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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예수님이 계십니다.

누가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1859 추천 수 0 2011.11.16 22:56:24
.........
성경본문 : 눅15:1-2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거기> 예수님이 계십니다.
누가복음 15:1-2

                *2007년 4월1일 주일 설교 원문입니다.
                 오늘은 일찍 올려지죠?
                 감기 몸살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고
                 영성훈련의 진동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3월29일에 있었던 홍보출판국의 출판기념예배 독서 서평
                 때문에 독서와 기도량이 깊고 많았던 까닭입니다.
                 교우들을 만 날 '만우절' 주일 아침을 기다리고 사모합니다.  

1972년 이일수 감독 작품의 <모정에 우는 두 아들>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김지미, 장동휘, 김희라, 이순재가 출연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죽은 남편의 뜻을 받들어 이복자식인 상태와 친자식 두호를 키우던 윤옥은 궁핍한 생활에 두호를 고아원에 맡기고 상태만을 키우려 하지만 상태가 가난에 지쳐 병이 들자 윤옥은 그만 정신이상이 된다. 3년을 정신병원에서 보낸 윤옥은 상태를 찾지만 이미 다른 집에 양자로 들어간 후 였다.
 20년 후 고생으로 전전하던 윤옥은 우연히 양부모의 재산을 물려받아 사장이 된 상태와 공사장의 인부가 된 두호를 만나지만 그들 앞에 어머니라고 나설 수 없기에 고심하던 중 교통사고로 눈을 잃은 상태에게 눈을 제공하고 파란많은 생애를 마친다. 뒤늦게 이를 안 두 아들은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며 후회의 눈물을 흘린다.

만약 이 영화가 어머니 그리고 상태, 두호로 이어지는 삼각구도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요? 재미가 있었을까요? 영화 속의 이야기가 이어질 수 있었을까요? 그렇습니다. 가난한 작은 아들과 부자가 된 큰 아들과 어머니라는 삼각관계가 영화를 이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 삼각의 사람들이 일으키는 긴장을 사람들이 숨죽여 즐기는 것입니다.

도형 가운데서도 삼각형이 가장 안정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림을 그릴 때도 삼각구도로 그립니다. 마찬가지로 인간관계에서도 삼각관계가 가장 안정적일 뿐 아니라 기본이 되는 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가정은 부부만 있을 때보다는 자식이 생겨나서 삼각구도를 이룰 때 더 안정적이 됩니다. 아이도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동시에 사랑을 받는 삼각구도 속에서 가장 건강하게 자랄 수 있습니다.

TV 드라마에서 가장 흔하게 등장하는 게 삼각관계입니다. 어느 한 여자가 돈 많은 남자와 가난한 남자 사이에서 갈등한다거나, 결혼한 남자가 우연히 옛날에 사귀던 사람을 만나서 그와 아내 사이에서 갈등한다는 식의 이야기입니다. 뻔한 얘기인 줄 알면서도 보는 사람은 그 삼각관계에서 흥미를 느끼게 되고 그 이야기에 빨려들게 됩니다.

에덴동산에 아담과 하와만 있었다면 거기에는 역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뱀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삼각관계가 형성되었으며, 뱀의 유혹은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어겨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하는 갈등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뱀의 유혹에 넘어간 그들은 낙원에서 쫓겨나게 되었으니 사람들이 처음으로 이룬 삼각관계는 비극적인 것이라 하겠습니다. 낙원에서 쫓겨나면서 온갖 인간의 비극은 시작이 되었지만, 동시에 거기서부터 인간의 역사는 시작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삼각관계는 역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성서에 나오는 흥미진진한 이야기 가운데는 삼각관계를 그 기본 구조로 하고 있는 것이 많은데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아요.

아브라함-사라-하갈
이삭-야곱-에서
야곱-라헬-레아
사무엘-사울-다윗
사울-다윗-요나단
다윗-밧세바-우리야
바리새파 사람들-죄인과 세리-예수
예수-옥합을 깨뜨린 여인-제자들
강도 만난 사람-제사장과 레위 사람-선한 사마리아 사람
마르다-마리아-예수
18년간된 병자-안식일에 고쳐주는 예수-비난하는 회당장
부자-빚진 사람들-불의한 청지기
부자-거지 나사로-아브라함
삭개오-삭개오를 정죄하는 사람들-예수
간음하다 잡힌 여인-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예수

그런데 우리는 종종 이런 삼각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어느 한 쪽을 잘라내 버리고 둘만의 관계로 보는 잘못을 범하곤 합니다. 그리하여 삼각관계는 사라지고 둘만의 직선적 관계나 혼자만의 개인이 남게 만들죠. 그렇게 되면 성경이 말하려는 구원 사건은 사라지고 개인 윤리나 구원의 의미 같은 것만 남습니다.

신약성서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가장 기본적인 관계도 삼각관계입니다. 아니, 삼각 구도라고 말하는 게 어감이 좋겠습니다. <삼각관계>라는 말에 우리는 자꾸 <불륜>이라는 윤리를 대입하게 되니까요. 성경은 어떤 삼각구도로 되어 있는 걸까요?

바리새파 사람들
세리와 죄인들
예수

이들이 삼각 구도의 주인공들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께로 왔을 때 예수는 그들을 영접하고 함께 음식을 먹었습니다. 이 일을 두고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가 죄인과 어울린다면서 비난을 퍼붓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바리새파 사람들의 위선을 책망하면서 세리와 죄인들의 권리를 회복시킵니다. 이 관계에서 세리와 죄인, 바리새파 사람, 예수라는 세 꼭 지점은 모두 중요합니다. 만약 그 중 하나를 빼 버린다면 도형 즉 삼각형은 망가지고 맙니다. 바로 이러한 관계 속에서 예수가 한 일이 어떤 일인지 분명하게 드러나죠. 바리새파라는 꼭 지점이 분명하게 부각이 될 때에, 그런 비난 속에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예수와 ‘세리와 죄인들’이 더불어 이룬 사랑의 사건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바리새파 사람들을 당연히 나쁜 사람, 구원받지 못할 율법주의자로 여겨서 논외로 해버리는 것입니다. 삼각구도에서 한 점을 잘라내 버리는 것이죠. 남는 것은 ‘죄인과 세리’와 예수 사이의 직선적 관계겠죠. 그리고 죄인과 세리의 자리에 ‘나’를 대입시키고 예수의 자리에 영광 받으신 그리스도를 대입시키게 됩니다. 그러면 그 삼각구도가 본래 담고 있던 사랑의 ‘사건’은 사라지고 속죄론적 ‘의미’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삶의 실제는 없어지고 이론만 생긴다는 뜻입니다.

자, 그러면 이런 눈으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으로 옮겨 가 봅시다.
우리들에게 ‘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잃었던 아들의 비유’(눅 15:11-32)에서 나타나는 기본 골격도 아주 분명한 삼각구도입니다. 성실하게 열심히 일하는 첫째 아들-재산을 탕진하고 거지꼴이 되어서 돌아온 둘째 아들-그런 둘째 아들을 책망하지 않고 영접하는 아버지가 세 꼭 지점을 이루고 있죠? 사람들은 흔히 이런 명백한 삼각구도를 외면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먼저 아버지의 자리에 하나님을 대입하고, 다음으로 두 아들의 자리에 임의의 사람을 대입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자리에 하나님을 대입하고 나면 삼각관계는 사라지고 두 개의 직선 관계만 남습니다. 하나는 ‘첫째 아들-아버지’의 관계이며, 다른 하나는 ‘둘째 아들-아버지’의 관계입니다. 이 가운데서도 대개 전자보다는 후자, 곧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는 ‘탕자’와 그를 너그러이 용서하는 하나님의 관계만 부각이 됩니다. 그렇게 하면 삼각구도가 부각되지 않음과 동시에 이 비유에서 말하려고 한 사건은 사라지고 개인적인 교훈만 남는데, 곧 회개입니다.

(이런 해석을 한 대표적인 사람이 초대 교회 교부 터툴리안.Tertullian입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에 나오는 세 역할을 한 번 나누어 맡아 봅시다.
첫째 아들 역, 둘째 아들 역, 그리고 아버지 역이 있습니다. 자, 어느 역을 맡으시겠어요?  마음속으로는 둘째 아들 역을 맡고 싶으시죠? 그동안 자신을 많이 대입시켜 본 익숙한 역이니까요. 누군가 첫째 아들 역을 맡겠다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성실한 장남이니 말입니다. 문제는 아버지 역을 맡겠다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맡기는 하겠지만 웬지 자신의 역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갖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 역은 늘 하나님이 맡아주는 것이라고 우린 생각하곤 했으니까요.

그러나 이런 역할극의 포인트는 바로 이 세 번째 역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동안 맡아오지 않은 역, 당연히 우리의 역이 아니라고 생각한 그 역을 맡아 볼 때 이제까지 우리가 놓쳐 온 이 비유의 핵심을 포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기득권 속에서 뭔가 보장된 미래를 위하여 성실하고 겸손하게 일하지만, 그러나 그 보장된 미래가 조금이라도 위협을 받을 때는 얼굴을 바꾸고 버럭 화를 내는 큰 아들의 모습은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뭔가 불리한 듯한 여건을 타파해보려고 자기 몫을 강하게 주장도 하고, 모험적으로 사업을 시도해 보기도 했지만, 실패하고 좌절하는 가운데 부모에게 돌아와 도움을 청하는 둘째 아들의 모습 역시 오늘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와 같이 실패하고 상처받은 채로 돌아온 아들을 아무런 조건 없이 맞아들이며, 거기에 대해 얼굴을 붉히며 항의하는 큰 아들을 ‘내 것이 다 네 것인데 뭘 그러니’ 하면서 너그럽게 감싸는, 그리하여 두 아들 가운데 어느 한 편도 배척하지 않고 다 포용하여 아름다운 삼각관계를 이루는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그 모습 또한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까?

첫째 아들이나 둘째 아들의 역할은 잘 떠맡으면서도, 아버지의 역할은 우리와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여기거나 하나님께 떠맡기는 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 아닌지요.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사는 삶에 서의 문제입니다. 이 역할을 사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정에, 사회에, 교회에서 있어야 할구도 하나가 빠져 있는 것입니다. 큰 아들도 있고 둘째 아들도 있는데 아버지 역할을 하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싸움과 다툼만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화해와 그것을 통한 화목한 가정이 없는 것입니다. 자꾸만 사람들의 삶이 나누어지고 붕괴되는 것입니다. 선과 점만 있고 도형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아버지 역할을 맡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 역할에 몰입하여 잘 해낼 때 우린 전체 극 속에서 일어나는 사랑의 사건을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랑의 사건은, 2000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세리와 죄인들-예수의 삼각관계에서 일어난 사랑의 사건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이야기는 두 아들 가운데 어느 하나는 옳고 다른 하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삶의 문제와 씨름하는 현실의 사람들이 이루는 삼각구도와 그 속에서 일어나는 사랑의 사건을 무시한 채, 수평적인 ‘윤리적 의미’ 또는 수직적인 ‘종교적 의미’만을 추구해 온 잘못을 극복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본래 말하려 했고 또 실천한 사랑의 사건을 있는 그대로 우리 삶 속에서 계속되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세리와 죄인들-예수가 이룬 삼각관계 속에서 예수는 자신의 역할을 하나님께 떠넘기지 않았습니다. 그가 십자가를 진 것도 그 역할에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끝까지 그 역할을 잘 해 냈으며, 우리에게도 ‘나를 따르라’고 합니다. 우리가 그를 따르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을 잘 해내는 것입니다. 때로 그것이 아버지 역할일지라도 말입니다. 둘째 아들의 역할일지라도 비난하고 잘라 버리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곰 같은 첫째 아들일 지라도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정, 교회, 직장 그 어디에서나 일대일의 직선관계에서 일어나는 대립과 갈등과 미움은 끊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첫째 아들 역이나 둘째 아들 역을 맡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아버지 역을 맡으려고 하는 사람은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살기 힘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세상 속에서도 그래도 세상은 살만하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직선적 대립밖에 없는 이 세상 구석구석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끼여서 직선을 삼각형으로 만들며, 사람들 사이를 훈훈하게 하며, 얘깃거리를 만들어 내는 그런 사람을 만날 때입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서 함께 이야기하고, 같이 걷고, 또 다시 만날 약속을 할 때입니다. 그는 꼭 무엇을 많이 가지거나, 많이 배우거나, 잘난 사람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그저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이 세상을 밝게 하며, 그런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꼭 온 세상이 어두워지는 것 같고 적막하기까지 한 것입니다.

예수는 그런 분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도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비유를 읽으면서 회개의 기도를 드리기보다는 아버지의 뜨거운 사랑의 가슴을 갖고서 일어서는 사람도 그런 사람일 것입니다.

성암 교회는 그런 교회입니다.
성암교회의 성도들은 그런 사람들입니다.
기꺼이 아버지의 역할을 맡으려는 사람들, 둘째 아들을 비난하지 않는 사람들, 첫째 아들을 무시하지 않는 사람들이 성암교회 교우들입니다.

거기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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