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순전한 신앙 이야기<http://cafe.naver.com/ghkdqndlf> |
---|
오늘날 교회들이 공감적으로 꿈꾸며 연대하여 강조 하면서 여러 방면으로 운동하는 것이 있는데 교회가 세상을 변화 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는 세상의 희망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물론 이런 얘기는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뭔가 위기적으로 급변하는 이 시대에 와서는 거의 한 목소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얼마 전 8.15광복절 기념일에 이 땅의 교회들은 마치 그것이 교회 역사의 큰 절기처럼 곳곳마다 대성회를 열면서 요란하게 행사를 벌였습니다. 거기서 교계 지도자들은 한 목소리로 기독교는 민족의 통일과 구원과 사회의 변화를 가져오는 종교로서 세상에 희망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기독언론을 통해 나타나는 오늘날 교회들의 목표나 신학자들 및 목회자들의 강조점을 살펴볼 것 같으면 “민족을 치유하고 세상을 변화 시키는 교회” “글로벌시대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는 신학교” “인류와 사회에 생명과 사랑과 평화를 주는 종교로서 역할절실” “동서화합과 경제 회생과 복지사회 구현” “하나님의 권능의 손아래 인류의 화해와 평화를 이루어내야 한다” “세계 복음화와 인류 공동체 실현” “장로교 하나 되어 세상에 희망 주는 교회 되자” “젊은 기독인들이여 세계를 품는 비젼을 가지라”등 많습니다.
“세계를 변화시킨 13인”이라는 책이 있는데 거기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들, 그들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업을 했다.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가? 세상을 변화 시키는 일이었다. 그렇다. 세상은 변화 되야 한다. 더욱이 우리시대에 있어 변화는 꼭 필요하다. 예수님이 열세명의 제자를 불러 그러하셨듯이 하나님의 나라의 선포를 통해 세상을 변화 시키려고 우리를 부르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언제부터 교회들의 관심이나 기대가 세계적이 되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인류의 복지나 세계 평화 공존을 꿈꾸는 세상 나라들과 같은 목적을 가지고 같은 공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오늘날 기독교의 세속화 현상이요 인본주의가 교회를 잠식하고 있는 증거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지도자들인 목회자들이 대부분의 기독교 이상주의자들인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독교 역사를 들어 교회가 세상에 많은 변화와 성장에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지금의 미국사회가 잘 살고 선진국으로 우뚝 서 있는 것은 그들의 개척자들이었던 청교도들의 신앙중심 역할이었음으로 인정하는 것처럼, 또는 서양사회의 발전이나 인문적인 문화 형성이나 민주주의 발전을 기독교의 영향으로 다수가 보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기독교인들이 사회나 국가에 좋은 지도자들이 되어 영향을 끼친 경우도 있고 그 외에 모든 분야에서 월등한 위치나 역할로 각 분야에 지대한 공을 세우거나 개혁내지는 계몽을 시킨 경우도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유를 들어 오늘날 교회들은 세상을 교회가 변화 시켜야 한다지만 그것은 교회의 본질을 모르는 얘기며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 무엇인지 복음적으로 보지 못하는 무지의 증거인 것입니다.
<세상의 희망과 교회의 소망의 본질적 차이>
세상사람들이 희망얘기를 더 잘 합니다. 젊은이들에게 꿈을 가지라 합니다. 보다 확실하고 큰 비전을 가지고 살라 합니다. 그러나 세상사람들의 소망은 세상안에서의 기대에 불과 합니다. 각자든, 사회공동체적이든, 인류전체적이든 그들의 기대는 보이는 것에 있습니다. 부귀영화에 있고 유토피아 건설에 있습니다. 이렇게 잡으려는 소망은 다 헛것이라 했습니다. (욥 41:9)
교회의 소망은 세상과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사도바울은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증거했습니다. (고후 4:18) 그러니까 성도가 소망하는 것은 세상 보이는 일시적인 기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나라와 그 나라 건설의 삶에 있음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또 증거하기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했습니다. (롬 8:24-25)
사도베드로는 교회의 소망을 산 소망이라 했습니다. 산 소망이라는 것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가 은혜로 살게 된 구원의 소망이요 그 구원을 영원히 누리는 소망인 것입니다. 그의 증거를 보면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벧전 1:3-4) 이 말씀에서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역사로 중생케 되는 구원의 역사로 산 소망이 있게 되었고 그것은 곧 영원한 하나님나라의 기업이라고 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래서 에베소 교회 된 자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그 영원한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을 위해 성도로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마음의 눈으로 밝히 보기를 간구했던 것입니다. (엡 1:18)
이런 산 소망을 알지 못하고 밝히 보지 못하는 자들이 신앙을 통해 자기들의 기대를 바라는 것 이며 그래서 예수님 당시 유대 무리들처럼 예수를 열심히 찾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기대적 소망이 능력의 힘으로 성취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자들은 소망이 하나님을 통한 세상에 있기 때문에 세상과 상통하면서 교회가 세상에 소망을 주고 희망이 되어야 한다고 말 하는 것입니다. 이런입장에 서있는 지도자들은 세싱기대에, 젊은이들의 꿈에 부응하는 교회가 되려고 열정이 되어 있습니다.
분명 하나님은 산자의 하나님이라 하셨습니다. (마22:32) 그러니까 구원을 입지 못한 세상은 하나님이 없는 자들이요 때문에 그들은 생명도 없고 참 소망도 없다고 했습니다. (엡 2:12)보통사람들의 소망은 보이는 욕망적 세상나라에 있으나 교회는 하나님나라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본질적인 차이를 모르는 자들이 교회를 인본주의로 세워가는 것이며 그런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된 모습이 될 수 없는 것으로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39:6-7)
보통 사람들의 소망과 기대가 일시적인 욕망 중심에 있음을 다윗은 증거 하면서 자신은 하나님 백성이요 하나님 나라에 지도자로서 마땅히 소망은 하나님께 있어야 함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라”(딤전6:17)고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성도에게 영광의 소망이 되신다(골1:27)고 증거 했습니다.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소망입니다. 그리고 이 소망은 교회에만 주어진 것입니다. 때문에 교회가 가진 하나님 나라된 소망은 세상에 기대가 될 수 없고 함께 공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
어떤 신학자가 발표한 학술 주제를 보면 “기독교 영성은 사회 변혁의 영성이다”라고 주장한 것을 지면을 통해 보았는데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자체가 사회 변혁의 신앙적 동기이자 목표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존재 자체는 세계를 변화 시키는데 있으며 따라서 기독교 신앙의 동기나 추구하는 목표 자체도 사회 변혁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세상을 변화시킨 13인”이라는 책을 쓴 저자의 주장과 같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세상을 변화 시키는 일을 했고 오늘날 교회로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신학 논리나 저자들의 주관적 세상관의 영향 때문인지 오늘날 교회들은 교단별 차이 없이 공통적으로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고 그 변화를 기대하는 세상에 교회가 주도 하거나 영향을 끼쳐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다 구원의 본질과 교회의 본질을 모르는 자들의 발상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의 생애는 33년이신데 3년 공생애 기간 동안 천국복음을 전하시는 사역에 열중하셨습니다. 주로 갈릴리 지방에서 유대지방과 예루살렘에서 하나님 나라를 전하셨습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그가 주로 다니시며 머무르시며 사역하신 가버나움이나 나사렛이나 예루살렘등이 사회적으로 당시 그 세대가 원하는 대로 변화된 곳은 한 곳도 없습니다. 오히려 유대 사회는 예수님 때문에 혼란이 생겼고 자기들 기대에 맞는 변화를 주지 않는다고 거부하고 외면하며 아예 반항적으로 나오기도 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바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10;34)의 말씀대로였습니다.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던 유대 사회는 예수님에 의해 바뀌지 않았으며 예수님의 제자들 당시도 마찬가지였고 오히려 유대 사회는 로마에 의해 비참한 몰락을 가져 왔던 것입니다.
예수가 오신 후 2천년 이상 지난 오늘날 볼 때 과연 이스라엘은 어떤 변화를 찾아 볼 수 있을까요? 이스라엘은 세상 여러 나라중 한 나라로서 그저 세상적인 변화만 있을 뿐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야를 통한 이상적인 유대나라로는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아직도 그들의 기대대로 변화를 시켜줄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대로 복음은 땅끝까지 전파되는 역사를 따라 세계 곳곳에는 하나님의 교회들이 수많이 세워져왔고 또한 계속 세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세상은 인간세상으로만 발전하고 인간들의 역사로만 변해 갈 뿐입니다. 무엇보다 이 땅에는 교회가 무수히 많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들이 세상의 희망이 되고 좋은 세상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아예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고 성시화운동을 벌이며 그런자들 나름대로 애쓰고 있지만 누구나 공감하듯이 우리사회는, 그리고 이 세상은 점점 혼란하고 전쟁과 기근과 악하고 불안한 요소들이 더욱 가중되는 상태로만 갈 뿐임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예고한 종말대로 갈 뿐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의 변화를 위해 목적하시고 오신 분이라면 실패자가 됩니다.
마태복음 13:24-43에 보면 밭에 뿌려진 곡식과 가라지 비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밭은 세상이라 했고 곡식은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자의 아들들이라 했습니다. 즉 마귀의 자식들입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구분이 어렵지만 각자의 모습으로 자라간다고 했습니다. 가라지는 악한자의 모습으로 자라가는 것 이며 곡식된 천국의 백성들은 그 모습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라지는 영원한 지옥형벌로 곡식된 자들은 영원한 하나님나라로 가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19에 보면 교회된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세상은 악한자안에 처한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죄 아래 있고 사탄의 권세 아래 있으며 죄의 형벌을 지고 영원히 멸망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태의 본질은그 어느것으로도 변화 시킬 수 없고 벗어나게 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오신 것은 이런 세상중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교회로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즉 교회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어서 세상과 같았던 교회를 거룩한 교회로 새롭게 하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라고 한 것입니다.(고후 5:17) 그리스도는 죄로 옛것이었던 예정된 교회를 본질적인 변화를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죄에서의로 어둠에서 빛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새롭게 된 것이고 또한 새롭게 된 거룩한 교회모습으로 온전히 변화되도록 지금도 주님은 하나님우편에서 기도하시며 성령으로 역사하시며 교회구원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복음안에서 교회구원의 변화를 위해 세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않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하라”고 증거한 것입니다. (고전 10:33)
교회가 교인 된 자들이 세상에 변화를 주고 계몽을 시키고 영향을 주었다면 그것은 세상과 맞는 박애주의자들이고 인본주의자들의 일시적 부분적 감동이고 영향이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실현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의를 이루려고 애쓰는 것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거룩한 교회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
혹 글을 퍼오실 때는 경로 (url)까지 함께 퍼와서 올려 주세요 |
자료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 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