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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1: 25-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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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동호 목사 |
참고 : | 2009.4.12 설교 |
예수의 생명을 세상에.
요 11: 25-26.
복된 부활주일에 함께 나아와 예배하는 높은 뜻 광성교회, 높은 뜻 정의교회, 높은 뜻 하늘 교회, 높은 뜻 푸른 교회의 모든 높은 뜻 가족 여러분들과 여러분의 가정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7년 여 동안의 높은 뜻 숭의교회 시절을 끝내고 높은 뜻 네 교회로 분립하여 각각 예배를 드린지 벌써 3개월이 지났습니다. 오늘 기쁘고 복된 부활주일을 맞아 한양대학교 체육관에서 네 교회가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니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멀쩡한 교회를 넷으로 분리하는 것을 명분은 있으나 위험할 수 있는 일로 보았습니다. 우리들 중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저 자신도 위험까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교회가 외형적으로 작아지고 잠시 동안은 축소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였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그와 같은 인간적이고 상식적인 예측은 모두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분립된 우리 높은 뜻 네 교회는 외형으로 볼 때 작년 높은 뜻 숭의교회 시절보다 약 20% 성장하였고, 재정적으로 볼 때 30%에서 40% 정도까지 성장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높은 뜻 숭의교회 개척의 중심이 되었던 담임목사가 빠져 있는 상태에서도 그와 같은 성장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 높은 뜻 네 교회는 지난해까지 있었던 우리 높은 뜻 숭의 교회보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모든 면에서 건강해지고 성숙해졌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미처 몰랐지만 성경에는 이미 그에 대한 답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답을 마태복음 10장 39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여러분 아시겠습니까?
“자기의 목숨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은 잃게 될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얻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높은 뜻 교회의 분립을 하나님의 높으신 뜻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으로 해석해 주신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약속하신대로 우리에게 오히려 진정한 생명과 건강한 목숨을 우리 네 교회에 허락해 주신 것 같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언제나 옳으시고,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우리에게 축복이 됩니다. 저는 이래서 예수 믿는 것이 좋고 부족하지만 말씀의 정신을 좇아 목회하는 것이 즐겁습니다.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우리는 마태복음 10장 39절 말씀 즉 자기의 목숨을 찾으려고 하면 잃게 되고 오히려 자기 목숨을 하나님을 위하여 버리면 얻게 된다는 말씀의 증거입니다. 예수님도 자기 목숨을 버리는 일이 쉽지 않으셔서 하나님께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거두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결국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는 기도와 함께 순종하시어 하나님의 높으신 뜻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와 같은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높으신 뜻 즉 죄로 말미암아 죽게 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예수님은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죄로 말미암아 죽게 된 우리 인류를 구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자신의 삶을 버리시고 잊으십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당신의 최선을 다하십니다. 사람이 되기도 하시고 십자가를 지시기도 하십니다. 그리고 결국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하시게 됩니다. 그것을 통하여 모든 인류는 죄 사함을 받고 사망에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버리셨던 자신의 삶을 되돌려 받으시고(부활) 하나님 우편에 앉게 되십니다.
이것은 일종의 하나님의 패턴입니다. 그 하나님의 패턴이 우리가 소중히 여기고 있는 가치 즉 높은 뜻입니다. 그것은 매우 힘들고 어려운 것이지만 복잡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매우 간단하고 심플합니다. 그것은 자신을 삶의 목적으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늘 자기를 부인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과 사람들을 목적으로 삼고 저들을 섬기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들을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사탄의 패턴이 있습니다. 그것을 자신을 부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자신의 삶의 목적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하나님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도 부인하고 세상과 사람들을 다 경쟁자로 여기고 어떻게 하든지 저들을 짓밟고서라도 자신에 대한 욕심과 야망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이 패턴 때문에 세상과 사람들은 철저히 파괴되어가고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며 짓밟고 살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패턴은 생명의 패턴이요, 사탄의 패턴은 사망의 패턴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패턴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모든 세상이 세상의 패턴을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다. 자신을 삶의 목적으로 삼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무한경쟁 속에서 서로를 짓밟고 죽이며 살벌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세상 속에서 우리 믿는 사람들만 무장을 해제하고 패턴을 바꾼다는 것은 위험한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장을 더 강화하고 정신을 바짝 차려도 살까 말까한 세상에서 무장을 해제하고 자신을 부인하고 삶의 목적을 바꾸어 산다는 것은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렇게 살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식과 뜻을 따라 살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패턴을 따라 살지 못했습니다.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며 살았지만 실제로는 세상의 식과 뜻을 따라, 세상의 패턴을 따라 살아왔습니다. 세상에서 패배하여 짓밟히고 살았든, 남을 짓밟고 세상적으로 성공하여 살고 있든 다 떳떳치 못하고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 안에는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네 교회가 연합하여 처음 부활절 예배를 드리는 이 날 그동안의 우리 삶의 패턴을 십자가에 못박고 남은 삶의 패턴을 바꾸는 결단을 하나님께 드리면 어떻겠습니까? 우리만이 목적인 삶 그만큼 살아봤으면 되지 않았을까요? 마셔도, 마셔도 다시 목마른 물이 아닌 속에서 솟아 나는 생수가 되어 다시는 갈함이 없는 물을 마시며 사는 삶에 한번 도전해 보면 어떨까요? 솔로몬과 같이 채워지지 않는 욕심을 위하여 살다가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는 삶이 아니라 다윗과 같이 하나님으로 자신의 목자를 삼고 하나님의 식과 뜻대로 살아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고백을 하며 사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번 부활절 연합예배의 주제 성경이 누가복음 4장 18절과 19절에서 예수님은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하고 눌린 자들에게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는 것을 자신의 삶의 의미와 목적으로 이해하셨습니다. 그와 같은 사명을 감당하라고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임하시고 삶에 기름을 부어 주셨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우리는 공부해서 남 주냐? 돈 벌어 남 주냐?’며 공부하고 돈을 법니다. 그게 우리의 사고방식이고 삶의 패턴입니다. 그 패턴을 바꾸면 ‘공부해서 남 주자 ! 돈 벌어서 남 주자 !’가 됩니다. 말만 그렇게 하지 말고 정말로 한번 그렇게 살아 보십시다. 저 사람은 정말 남 주려고 돈을 버는 사람 같다. 남 주려고 공부하는 사람 같다는 소리를 한 번 들어 보십시다.
우리 교회는 이와 같은 패턴을 실천해 보기 위해 우리를 위하여 먼저 예배당 짓는 일을 뒤로하고 예배당 짓는 돈과 힘을 새터민과 빈민들의 자활을 위하여, 통일을 준비하는 일을 위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일을 위하여 보이지 않는 성전 건축을 건축하고 있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이에 호응하고 있지만 갑자기 삶의 패턴을 바꾼다는 것을 역시 쉽지 않아 다른 교회가 자기 예배당을 건축하는 것만큼 열정적으로 건축이 이루어지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교회가 추구하고 있는 것이 옳습니다. 이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식입니다.
저희 교회 사랑방 인터넷 게시판에 장로님 한 분이 육순 잔치를 마치시고 글을 올리셨습니다. 장로님은 육순 잔치에서 가족 앞에서 유언서를 작성하여 낭독하셨답니다. 그 유언서 중에는 당신이 돌아가신 후 상속에 관한 내용도 있으셨는데 1/3은 하나님께, 1/3은 아내에게, 1/3은 자녀에게 남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실천하고 싶으셔서 만인이 보는 교회 게시판에 올리신 것 같습니다.
은퇴하신 장로님 중에도 그와 같은 결심을 하시고 저에게 말씀하신 분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장로님들의 헌신을 보며 저도 그렇게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조금 더 욕심을 부려서 사는 동안에도 그런 식의 비율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오대식 목사님으로부터 미국의 어느 교회에서 시행하고 있는 근사한 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운동의 이름은 triple thirty랍니다. triple thirty 란 세 번의 삼십 년이라는 뜻인데 처음 삼십년은 열심히 공부하고, 그 다음 삼십년은 열심히 돈을 벌고, 마지막 삼십년은 60년 동안 공부한 것과 번 돈을 잘 쓰자는 뜻이랍니다. 물론 60이 되기까지는 돈만 발고 공부만 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나머지 30년 동안은 공부도 하지 말고 무조건 돈도 벌지 말자는 뜻은 아니지만 나이에 맞게 주력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대학병원에서 교수로 계시는 교인께서 은퇴하신 후에는 무료병원에서 봉사하고 싶으시다고 하셨습니다. 혹시 교회에서 그와 같은 병원을 세워 준다면 같은 뜻을 가진 의사들을 모아 아주 좋은 선교병원에서 남은여생 섬기시고 싶다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처음부터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들을 돕고 섬기는 일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쪽방탈출헌금과 밑천나눔헌금이 씨앗이 되어 중구자활후견센터가 세워졌습니다. 그 센터에서는 김밥천국, 이동세차, 행복도시락과 같은 사업을 하고 있는데 현재 100명이 넘는 분들이 그곳을 통하여 많지는 않지만 월급을 받고 생활을 하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의 희년헌금 즉 보이지 않는 성전건축 헌금을 가지고 세운 열매나눔재단에서는 새터민들을 위한 공장 둘을 세웠습니다. 그 두 공장을 통하여 새터민 50명 가까이가 남한에 성공적으로 적응하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새터민들이 남한에 오게 되면 통일부 하나원에서 훈련을 몇 달간 받아야 하는데 우리 재단의 두 공장은 저들이 견학하는 코스가 되었습니다. 우리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새터민들이 남한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적응하고 있는 사람들로 인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삶의 목적을 자신이 아닌 우리 인류를 구원하는데 두셨을 뿐만 아니라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십자가를 질 줄 압니다. 어린 아이들까지도 감당하기 어려운 십자가들을 지고 삽니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해야만 합니다. 교육을 받아야만 합니다. 훈련을 받아야만 합니다. 우리의 고등학교 아이들을 하루에 네 다섯 시간도 자지 못하며 공부하고 있습니다. 대학엘 가서도 그와 같은 고행을 끝나지 않고 직장에 취직을 하여도 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사람들은 얼마나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지는 목적이 예수님과 다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아닌 우리 인류를 살리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는데 우리들은 십자가를 짐을 통하여 남을 죽이고 짓밟아 자기가 하나님이 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예수님의 부활 주일을 맞이하여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지 말고 실제로 삶의 패턴을 완전히 바꾸어 예수님과 같은 삶에 한번 도전해 보십시다. 오직 자신만을 위하여 사는 삶을 나보다 가난하고 어렵고 불쌍한 이웃들을 돕고 섬기고 구원하기 위한 삶으로 바꾸어 보십시다.
그와 같은 삶에 욕심을 가지고 그와 같은 삶을 위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한번 다해 보십시다. 방관자가 되지 말고 무슨 일에든지 참여하여 예수님처럼 살아 저들에게 예수의 생명을 전하는 삶을 살아보십시다. 저들을 짓누르고 있는 모든 사망의 그늘 속에서 저들을 해방시키십시다.
우리 교회는 대형교회는 아닙니다. 그러나 절대로 작은 교회도 아닙니다. 오늘 예배에 아마 6천 명 정도의 교인은 모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우리 6천 명이 정말 삶의 패턴을 세상의 패턴이 아닌 하나님의 패턴으로 바꾸게 된다면 이 세상은 예수 부활의 생명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로 말미암아 가난한 자들이 부해지고, 포로된 자들이 자유케 되고, 눈 먼 자들이 다시 보게 되고 눌린 자들이 기를 펴고 사는 세상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정말 살만한 세상, 사람의 정이 있는 아름다운 세상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저는 지난 3월 22일 주일에 에스겔 47장에 있는 말씀을 중심으로 높은 뜻 정의교회에서 ‘세상을 살리는 교회’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습니다. 에스겔서에 보면 성전에서 물이 스며 나왔는데 그 물이 점점 커져 발목에 차고, 무릎에 차고, 허리에 차다가 나중에는 헤엄칠만한 물이 되었는데 그 물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들이 살아나게 되었나는 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우리 높은 뜻 교회가 이 시대에 그와 같은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물이 우리 높은 뜻 교회에서부터 스며져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말씀을 마치렵니다. 예수는 생명입니다. 모든 죽은 것을 살리는 부활의 생명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생명을 얻었습니다. 생명의 힘은 생명에 있습니다. 생명은 생명을 낳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생명을 얻었으니 이제는 우리가 예수의 생명이 되었습니다. 이 생명이 모든 가난하고 약하고 갇히고 눌려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해져 저들도 부활의 생명으로 살아나는 역사를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좀 더 잘 먹고, 좀 더 잘 입고, 좀 더 잘 나기 위하여 살면 뭐하겠습니까? 좀 더 근사하고, 좀 더 훌륭하고, 좀 더 아름답고, 좀 더 보람 있는 삶을 위하여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만 앉아 있지 말고 무슨 일이든지 찾아서 움직이는 사람들이 되십시다. 젊은이들이 애타게 직장을 찾듯이 일을 찾아 보십시다. 그리고 최선을 다하여 그 일을 섬겨 보십시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에 예수 부활의 생명을 불어 넣는 사람이 되어 보십시다. 세상을 살리는 사람들이 되어 보십시다. 그런 우리 높은 뜻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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