긴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억울한 일 당했는데 재판을 하려고 변호사를 찾아가서 의뢰를 합니다. "내게 이런 일 있소"하고 의뢰를 하면 변호사가 그 문제를 모두 맡아버립니다. 그리고 나 대신에 재판해서 이겨 줍니다. 이것이 신뢰하는 것입니다. 여기 신뢰하는 것은 아예 의심 없이 믿고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믿고 맡겨 두면 변호사가 내 문제를 맡아 재판해서 이겨 주듯이 하나님께서 전부 맡아 해결해 준다는 뜻입니다. 신뢰하는 자,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른다는 것은 은혜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여기 인자라고 하는 말은 히브리 원문으로는 '헷세드'라고 합니다. '헷세드'라고 하는 말은 구약 성경에 은혜라고 제일 많은 번역을 하고, 그 다음에 자비라고도 번역하고, 그 다음엔 인자라고도 번역을 합니다. 그러니까 신뢰하는 자에게는 은혜를 입혀 주신 다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은혜 받고 싶습니까? 남편이 은혜 받기를 원합니까? 아들딸들이 은혜 받기를 원합니까? 그러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믿고 의뢰하시면 하나님이 다 해결해 주시고, 하나님이 은혜 입혀 주시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3. 변화되는 신뢰(11절)
10절에는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 신뢰하는 자가 11절에 와서는 '너희 의인들아'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의인으로 변합니다. 다음 하반절에서는 '마음이 정직한 자들아'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면 의인이 되고, 의인이 되면 마음이 정직해지고 이렇게 자꾸 변화가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뢰하고 사는 사람에게는 자꾸 변화에 변화가 일어나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들의 남편이 예수 안 믿고 오히려 핍박하고 괴롭힙니까? 그렇다면 그 아내가 바로 서 보십시오. 하나님을 신뢰하고 바로 서게 되면 남편도 다 교회 나오고 예수 믿고 구원 얻게 됩니다. 아들 딸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문제아입니까?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나님 앞에 바로만 서 보십시오. 하나님 믿고 신뢰하게 되면 분명히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의인이 되고 마음이 정직한 사람으로 말입니다.
이렇듯 복 있는 사람의 교훈, 경건한 사람의 교훈, 신뢰하는 사람의 교훈을 잘 받아 드려 우리 모두 다 그런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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