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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히11:39-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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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우리가 아니면
히11:39-40
*2008년 4월13일 주일 2부 설교 원고입니다.
어떤 목사가 지난 번 연회 때 저에게 물었습니다.
"허목사님, 교회가 부흥한다면서요? 얼마큼이나 교인들을 늘릴 예정입니까?
평소에 목사님의 목회철학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바뀌셨나 봐요."
"허허!"
그렇습니까?
제가 뭐 교회 성장 주의자입니까?
그 질문에 답하며, 성암교회의 공동체성이 뭔가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니 단어
하나하나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번 주일에 행복하고 기쁜 영혼들로 뵙겠습니다.
믿음은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노아, 에녹, 아브라함, 야곱, 모세, 라합 같은 믿음의 조상들을 열거하죠. 그들은 너무나 훌륭해서,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 발자취를 따르기에 부족함을 느끼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끝부분 39절에는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모든 사람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좋은 증언을 받았지만,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다”(39절).
이렇게 훌륭한 분들이 그 약속을 성취하지 못했다는 말이 좀 의아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은 당대에 이루어지지 않고 한참 후대에 내려가서 이루어졌어요. 하나님이 모세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지만, 그는 그 땅을 바라보기만 할 뿐 들어갈 수는 없었고요. 그래서 앞의 13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그것을 멀리 바라보고 즐거워하였으며, 땅 위에서는 손과 나그네로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습니다”(13절).
이것은 크리스천의 실존을 한 마디로 잘 정의해 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들은 자기 대에 모든 것을 누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가 약속 받은 것이 다음 대에서 이루어질 것을 믿으면서 즐거워하는 길손이요 나그네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기쁨은 도상의 기쁨이지 정상에 기를 꽂은 자의 환호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39절에 이어서 40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날 믿는 사람들의 현실을 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새로운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계획을 미리 세워 두셨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가 없이는 완성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40절).
상반절에서 히브리서 기자의 역사관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을 위한 것보다 더 좋은 계획을“우리(지금의 ‘나’)를 위하여”예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위대한 분들이 시작한 일이 오늘날 우리의 일과 연관이 되고 의존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 비하면 지극히 작은 사람인 오늘의 나에 대하여 하나님이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의식입니다.
하반절에 나오는“우리가 없이는”(choris hemon)―오늘의 설교 제목이기도 한데―이라는 구절은 이런 의식의 절정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 훌륭한 분들이 하신 일들도“우리가 없이는”,“우리가 아니면”완성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믿기워 지세요? 다시 말해서 초대교회가, 그 적은 무리가 이루려고 하는 일들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라,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이 해 온 것을 이어서 하는 것이요, 오늘에 완성해 가는 위대한 일이라는 의식입니다.
이것이 초대교회가 가진 믿음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니면 믿음의 조상들이 약속 받은 것도 완성에 이를 수 없다는, 매우 주체적인 역사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구원사의 한복판에 있다는 사명감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요즘처럼 쩨쩨하게 자기 교회나 어떻게 하겠다는 그런 마음들이 아니었습니다. 초대교회성도들은 비록 작은 교회이지만 위대하고 큰 하나님의 집을 완성해 가는 센터라는 의식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들의 형편은 어땠습니까? 대개 초대교회들은 30명 안팎의 작은 공동체였으며, 사회적으로는 당시 로마 사회에서 중심부에 있지 못했고 주변부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의식만은 주변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작기 때문에, 나는 못 배웠기 때문에, 그저 훌륭한 분을 따라 하기나 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주변부 공동체이지만,“우리가 아니면”,“내가 아니면”믿음의 조상들이 꾸어온 꿈이 완성될 수 없다는 충만한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계승해야 할 역사의식이요 사명감이며, 성암교회 공동체가 지녀야할 정체성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날도 전체 교회의 1%도 안 되는 극소수의 대형교회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교회들은 100명 미만의 작은 교회들입니다. 그 작은 교회들은 농촌 지역사회는 물론이고 도시의 주변부에 자리 잡고 자기 몫을 다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그런 교회들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까? 문제는 교회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이 작은 교회들이 초대교회와 같은 역사의식과 충만한 사명감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자꾸 대형교회와 비교하여 건물의 크기나 화려함, 수천 명에 이르는 교인 수에 압도되어, 작은 교회들은 자신들이 뭔가 잘못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며,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대형교회가 생긴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죠. 우리 사회가 급속하게 산업화 되면서, 도시 주변에 와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회와 직장에서 많은 상처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거의 다 경제적으로 잘 살고 싶은 꿈을 갖고 있습니다. 대형교회는 이들에게 위로를 주고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습니다. 대형교회는 일단 사람 수가 많습니다. 각자 군중 속에 파묻혀 교회가 제공하는 오케스트라 같은 음악과, 감성적인데다가 오락성까지 가미한 요란한 기도와 설교 속에서, 사회에서 입은 상처가 치유 받고 위로 받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주입하는 설교는 그들에게 희망을 줍니다. 그들은 교회에 와서 무엇을 주도하거나 책임을 지는 데 부담을 느끼는데, 대형교회는 그런 부담을 주지 않죠.
산업화 과정에서 서울의 몇 곳과 신도시 등에 잘 사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부각되었는데, 대형교회는 거의 예외 없이 그런 곳에 자리 잡습니다. 이는 대형교회의 물적 토대가 이른바 강남의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임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안정을 추구하는 세력들입니다. 그래서 대형교회들은 거의가 보수, 반공, 이데올로기로 무장하여 안정을 추구하며, 심하다 싶을 정도로 미국을 찬양하거나, 미국을 예수 믿어 축복받은 대표적인 국가로 내세웁니다.
이런 대형교회에 사람들이 집중하는 현상은 이렇게 설명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일시적 사회 현상일 수도 있고 기형적인 것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최선의 목회 모델이나 되는 것처럼 여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더욱이 대형교회의 규모나 교인 수에 비하여 작은 교회를 평가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기드온이 300 명의 용사 뽑은 것을 보세요. 처음 선발된 32,000명은 너무 많았습니다. 첫 번 심사에서 22,000명이 떨어지고 10,000 명만 남았지만 하나님은 그것도 너무 많다고 하셨지요? 하나님은 거기서 뽑은 정예 300 명으로 전쟁을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뭐 그렇다고 교인수가 꼭 300명이어야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공동체의 정체성이 뭐냐 하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두세 사람이 예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그들과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존재해 온 가장 건강한 교회 모델은 큰 교회가 아니라 작은 교회입니다. 초대교회들은 30-50명 규모의 작은 가정 교회들이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를 방문했을 때, 성경에 능하고 학식 있는 아볼로가 열심히 가르쳤다고 하는데, 그때 교인수가 모두 열 두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성경은 교회를 말할 때 어디서도 교인 수의 적고 많음이나, 큰 교회나 작은 교회라는 개념 자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4세기 말 북아프리카 히포에 있던 한 교회는 도시에 있지도 않았고 크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는 어거스틴의 사역의 중심지였고, 그의 신학적 저작의 배경이 되지 않았습니까?
삭소니 주 비텐베르크에 있던 교회는 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교회를 담임하던 마틴 루터는, 그 마을에 설립된 대학의 교수로 있었는데, 대학정문에 라틴어로 된 95개 조항을 써 붙였고, 그것이 종교개혁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유럽을 여행해 보면 대도시마다 큰 성당(Cathedral)이 있지만, 대개 그것은 웅장하게 돌로 지어진 집이고 썰렁한데, 유지비가 부족해서 관광객들에게 헌금을 부탁하는 문구를 입구에 적어놓은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과거에 누군가가 큰 재산을 희사하여 지어졌을 것이지만, 지금은 유지가 어려운 박물관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지역사회에 건강하게 뿌리 내린 교회들을 방문해 보았는데, 우리 교회처럼 활기가 넘쳤다. 교인 수는 100명 남짓이지만 그 지역 주민들이 오고, 예배 마치면 차 한 잔을 마시면서, 가족 같은 친교를 나누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교회들이 대개 지역 사회에서 공헌하는 건강한 교회들이었습니다.
작은 교회는 가족 같은 교회입니다. 본래 초대교회는 가족교회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교회를 부를 때“○○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가정이 모이고 모여서 이루어진 확대된 가족이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도 가족들이 나오는 교우들이 많고, 또 전체가 교회 가족이 되었습니다. 대형교회에서는 이런 친밀한 가족 관계가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대형교회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은 예배 참석자가 꽤 많았어요. 사람들 수를 헤아려보셨어요? 앞좌석까지 꽉 찼어요.”
하지만 우리 교회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교회에서 안규민 형제가 보이지 않더군요. 집에 무슨 일이 있나?”
대형교회 예배에서는, 목사와 성가대는 연주자이고 회중은 관객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 예배에서는, 목사와 성가대는 이끄는 이이고 회중은 함께 합창을 하는 공연자이며, 하나님이 청중이 되십니다.
대형교회는 인재가 워낙 많아서 전문가가 아니고는 참여하기 힘듭니다. 이를테면 성가대원이 되려면 적어도 음대 교수이거나 성악을 전공하는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해요. 그러니 보통 사람들은 늘 관객으로 남지 주체로 참여하기는 힘들겠죠. 하지만 작은 교회는 사람 수가 적기 때문에 개개인이 은사를 활용할 수 있고 언제나 교회 일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지도자로서 훈련을 받는 데서도, 큰 교회보다는 작은 교회가 더 좋습니다.
작은 교회의 또 다른 장점은 유연성입니다. 작은 교회는 어떤 상황에 대해 대형교회보다 빨리 반응할 수 있습니다. 골리앗이 힘이 약해서 다윗에게 진 것이 아닙니다. 골리앗은 너무 커서 몸이 둔했습니다. 작은 몸집의 다윗이 사울이 준 갑옷과 투구를 걸쳤다면 그는 실패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가벼운 복장으로 나아갔기에 날렵하게 움직여서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칼 더들리라는 사람은 작은 교회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큰 세상에서, 작은 교회는 친밀하게 남아 있다.
빠른 세상에서, 작은 교회는 안정적으로 남아 있다.
많은 비용이 필요한 세상에서, 작은 교회는 검소한 상태로 남아 있다.
복잡한 세상에서, 작은 교회는 단순한 상태로 남아 잇다.
이성적인 세상에서, 작은 교회는 감성을 유지하고 있다.
유동적인 세상에서, 작은 교회는 닻의 역할을 해 오고 있다.
익명의 세상에서, 작은 교회는 우리를 이름으로 부른다.
그가 이렇게 작은 교회의 의의를 강조하는 것도, 큰 교회에 대조하여 작은 교회를 무시하는 풍조 때문입니다. 대형교회라고 해서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 없듯이, 작은 교회라고 해서 무조건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크고 작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교회가 오늘의 이 역사 속에서 어떤 의식으로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교회에 속한 사람 하나 하나가 진정으로 건강하고 행복한가가 가장 중요합니다.
어떤 목사가 시골 교회를 섬겼는데 교회 문은 열어놓았으나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전망도 매우 어두웠습니다. 최악의 상태에 이르렀을 때 그는 자기 아버지께 편지를 썼답니다. 그 편지에서 그는 그의 가장 내밀한 슬픔과 패배감에 대해서 적었고, 지난주일 예배에 겨우 다섯 명만 참석했다는 것도 적었습니다.
즉시 아버지로부터 답장이 왔습니다. 거기에는 그 목사의 가슴을 찌르는 말씀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예배에 몇 명이 참석했는지가 아니라 참석한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해 질문하거라.”
오늘날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나 숫자에 민감합니다.
“오늘은 30 명밖에 안 왔어”라는 식으로 부정적인 말을 쉽게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수를 세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교회에 나온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헤아리는 것입니다. 몇 명이 예배드렸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드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오늘날 구성원들 모두가 진정으로 행복한 교회는 어떤 교횔까요? 그것은 신자 개개인이 익명의 관객이 되고, 개개인이 빈자리를 메우는 숫자가 되는 교회는 아닐 것입니다. 나 한 사람쯤이야 가도 모르고 안 가도 그만인 교회, 각자가 알아서 낼 것 내고 받을 것 받는 슈퍼마켓 형 교회도 아닐 것입니다.
내가 안 가면 성가대 베이스 파트가 안 된다고 걱정하면서 무리를 해서라도 꼭 나와야 하는 교회, 자리 한 곳이 비면 수를 카운트 하는 것이 아니라 빈자리 주인공의 이름을 부르면서 염려하여 기도해 주는 교회, 목사와 언제라도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는 교회, 나 한 사람이야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것이 아니라, 꼭 내가 나가야만 되는 그런 교회가 행복한 교회가 아니겠어요? “내가 아니면”성가대도 안 되고, 내가 아니면 주일학교도 안 되고, 내가 아니면 청년회도 안 되고, 내가 아니면 재정도 부족할 것이라는, 그런 사명감으로 가득 찬 교회가 진정으로 행복한 교회일 것입니다.
비록 적은 수가 모인 공동체이지만,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의 꿈과 그들이 받은 약속에 잇대어 살고 있으며, 그들과 서로 의존하고 있는 교회가 진정으로 행복한 교회입니다. 그리하여“우리가 아니면”(choris hemon) 믿음의 조상들이 꿈꾸어온 것도 완성되지 않고, 우리가 아니면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도 성취가 되지 않는다는, 그런 사명감과 역사의식으로 충만한 교회가 진정으로 행복한 교회입니다.
우리가 이룩한 것이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우리 역시 주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길손이요 나그네임을 겸허하게 고백하는 교회, 그리하여 자라나는 어린 새싹들에게,“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해 두셨다”고 말해주고,“너희가 아니면”우리 꿈이 완성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교회가 진정으로 행복한 교회일 것입니다.
성암교회는 그런 교회를 지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의 정체성이며 그렇게 되어 가고 있으며, 될 것이라고 믿고 계시죠? 그래서 성암교회의 목사인 저는 여러분이 사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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