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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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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밝고 유능한 사람이 받는 복
마1:1-6
*구약성서 [룻기]를 꼭 참고 하셔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이례적으로 여자의 이름이 셋이나 나옵니다. 다말과 라합과 룻인데, 이들은 여자들일 뿐 아니라 매우 험한 인생을 산 사람들입니다. 다말은 젊은 나이에 두 번이나 과부가 되고 우여곡절 끝에 시아버지와 사이에 아이를 낳게 됩니다. 라합은 여리고의 기생이었고요, 룻도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이방여인입니다. 마태복음은 왜 처음에 이런 여인들의 이름을 올린 것일까요? 결론적으로 이 세 명의 여인이 그리스도와 비교되는 것은 [밝고 유능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므로 생명을 이어가게 했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베들레헴 출신의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은 그 땅에 기근이 들자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으로 가서 살았습니다. 무슨 일인지 그는 일찍 죽게 되었고, 나중에 나오미는 모압 여자들을 며느리로 맞이하였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룻입니다. 룻은 먹을 것을 찾아 외국까지 온 이방사람에게, 더욱이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사람에게 시집을 왔으니 고생이 많았다 하겠습니다. 엎친대 덮친 격으로 결혼한 지 10년 만에 그 집의 두 아들이 다 죽게 되어 룻은 청상과부가 되었습니다. 나오미는 고향에 풍년이 들었다는 말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먹는 것 때문에 왔다가 다시 먹는 것 때문에 돌아가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을 때 마을 사람들이 환영을 했는데, 그때 나오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나오미라고 부르지들 마십시오.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몹시도 괴롭게 하셨으니, 이제는 나를 마라라고 부르십시오/나는 가득 찬 채로 이 곳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나를 텅 비어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주께서 나를 치시고,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불행하게 하셨는데, 이제 나를 나오미라고 부를 까닭이 어디에 있겠습니까?"(룻 1:20-21)
‘나오미’는 본래 ‘기쁨’이라는 뜻인데 이제는 ‘마라’(괴로움, 괴로운 여자)라고 불러달라고 하는 겁니다. 얼마나 삶이 괴로우면 자기 이름마저도 부담스러웠을까요? 나오미는 고향으로 오기 전에 두 며느리를 떠나보내고 혼자 돌아오려고 하였습니다. 한 며느리는 그렇게 했지만 룻은 나오미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나더러, 어머님 곁을 떠나라거나, 어머님을 뒤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는 강요하지 마십시오. 어머님이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님이 머무르시는 곳에 나도 머무르겠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내 겨레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어머님이 숨을 거두시는 곳에서 나도 죽고, 그 곳에 나도 묻히겠습니다."(룻 1:16-17)
이런 말을 한 것을 보면 룻은 참 정이 많은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남편이 좋아서 시집을 왔겠지만 살다보니 시어머니에게 정이 든 것입니다. 남편이 죽었어도 친어머니한테 돌아가지 않고 시어머니와 함께 살겠다고 하고, 시어머니가 본국으로 돌아간다고 하는데도 낯선 타국땅까지 따라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얼마나 잘 해주었으면 그럴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남녀 사이의 사랑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죠. 이렇게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도 아름다운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남자들은 다 죽고 여자들만 남았으니 그 집에 슬픔과 통곡만 있을 것 같지만 이렇게 시어머니를 친어머니 이상으로 사랑하고 따르는 룻이 있었기에, 슬픔과 어둠은 걷히고 새날이 밝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2장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면서 이야기의 분위기가 바뀝니다. 2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오미에게는 남편 쪽으로 친족이 한 사람 있었다. 그는, 엘리멜렉과 집안간으로서, 재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이름은 보아스이다”(룻 2:1).
‘보아스’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빠름, 쾌속’이라는 뜻인데, ‘쾌활한’, ‘활력이 넘치는’과 비슷한 뜻입니다. 실제로 그가 등장하면서부터 이야기는 절망에서 희망으로 변해가며 전체적으로 쾌활하고 활력이 넘치는 분위기로 변해갑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말하였습니다.
"이봐요, 룻, 그대는 주께 복받을 여인이오. 가난하든 부유하든 젊은 남자를 따라감직한데, 그렇게 하지 않으니, 지금 그대가 보여 준 갸륵한 마음씨는, 이제까지 보여 준 것보다 더욱더 값진 것이오/ 이제부터는 걱정하지 마시오, 룻. 그대가 바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겠소. 그대가 정숙한 여인이라는 것은 온 마을 사람들이 다 알고 있소. (룻 3:10-11)
보아스 뿐만 아니라 온 동네사람들이 시어머니를 따라 온 그 갸륵한 마음씨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11절에서 “정숙한 여인”은 “현숙한 여인”(개역)으로도 번역되는데 본래 히브리어의 뜻은 “유능한 여인”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말 ‘현숙하다’는 ‘어질고 깨끗하다’는 뜻이니, 유능하다는 말과는 거리가 멉니다. ‘유능한 여인’을 ‘현숙한 여인’으로 바꾼 것은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가부장주의 때문일 것입니다. 잠언 31:10-31에도 이른바 ‘현숙한 여인’에 대해서 길게 나오는데, 그 내용을 보면 그는 현숙한 여인이라기보다는 유능한 여인입니다.
그는 양털과 삼을 가공해서 돈을 벌고, 상인의 배와 같이 먼 곳에서 먹을 것을 구해오기도 하고, 일꾼들을 잘 관리하고, 부동산 매입도 신중하게 하고, 사업도 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고, 입만 열면 지혜가 저절로 나오고, 혀만 움직이면 상냥한 교훈이 쏟아져 나온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가 알고 있는 현숙한 여인상과는 다르죠. 그는 유능한 여인이고 가정과 사람들을 환하게 만드는 빛나는 여인입니다. 잠언의 이야기가 오늘날 여성들에게는 너무 짐을 지워주는 얘기가 될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것은 시대적 차이에서 오는 것이고, 그 핵심은 그 여인은 아주 적극적이고 유능하여 세상을 밝게 만드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룻이 보아스를 만나게 되는 장면들을 보면 룻은 그저 순종적인 순한 여성상은 아닙니다.
"밭에 나가 볼까 합니다. 혹시 나에게 잘 대하여 주는 사람을 만나면, 그를 따라다니면서 떨어진 이삭을 주울까 합니다."(2:2)
이렇게 말하는 자체가 수줍은 과부의 모습은 아니죠? 자기에게 잘 대해 주는 사람을 적극적으로 찾는 모습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해서 그가 우연히 가게 된 곳이 보아스의 밭이라고 하는데, 그것도 우연이 아니라 일부러 그곳에 간 것일 수도 있습니다. 룻은 그냥 이삭줍기를 한 것이 아니라, 일꾼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여, 보아스와의 만남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일꾼들을 감독하는 젊은이가 대답하였다. ‘저 젊은 여인은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사람입니다. 일꾼들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곡식단 사이에서 떨어진 이삭을 줍도록 허락해 달라고 하더니, 아침부터 와서 지금까지 저렇게 서 있습니다. 아까, 여기 밭집에서 잠깐 쉬었을 뿐입니다’”(룻 2:7).
이삭줍기는 성경에서 가난한 사람과 외국인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돌보기 위해서 법으로 제정된 것입니다(레 19:9; 23:22; 신 24:19-20). 그러니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삭줍기는 수확이 끝난 빈 들판이나 곡식 단을 치운 곳에서 하는 것이지 곡식단 사이에서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 요구는 일꾼들이 허락할 수 없는 특혜인데, 그런 무리한 요구를 하니까 일꾼들은 들어줄 수도 없고 룻은 하루 종일 서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결정권자인 보아스가 그녀 앞에 나오도록 유도한 셈입니다. 보아스는 일꾼들에게 일어난 일을 듣고 나서는 룻에게 아주 호의를 보입니다.
그는 룻에게, 다른 밭에 가서 고생하지 말고 그냥 여기서만 일하고, 자기 밭에서 일하는 여자들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이삭을 주우라고 합니다. 아마도 이런 일을 빌미로 남자들이 여자에게 추근대는 일도 있었는지, 젊은 남자 일꾼들에게는 룻을 건드리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두겠다고 합니다. 목이 마르면 주저하지 말고 물 단지에 마시라고 합니다. 게다가 새참 때가 되니까 룻을 불러다가 같이 음식을 먹고 음식 먹는 방법까지 일러줍니다. 그리고 또 볶은 곡식을 내주었습니다. 또 일꾼들에게 일부러 곡식 단에서 이삭을 뽑아 흘려서 룻이 줍게 하라고 일러두었습니다.
룻 이야기의 절정은, 룻이 낟가리 곁에서 누워 자는 보아스와 함께 누운 일입니다. 나오미는, 마치 리브가가 야곱에게 축복을 가로챌 작전을 지시해주듯이, 룻에게 보아스를 사로잡을 계획을 짜주고 그대로 실행하게 합니다. 룻은 시어머니의 지시대로 목욕하고 향수를 바르고 고운 옷으로 단장하고서 타작마당으로 내려가서 잠자고 있는 보아스의 발치께에 누웠다. 잠자다가 인기척을 느낀 보아스가 누구냐고 묻자, 룻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어른의 종 룻입니다. 어른의 품에 이 종을 안아 주십시오. 어른이야말로 집안 어른으로서, 저를 맡아야 할 분이십니다." (룻 3:9)
이보다 더 로맨틱한 장면도 없을 것입니다. 룻의 프러포즈는 주저함이 없습니다. 보아스가 애초에 룻에게 호감을 가진 것도 사실이지만 또 이렇게 로맨틱한 프러포즈를 받고서 더욱 좋아진 것 같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룻과 결혼하기로 결정합니다. 다만 결혼하기 위해서 해결해야 할 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 그는 즉시 그것도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서 그 다음날 문제를 해결하고 사람들 앞에서 결혼을 공표하게 됩니다.
보아스가 룻을 유능한 여인이라고 칭찬한 것은 룻에게서 용기와 밝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어머니를 따라와서 이방 땅에 살면서도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사는 그 모습이 그가 보기에도 갸륵하고 복 받을 만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이제부터는 걱정하지 마시오, 룻. 그대가 바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들어 주겠소”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밝은 사람에게는 이끌리는 법입니다. 그에게는 자기 것을 주고 싶고 주어도 아깝지 않은 것입니다.
사실은 보아스도 ‘이쉬 깁보르 하일’ 즉 ‘유능한 사람’입니다. 표준새번역은 ‘재력 있는 사람’이라고 의역하였는데 너무 좁은 의미로 한정한 것 같습니다. 그가 그저 돈 많은 사람이고, 룻이 그저 얼굴 예쁘고 현숙한 여인이어서, 둘이 사랑하게 되었다고 하면 그것은 통속적인 <신데렐라>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유능한 사람이고 그 또한 밝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에셋 하일’이 ‘이쉬 깁보르 하일’을 만난 것이고, 유능한 여자가 유능한 남자를 만난 것이고, 밝은 여자가 밝은 남자를 만난 것입니다.
룻이 나오미를 따라올 때 “어머님의 겨레가 내 겨레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라고 말한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비밀을 알려줍니다. 룻이 하나님을 알고 믿은 것이 아닙니다. 그저 시어머니가 너무 좋아서 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을 믿겠다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며느리 룻을 보아스에게 시집보내기 위해서 작전을 짜고 구체적인 지시까지 하는 것을 보면 매우 적극적이고 유능한 여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야곱에게 형 대신 축복을 받도록 지시를 내리는 리브가와 같습니다. 나오미에게 그런 적극성, 밝음이 있었기에 어쩌면 룻은 남편도 시아버지도 없는데 시어머니 한 분을 따라 그 낯선 타국 땅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하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 덕분에 그도 유능한 여인이라는 소리를 듣고 또 유능한 사람 보아스를 만나서 복받은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보아스가 룻을 처음 만났을 때 한 말은 이렇습니다.
“댁이 한 일은 주께서 갚아 주실 것이오. 이제, 댁이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날개 밑으로 보호를 받으러 왔으니, 그분께서 댁에게 넉넉히 갚아 주실 것이오.” (룻 2:12)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행동은 흔히 ‘날개로 덮는다’는 은유로 표현이 되곤 합니다.
그런데 룻이 타작마당의 보아스 발치께에 누웠을 때 보아스에게 한 말은 이렇습니다.
“어른의 종 룻입니다. 어른의 품에 이 종을 안아 주십시오”(표준새번역 룻 3:9)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개역)
“당신의 옷자락으로 나를 덮으소서”(룻 3:9)의 “옷자락”이나 “하나님의 날개 밑으로 보호를 받으러 왔으니”(룻 2:12)의 “날개”는 히브리어로 같은 단어(knp)입니다. 이야기가 진전됨에 따라, 결국, 하나님께서 룻에게 복을 베푸시는 것은 보아스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소중한 사실을 알려줍니다. 룻이 보아스의 옷에 덮여서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께서 룻을 날개로 감싸주시는 행동의 일부라는 것입니다. 룻이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지만, 룻은 보아스의 옷자락을 통해서 하나님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보아스의 밝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환하심을 느끼는 것입니다. 보아스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아스는 룻의 유능함, 밝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환하심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믿는 사람들이 서로 이끌어주는 방법입니다. 나오미가 룻을 이끌었고 룻이 보아스를 이끌었고 보아스가 룻을 이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 이끌리는 가운데 점점 더 밝은 데로 나가게 되고 결국은 우리를 날개 아래 보호하시려고 하는 하나님께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또 다른 사람에게 밝은 사람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에게 포근한 옷자락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날개가 되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이끌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밝은 사람, 기분 좋은 사람에게 이끌립니다. 여러분 모두 예수로 인해 밝은 사람 기분 좋은 사람이 되기 바랍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답게 예수께 이끌린 사람답게 유능하고 밝은 사람이 되어 다른 사람들을 예수께 인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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