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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2: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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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아기 예수를 맞는 마음
*요즘 교회의 목사들과 설교를 나눠 하는 까닭에
저는 비교적 일찍 주일 설교원고가 정리됩니다.
오늘은 엠마오 가는 길 18기 봉사자로 가기 때문에
미리 준비했습니다.
훈련원에서 갈고 다듬을 것입니다.
사랑합니다, 성암교회 교우 여러분!
12월17일, 그러니까 다음 주 월요일에 제 큰 딸 은실이가 결혼을 하겠다는 청년과 함께 집에 옵니다. 처음에는 그런 이야기를 듣고도 감정의 변화가 없었는데 그날이 가까워 올수록 이런저런 마음이 드는 겁니다. 잠자리는 어떻게 하나, 먹는 건 어떻게 해야 하나, 보름 가까이 있겠다는데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상태로 지내자니 답답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딸의 남자인데 ‘어떻게 맞을 준비를 해야 하나’ 하게 됩니다. 여러분도 제 이런 마음을 조금은 이해하시겠죠? 그렇습니다. 딸의 남자를 만나는 일에도 이렇게 특별하지는 않다 해도 맞을 준비의 마음과 행위가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 다시 태어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탄강에 대해 우리는 어떤 준비가 있어야 할까요?
요한복음은 태초의 말씀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 하더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안드레, 베드로, 빌립, 나다나엘 등을 제자로 부르신 후 공생애를 시작하십니다.
주목할 것은 예수님의 공생애가 흥겨운 혼인잔치와 함께 시작 된다는 것입니다. 현대적 용어를 빌리면 주님의 공생애는 신나는 파티와 함께 시작됩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왜 하필 결혼식 피로연입니까? 잔치 중에서도 혼인잔치는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최고의 잔치입니다. 아담이 하와를 만나 잃어버린 갈비뼈를 되찾는 기쁨의 자리, 사랑하는 청춘 남녀가 한 몸이 되는 즐거운 자리, 축하와 인사와 친교가 이루어지는 그 자리로부터 당신 공생애를 시작했다는 사실이 암시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11절에 보면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의 결론은 이렇게 내려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주님께서 가나의 혼인잔치에 참석하신 것도 또 거기서 기적을 행하신 것도 다 제자들을 염두에 둔 행동이셨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 가나의 하루를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혼인잔치에 초대받아 가셨습니다. 그곳 아닌 다른 곳엘 가실 수도 있었겠지만 그 잔칫집을 찾아 가셨습니다. 함께 간 제자들 가운데는 한때 세례요한의 제자였다가 주님의 제자가 된 사람도 몇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안드레를 통해 주님께 온 베드로도 있었고 빌립을 통해 주님께 온 나다나엘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저들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나의 혼인 잔치 집에 오셔서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시는 모습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제 갓 주님을 따라나선 저들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많은 게 아닙니다. 세례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와 또 한 제자는 주님이 머무는 곳에 가서 몇 시간 함께 있었던 것이 다였고 빌립이나 나다나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들이 잔치 집을 찾아 먹고 마시는 주님을 어떻게 보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그러한 모습을 보며 자기의 옛 스승이었던 세례요한을 떠올렸을 겁니다. 그 옛 스승은 결혼잔치 같은 자리에 가기는 커녕 광야에서 메뚜기와 들 꿀로 요기를 하며 금욕생활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새 스승은 공생애 처음부터 먹자, 놀자 판 입니다. 제자들은 금욕적이었던 옛 스승을 떠올리면서 새 스승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가졌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제자들은 유대교적 분위기에 익숙한 자들입니다. 근신하고, 금식도 하고, 경건을 추구하는 종교적 분위기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저들은 옛 스승으로부터 또 유대 전통으로부터 구도생활은 모름지기 엄격하고 근엄해야 한다는 것을 배운 자들이었습니다. 나다나엘을 보십시오. 그는 무화과나무 아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명상하며 메시야를 기다리던 자였습니다.
저들은 주님의 제자가 된 후 주님이 자기들을 제자로 삼으신 후 어디로 데려가려 하자 여러가지 추측을 했을 것입니다. 제사가 이루어지는 성전으로 가는 것일까, 율법이 선포되는 회당으로 가는 것일까. 아니면 옛 스승처럼 광야로 나가 단식하며 기도하려는 것일까. 그런데 그들의 추측과는 너무도 다르게 혼인잔치 집으로 데리고 온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기치 못한 주님의 이러한 행동에 크게 놀랐을 겁니다. 저들은 통상 경건한 사람들이 그러하듯 순수한 즐거움 앞에서도 눈살을 찌푸리던 자들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웃음 사절, 재미 사절, 흥겨움 사절'이란 표지판을 얼굴에 달고 다니면서 엄숙함을 드러내는 자들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여흥을 즐기는 자리에 초대받아도 여지없이 거절하고 유머러스한 농담을 들으면서도 어금니를 깨물고 웃음을 참으려는 자들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경건한 사람들이 그러하듯 목소리를 착 내리깔고 묵직하게 무게를 실어 말하는 자들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아닙니다. 그들의 새 스승이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동안은 심판을 선포했던 세례요한을 따라다녔기 때문에 낮고 음울하고 음산한 단조의 목소리가 어울렸을지 모르나 이제부터는 복음,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제자이기에 그런 옛 모습은 어울리지가 않습니다. 이제부터는 천국의 기쁨에 가득 찬 모습으로 삶에 지친 영혼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불어넣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치관은 '축하하고, 축하하고, 축하하는 것'이었습니다. 곧 '파티하고, 파티하고, 파티하는 것'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주님의 적대자들이 예수님을 조롱하려고 하는 말이 '먹기를 탐하고 마시기를 즐기는 자'라고 했겠습니까? '먹고 마시는 자'라는 그 별명이 어떤 연고로 주님께 붙었겠습니까? 주님께서 들려주신 비유들을 보면 온통 잔치 이야기로 가득 합니다. 잃었던 양을 찾았다고 잔치, 잃었던 동전을 찾았다고 잔치, 잃었던 아들을 찾았다고 잔치. 잔치, 잔치, 잔치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모습이 제자들에게 얼마나 낯설고 황당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저들이 예수께서 그 잔치 집에서 포도주를 채워 흥을 지속시키는 것을 보고 주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엄청난 변화를 수반한 믿음이었습니다. 그것은 이제까지의 자신들의 신앙 스타일을 완전히 뒤집는 자기부인과 자기변혁의 믿음이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첫 제자들이 저들의 옛 스승 세례요한에게서 배운 그대로 종교적 엄격함과 근신만을 고집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만일 저들이 옛날의 세례요한을 따라 다니면 익혔던 수행법칙을 고집하면서 계속해서 극기하고 단식했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저들은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삶의 스타일은 전혀 180도 상반된 것이었습니다. '먹기를 탐하고 마시기를 즐기는 자'와 '지독하게 금욕하는 금욕자'였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예수의 제자이지 세례요한의 제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 된 저들은 주님이 사셨던 삶의 방식을 따르고 그분의 사고방식을 좇아야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가나의 혼인잔칫집에서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은 저들의 선입견과 고정관념을 허물었다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요한복음에서 주님의 첫 제자들은 제자로서 양성을 받으며 무엇보다 먼저 저들의 옛 가치관과 선입견을 포기할 것을 요구받습니다.
나다나엘은 빌립의 소개를 듣고서는 "나사렛 같은 촌 동네에서 어떻게 그리스도가 나올 수 있겠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런 그가 주님을 만나고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당대 세상이 갖고 있던 메시아의 신원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도록 요구받습니다. 오늘 이 가나의 혼인잔치를 통해서도 신앙생활은 모름지기 엄숙하고 금욕적 이어야한다는 선입견을 버리도록 저들은 요구받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욱 이어지는 내용 속에서 예수님은 유다에서 갈릴리로 내려가면서 유대인들의 주통로인 요단강 동쪽 길을 택하지 않고 우정 돌아가는 사마리아인의 길을 택함으로서 사마리아에 대한 선입견을 깨도록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수가성 야곱의 우물가에서 여자와 단둘이 이야기하는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임으로서 저들의 선입견을 무너뜨리십니다. 제자들이 그 모습을 보고 놀랐던 것은 당시 유대 남자가 사마리아 여자와는 절대 말을 해선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건 유대 관습을 어기는 것이요 스승으로서의 품위에도 맞지 않는 행위였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제자들이 그런 고리타분한 선입견을 버리도록 요구하시는 겁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한 번도 이러한 선입견들에 대해서 질문을 받아본 적도, 또 스스로 해본 적도 없었습니다. 문화가 그랬고 모두가 그러한 선입견을 당연시했습니다. 그 고정된 관습과 전통의 틀 속에서 살아갔습니다. 주님은 제자를 부르시어 하나님 나라 사역을 시작하실 때 무엇보다 먼저 저들 속에 있는 이러한 선입견과 고정관념들을 다 허물어뜨림으로서 새 일을 시작하고자 하셨던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역시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지만 나름의 굳어진 선입견과 고정관념을 가지고 우리식의 신앙생활을 도모해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러하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합당한 자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올바른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모든 선입견과 고정관념들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비록 그것이 좋은 것이라고 해도 주님의 가치관과 다르고 주님의 시선과 다르다면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선입견은 영적 진보의 큰 장애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선입견을 버리지 못함으로서 하나님을 상심케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 선입견에 걸려서 스스로 상처를 입고 또 남에게 상처 주는 일이 그 얼마며 치유되지 않고 회복되지 못하는 고통이 또 얼마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이 가나의 혼인잔치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그분의 멋진 인간성을 함빡 느끼게 하는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의 삶 속에 들어와 생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생의 여가를 함께 즐기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은 남을 불편하게 만들만큼 경건하고 심각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편안하고 유쾌한 성품을 가진 분이셨고 넓은 마음으로 누구든 품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그 어느 누구를 향해서도 마음을 열어놓으신 분이셨습니다. 세리와 창기와 죄인 그리고 부유한 자, 바리새인들에게도 자신을 열고 그들의 초대에 응하기도 하신 분이셨습니다. 어느 한 부류의 사람들하고만 친하게 지낸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열려있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그랬기에 천국의 주인이 되실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계는 모두가 함께 어우러지는 자리입니다. 선입견과 편견과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굳고 경직되고 메마른 마음을 깨부수고, 열린 마음, 포용하는 마음, 더불어 즐거워하는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맞을 수 있는 복된 마음입니다. 가나의 잔칫집에 제자들을 데리고 가셔서 그 집의 흥을 북돋워주신 주님을 생각하며 우리는 이 대강절을 지나야 하겠습니다. 우리나라도, 우리 교회도, 우리 가정도 그리고 내 인생도 축제여야 할 것입니다.
내 딸아이의 남자는 외국인입니다. 스위스 사람이랍니다. 그는 그만의 독특한 문화와 의식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아비 된 제가 그를 맞아 들이려 할 때 준비할 마음은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편견과 한정된 지역의 문화경험을 포기해야 하는 겁니다. 딸의 남자 친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기 예수를 우리는 어떻게 맞아야 하는가요? 나에게 예수를 맞추는 게 아니라 그에게 나를 맞추려는 마음입니다. 그의 사고와 행동, 목표와 삶의 방향에 나를 맞추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다 고 해도, 그렇게 배우지 않았어도, 살지 않았어도 그를 좇아 그처럼 살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우리들의 마음이어야 하고, 마침내 예수를 만나게 될 때 우리의 모든 고정관념과 경험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예수의 탄강이 우리에게 복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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