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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롬5: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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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만물이 봄 볕 속에 들듯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어야 합니다.)
롬 5:1-11
*간증 집회가 이어진 다음의 설교입니다.
이것은 집회 내내 하나님이 나와 여러분에게 하신 말씀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봄 볕에 만물이 생기를 일으키듯,
하나님 은혜의 생기가 교우들에게 넉넉하길 빕니다.
우리는 가끔 유명한 사람들의 자살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 그들이 무슨 이유에서 그런 길을 택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런 소식을 접하게 될 때 사람들은 겉으로 보는 것과 다른 자아를 갖고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죠. 겉으로 볼 때는 분명히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사람인데, 그가 그렇게 큰 괴로움을 안고 있었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눈에 보이지 않는 아픔과 고통을 갖고 신음하고 있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대개 그런 경우 그 자신을 엄습하는 그 힘은 스스로 이길 수 없는 막강한 것입니다.
죄의 힘도 그렇습니다. 그것을 우리 스스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찹니다. 우리가 갓 태어난 병아리라면 죄는 독수리 같은 것입니다. 독수리의 날카로운 발톱 앞에서 병아리는 꼼짝도 못하고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한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이 죄의 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로 들어갈 때만 우리는 그 죄의 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2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금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믿음으로 나아왔습니다”(표준새번역, 2절)
바울은 앞의 3장에서 죄의 절망적인 상태에 대해서 솔직하게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죄의 힘에서 벗어나는 것은 오직 믿음뿐이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을 때,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고 은혜의 자리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은혜의 자리에’는 의역한 것이고 원어는 ‘은혜 속으로’(eis ten charin)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추상명사로 생각하지만 추상명사로는 번역이 잘 안 되어서 ‘은혜의 자리’라고 한 것입니다. 은혜는 그만큼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것이고 우리를 사로잡는 것이고 우리에게 물리력을 느끼게 하는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죄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영향권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 속에서 우리는 가장 비참한 사람이 된 것으로 느끼지만, 은혜 안에서 우리는 우리가 왕의 아들임을 알게 됩니다. 죄 안에서 우리는 죄책감에 시달리지만, 은혜 가운데서 우리는 자신이 조건 없이 받아들여졌음을 압니다. 죄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우리는 우울하게 되지만, 은혜 가운데서 우리는 환희에 찬 기쁨을 맛봅니다. 죄의 세계의 음침한 곳에서 우리는 자신이 길을 잃었다고 느끼지만, 은혜 가운데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가졌음을 압니다. 은혜는 우리를 해방하여 생명의 기쁨으로 들어가게 해 주는 풍성한 능력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은혜의 영향권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방금 읽은 구절을 보면,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어떻게 해야 믿음을 가질 수 있느냐? 믿음을 가지려고 노력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은, 의롭다 함을 받는 은혜가 우리의 행위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선물로 주어진 것임을 가르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를 잘못 생각하여, 마치 ‘행위’라는 단어 대신에 ‘믿음’이라는 단어를 바꿔치기 한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또 다시 ‘믿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좌절하는 악순환을 되풀이하게 됩니다. 이것은 이름만 바꾼 것이지 이전과 똑같은 것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은혜’(charis)라는 말은 ‘선물’(은사=charisma)이라는 말과 같은 어원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지 우리가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의로운 사람을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선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감히 죽을 사람은 드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으로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7-8절).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주님을 향한 사랑을 무관심과 미워함으로 바꾸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함없이 사람에게 오셔서 “어쨌든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사랑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가운데 눈으로 볼 수 있게 나타나신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으로 있을 때에” 이런 은혜가 주어졌습니다. 여기에서 은혜의 본질이 분명히 나타납니다. 은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무슨 착한 일을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우리 쪽에 어떤 받아들일 만한 장점이 없는데도 거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이 다마스쿠스로 가고 있었을 때, 그의 마음은 크리스천에 대한 증오심으로 불탔습니 예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고, 바울은 자신의 증오에 넘치는 행동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그를 사랑한 것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용서와 예수의 살아 있는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그 시점부터, 그는 죽는 날까지 하나님과 모든 사람들에게 최고의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은혜는 미움을 극복하고 사람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웁니다. 미움의 심연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빛은 비춰옵니다. 왜냐하면 은혜는 바울이 크리스천을 잔혹하게 박해하고 있는 동안에 그에게 왔기 때문입니다.
<아는 여자>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야구선수인 주인공은 몸이 안 좋아서 의사를 찾아갔다가 앞으로 두 달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는 충격적인 말을 듣게 됩니다. 그는 자포자기하여 술을 마시기도 했지만, 한편 두 달밖에 남지 않은 생을 더 소중하게 사는 경험을 합니다. 은행에 복면강도들이 들어와서 권총을 들이대고 협박을 할 때도 죽음이 두렵지 않으므로 오히려 태연하게 그들을 설득하여 경찰서로 보냅니다. 집에 들어온 좀도둑의 어려운 사정을 듣고는 선뜻 큰돈을 집어 주기도 합니다. 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바텐더 여자와 진정한 사랑을 나누기도 합니다. 그가 건강했다면 그렇게 행동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의사가 필름을 혼동해서 오진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의사를 가만 두지 않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데……, 오진 때문에 별나게 살다 보니 집도 날아가고 직장 날아가고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그렇게 해서 그가 새로운 인생을 찾았고 진정한 사랑을 찾았음을 암시하면서 영화는 끝납니다.
성경은 늘 그리스도인의 삶은 종말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미리 체험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이런 영화에서 우리는 코미디 형태이긴 하지만 사람에게 종말이 왔다는 가정 하에서 얼마나 생이 변할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런 재난, 환난에서 오는 종말 의식 때문에 사람은 평소에 모르던 진리를 깨닫고, 은혜의 세계를 알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난이나 좌절, 지독한 증오 같은 것이 우리에게 있을 때에 그것 때문에 절망하지 말고, 오히려 그런 가운데서 역으로 더 깊은 은혜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로 있을 때에도 그분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하나님과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에 와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한 일이 아니겠습니까?”(10절)
본문 10-11절에서는 은혜 가운데 사는 삶은 하나님과 화해하는 삶이라는 것이 분명히 나타나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무관심으로 바뀌면, 우리는 자신을 그로부터 분리시킵니다. 우리는 기도로 그에게 말하거나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 교회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교회 건물이 일반 상가 건물과 같이 무덤덤해 보이고 교회 행사나 예배나 기도회 그 무엇도 감동을 주기는커녕 무덤덤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하나님과의 화해는 명상하듯 자기 혼자 내적으로 깨닫기만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은혜의 영향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며, 기도와 성경읽기와 찬양과 예배, 봉사와 헌신 그리고 모이기를 힘쓰는 성도의 삶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 속으로 들어가는 경험입니다. 이 경험, 이 체험, 이 실천이 없이는 우리는 은혜를 관념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게 되어요.
우리 주위에 늘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을 닫아걸고 무관심하고 들어가 보지 않으면 은혜는 나에게서 멀리 있고 나는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용기를 내어 그 세계로 들어갈 때 은혜가 우리 속에서 비로소 작동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용기를 내어 기도하고, 성경 읽고, 혼자 힘들면 예배에 참여하고 성경공부에 참여하여 말씀 듣는 가운데, 또는 이웃을 위하여 봉사하고 선교활동을 하는 가운데,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은혜의 세계가 우리에게 열리는 것입니다. <아는 여자>의 주인공은 의사의 실수 때문에 본의 아니게 남을 돕고, 용기 있게 행동하고, 사랑하는 진정한 삶의 체험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오진임을 알고 난 다음에도, 이미 그는 진한 ‘체험 속으로’ 들어가는 경험을 했기 때문에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삶의 가능성은 그의 주위에 늘 있었지만, 다만 그가 눈을 뜨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오직 그 ‘체험 속으로’ 들어갈 때 눈을 뜰 수 있었습니다. 은혜의 세계도 이와 같습니다. 우연이든 실수든 나의 노력이든 무슨 계기든 간에, 하나님과 화해하는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경험을 할 때 비로소 은혜의 세계에 눈을 뜰 수 있습니다. 지난주일 오후부터 있었던 평신도들의 간증에서 우리는 확실하게 ‘은혜로 사는 비결’을 알 수 있었지 않았습니까? 그게 바로 하나님과 화해하는 삶을 살 게 될 때가 아니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하게 될 때 가장 본래적인 나의 길을 가고 있다는 믿음과 내가 가장 잘 살고 있다는 확신이 나를 한없이 긍정하게 하고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시켜 줍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화해를 이루지 못해서 늘 두려움 속에서 삽니다. 자기가 병에 걸릴지 모른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면서 삽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고 은혜의 경험이 없으니까 매사가 두려운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식, 은혜의 영향권에 속해 있지 않다는 의식, 즉 죄는 늘 우리에게 두려움, 죄책감, 공포를 일으킵니다. 그것의 본질이 사망으로 우리를 끌고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일에 무능하게 하고, 대인관계에 실패하게 하고, 자기 자신을 학대하게 하고, 하나님과 소원하게 만듭니다. 기도를 중지하고 하나님께 나오기를 중지하게 만듭니다. 늘 두려움 속에서 전전긍긍하며 살아가게 만듭니다. 되는 일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매사에 억지로 일을 하기 때문에 늘 에너지가 고갈되어 있음을 느끼고 늘 피곤합니다. 이런 사람은 늘 짜증이 붙어 있습니다. 사람과 스쳐도 꼭 밀칩니다. 항상 서두르고 누가 다치기라도 하면 소리 지르며 싸웁니다.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침대에서 자기를 몰아내야 합니다. 억지로 세수시키고 머리 감겨야 합니다. 늘 지각하지 않기 위해서 자기를 채찍질하고 힘들게 노력해야 합니다. 왜 그런가요?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니까 그렇습니다. 그의 에너지는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도록 자기를 가동하고 일으키고 재촉하고 후회하고 시계를 보고 동동거리는 데 다써버리고 나면 정작 일할 곳에 가서 남는 것은 짜증뿐인 것입니다.
반대로 많은 일을 하면서도 엄청나게 바쁘면서도 소리 없이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일의 목표가 분명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때문에 누가 건드리면 웃어주면서 미안하다고 하고 누가 발을 밟아도 괜찮다고 합니다. 그 사람하고 싸우는 게 급한 게 아니라 지금 사랑하는 사람 만나러 가는 일이 더 중하고 그런 일로 더 중한 일을 망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대개 핑계입니다. 자기가 만나고 싶은 사람이면 시간은 어떻게든 낼 수 있습니다. 평소에 상상도 못한 많은 일들을 한꺼번에 다 해낼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인가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아닙니까?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강요하지 않고 너무나 좋아서 하는 일일 때 그에게는 시간도 남고 에너지도 넘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은혜 속으로 들어가서 은혜의 영향권 속에서 사는 사람의 삶의 특징입니다. 하나님과 화해하였으니 모든 관계가 회복되고 사랑이 넘치기 때문에 시간도 자기편이 되어 줍니다.
하나님과 화해하는 삶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고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와서 활기찬 생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을 멀리하고 이런 저런 핑계로 고립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은 우리 자신이 해야 합니다. 용기가 필요합니다. 나오기만 하면 하나님은 조건 없는 은혜로 우리를 감싸 주십니다. 우리가 겨우내 얼었던 몸을 녹이고 봄 볕 속으로 들어가듯,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먼저 교회 안으로 들어오세요. 교회의 여러 프로그램들 속으로 들어오세요. 그런 방편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과 화해 할 수 있는 겁니다.
고기가 물 밖에 있으면 헐떡거리다가 곧 숨이 넘어갑니다. 하나님이 지은 피조물인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 밖에 있다는 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 밖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지난주 여러 명의 평신도 간증 자들을 통해 이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 속에 들어간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걸 아셨지요? 여러분도 은혜 속으로 들어가길 사모하셨지요?
만물이 봄 볕 속에 아름답듯, 여러분과 저도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사는 행복한 사람들이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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