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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이 넘치는 복을 받으시라!

고린도후 허태수 목사............... 조회 수 4761 추천 수 0 2011.11.29 15: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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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고후1:3-7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고난이 넘치는 복을 받으시라!  
고후 1:3-7

성서에 나타나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고난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그들은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그리스, 이집트, 시리아, 로마 등 모두 당대 세계 최강의 국가들에 의해 차례로 점령당했고 오랜 기간 동안 지배를 받았습니다. 민족 전체가 뿌리 뽑히듯 뽑혀서 이국 땅 바빌론으로 끌려가 포로 생활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고난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난의 의미를 물었고, 고난의 의미에 대한 해석은 성서의 중요한 맥을 이룹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나의 백성이 고통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또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고난을 분명히 안다. 이제 내가 내려가서, 이집트 사람의 손아귀에서 그들을 구하여……”(출 3:7-8).

이것은 호렙산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말씀이죠. 여기에서 하나님의 특징이 가장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곧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고난을 당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이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바로 그 현장에 내려 오셔서 구원활동을 개시하시는 분이십니다(또한 삼상 9:16을 참조).

출애굽 하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는 홍해 바다가 있었고, 홍해 바다를 건넌 다음에는 다시 40년의 광야 생활이 이어졌습니다. 이런 고난을 겪은 다음에 그들은 비로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어요.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고난 받은 것을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거나 감추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기억하고 기념하려고 합니다. 그것을 잊지 않아야만, 그들을 건져 주신 하나님을 잊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출애굽을 기념하여 유월절 기간 이레 동안 누룩 넣지 않은 빵을 먹는데, 이것을 “고난의 빵”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먹는 것은, “이집트 땅에서 나올 때의 일을 그들이 평생토록 기억하게 하려 함이다”(신 16:3). 그들은 이 고난의 빵과 함께 쓴 나물을 먹지요.(출 12:8, 민 9:11). 이는 중국의 월(越)왕 구천이 오(吳)왕 부차에게 당한 패배를 잊지 않기 위해 쓸개를 핥았다고 하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를 떠올리게 하지요?

이스라엘이 바빌론에서 포로생활을 할 때에 그들의 고난은 극에 달했고,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예언자 이사야는 그런 민족의 고난을 대신 짊어질 ‘고난의 종’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 그는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마치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암양처럼, 끌려가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 53:3-7).

이유가 있는 고난이라도 견디기가 힘든데, 아무런 죄도 없이 다른 사람의 허물과 죄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은 얼마나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는 일일까요? 그런데 앞으로 나타날 메시아가 바로 그런 고난을 짊어질 이라고 합니다. 메시아라면 슈퍼스타처럼 하늘을 날고 권력자들을 속 시원하게 해 치우는 모습이어야 할 텐데, 어찌하여 꼼짝도 못하고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는 모습으로 온다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이 바빌론에 끌려가서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일을 겪지 않았다면, 이사야 예언자는 이런 비전을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 죄도 없이 죽은 어린아이, 아무 죄도 없이 순순히 끌려가는 백성들을 보면서, 예언자는 그들의 고난의 의미를 묻고 또 물었을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그들 곁에 와서 똑같이 고난을 당함으로써, 그들이 받은 그 고난을 위로해 주고 그 눈물을 닦아 주고 그 짐을 대신 져 줄 하나님의 종이 오실 것이라는 비전을 갖게 된 것입니다.

신약성서 기자들은 예수가 바로 그 고난의 종이라고 보았습니다. 예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제국의 식민지배와 포악한 헤롯왕의 지배 아래에서 여전히 고난 받고 있었습니다. 예수는 그 고난 속에서, 병에 걸리고 장애를 겪고 귀신들린 사람들을 영접하여 고쳐 주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다가 십자가에 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죄 없는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하게 된 것은 온전히 그 백성들, 그 작은 사람들의 고난을 대신 짊어진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히브리 백성들의 고난이나 출애굽의 고난, 그리고 고난의 종이 짊어진 고난이 주로 민족적 고난이었다면, 예수가 짊어진 고난은 이러한 민족적 고난을 포함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던 갈릴리의 작은 사람들은, 로마와 헤롯의 지배를 받았을 뿐 아니라, 대제사장, 바리새파 사람, 율법학자 등, 그 사회의 지배세력들의 멸시와 지배를 받았습니다. 예수는 그들의 짐과 고난을 대신 짊어지고 고난을 당하였으며, 이는 예수의 고난이 민족의 고난뿐 아니라 사회에서 소외된 작은 사람들의 고난까지 짊어진 것임을 의미합니다.

이전에 자신들의 고난을 보며 한탄하고 눈물 흘리고 열등감에 사로잡혔던 갈릴리의 작은 사람들은 이제 예수께서 자기들을 사랑하여 자기들의 고난을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를 졌음을 알고, 그 한탄과 열등감에서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분노와 원망 속에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모르던 그들은 이제 예수의 고난 받으심에서 한없는 위로를 받고, 그들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제 그들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따라, 그들도 이 땅의 작은 사람들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들에게서 위로는 고난이 끝난 다음에 오는 것이거나 고난에 반대되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고난 받으심으로 그들이 위로를 받았듯이, 이제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위로를 받습니다. 즉, 그들이 다른 사람들의 고난에 동참할 때, 고난 받는 그 사람들이 위로를 받을 뿐 아니라, 동참하는 그들 자신도 위로를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위로도 또한 넘친다”고 합니다(고후 1:5).

이제 그들에게서 고난은 그저 피하거나 참아야 할 것이 아니라 “동참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러분이 고난에 동참하는 것과 같이, 위로에도 동참하고 있다”고 하죠(7절). 이 구절을 직역하면, “여러분은 고난에 동참하는 이들인 것같이 위로에도 동참하는 이들이다”가 됩니다. 여기서 “동참하는 이들”(koinonoi)이라는 단어는 친교(kononia)라는 단어와 어원이 같습니다. ‘친교’란 ‘상대방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친교라는 단어에 익숙하므로, 그 말뜻을 살려서 이 구절을 다시 옮겨 보면, “여러분은 고난을 친교하는 이들인 것과 같이 위로를 친교하는 이들이다”가 됩니다. 우린 흔히 친교한다 하면 좋은 일로 함께 먹고 마시면서 사귀고 나누는 것만을 떠올리게 됩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런 즐거운 일만 아니라 고난도 그렇게 함께 사귀고 나누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은 신자가 받는 특권 또는 은혜라고 합니다(빌 1:29). 그리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고, 또한 부활에 이르고 싶다고 합니다(빌 3:10-11).

후대로 오면서 이런 고난의 의미는 상당히 소극적 의미로 해석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베드로전서 기자는, 하인이 주인에게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더라도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참고 견디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의 ‘고난의 종’에 관한 말이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졌다고 하면서 그것을 본받으라고 합니다(2:18-25). 고난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구약성서의 맥락이나 바울이 말한 맥락에서는 많이 벗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당시의 상황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노예제가 이미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던 상황에서, 그나마 그들에게 그리스도께서도 고난 받으셨음을 알려주어서 그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려고 한 것이죠.

이런 맥락을 무시하고, 이런 구절이 노예제나 종노릇하는 것을 합리화 해 주는 것이라고 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더 위험한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따르고 본받는 것이 자기가 처한 고난의 처지를 무조건 받아들이고 묵묵히 참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를 아주 축소시키는 것인데도, 오히려 오늘날 크리스천 가운데 이런 해석을 받아들이는 이들이 많습니다. 예수는 고난 받는 이들이 그것을 딛고 일어서게 하였는데, 이런 해석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고난 속에 매몰되고 맙니다. 그리고 늘 자기의 내적 고난의 문제에 사로잡혀서, 민족의 고난이나 이웃의 고난에 대해 무관심하게 됩니다. 이러한 것은 성서 전체에 흐르는 고난에 대한 해석의 맥에서 너무나 벗어난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일찍이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여 3.1운동을 주도한 자랑스런 전통을 갖고 있습니다. 3.1운동의 대표 33인 가운데 16명이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3.1 운동의 선봉에 선 주동자로서 오기선, 안세환, 오상근, 함태영, 안창호, 전덕기 등과 청년학생층으로서 박희도, 김원벽, 이용설 등이 있는데, 이들이 모두 크리스천입니다. 그리고 서울 상동교회, 승동교회 등은 3.1운동의 산실이었으며, 전국 교회는 3.1운동의 연락망 역할을 했습니다. 총독부 통계에 따르면, 붙잡힌 사람 가운데 유교 1.8%, 불교 1.1%, 천도교 11.1%인데 비하여 기독교는 17.7%나 되었습니다. 조지훈의 통계로는 천도교 1426명에 비해 기독교는 2190명이나 됩니다. 그 가운데 목사 40명, 전도사 59명, 기독교 기관에 일하는 이 52명 도합 151명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이때 피해 받은 교회만도 47곳이나 되었습니다.(안병무, “3.1운동과 기독교”, 『한국 민족운동과 통일』, 한국신학연구소, 2001, 148.)

그러나 일제가 3.1운동을 폭력으로 진압한 이후, 한국 교회는 좌절하여 피안의 세계로 도피하였습니다. 1920년대의 대부흥운동은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기보다는 개인의 내면적 고난 문제나 심령 대부흥에 몰두하였는데, 그때는 바로 3.1운동이 진압된 이듬해입니다.

더욱이 해방 이후에 한국 교회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반공과 기독교를 동일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월남한 사람들이 370만 명이나 되는데 그들은 모두 반공투사가 된 것입니다. 그 후 4.19가 일어나고, 5.16이 터졌어도 기독교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질 못했습니다. 유신독재와 5.18때도 독재자들에 대해 침묵하는 모습으로 일관했습니다. 광주항쟁 때도, 그 고난의 현장을 끝까지 지킨 크리스천들도 있었지만, 계엄군에 쫓긴 사람들이 교회 문을 두드렸을 때 문을 열어주지 않은 교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저는 지금 역사에서 일어난 일들을 정치의 관점으로 말하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성서에 면면히 흐르는 [고난]에 대한 이타성들이 어떻게 개인적인 이기성으로 변해 왔는가를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민족이 당하는 고난과 친교하는 공동체입니다. 또한 이웃의 고난과 친교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그들에게 위로가 될 때,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고난 주간에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뜻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얼마나 내게 이익이 되는가를 묻거나, 그의 고난으로 인하여 내가 고난 받지 않게 되었다 또는, 고난 주간에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지극히 이기적인 고난(?)을 자청하면 마침내 예수가 복을 주실 것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명백히 성서에서 말하는 ‘고난의 의미’를 변질 시킨 행위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무엇을 얻으려는 게 아니라, ‘고난 받는 사람과 사귐’으로 그들을 위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과의 친교가 위로와의 친교’도 되는 것입니다.    

왜 지금 교회가 손가락질을 받고 있을까요? 제 몸집만 불리고 남의 아픔을 몰라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나의 고난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돌아가셨으니, 이제 나는 고난 없이 사는 게 믿음이라는 변질된 신앙사고방식 때문입니다. 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하는 걸까요? 남의 아픔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자기 잘되고 편안한 것만 알기 때문입니다. 남의 아픔에 뛰어들어 사귀지(친교) 않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작은 사람들이나 민족이 겪는 고난에 동참하는 공동체가 성암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팔아 자기의 안위를 얻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다른 사람의 아픔에 뛰어들므로 그들에게 위로가 되었듯이, 고난 받는 이웃과 친교 함으로 그들이 받는 위로와도 친교 하는 사람들이 성암교회 성도입니다. 진정 복 있는 사람은 고난이 피해가거나, 고난이 없다는 사람이 아닙니다. 진정 복된 사람은 ‘고난이 넘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는 늘 타인의 고난 속으로 들어가 고난과 사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늘의 뜻에 올바르게 사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가슴 깊숙한 곳에 다음 말을 새겨 두어야 합니다.  

고난과의 친교 없이는 위로의 친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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