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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바람이 불게 하라!

요한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2558 추천 수 0 2011.11.29 15:08:37
.........
성경본문 : 요3:1-8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풍차와 바람개비

우리교회 목사들이 여러 차례 모여 내년 목회 일정과 내용들을 기도하며 준비하고 있습니다. 내년 교회의 표어를 뭐라고 할까 기도 중에 있는데, 저는 요한복음, 오늘 본문을 읽다가 이런 제목이 떠올랐습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게 하라!”

크리스티나 로제티의“누가 바람을 보았는가?”라는 시가 있습니다.

"누가 바람을 보았는가?
나도 당신도 볼 수 없지
하지만 나뭇잎이 흔들릴 때
바람은 지나가고 있지

누가 바람을 보았는가?
당신도 나도 볼 수 없지
하지만 나무들이 머리를 숙일 때
바람은 그 곁을 지나고 있지."

참 아름다운 시죠? 이 시에는 바람은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들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낸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 시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8절과 비슷합니다. 로제티의 시에서 바람이 보이지 않는 것을 특징적으로 묘사했다면, 8절에서는 바람의 자유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성령은 불고 싶은 대로 붑니다. 우리는 성령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8절 하반 절입니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 즉“위로 부터”,“성령으로 부터”태어난 사람은 바로 이러한 바람의 특징, 바로 이러한 성령의 특징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헬라어성경에는 8절 맨 앞에“바람”(to pneuma)이 나오고 맨 끝에“성령으로부터(ek tou pneumati) 난 사람”이 나오는데, 이 두 단어는 같은 단어입니다. 두 단어를 모두 바람으로 번역하면 이렇게 되죠.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바람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

헬라어성경에서 이 두 단어를 일치시키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 큰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위로 부터”또는“성령으로”난 사람에 대해서 어떤 틀에 박힌 신앙인 또는 열광주의자라는 고정관념을 갖기가 쉬워요. 그러나 본래는 그렇지 않습니다.
“바람에게서 태어난 사람”(바람의 아들)이라는 구절에서 느끼는 바와 같이, 성령으로 난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그런 자유를 갖습니다.

구약성서는 성령을 폭풍 같은 바람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루아흐는 홍해를 말리는 엄청난 능력의 바람입니다.

“주께서 바람을 일으키시니, 바다가 그들을 덮었고, 그들은 거센 물 속에 납덩이처럼 잠겨 버렸습니다”(출 15:10).

성령은 우리가 컨트롤할 수 없는 자유로운 분입니다. 사람들은 자꾸만 하나님을 종교나 의식이라는 틀, 심지어는 성전 속에 가두려고 합니다. 그것은 결국 그 종교를 타락하게 해요. 외국에서는 신선한 바람을 캔 속에 넣어서 팔기도 한다고 하지만, 대관령 위에서 부는 바람을 캔 속에 담을 수는 없습니다. 그 바람은 성분이나 요소가 아니라 그대로 힘이고 바로 거기에서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높은 곳에 올라가야 만날 수 있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려면 하나님 계신 곳으로 올라가야지 우리가 쓰기 쉬운 방편이 되도록 담으려 해선 안 되죠. 하나님을 종교로 바꾸어, 사람들이 병들고 외로울 때, 각종 의식 때에 그 도움을 적절이 받으면서 살려고 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의 소박한 소망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바람을 캔 속에 넣는 시도일 뿐 진정한 하나님 체험이라 할 수 없습니다.

폴 틸리히라는 공부쟁이는 성령론에서 힘과 의미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성령론에서 의미가 빠지면 열광주의가 되며, 힘이 빠지면 영지주의가 된다는 것입니다. 의미와 동시에 힘이 있어야 건강한 성령론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성령론에는 힘이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자꾸 신비주의화 내면주의화 되어서, 심리학과 성령론이 혼동되고 있습니다. 인간의 영과 하나님의 영이 혼동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심리학이나 최면술로 전락하게 됩니다.

“위로부터”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은 우리가 처분할 수 없는 힘에 우리를 맡긴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명심 하세요. “위로부터”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은 우리가 처분할 수 없는 힘에 우리를 맡긴다는 말입니다. 엄청나게 큰 위력의 바람 앞에서 감동을 느끼듯이 그런 성령을 체험할 때 우리는 감동을 느끼고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1)
성령이 이런 낯선 분이고 우리가 조종할 수 없는 분이라면 우리가 다시 태어나고, 성령을 충만히 받는 길은 우리 자신을 그분께 내 맡기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니고데모처럼 자기의 출신성분이나 현재 지위를 고수하려고 하면 새로운 일을 받아들일 수 없고 하나님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셔도 그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농담을 하듯 어떻게 자궁 속으로 다시 들어가느냐는 다소 불경한 소리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머리만 커진 현대인들, 또는 자기만 잘났다는 대접을 받고 자라서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들의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외적으로 보아서는 가문도 좋고 학교도 좋은 데 나왔고 교회도 열심히 나가고 아무런 문제가 없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의 속에서 성령의 바람이 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대관령 꼭대기의 힘찬 바람에 거대한 풍차를 돌리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러나 자기 아집만 고수하는 사람은 자기 입김으로 바람개비를 돌리는 것과 같다고 하겠죠. 그런데도 그런 풍차를 비웃으면서 자기 바람개비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게 누군지 아세요? 니고데모입니다. 그가 나는 바리새파다 국회의원이다 하는 것은 자기 바람개비를 돌리는 정도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직분이 뭐지, 얼마나 교회를 다녔지, 헌금을 얼마나 하지하며 자랑하는 것은, 그것을 은근히 과시하는 행위는 ‘나 바람개비야’하는 말과 같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바람은 집채를 날아가게 할 것 같은 강한 바람, 하나님의 루아흐(콧김, 폭풍)입니다. 언젠가 엄청난 재앙을 가져왔던 쓰나미 같은 해일도 결국 강한 바람이 아닙니까? 그것은 선풍기로 일으키지 못합니다. 바람개비 따위는 거기서는 금세 망가지고 맙니다.
우리가 전에 쓰던 자전거에는 발전기가 달려 있었습니다. 밤에는 타이어에 발전기가 닿게 하고 열심히 달리면 앞에 라이트에 불이 들어옵니다. 그 덕분에 페달을 밟기가 좀 더 힘들었죠. 우리가 일으키는 전기의 양은 그 정도인 것입니다. 대관령 삼양목장에는 풍력발전기가 50기 가까이 세워져 있답니다.  기둥 높이 40미터에 풍차 지름 40미터의 거대한 풍차가 힘차게 돌고 있었는데 거기서 발전하는 전력이 강릉의 수만 가구에 전기를 공급하며, 거기서 얻는 수익도 엄청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페달을 밟아서 일으키는 전기와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의 바람은 힘이 있습니다. 무한합니다. 우리에게 엄청난 능력과 에너지를 주어서 많은 사람들이 살게 만듭니다.

우리는 자신의 내면적인 노력과 육적인 자랑으로 알량한 바람개비를 돌리려고 하지 말고, 그 엄청나게 크고 위력적인 하나님의 바람에 자기를 맡겨 성령의 바람에 거대한 풍차를 돌려서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일들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바람을 만나지 못하고 자꾸 자기 속으로, 자기 집안으로만 들어가면 우리는 싸움만 하게 됩니다. 이런 성령의 능력에 닿아야 됩니다. 그러려면 성령의 바람이 부는 언덕으로 올라가야 하겠죠? 대관령 바람을 맞으려면 대관령으로 가야하고, 산위에서 부는 솔바람을 맞으려면 뒷동산으로 가듯이 말입니다.

교회는 그런 성령의 바람을 맞이하는 곳입니다. 성령의 바람이 강하게 불어오는 곳입니다. 교회는 그 지역의 작은 언덕 위에 있을 수 있지만, 그 안에서 부는 성령의 바람만은 대관령 삼양목장에서 부는 바람 이상으로 강해야 합니다. 자꾸만 인간적인 아이디어로 교회를 하려고 하고 친목회로 하려고 하고 무슨무슨 위원회로만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겸허하게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직 하나님의 쓸모가 아직 있다면 우리를 쓰시되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령의 바람으로, 바람개비 같은 우리를 성령의 풍차로 바꾸어서 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일에 써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모두 바람개비 하나씩은 갖고 있습니다. 그 바람개비로 잔재주를 부리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람개비는 아이들이 깔깔 웃는 정도 즐거움을 줄 뿐입니다. 니고데모처럼 기껏 자기 자랑하는 용입니다. 성령은 그런 바람개비가 아니라 거대한 풍차를 돌립니다. 이제 우리의 바람개비를 저만큼 치우고 성령의 바람을 맞이할 수 있는 거대한 풍차를 준비해야겠습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하여금 부족한 우리들에게서 엄청난 은사를 일으키시도록 우리가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그 성령 풍차를 통하여 우리가 사는 곳에 빛이 더 비취게 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따뜻함이 전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2)

태양열주택만 알았는데 요즘은 태양광발전이라고 합니다. 태양열이 그저 열로 물을 끓여 터빈을 돌려 전기를 얻는 것이라면, 반도체 기술이 발달하여 이제는 태양광에 반응하여 전기 에너지로 바꾸는 것이 생겼다고 합니다. 태양은 변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무능할 때는 태양은 그저 옷 말리고 고추 말리는 데 쓰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적극적으로 사고하고 준비가 되면, 태양의 선물은 우리에게 태양열 에너지도 되고, 태양광 에너지도 됩니다. 즉 하나님의 능력이 아무리 커도 우리가 그것을 쓰지 못하면 무능해진다는 말입니다.

성령의 바람이 아무리 불어도 우리가 거기에 닿지 못하면, 우리가 그 속에 없다면 우리는 무용지물이 됩니다. 그러니 성령의 바람을 맞이하려면 높이 올라가야 합니다. 그것은 기도의 무릎으로만 됩니다. 우리는 너무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가 그저 형식적이고 문학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나를 꺾는 기도, 하나님께 온전한 신뢰를 드리는 기도, 나를 맡기는 기도를 무릎으로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높은 산에 올라가야 한다고 말씀 드리는 겁니다. 그래야 성령의 바람이 우리에게 불어올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여기 이렇게 앉아 우리나라에는 바람이 별로 불지 않는다고 착각하고 있었을 때도, 대관령 꼭대기에서는 바람이 집채를 날릴 만큼 세게 불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바람을 체험하고 그 바람에 닿아서 집채만한 풍차를 돌리고 그 에너지로 은사를 받고 기적을 일으키는 경험들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발명을 하기도 하고 영감을 얻어 창의적인 일들을 하고, 시와 소설을 쓰고, 작곡을 하고 명화를 남기기도 합니다. 또는 발명을 하고 특허를 얻고 아이디어를 얻어 큰 재산을 이루고 그것으로 선한 사업에 쓰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산에 오르지 않으면서 늘 기적은 과거에만 일어나고, 나에게는 바람 한 점 없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기로 선풍기 돌리면서 그저 세상은 돈 넣는 만큼만 돌아간다고 불평합니다. 에어콘 시원한 줄 알지만 전기요금 무서워 못 돌린다면서 세상에는 돈 들어가는 것밖에 없다고 투덜거립니다. 그런 사람은 구름이 끼었다고 태양이 없다고 불평하는 사람과 같지 않나요? 문제는 우리가 주님의 산에 오르지 않아서입니다. 성령의 바람에 나를 맡기지 않아서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살리는 일도,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길도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뭐를 하려고 하는 것은 마치 바람개비 돌리는 일과 같고, 전기료 물어가면서 선풍기 돌리는 일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그렇게 인위적인 노력만으로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의 바람이 여기에 불어오셔야 합니다. 성령의 바람에 우리를 맡겨야 합니다. 우리 바람개비 대신 성령의 풍차가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밖에 없습니다.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틈날 때마다 기도해야겠습니다.

성령이시여 불어오소서, 나를 주장하시고 내게 불어오시어 나를 통하여 주님 일을 하소서. 우리가 섬기는 교회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역에 불어오소서. 우리의 풍차를 이렇게 높이 세우니 힘차게 돌게 하시여 성령의 바람으로 이 교회와 이 지역을 밝히소서. 나아가 더 넓은 세상을 따뜻하게 하소서.

이렇게 간절하게 기도해야겠습니다. 우리가 각자 하는 일들은 다양하지만 우리가 선 곳에서 성령의 풍차들이 되어서, 성령의 바람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는 그런 성령의 풍차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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