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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일4:7-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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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옛날 하나님 요즘 하나님
2007.10.20
*83세의 김수환 추기경이 전시회를 하고 있습니다.
전시회의 제목이 [바보야]입니다.
그동안 젊어서 모든 걸 다 아는 것처럼 산 게 [바보]고,
진작 그렇게 남들보다 모르는 것도 있고,
할 수 없는 것도 있고,
이길 수 없는 사람처럼 [바보]로 살았어야 하는데,
그걸 이제야 알게 되었으니
정말 바보라는 의미에서 [바보야]가 되었다고 전합니다.
예수는 그야말로 바보였습니다.
할 수 없는 게 많은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내려오지도 못했고,
비난하며 죽이려는 사람들을 대화로 이기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사람들은 그게 [사랑]인줄 아직도 모르고 있습니다.
눈 똥그랗게 뜨고 단어에 붙들려 분노할 영혼들이 없진 않겠지요.
그러나 가을이 아닙니까?
누구의 필요를 따라 하늘이 높아진 게 아니고,
어떤 사람의 경험과 지식을 좇아 낙엽이 지는 게 아니니,
설교도 이젠 [아첨]하는 일을 포기해야 합니다.
[옛날] 하나님과 [요즘] 하나님은 같을까요? 다를까요? 다릅니다.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 곳도 다르고 섬기는 방식도 다릅니다. 의아스러워 하시겠지만,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의 본문 8절과 16절을 보세요. 거듭하여 [하나님은 사랑이시다]고 말하고 있지요?
사람들은 대개 이 구절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런 의미라면 [하나님은 사랑하신다]고 하면 되는데, 어찌하여 [하나님=사랑이시다](ho theos agape estin)라고 하여, 하나님과 사랑을 동격으로 놓을까요? 하나님의 이름도 함부로 부르지 못하는 유대 관습을 생각할 때, 하나님을 사랑이라는 추상명사와 동격(=)으로 놓는 데는 그 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을 새롭게 이해했음을 의미합니다.
옛날 하나님은 하늘 위에 계셨어요. 전지전능하고(창 17:1, El Shaddai) 무소부재한 분(시 139:1-10)이셨어요. 옛날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어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아브라함이 늙고 약한 처지에 있을 때 그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맥락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던 때, 그들이 스스로 서는 것이 중요했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서게 하는, 있게 하는) 나다”라고 자기를 계시하셨지요?
그런데 예수님 시대에 와서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십자가를 통해 이 땅에 내려오셨어요. 하늘을 버리고 말입니다. 그 말은 그때부터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분이 아니라 땅에, 사람들 속에, 사람들의 삶속에 계신다는 뜻이에요. 그것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말입니다. 그 의미는 10절에서 더욱 분명해지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 주시고, 우리의 죄를 속하여 주시려고 속죄제물이 되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사람들에게로 내려 오셨다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전능하신 하나님]이해도 달라지는 거예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하게 되면 그때부터 [하나님도 못 하시는 것도 있다]가 되는 거죠. 예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면, 십자가 밑의 병사들이 “네가 메시아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했을 때 하늘의 군사를 동원하여 왕으로 등장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겟세마네동산에는, “할 수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물리쳐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지만, 그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습니다. 이걸로 보아 예수는 자기 뜻대로 못하는 게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래도 자기 뜻을 꺾고 하나님께 순종하여 십자가를 진 것은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이 십자가 사건 때문에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고 깨닫고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이 사랑이란 말은,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릴 때 토끼 길러 보셨죠? 토끼가 새끼를 낳을 때면 어떻게 하지요? 입으로 자기 털을 뽑아서 자리에 깔고 그럽니다. 그 속에 아기 토끼를 낳아요. 그러면 아기 토끼가 궁금해서 들춰 보게 되는데, 그러면 대부분 아기 토끼는 어미가 물어서 죽여 버려요. 불안해진 어미 토끼가 새끼들을 물어 죽인 것이라고 어른들은 말하셨죠. 그저 가만히 덮어두었으면 시간이 지나고 예쁜 토끼들이 나타났을 것인데, 그런 걸 잘 모르고 조급하게 열어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알았어요. 때론 덮어 두는 것도 유익이라는 걸 말입니다. 누구나 살아오면서 이런 경우, 덮어둬야 좋은 경우들을 많이 만나게 되죠? 그렇습니다.
우리 자녀들도 그냥 덮어줘야 할 때가 있습니다. 좀 속아주고 묻어줘도 때가 되면 스스로 깨닫게 됩니다. 선도나 훈육선생처럼 가방 뒤지고 일기장 검사, 편지 검사, 이메일 검사까지 하겠다고 하는 학부모는 스스로 전지전능한 부모가 되려고 하는 겁니다. 그보다는 [사랑하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모르는 게 있는 걸 말하는 거예요. 사랑은 공개가 아니라 덮어주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덮으시기 위해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말씀은 [하나님도 모르시는 게 있다]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은 모든 걸 아시는 분이지만 매사에 아는 척 하지 않고, 어수룩하게 속아 주기도 하고, 덮어 주기도 하고, 모른 척도 하신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자식 된 우리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말은 그런 뜻이에요.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이란 이런 거 아닌가요?
예수는 창녀, 간음한 자, 반역자, 세리, 죄인의 비밀을 묻어주고 건드리지 않았지요? 반면에 바리새파와 율법학자들은 그들을 번번이 죄인으로 정죄하고 따돌렸습니다. 그들에게는 비밀이라는 게 없었습니다. 그들은 현미경으로 보듯이 그들을 들여다보고 판단하고 정죄했습니다. 덮어 주고, 모른 척 하는 게 없었어요.
사람에겐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있습니다. 한비자 <세난편>에는 역린지화(逆鱗之禍)라는 말이 나옵니다.
“용이란 원래 순한 동물이다. 길을 잘 들이면 사람이 타고 다닐 수도 있다. 하지만 목 근처의 길이가 한 자나 되는 거꾸로 난 비늘, 역린을 건드리면 절대로 안 된다. 용은 이것을 건드리는 자를 반드시 죽여버린다. 군주에게도 이런 역린이 있으니 절대로 이것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
이것은 군주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적용할 수 있어요. 자식에게 늘 공부 얘기만 하고, 약점만 공격하면 반감만 높아집니다. 부부간에도 절대로 건드려서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걸 지켜 주는 게 사랑이에요. 조금 화나면 약점을 공격하고 처갓집 또는 시댁을 흉보는 것은 역린을 건드리는 것입니다. 용도 참지 못하는 그걸 사람이 어떻게 참겠어요. 절대로 다른 사람의 외모나 성격 등과 관련된 콤플렉스를 건드리면 안 됩니다. 무심코 던진 그런 한 마디 말이 듣는 사람을 불행하게 할 수도 있고 죽게 할 수도 있으니까요.
예수님은 남을 정죄하거나 판단하는 것을 못하게 하셨지요? 남을 판단하면 자신도 판단을 받는다고 하셨지요. 남의 눈의 티보다 자기 눈의 들보를 먼저 보라고 하셨어요. 간음죄로 한 여인을 정죄하려는 사람들에게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죄인이며 누구도 다른 사람을 정죄할 수 없는 존재임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을 하시는 것도 이런 이유가 있어요.
[비유]란 분명하게 말하는 대신 약간 감추는 방식이에요. 전지전능한 존재 같으면 한 마디 말로 깨달음을 주어서 명령하면 될 것이 아닙니까? 구약의 하나님처럼 [나는 나다] 이렇게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나 요즘 하나님은 하늘에서 내려 오셨기 때문에, 전지전능을 포기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명령하는 것처럼 말하는 대신에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시고, 진정한 이웃 사랑을 느끼게 하시고, 스스로 깨닫도록 초대하십니다. 숭고한 하늘의 진리를, 잃은 양, 잃은 돈, 장사꾼, 누룩, 씨 뿌리는 농부 등등 가장 평범한 단어들 속에 담으시지요. 전능하신 분의 뜻이 무식한 농부와 잇속 차리는 장사꾼의 삶에서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예수는 이런 식으로 평범한 것들, 작은 사람들을 속으로 내려 오셨어요. 그게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는 증거예요. 이것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을 뵈면 죽는다는 믿음이 있었어요.
여기서, 하나님은 인간으로부터 떨어진 <전적 타자>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아무리 도망을 가도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피할 수 없는 존재로 되어 있습니다. “내가 주의 영을 피해서 어디로 가며, 주의 얼굴을 피해서 어디로 도망치겠습니까? 내가 하늘로 올라가더라도 주께서는 거기에 계시고, 스올에다 자리를 펴더라도 주님은 거기에도 계십니다”(시 139:1-10). 이게 옛날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본문 12절에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 대한 이해가 다르게 나타나는 걸 알 수 있어요.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하나님은 멀리 떨어진 하늘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겁니다. 이게 요즘 하나님입니다. 구약의 이해와는 다르죠? 무소부재 하셨던 하나님께서 살과 피로 제한하시고, 저기서 여기로 내려오셔서 스스로 거처를 제한하신 것입니다.
아들만 둘을 둔 지방의 후배 목사가 있습니다. 이제 큰 아들은 중학교를 다니는데 하루에 한 뼘 씩 자란다고 자랑을 하다가 이런 말 하는 걸 들었습니다. 전에는 식구들이 어딜 가면 좋다고 따라 나섰는데 요즘엔 그런 답니다. “꼭 가야 합니까?” 어느 날 아침에 학교에 가는 아들의 엉덩이를 쓱 만지면서 “많이 컸다.”고 했더니 화를 벌컥 내면서 다음에는 이러지 마시라고 하는데 많이 서운하더래요. 그런데 요즘에는 아예 자기의 방문을 걸어 잠근답니다. 처음에는 그게 섭섭하고 배신감이 들었답니다. 그런데 이해가 된다는 거죠. 이제부턴 부모가 침범해선 안 되는 공간이 생긴 거예요. 부모가 굳이 문을 열려고 하면 못 열 것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문을 못 여는 것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집의 어디에나 갈 권한이 있지만,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식의 방에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내와 남편의 사이에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이게 무시되면 불행에 지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어디에나 가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활동하시던 갈릴리와 그의 십자가 위로 자신의 임재 장소를 제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사는 사람들 속에 하나님이 있다고 하므로 더욱 그 거처를 제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서는 쪼그라들었는지 모르지만 우리로서는 이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 모릅니다. 쉽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대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을 하늘에서 땅으로, 땅에서 사람들 속으로 자신을 제한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나를 위해, 이땅의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은 자신을 이렇게 제한하셨어요. 그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증거인 거예요. 그러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하는 거예요(11절).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도 이미 정해졌죠. 요즘 하나님이 자기를 포기하고 하늘에서 이곳으로 내려와 낮아짐으로 사랑하는 것처럼, 우리도 이렇게 사랑하면 됩니다. 우리도, 스스로 [전능]을 버리고 못하는 게 많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잘난 척 않고 못난 사람처럼 사는 겁니다. 알아도 모르는 사람처럼 슬쩍슬쩍 덮어주며 사는 것입니다. 이게 이웃사랑 아닙니까? 스스로 [전지]를 버리고 모르는 게 많고, 알아도 말 못하고, 덮어주고 비밀을 간직해주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무소부재]를 버리고 제한당하고 못 가는 데가 많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서로 사랑]하는 거예요.
사실 우리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은 사람들입니다. 어디서 들었는데, 편견이란 ‘아직 내가 경험하지 않는 것’ 이랍니다.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게 얼마나 많아요? 그게 모두 내게 편견이 되는 겁니다. 나하고 맞지 않는 사람이나 일이 있다면 그것은 누군가 나보다 먼저 경험한 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말하기보다 듣기를 많이 해야 하죠. 남의 말을 끊지 말고 끝까지 경청해야 합니다. 왜? 아직 내가 경험하지 않은 일일 수 있으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혼자서 떠들고, 늘 남에게 한 수 가르치려고 합니다. 자기가 다 알아요. 그래서 정죄하고 심판하려드는 거예요. 늘 화제를 독점하면서 자기가 결론을 내리려고 합니다. 이것이 예수를 비난하는 당시대의 종교인들 모습 아닙니까? 그리고 요즘도 비난 받는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삽니다. 이러면 그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사랑이 아닌 거죠.
바리새파와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이 율법 전문가이고 모르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죽게 만드는 가시 돋친 말들을 많이 했습니다. 소외된 작은 사람들에게 “세리와 죄인”이라는 별명을 붙이고 손가락질하였습니다. 예수님에게도 “술꾼, 먹보, 귀신들린 자” 등등 악의적 칭호들을 갖다 붙였습니다. 예수께서 병을 고치시면 왜 안식일에 고치느냐고 트집 잡고, 흥겹게 잔치를 하면 왜 요한의 제자들처럼 금식을 안 하느냐면서 시비를 걸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금식을 하니까 이번에는 그가 귀신이 들렸다 하고, 예수께서 능력 있는 일들을 행하시니까 바알세불에 지폈다고 모함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런 전지한 척 하는 말이나 비꼬는 말 대신에 칭찬과 격려 그리고 감사의 말들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 아는, 정용치 목사님을 뵈면서 알게 된 한 가지 귀중한 사실이 있습니다. 정 목사님 스스로도 그런 말씀을 하셨지만, 그분은 다른 사람을 결코 비난하거나 정죄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마음으로 흠모하고 존경하는 것은 그분이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처럼 굴지 않는다는 것이죠. 목사님은 음식을 잡수시곤 언제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참 맛난 식사였어요. 6.26 이후로 가장 맛있는 음식 이예요.” 그분은 옆에 누가 있던지 이렇게 말씀하셔요. “장래가 촉망되는 감리교의 인물 이예요. 신실하고 유능한 목사입니다. 이런 목사를 만난 게 저의 행복 이예요.” 저는 처음에 나보고만 그렇게 말씀하시는지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 예요. 누구에게나 그러셔요. 그걸 아는 대도 결코 싫지 않아요.
이런 언어는 우리를 감동하게 하고 들뜨게 합니다. 행복하게 하죠? 그쵸? 하나님은 우리 가까이 계시고 싶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보내신 분입니다. 그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관심이 많으신 분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하면서 자꾸 하나님을 먼 곳으로 밀어놓는 것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거부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사랑이 불가능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먼저 이렇게 [사랑이 되셔서],[이런 사랑의 방식]으로 우리를 사랑해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것을 모방해서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전능을 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요즘 우리 하나님은 못하는 게 있으십니다. 모르는 게 있으신 분입니다. 갈 수 없는 곳이 있으십니다.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서 일부러 그렇게 자신을 한정해 좋으셨다는 겁니다. 그렇게까지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도 못하는 것, 모르는 것, 갈 수 없는 곳이 있음을 인정하고 겸허하게 서로 칭찬하고 격려하고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사는 것이 바로 그 [사랑의 삶]아니겠어요?
옛날 하나님은 옛날식대로 섬겨야겠지요. 그러나 요즘 하나님은 요즘 식대로 섬겨야 합니다. 옛날 하나님은 전지전능과 무소부재의 하나님이지만, 요즘 하나님은 자신을 제한하여 우리에게 내려와 우리의 허물을 덮어주고, 기다려주고, 모른 척 해주는 하나님입니다. 이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렇게 살아서 사랑의 삶을 이뤄야 합니다. 그게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요즘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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