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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화약고인 예루살렘에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라는 찬송 소리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총성 속에 엘리야가 들었던 세미한 음성처럼
주님이 다시 오실 도성 예루살렘의 하늘 위로 올려지고 있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마 23:35)
현지 예루살렘에서는 전쟁 가능성이 고조되는 가운데 랍비들조차 예수께로 돌아오는 영적회복의 역사가 진행되고 있다. 세계뉴스를 접할수록 종말에 관한 성경말씀을 상기하게 되는 시대이다. 특히 이스라엘에 관련된 상황과 말씀은 민감해진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마 24:7).
한세기 간격으로 통계를 낸 지진, 기근과 민족 간의 전쟁 발생 그래프를 보면 19세기까지는 평평하다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그래프 경사가 갑자기 70도 이상의 급경사로 치솟는다.
필연적 성경에 기록된대로 이스라엘이 국가로 재건된 1948년을 기점으로 더욱 선명히, 컴퓨터와 핵발전 등 과학문명의 진보도 같은 함수관계이다.
그런데 과학의 발전이 인류에게 혜택을 주는 만큼, 지구는 더욱 타락하고 위험해지고 있으며 미래는 불확실해지고 어두워져가고 있다. 세상의 윤리도 임박한 심판으로 다가서고 있으며, 주님이 다시오실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신부로서 준비되지 못한 교회
그런데 이 세상에 있는 주님의 신부된 교회의 상태는 어떠한가? 역사 속에서 개혁을 시도할수록, 개혁되는 만큼 교파는 분열되고 초대교회의 생명력과 삶으로부터 멀어져 왔다.
세상은 성경에 기록된 죄 가운데 더이상의 타락을 전개시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고 주의 재림이 임박한 것 같으나, 교파로 분열된 이 세대의 교회는 아직도 먼 성숙의 기간이 필요한 것 같은 역설적인 모순, 이 두 가지의 공백 사이에, 이스라엘과 유대 그리스도인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존재한다.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가 말한대로 역사의 기적처럼 2500여년만에 이스라엘은 국가로 재건되었고, 성경 안에만 갇혀있던 히브리어가 유대인의 언어로 복원되었으며, 사도행전 이후 교회사에서 사라졌던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최근 20년 사이에 이방교회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이 나라로 회복되어 구약의 예언말씀이 성취되면서부터 멈추었던 종말을 알리는 시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외치고 있다.
우리 유대인들이 주님께 돌아옴으로 주님의 재림이 가깝다고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현 중동의 정치상황을 에스겔 37장과 같은 예언말씀과 계시록의 아마겟돈 전쟁 사이에서 바라보고 있다. 세계 어느 국가가 자기 나라의 현 상황을 성경에서 직접 인용할 수 있을까?
종말을 향한 긴장감을 주는 세상에 대한 우려와 신부로서 아직 준비되지 못한 교회의 모순 사이에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공통적으로 이방교회에 외치는 말씀이 있다.
“저희(유대인)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롬 11:15).
유대인으로서 리차드 범브란트는 이 말씀을 이렇게 설교했다.
“우리는 예수께서 세상 끝날까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신 교회, 그 교회가 커지고 있으나 생명력에 있어서 왜 쇠해가는지 그 비밀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은 교회가 지난 15세기 동안 오류를 범하고 쇠퇴하는 가운데서 유대인을 보류해 두셨다. 교회를 완성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이방교회에 실제적인 깊은 의미를 주도록 유대인은 고난 가운데 예비되었다. 현재의 교회가 교회의 참모습의 전체라고 생각하지 말라. 유대인이 주님께 돌아올 때 유대인은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교회에 부여할 것이다.”
유대인이 버려진 동안 교회는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는 양적 성장이 이루어졌다. 헬레니즘의 특성상 확산과 성장이 강조되고 교파분열은 어쩔 수 없던 결과라고 유대인들은 말한다.
이것이 말세의 징조가 긴박하게 성취되는 가운데 이방교회가 홀로 해결할 수 없는 종말론적인 딜레마이다. 현재를 개혁하지만 분열을 거듭해온 헬라화된 이방교회의 한계이다.
유다이즘은 헬레니즘과 비교해 볼 때 다양성보다는 일체성을, 성장보다는 성숙을, 효과보다는 본질을, 열매보다는 뿌리를 먼저 중요시한다.
유대인들이 주께 돌아올 때에 이방교회는 참 감람나무인 유대적인 본질로부터 도움을 얻어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사는 것 같은 질적 성숙이 일어날 것이다.
개혁(Reformation)이란 용어 자체가 헬라적이다. 유대인들은 회복(Restoration)이란 개념을 가지고 있다. 현재의 교회를 개혁하는 것은 끝이 없다는 것이다. 교회가 초대교회로 회복되어야 한다고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말한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대인들에게 한 설교 중에 현대의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재림에 관한 말씀이 있다.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두리라” (행 3:21).
이원론적인 헬라적 시각만으로는 계속 타락해가고 어두워지는 징조를 강조하는 부정적이고 수동적인 종말론에 치우치기 쉽다. 그래서 이런 종말론을 지나치게 강조할 때 교회가 사회적 책임으로부터 소극적이 되고 세상을 방관하게 되기도 한다.
유대인들에게 메시야가 다시 올 시기는 믿는 무리를 통해 만유가 회복될 때이다. 어두워져 가는 마지막 때의 흑암 가운데 새벽별빛이 온전히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수동적으로 상황을 살피는 종말론이 아니라 메시야를 모셔오기 위해 적극적으로 만유를 회복시키는 종말론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유대인들은 세계인구의 0.33%밖에 되지 않으면서 강대국들의 경제, 정치, 과학, 문화의 핵심부를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중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유대인들은 실제적인 인구비율에 상관없이 그러하다. 헬라적 종말론안의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동안, 유대적 종말론을 가진 유대인들은 세계를 움직이고 있다.
이스라엘에 나라를 회복하시는 때를 묻던 유대인들(행 1:6)에게 예수님은 먼저 엘리야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할 것이라고 이미 말씀하셨다(마 17:12).
예수님의 회복에 대한 말씀을 잊은 제자들은 때와 징조에 대한 관심만을 가진 것을 복음서는 기록하고 있다. 베드로가 성전에서 만유의 회복을 상기시킨 설교를, 오늘날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이방교회에 다시한번 반복하고 있다.
끝으로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즐겨 부르는 재림찬송을 들은 구절을 소개하면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마 23:37~39).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주의 이름으로 찬송할 때까지 주의 재림시기가 보류된다는 뜻이다. 긴박한 종말론이 유행할 때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이 말씀을 인용하여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유대인들이 아직 주님께 돌아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주님이 오실 수 있느냐고.
그런데 이곳 예루살렘에서는 현재 전쟁 가능성이 고조되는 가운데 랍비들조차 예수님께 돌아오는 영적 회복의 역사가 진행되고 있다.
황폐하여 버린바 된 예루살렘 성전의 서쪽 벽에서 유대인들은 한맺힌 통곡의 기도를 올리고 있으나 그 가운데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역사상 두번째로 다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세계의 화약고 예루살렘에서 그들의 신앙이 회복되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는 소리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총성 속에 엘리야가 들었던 세미한 음성처럼 주님이 다시오실 도성 예루살렘의 하늘 위로 올려지고 있다.
재림을 알리는 시계바늘이 더 빨리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마라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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