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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58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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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기종의 영성강좌10]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관
구원의 문제는 동서고금을 물론하고, 또한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중요한 문제이다. 특히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는 이 구원의 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임을 부인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의 궁극적 목적이 구원에 있으며, 구원을 받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구원은 사후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현세에서부터 이뤄진다 예수님은 구원의 문제를 천국에 들어가는 일로, 천국을 소유하고 누리는 일로 표현하셨으며, 또한 영원한 생명(영생)을 소유하고 누리는 일로 말씀하셨다. 물론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이나 천국을 소유하고 누리는 일을 우리의 육신이 죽은 후에 이루어지는 내세적인 것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바로고 깊은 관계에 의해서, 즉 온전한 신앙에 의해서 이루어 질 것을 말씀해 주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요6:47-8)>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5:8)>
위의 말씀들에 따르면 예수님의 구원관은 단순히 내세적인 것만이 아님을 알 수 있으며, 따라서 구원은 사후에 이루워지는 것만이 아니라 현세에서부터 이루워 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성경에는 구원의 문제를 쉽게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구절들이 있다
행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행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롬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롬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10: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니>
위의 말씀들은 누구든지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믿는다고 시인만 하면 다 구원을 받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게 하는 말씀들이다. 또 많은 목회자들이 이 말씀들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또한 그렇게 가르치는 이들도 있다. 물론 이 말씀들은 구원의 근본 도리를 말한 것이라기보다는 베드로나 바울의 이방 사람들을 향한 전도를 목적으로 행한 말씀들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말씀들을 가지고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 너무 안이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구원에 관한 예수의 교훈
사실 예수님은 구원의 문제에 관해서 매우 신중한 태도를 보이셨으며, 또한 매우 엄격하고도 단호한 말씀을 하신 것을 볼 수 있다. 구원에 관계되는 예수님의 대표적인 말씀들은 다음 말씀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1) 요3:5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다시)나지 않으면 천국(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2) 마7:23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3) 마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세인보다 낫지 아니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위의 예수님의 말씀들에 따르면, (1)천국은 아무나 쉽게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즉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행하고 산 사람, (2)진리의 영인 성령으로 온전히 거듭나서 천국백성답게 진리의 사람으로 완전히 변화된 사람, 그리고 (3)율법주의자들인 바리세파 사람들의 ”의" 보다 한층 더 높은 수준의 “의”를 지닌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음을 말씀하셨다.
하늘나라 곧 천국은 어떤 나라인가?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은 어떤 나라인가? 천국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나라로서, 영원자이신 하나님의 주권 즉 신성(의와 진리와 사랑과 평화)으로 온전히 다스려진 나라, 곧 하나님의 통치의 세계이다. 따라서 하늘나라 곧 천국은 영원한 나라이며, 절대 평화의 나라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과 의(진리)로 충만한 나라인 것이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곧 하나님의 사랑과 의(진리)와 평화의 나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의(진리)와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천국의 본질에 부합한 성품을 지닌 사람 곧 의(진리)와 사랑과 평화의 사람이 되지 아니하면 안되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성도들이 구원의 목표로 삼고 소망하는 천국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묘사하고, 이 새 하늘과 새 땅은 바로 “의가 있는 곳”이라고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벧후3:13>. 사도 베드로에 의하면, 구원받은 우리 성도들이 들어갈 천국은 바로 다름 아닌 “의의 나라”란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 성도들이 의의 사람 곧 진리의 사람이 되지 아니하면 안되는 것이다.
칭의와 성화와 구원: 칭의는 성화를 이룰 때 완성된다
사실 예수님은 칭의나 성화를 말씀하신 적이 없다. 그것은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말한 것이며, 루터가 가톨릭교회의 공로주의를 경계하기 위해서 강조한 것이다.
물론 우리가 의인이 되는 것, 즉 의롭게 되는 것은 우리 인간의 선한 행위, 곧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음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죄 사함의 은혜인 "칭의"는 칭의라는 말 그대로 죄인인 우리를 의인이라고 불러(칭해)주고 인정해 주시는 것이지, 우리가 참으로 의인으로 변화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칭의는 의인의 반열, 곧 의인이 되는 도상/길(track)에 들어선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온전한 의인으로 변화 된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아야 한다(마틴 루터의 두 종류의 "의"/Two Kinds of Righteousness론 참조).
따라서 참 의인이 되기 위해서는 칭의의 은혜를 입은 이후부터, 믿음의 선한 길을 잘 달려가서 진리의 영인 성령의 내주의 은혜를 힘입어 우리 인간의 내부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죄성이 소멸됨으로, 육적인 인간이 영적인 인간으로 변화되어지고 또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짐으로써, 하나님 보시기에 거짓 없는 참 의인, 곧 참 진리와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이것을 "그리스도에게 접붙혀짐" “내적인 칭의”(inner justification), 또는 “온전한 성화”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칭의는 성화를 이를 때 온전한 칭의가 완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구원을 말할 때 칭의만을 강조하는 것은 절반밖에 말하지 않은 것이며, 따라서 불완전한 것이다.
천국에 확실히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온전한 성화를 이룬 사람이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한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진정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참으로 확실하게 구원받을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천국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성품인 의(진리)와 사랑을 지닌 사람, 곧 진리(의)와 사랑의 사람이다. 진리(의)와 사랑을 지닌 사람은 어떤 사람을 지칭하는가? 바로 온전히 성화된 사람 곧 온전한 성화를 이룬 사람이다. 그런고로 참으로/확실하게 구원받을 사람은 온전한 칭의 곧 칭의의 완성인 "성화"를 이룬 사람이라고 말해야 한다. 베드로 사도는 온전한 성화를 이룬 사람을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 곧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라고 표현하였다(벧후1:4).
그러면 온전한 "성화"를 이룩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가? 바로 다름 아닌 우리의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인 참된 의(진리)와 사랑을 지닌 사람 즉 모든 위선과 거짓에서 떠난 사람 그리고 참 사랑을 지닌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은, 가장 쉽게 그리고 가장 간단하게 말하자면, 천국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성품인 거룩함 곧 형식적인 의가 아닌 온전한 "의"(진리)와 "사랑"을 지닌 사람만이 확실히게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를 향하여 하늘에 계신 너희 하나님의 온전(완전)하심같이 너희도 온전(완전)하라고 말슴하신 것이다(마5:48). 이 말씀에 근거하여 사도 베드로는 성도들을 향하여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 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1:15)>고 말하였는데, 여기 거룩한 자란 바로 하나님의 성품인 참 의와 진리와 사랑으로 온전히 성화된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도들에게 구원을 말할 때에는 칭의만을 말해서는 안되며 칭의의 완성인 "성화"를 강조해야 하는 것이다.
천국의 열쇠는 참 "의" 곧 진리와 사랑이다
그러면 성화의 핵심 요소는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의 성품인 "의" 곧 "진리"와 "사랑"이다, 그런고로 의(진리)와 사랑은 천국 문의 열쇄이며 또한 천국 입국의 티켓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 즉 참된 의(진리)와 사랑이 없이는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라세인의 의보다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사람이 물과 성령(진리의 영)으로 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예수님의 이 말씀 즉 서기관이나 바리세인의 의 보다 더 낳은 의란 단순히 칭의에 의한 외형적인 의인을 말씀한 것이 아니라 내적인 의를 이룬 온전히 성화된 사람 곧 진리와 사랑의 사람인 참 의인을 지칭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최후의 심판에 관한 비유에서 영생(천국)에 들어갈 자들은 곧 "의인들"이라고 말씀하셨다(마25:46). 이에 관련하여 사도 베드로는 최후의 심판 때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을 터인데, 경건치 않은 사람과 죄인들은 어디에 서리요?>라고 반문하고 있다.(벧전4:18)
따라서 우리는 구원의 문제에 관련하여 일방적으로 강조해온 "칭의론"을 재 검토하지 않으면 인된다. 오늘날 우리는 구원의 문제를 너무나 쉽게 생각하고 너무나 안이하게 가르치고 있지는 아니한가 반성해 보아야 한다. 또한 우리는 본회퍼가 지적한 바와 같이 예수님의 복음(구원의 진리)을 올바로 전하지 않고 값산 은혜만을 남발하고 있지는 않은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목회자의 가장 큰 과오는 무엇인가? 바로 교인들에게 올바른 구원관을 알져주지 않은 일, 즉 교인들에게 값산 은혜와 축복만을 강조하다가 참 구원의 길로 인도하지 않은 일이다. 올바른 구원관은 무엇인가?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구원의 도리, 즉 예수님의 구원관이다.
본회퍼는 예수님의 복음을 올바로 전하지 않고 값산 은혜(쉽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값산 구원론, 즉 성도의 올바른 삶과 행위는 아무 상관이 없고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를 남발하고 지나치게 강조하는 일은 하나님의 교회를 병들게 하는 가장 경계해야할 교회의 적(적 그리스도)이라고 경고하였다. 왜냐하면 값산 은혜를 남발하는 일은 결국 성도들의 영혼과 교회를 병들게 할뿐만 아니라 온전한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일이 됨으로 치명적인 과오늘 범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구원의 최종 결정자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시다
그러면 우리의 구원의 최종 결정자는 누구인가? 우리의 구원의 최종 결정자는 우리들 자신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과 존재의 윤허자시며 창조주이신 하나님이시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에 매낄 수밖에 없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까지 하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알려주신 하나님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자비와 은총(사랑)의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의 말씀을 복음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않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서운 심판자가 아니라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깊고 크신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런 고로 지혜로운 신앙인은 우리의 구원의 문제나 또는 남의 구원의 문제를 함부로 말하거나 속단해서는 안되며 자비의 하나님의 은총에 매끼는 겸손을 지녀야 하는 것이다. 한량없는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바로 우리의 삶의 희망이며 용기의 원동력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 겁쟁이가 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없는 자비와 긍휼의 하나남이 바로 우리가 의지하고 살아가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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