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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4: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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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내가 지금 가는 길
요14:1-6
*2007년 8월5일 주일 설교 원문입니다.
<박기영 집사이 이야기>
<목회자 수급에 관한 법 제정>에 대해서는 따로 해야 될 이야기입니다만,
성령의 인도를 따라 적용하려고 합니다.
입추가 내일 모렙니다.
그리스도안의 모든 가족들을 서늘한 인생길에서 만났으면 합니다.
조지 타마린이라는 심리학자의 질문지를 따라 이렇게 물어 봅니다.
“23명의 기독교 신자가 이슬람 국가에 가서 선교를 했다. 그들의 행동은 옳은가 그른가?”
사람들은 비난합니다. 자기가 믿는 종교가 꼭 옳다고 강요하거나 주장하지 말고 각기 다른 문화적인 상황을 따라 살아온 사람들의 생각이나 종교성을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질문이 경우는 대부분 그르다고 대답을 합니다. 지금 두 명이 죽임을 당하고 21명이 잡혀있는 아프가니스탄의 젊은이들을 바라보는 하나의 눈입니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그들을 비난합니다.
그러면 이제 질문을 다르게 해 보겠습니다.
“23명의 한국 청년이 내전을 겪고 있는, 마치 6.25직후 한국과 같은 상황에 있는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가서 의료봉사 활동을 했다. 그들의 행동은 옳은가 그른가?” 처음 질문처럼 비난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되레 나중의 질문엔 분노와 눈물을 흘립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은 어떻습니까?
“23명의 기독교인 청년들이 이슬람 국가에 가서 의료봉사활동을 했다. 그들은 옳은가 그른가?”
평소에는 그렇게 봉사를 들먹이던 사람들이, 달리는 기차에 뛰어드는 아이를 살린 역무원을 영웅처럼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기독교 봉사’란 애시 당초 가당치 않다는 듯 말하고 있습니다. 제 나라 안에서는 영웅이 되고 자랑이면서 남의 나라에서 한 일은 ‘현지 문화를 거역하는 침략적 행위’로 지탄합니다. 왜 이렇게 우리는 어리고 못났습니까?
팔레스타인이 아니 터키라도 가본 사람은 압니다. 그 나라에서 선교란 곧 봉사입니다. 우리나라처럼 “주 예수를 믿으세요. 안 그러면 지옥에 갑니다.”하고 소리 지르며 전도지 나눠줄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금방 목숨이 위태롭고 돌에 맞아 죽습니다. 우리처럼 그렇게 노골적으로 전도 할 형편이 아닙니다. 대신 그곳에서 할 수 있는 건 사랑을 베풀고 배고픔을 해결해주며 고통을 나누는 것입니다. 나는 그런 작은 사랑의 힘을 믿습니다. 총이나 칼이나 미사일을 믿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세상 사람들은 뭘 믿습니까? 작은 사람들의 봉사와 헌신의 사랑의 힘을 믿는 게 아니라 총을 믿는 단 말입니까? 나는 사랑의 힘을 믿습니다. 사랑이 세상을 변화 시키고, 사랑이 사람과 사람을 진정으로 화해하게 한다고 믿습니다. 그런 눈으로 묻고 답해야 합니다. 이번 사건만이 아니라 매사에 말입니다.
사람은 다 길가는 나그네죠.
목표를 향해서 걸어가는 도상에 있습니다. 그 목표란 그의 삶의 꿈이기도 해요. 우리는 그 꿈을 이룩하기 위해서 나날이 전진합니다. 순교를 당한 두 젊은이도 꿈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꿈을 이루려고 거기 갔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람된 삶’이란 그 꿈이 어떤 것인지, 나날이 그 꿈을 향해서 어느 만 큼 더 전진하느냐 하는 거죠. 그런 삶이 보람된 삶인 거예요. 어떤 사람은 위대한 음악가가 되려는 꿈을 가진 이가 있습니다. 사회를 위하여 좋은 문화 사업을 꿈꾸는 이도 있지요. 그리고 많은 부모들은 자식을 잘 길러서 훌륭한 인물이 되게 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식들을 다 기르신 분들은 교회를 잘 섬겨서 이 교회를 통해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 위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려는 이들도 있습니다. 모두 크고 작은 삶의 목표가 있습니다. 노인은 노인대로, 젊은이는 젊은이대로 다 꿈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이룩하기 위해서 모든 정성을 다하죠. 그걸 이뤄가기 위해 사는 거죠.
그러나 불행히도 적지 않은 사람들은 목표를 정하지 못하고 허송세월을 합니다. 목표를 정하더라도 그것을 끝까지 붙잡고 가지 못하고 이 것 저 것으로 표류하는 부평초와 같은 생활을 합니다. 그런 사람의 일생은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허무하게 삶이 끝납니다. 그러니 먼저 내 삶의 목표가 뭔지 똑바로 해야 합니다.
<박기영 집사 이야기/시간을 봐 가면서>
그런데 문제는 어떤 목표를 정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목표를 향해서 삶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 교회 다니는 사람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가야 할 길은 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도 많은 길 가운데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 가죠. 간단하지 않습니까?
<넓은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두 가지 길을 제시하셨지요. 여러분 다 아시지요? 하나는 넓은 길이요 다른 하나는 좁은 길입니다. 넓은 길은 편해서 모두 쉽게 택할 수 있는 길입니다. 그래서 그리로 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번에 백두산엘 가보니 더욱 잘 알겠더군요(시간을 따라서). 좁은 길은 그 길이 험악해서 그리고 가는 사람이 적습니다. 그러나 그 좁은 길이 생명으로 가는 길이요 넓은 길은 멸망으로 가는 길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지요? 이 죽음으로 이끄는 넓은 길이란 어떤 길이요 생명에 이르게 하는 길은 어떤 길인가요?
죽음으로 이끄는 길이란 애굽의 바로 왕을 위시한 모든 민족들이 걸어온 길입니다. 다윗 왕을 위시한 유대나라와 이스라엘의 기득권자들이 걸어온 길입니다. 로마제국의 힘센 자들이 걸어온 길입니다. 그리고 그들과 손을 잡고 혜택을 받아온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걸은 길입니다. 아니 인류 역사를 통해서 힘으로 세계를 지배하려한 제국들은 다 이 길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그 제국 안에 발을 붙이고 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제국이 수탈한 전리품을 좀 더 얻으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리고 이 길을 걷는 사람의 특징이란 모두 자기 앞만을 챙기려고 혈안이 된다는 것입니다. 경쟁에 이기려고 힘을 기르고 제도를 만들고 마침내 그 위에 군림을 합니다. 그들에게는 근본적으로 이웃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서로가 경쟁자일 뿐이죠. 정치를 하는 사람들을 위시해서 사업을 하는 사람, 교육을 하는 사람, 예술을 하는 사람, 심지어 종교가들까지도 자기중심적인 경쟁을 일삼기 일쑤입니다.
<2009년부터 있을 목회자 수급에 관한 법률 제정과 500명교인 제한/시간을 보고>
그들에게 있어서 가치란 힘과 권세, 물질과 향락입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이란 안중에 없습니다. 정의란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봐도 찾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할 때 그 사회 안에는 인정공동체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죽음의 세력이 난장판을 치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계 방방곡곡에서 봅니다. 아프가니스탄이나 팔레스타인 레바논과 같은 곳에서 일어나는 아픔들은 모두 그렇게 해서 생긴 것입니다. 넓은 길로 가는 사람들이 만든 것입니다. 거기 좁은 길로 가는 우리 젊은이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좁은 길이 있지요.>
생명에 이르는 좁은 길이란 어떤 길인가여? 그것은 죽음의 길, 넓은 길에 역행하는 길입니다. 넓은 길을 거꾸로 가는 몸부림입니다. 이 길을 가는 사람은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라 섬기려 합니다. 독점하려고 하지 않고 나누려고 합니다. 올라가려고 하지 않고 내려가려고 합니다. “내”가 아니라 “우리”를 관심의 초점으로 삼지요. 남을 정죄하지 않고 용서하고 껴안습니다. 남의 약점을 보려고 하지 않고 장점을 보려고 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소중한 것이란 권력이나 물질이나 향락이 아니라 천하보다 소중한 생명입니다. 생명이 소중해서 서로 위하고 아낌으로 생명이 성장하는 것을 보고 기뻐합니다. 그가 가진 재간이든지 지위든지 그가 하는 사업 등 모든 것을 생명을 키우는 일에 동원합니다.
산 눈이라도 빼먹으려는 경쟁사회에서 이 길로 가려는 사람이 별로 없지요? 이 길로 가면 손해밖에 볼 것이 없다고 생각을 하지요? 그러면 누가 감히 그 길을 택할 것인가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 좁은 길로 가라고 하십니다. 이 좁은 길로 가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자기가 바로 그 길이라고 선언을 하셔요. 이 선언은 매우 중요한 선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 좁은 길로 받아드리게 될 때 우리에게는 한 새로운 소망의 빛이 비쳐오기 때문이죠. 예수님이 걸으신 그 고난의 길을 음미해 보세요. 그것이야말로 생명을 살리는 승리의 길이었잖아요? 그가 걸으신 길이야말로 생명이 차 넘치는 샬롬의 길이었잖아요? 그의 삶이야말로 포도가 주렁주렁 달리는 포도나무와도 같았잖아요? 그가 가는 곳마다 기쁨이 넘치는 하나님 나라가 전개되었잖아요? 그러기에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던 겁니다. 분명하다는 겁니다. 여러분도 이걸 믿습니까? 23명의 젊은이들이 이 길을 갔다는 거 아닙니까?
<하나님 아버지에게 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에게 갈 수 없다.” 라고 말씀하셨어요. 그 길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이르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걸 우리가 또 믿어야 해요. 이걸 믿어야 해요. 우리 인류가 다다라야 하는 종착점이기 때문입니다. 그 종착점은 평화가 넘치는 세계입니다. 생명 강이 넘실거리는 세계입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샬롬의 나라죠.
이런 하나님의 경륜의 시초를 우리는 아브라함에게서 보는 겁니다. 하나님은 떠돌이 아브람을 불러서 앞으로 그의 후손을 통해서 민족들이 서로 축복을 하면서 사는 평화의 세계로 만들겠다고 약속하셨어요. 그리고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을 부르셔서 과부, 고아, 떠돌이도 안심하고 사는 정의롭고 평화스런 인정공동체를 만드셨죠. 남북조가 다 타락을 해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된 이스라엘을 향해서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결국 저들을 다시 깨닫고 돌아와 사자와 염소가 같이 풀을 뜯고 젖 뗀 아기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어도 상하지 않는 평화의 동산을 이룩하게 하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어요. 그리고 때가 이르러 그의 아들 예수님이 구유에 탄생했을 때 천군 천사들이 양을 치는 목자들에게 나타나서 “지극히 높은 곳에는 하나님께 영광 그의 축복을 받는 이들에게는 평화“ 라는 예수님을 통해서 이룩하실 평화의 세계를 노래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온 몸으로 그 평화의 공동체를 우리들 사이에 이룩하셨어요. 요한 계시록 마지막 장에 가보면 이 평화가 확산이 되어 생명이 충일한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게 성경의 전부예요. 이걸 믿고 따르고 이루라는 거예요.
<이야기 두 개>
어느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서울로 이사해서 살고 있는 한 집사가 식사대접을 하고 싶다고 해서 고급 식당으로 갔다. 오랜만에 만나 식사를 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든 중 그는 식사를 대접하게 된 연유를 설명했다. 얼마 전 높은 경쟁률을 뚫고 당첨된 아파트 입주권을 그 날로 전매하여 일 억 원의 이윤을 남겼다는 것이다. 기적적으로 도우신 하느님의 은혜가 너무도 감사해서 평소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는 목사님을 대접한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 네 식구와 60 평 짜리 아파트에 살고 있으며 삘딩도 여러 채 갖고 있다.“
1941년 독일 아우슈비츠의 수용소에서 가스실로 끌려 들어가던 한 젊은이가 집행관에게 “나는 아내와 어린 자식이 있으니 죽을 수 없다”고 하면서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것을 옆에서 보고 있던 한 젊은이가 “나는 아내도 자식도 없으니 대신 죽게 해 다라”고 하여 대신 가스실에 들어가서 죽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살아난 자의 이름이 가요체크입니다. 그리고 그 대신으로 죽은 자는 콜베라고 하는 신부입니다. 1972년 콜베 신부가 로마 교황청으로 말미암아 성자로 추대되어 예전이 거행되는 자리에 카요체크가 찾아와서 눈물을 흘리면서 그 때 일을 되새겼습니다. 그리면서 하는 말이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콜베 신부가 내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나도 콜베 신부의 사랑의 정신으로 살려고 노력합니다. 주여, 도와주소서.” 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누가 넓은 길로 가는 사람이고 누가 좁은 길을 가는 삶입니까?
우리는 길가는 나그네입니다. 벌써 내일 모레가 입춘 아닙니까? 인생길은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처럼 훅훅 지나갑니다. 지금 어느 길로 가고 계십니까? 아직도 어느 길을 가는지 모르십니까? 젊은 시절에는 세월이 한없이 긴 것만 같이 느끼지만 지나고 보면 잠깐입니다. 어느 길을 택해서 이 세월을 보낼 것입니까? 어느 길이 옳은지 따지고 방황할 시간도 없습니다. 주님이 가신 길, 좁은 길, 생명의 길을 가십시오. 세상 사람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십시오.
죽음의 수렁이 기다리고 있더라도, 손해가 나더라도, 소유를 내어 놓을지라도, 목숨을 바치는 한이 있어도 그런 길을 가야합니다. 거기 환희의 찬가가 차 넘치는 평화의 동산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예수를 똑바로 믿고 사는 사람입니다.
나는 지금,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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