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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 성경본문 : | 살전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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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 참고 : | 이한규 http://www.john316.or.kr |
은혜를 넘치게 받는 비결 (데살로니가전서 1장 1-5절)
< 노력보다 은혜가 먼저입니다 >
사람은 무엇으로 삽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삽니다. 은혜를 아는 삶은 가장 철든 삶입니다. 잘난 척 하면 은혜가 없습니다. 물론 잘난 척 하는 것이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약간의 잘난 척 하는 맛도 있어야 살맛이 납니다.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자신의 장점을 알리는 정도의 잘난 척은 애교로 봐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나쁜 잘난 척은 역설적으로 말하면 늘 남 탓만 하고 늘 불평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정말 잘난 줄 알면 불평도 끊이지 않게 됩니다. “나같이 잘난 사람이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자기는 잘났는데 사람들이 인정해주지 않으니까 미칠 노릇입니다. 그처럼 잘난 척이 심하면 삶도 힘들어집니다. 그러나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알면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고난이 극심해도 “나 같은 죄인에게 이 정도의 고난만 있으니 감사하다!”고 생각하니까 은혜가 쏟아집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에게는 간질병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병이 너무 고통스럽고 자존심을 상하게 해서 그 병이 떠나가기를 3번 간절히 기도했는데 그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바울아!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단다! 그 이유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해지기 때문이다.” 그 음성을 듣고 바울은 크게 기뻐하면서 자신의 약한 것들을 자랑했고 결국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은 그의 삶을 평생 떠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몸이 병들고 가정과 사업이 어려워도 사도 바울처럼 믿음만 있으면 그때가 오히려 은혜가 임할 때입니다. 그처럼 약할 때에 예수님을 꼭 붙잡으면 은혜가 쏟아집니다. 사람은 바로 그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사는 것도 아니고 출세하는 것도 아닙니다. 노력만으로 출세한다면 누가 출세하지 못합니까? 출세도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노력 이전에 은혜의 줄을 먼저 붙잡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유명한 사람이나 재력가와 연줄을 닿게 해서 출세하려고 많이 애쓰지만 그런 인적인 연줄보다 더욱 중요한 줄이 하나님과의 신적인 연줄입니다. 또한 사람들은 유력한 사람에게 충성해서 그의 눈에 들어 출세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유력한 사람에게 충성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에 충성해서 하나님의 눈에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은혜를 입습니다.
누구나 성공을 위해 노력하지만 노력한다고 길이 열리는 것은 아닙니다. 보편적으로 보면 능력이나 노력보다 연줄과 은혜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백날 노력해도 쉽게 축복의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축복의 대로는 노력대로 펼쳐지기보다 은혜의 줄에 붙잡힌 대로 펼쳐집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부모와 윗사람을 잘 섬기십시오. 더 나아가 하나님을 잠 섬기십시오. 그러면 굵은 은혜의 줄이 하늘로부터 내려올 것입니다.
노력보다 은혜가 먼저입니다. 이 ‘먼저’란 사실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노력도 중요하지만 먼저 하나님을 꼭 붙잡으십시오. 아무리 노력해도 배우자나 자녀가 변하지 않고 사업도 실패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노력하기 전에 먼저 은혜의 줄을 붙잡고 은혜에 정통한 자가 되십시오.
요새 좋은 직장에 취직하려면 몇 십대 일의 경쟁률을 뚫어야 합니다. 그런 경쟁률을 뚫고 취직하는 것은 실력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때 실력은 거의 우열이 없기 때문에 결국 은혜의 줄이 있어야 합니다. 살면서 실력보다 은혜로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는 의외로 많습니다. 결국 사람은 ‘실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이제 신적인 은혜의 줄을 추구하십시오. 사람의 손보다 하나님의 손이 큽니다. 사람이 무엇을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다 시시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은혜를 내려주시면 거칠 것이 없게 됩니다. 그 은혜가 삶을 지켜줍니다. 구원도 은혜로 주어졌고 축복도 은혜로 주어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은혜를 많이 받을 수 있습니까? 은혜를 받는데 필요한 제일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감사입니다.
< 은혜를 넘치게 받는 비결 >
본문을 보면 감사에 관한 몇 가지 중요한 원리를 가르쳐줍니다. 감사가 넘치게 해서 은혜도 넘치게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감사를 체질화시키십시오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이 구절에서 실루아노는 ‘실라’의 로마식 표기로 그는 바울의 2차 선교여행 때 동행한 바울의 신실한 동역자였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1차 전도 여행 때 루스드라에서 만난 바울의 믿음의 아들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세운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의 폭도들이 바울과 실라를 죽이려고 하자 바울이 그곳을 떠나면서 디모데를 남겨두었습니다. 그리고 아덴에서 잠시 전도한 후에 고린도로 가서 1년 6개월 동안 사역했습니다. 그때 디모데가 고린도에 와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핍박 중에도 믿음생활을 잘한다는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기쁨과 감사를 담아 보낸 서신이 바로 데살로니가전서입니다.
바울은 편지를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은혜와 평강을 빌어주었습니다(1절). 이것은 당시의 일반적인 인사치레입니다. 그 인사치레 다음에 바로 어떤 말을 합니까? 본문 2절 전반부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제일 먼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핍박 중에서도 믿음을 지킨 그들에게 감격하면서 그런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 항상 감사했습니다.
감사할 때는 사안별로 감사하지 말고 항상 감사하며 감사를 체질화시키십시오. 기도할 때도 감사하며 기도하십시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해 기도할 때도 감사한 마음을 품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2절). 기도할 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느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미운 마음을 품고 기도하지 말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품고 기도하십시오. 더 나아가 감사한 마음을 품고 기도하십시오. 그런 기도가 능력 있는 기도가 됩니다.
2. 감사할 일을 기억하십시오
왜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해 감격했습니까? 본문 3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당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는 신앙생활의 삼원색과 같은 덕목인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넘쳤습니다. 그 사실을 끊임없이 기억했기에 감사한 마음도 넘치게 되었습니다.
감사한 것을 계속 생각하면 정말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생각 단계부터 승리하십시오. 깊이 생각해보면 은혜가 크게 느껴집니다. 따지고 보면 얼마나 받은 것이 많습니까? 평생 신세지며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태어날 때도 신세를 지고 죽을 때도 장례를 치러주는 남의 신세를 져야 합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생각할 때마다 감사가 나옵니다. 왜 어떤 사람은 생각할 때마다 불평이 나옵니까? 인격이 저질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감사할 일을 자꾸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장례식에 참석하면 그때마다 구원받고 천국백성이 된 것이 얼마나 감격적인 것인지 생생하게 느끼게 됩니다. 병원 응급실에 가보십시오. 곳곳에서 신음소리와 비명소리가 들리고 피투성이가 된 채 응급실에 누워 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곳에 몇 시간만 있어도 건강의 축복을 피부로 느끼면서 삶에 대한 한탄이 찬탄으로 변합니다. “삶이란 정말 아름다운 것이구나! 내가 지금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구나!”
인천에서 목회할 때 한번은 응급실에 있는데 17세 소녀가 미친 듯이 소리쳤습니다. 그녀의 아빠는 양말만 신고 병원을 돌아다녔습니다. 너무 다급해서 신발도 신지 않고 달려온 것입니다. 사연을 들어보니까 엄마가 일찍 죽고 아빠가 그녀를 귀하게 키운다고 하다가 버릇없이 키웠습니다. 그래서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니까 어느 날부터 학교도 그만 두고 집에만 있으면서 점점 야위어가다가 젊은 나이에 혈기가 막혀서 중풍이 걸린 것입니다. 그때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주는 것만도 감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응급실 단골손님이 있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교통사고 환자입니다. 어떤 사람은 응급실이 아닌 영안실로 직행합니다. 그때 두려운 표정으로 달려오는 가족들을 보면 이런 생각이 절로 듭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의 지켜주시는 은혜 가운데 살고 있구나!” 그처럼 암담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무수한 또 다른 은혜가 있음을 생각하면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그리고 감사하면 머리가 잘 돌아가면서 IQ도 높아지고 창조적인 아이디어도 넘치게 됩니다.
저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중학교 2학년 때까지 매년 IQ 검사를 하면 보통 120 정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한참 반항하던 중학교 3학년 때는 IQ가 103으로 떨어지더니 고 1때는 IQ가 88까지 내려갔습니다. 저는 88이란 숫자만 보면 2가지만 기억합니다. 하나는 ‘서울 올림픽’이도 또 하나는 ‘저의 사춘기 때 IQ’입니다. 사춘기에 불평과 원망으로 사니까 IQ까지 두 자리 수로 떨어진 것입니다. 눈앞의 피해만 따지고 깊이 생각하는 머리가 없으면 감사할 줄도 모르고 점차 머리도 나빠집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하면 감사거리가 넘치게 됩니다. 그처럼 감사할 일을 늘 기억하며 살면 은혜도 넘치게 됩니다.
3. 선택된 자녀임을 확신하십시오
본문 4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성도에게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란 확신처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그 사실을 일깨워준 것입니다.
선택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했다는 것입니다(요15:16).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은 고행과 사색을 통해서도 아니고 누구의 전도를 통해서도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큰 시련 때문에 제 발로 교회에 나오기도 합니다. 그래도 우리가 하나님 자녀가 된 근본 원인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자녀로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선택하셨습니까? 어떤 조건 때문에 선택한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무슨 조건이 좋습니까? 그는 우상을 만드는 ‘우상 공장 공장장’이었습니다. 그는 혈통이나 가문이 좋지도 않았고 학식과 지위가 높지도 않았지만 믿음의 조상으로 선택되었습니다. 베드로도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생선 비린내가 진동하는 어부였지만 예수님이 선택했기에 예수님의 수제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인 선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고 절대 주권으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실제로 인생의 중요한 것들은 대부분 자신의 선택할 여지도 없이 일방적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어떤 성별로 태어난 것, 어떤 가정에서 태어난 것, 어떤 인종과 국가와 지역에서 태어난 것, 그리고 어떤 혈액형과 얼굴과 성격과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것 등 인생의 중요한 요소들이 자신의 선택의 여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것들입니다. 그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우리의 어떤 조건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일방적인 선택의 특혜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절대 근거입니다.
그런 선택이 있었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오늘도 예배와 말씀의 자리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처럼 자신이 선택받은 존재임을 굳게 확신하십시오. 때로 힘든 일도 있지만 하나님의 선택된 존재로서 천국이 확실하게 보장되었고 영적인 관점에서 최상의 축복도 보장된 존재임을 확신하십시오. 그때 감사와 은혜도 넘치게 됩니다.
4. 성육신의 마음을 가지십시오
사도 바울은 말로만 복음을 전하지 않고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다고 하면서 바로 이어 “우리가 너희를 위해 어떤 사람이 되었다.”고 언급합니다(5절). 사도 바울은 성육신의 실천적인 사랑으로 자신을 낮춰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원하는 인간상과 목회자상과 선교자상을 갖추려고 했습니다. 그처럼 말로만 사랑하지 않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사랑하려고 할 때 마음에 감사도 넘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을 ‘네가 나를 위해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오해합니다. 그래서 자기 원하는 대로 되어주지 않으면 불평과 원망이 나옵니다. 그러나 참된 사랑은 ‘내가 너를 위해 어떤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성육신의 사랑을 가지고 늘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으며 살면 이해심과 감사도 넘치게 됩니다.
이상하게도 사람은 행복한 일에 대해서는 원인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렇게 행복한데 이 행복이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어떻게 내가 이렇게 잘 살고 있는가?” 그런 생각은 잘 하지 않고 대신에 건강을 잃고 실패하고 고통스럽고 힘든 일을 당하면 그 원인을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당할까?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지난번의 그 행동 때문은 아닐까? 그 사람 때문은 아닐까?”
그처럼 원인을 찾다가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면 우울증에 걸립니다. 반면에 원인을 남 탓으로 돌리면 늘 원망합니다. 어떤 사람은 원인을 사회 탓으로 돌리면서 세상을 원망합니다. 그런 원망들은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한 무책임한 자의 자기변명입니다. 그런 원망은 항상 상승작용을 해서 처음에는 이웃과 형제와 부모를 원망하다가 나중에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데까지 이릅니다. 결국 모든 원망은 최종적으로 하나님께로 도달하기에 어디선가 그 원망의 고리를 끊어야 됩니다. 무엇으로 대개 그 고리가 끊어집니까? 말씀으로 끊어집니다.
또한 원망은 확산됩니다. 내가 그를 원망하면 그도 나를 원망합니다. 자녀에게 원망조로 탓해보십시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왜 그 모양이냐?” 그러면 자녀의 입에서도 좋은 말이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원망은 또 다른 원망을 낳습니다. 원망에 대한 응답은 오직 원망입니다. 부부관계에서도 원망조로 말하면 남는 것은 없고 조만간 그 관계가 잿빛처럼 됩니다. 결국 원망은 인생낭비로 귀결됩니다.
< 감사를 체질화시키십시오 >
어떤 부인이 남편에 대해 늘 원망만 했습니다. 그러자 친구가 차음에는 그 얘기를 들어주다가 나중에는 자기 마음이 독에 오염되는 것 같아서 괴로워서 말했습니다. “수십 년 동안 그렇게 살려면 차라리 헤어지라!” 그 부인이 “그래도 헤어지는 것은 두렵다!”고 하자 친구가 말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원망은 그쳐!” 그처럼 원망으로 정력과 시간과 감정을 소비하며 산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인생낭비입니까? 원망은 체질화될 수 있습니다. 반면에 감사도 체질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힘써 감사를 체질화시키십시오.
누가 행복합니까?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잘 믿는 사람입니까? 역시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믿음을 다른 면으로 자랑하지 마십시오. 금식기도나 예언기도를 많이 해도 불평이 입에서 떠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감사가 넘치는 것이 40일 금식기도 하며 불평하는 것보다 예수님을 훨씬 잘 믿는 것입니다. 행복은 감사에 달려 있습니다. 축복도 감사에 달려 있습니다. 축복과 행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왔다가 원망의 문으로 나갑니다.
감사하면 시비 걸 사람이 없습니다(고전 10:30). 감사하다는 말은 내게도 좋고 남에게도 좋고 모두에게 좋습니다. 왜 그런 감사하는 말에 인색합니까? 그 말을 하면 자신이 잘못한 것 같고, 밑지는 것 같고, 낮아지는 것 같다고 느끼는 몹쓸 자존심의 병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다는 말을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해 결국 행복도 질식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남에게 신세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면서 평생 감사하다는 말을 한 번도 할 줄 모릅니다. 그것은 ‘반듯한 삶’이 아닌 ‘오만한 삶’입니다. 그렇게 살면 감사도 모르고 행복도 모르고 은혜도 모르게 됩니다. 때로는 신세도 지고 때로는 신세도 주며 사는 사람이 성숙하고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람은 무수한 남의 신세를 알게 모르게 지고 삽니다. 그 사실을 깊이 깨닫고 감사를 표현하고 훈련하십시오.
3가지 감사가 있습니다. ‘육신적인 감사’와 ‘기본적인 감사’와 ‘절대적인 감사’입니다. 이제 원하는 것이 채워지면 감사하는 ‘육신적인 감사’를 버리고 삶 자체에 대한 ‘기본적인 감사’를 가지십시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선택된 자녀로서 어떤 악조건에서도 감사하는 ‘절대적인 감사’를 가지십시오. 그런 절대적인 감사가 있는 사람이 바로 참된 신앙인이고 참된 인격자입니다. 결국 “감사합니다!”라는 말의 횟수는 그의 인격과 믿음의 크기를 나타내고, 또한 그 말은 최고로 좋은 배우자와 부모와 자녀가 되는 길입니다.
요새 곳곳에 가정세미나가 성황리에 개최됩니다. 가정의 행복은 가정세미나에 달려 있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감사가 있으면 가정이 행복해지고 감사가 없으면 가정이 불행해집니다. 감사가 없으면 콩가루 집안이 됩니다. 부모가 자녀의 모습을 보고 불평하면 자녀도 부모의 모습을 보고 불평합니다. 가장 중요한 자녀교육은 부모가 먼저 감사하며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부모들이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살면 자녀들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기쁜 자부심으로 충만해집니다.
이제 가정에서부터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려고 힘쓰십시오. 그때 배우자와 자녀가 변하고, 가정이 변하고, 전체 사회도 변할 것입니다. 결국 찬란한 꿈과 비전을 이루려면 삶의 밑바탕에 어떤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절대적인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너무 대견했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편지를 써서 데살로니가전서에는 특별히 감사에 대한 언급이 많습니다(살전 1:2; 2:13; 3:9). 그러다가 마침내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큰 보답을 하는 것에 있지 않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에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무엇을 바랍니까? 자녀의 “고마워요.”라는 말 한 마디에 부모는 모든 고생을 순식간에 잊습니다.
이제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생각해보면 감사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억압과 배고픔에 시달리는 북쪽의 동포만 생각해도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많이 받았습니다. 우리의 잔은 이미 넘칩니다. 한참 잘나가는 정치인이었다가 장님이 되어서 오히려 세계적인 작품을 썼던 실락원의 작가 밀턴은 장님이 된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제 육신의 눈을 어둡게 하시고 대신 영적인 눈을 열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처럼 육적인 것을 잃고 영적인 더욱 소중한 것을 얻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제 어려운 일이 있어도 감사하십시오. 감사하는 삶이 능력 있는 삶입니다. 그리고 감사는 가장 설득력 있는 웅변입니다.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가 사람의 마음 문을 엽니다. 자녀가 잘 되기를 원하면 “네가 고맙구나!”라고 해보십시오. 배우자의 마음을 얻고 싶으면 “여보! 고마워요!”라고 해보십시오. 그러면 그의 마음이 정말 움직입니다. 결국 감사하는 말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최대의 설교이고 하나님의 손길을 움직이는 최대의 기도입니다.
이제 환경과 조건을 초월한 절대적인 감사를 하십시오. 그 감사가 어두운 세상을 거뜬히 이기게 합니다. 감사는 인간의 인격과 존엄성을 보여주는 가장 아름다운 덕목입니다. 인격이 좋은 사람이 감사한다는 말도 많이 합니다. 그처럼 감사하는 마음과 감사하는 말이 넘칠 때 신적인 거룩한 축복의 굵은 연줄이 하늘로부터 신비하게 내려올 것입니다. 항상 감사를 체질화시킴으로 큰 은혜와 축복을 얻어 누리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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