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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롬4:13-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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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선취先取하는 믿음
롬4:13-25
*2008년 6월 첫 주 2부 설교 원고입니다.
지난 주 수요일에 웨슬리 탄생 270주년 예배가 안디옥 교회에서 있었습니다. 인천 내리교회 김흥규 목사가 설교를 하셨습니다. 은혜롭고 감동이 큰 예배였습니다. 저는 김목사의 설교 중에서 지난 2002년 월드컵 때 우리나라와 이탈리아와의 경기 이야기를 하면서 사용했던 ‘선취하는 믿음’이 가장 영혼의 폐부 깊은 곳에 자리 잡았습니다. 그 경기는 2:1로 우리나라가 역전승 한 경기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경기를 비디오로 녹화를 해 놓았다가 다시 본다면 어떠냐고 물었지요. 다 알고 보는 경기라서 조바심이나 염려 불안이 없을 거라는 거죠. 바로 이거라는 겁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이 바로 이거라는 거였습니다. [선취하는 믿음]말입니다.
오늘날 크리스천들에게 당신은 누구를 또는 무엇을 믿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까요? 아마도 그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내 소원과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을 믿는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내 죄가 용서함을 받았고 내가 구원함을 받았음을 믿는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심을 믿는다, 이런 등등의 대답을 할 것입니다. 옳은 대답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할 게 있습니다. 이 네 가지 대답 가운데 첫 번째 것은 예수 자신을 믿는 것이지만 나머지 셋은 예수 자신이 아니라 예수에 관한 어떤 사실 또는 가르침을 믿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크리스천들은 대개 그것이 그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믿음의 의미를 좀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는, 예수를 믿는 것과 기독교의 가르침을 믿는 것은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교회의 가르침들 가운데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때 신자들에게 그런 것에 대해서 물으면, 그들은 한 결 같이 크리스천은 무엇을 이해해서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믿어야 비로소 이해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멘으로 믿고 순종하는 것이 신자라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믿음이 좋은 사람은 대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을 잘 믿는 사람이거나, 때로는 납득이 가지 않는 목회자의 말이라 할지라도 믿고 순종하는 사람, 또는 주일성수, 기도 생활, 교회 봉사 활동 등을 열심히 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과 어떤 사실을 믿는 것을 혼동하는 데서, 크리스천의 믿음은 어떤 사실을 수긍하는 것이나, 의심이나 질문을 제기하지 않고 무조건 믿는 것과 같은 것으로 취급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의미를 곡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크리스천들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대개, 무엇을 얻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그저 소원을 빌고 속으로 믿기만 하면 원하는 것이 생긴다는 기복적 믿음이나, 어떤 교리를 수긍하고 머리로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교리적 믿음, 또는 십자가 희생으로 내 죄가 용서받았음을 마음속으로 믿기만 하면 내 죄가 깨끗해진다는 내면적 믿음이 되고 맙니다.
크리스천들이 이런 믿음에 사로잡혀 있을 때, 교회 안에 신자는 많아도 진정으로 믿음 있는 사람은 많지 않게 됩니다. 자신들이 구원받았음을 고백하고 찬양하는 소리는 커도, 믿는 사람답게 소신과 지조를 지키며 꿋꿋하게 자기 길을 가는 사람은 보기 힘들게 됩니다.
성서가 말하는 믿음의 인물의 대표자는 아브라함입니다.
바울도 히브리서 기자도 아브라함을 믿음 있는 사람의 모범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눈에 보이는 보장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그를 큰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고 그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고향을 떠나서 미지의 세계로 담대하게 나간 인물입니다. 그는 백 살이 다 되도록 아들이 없었지만, 그의 후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게 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어떤 사실을 머리로 수긍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자기 생을 전적으로 맡기는 것이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하나님의 약속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근거하여, 믿는 사람들에게”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갈 3:22; 롬 4:23-25).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어서 받게 된 복을 이제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알게 해 줍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을 전적으로 맡기는 것이며 그의 약속을 믿고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표현은 바울의 전문 용어인데(롬 3:22; 갈 2:16; 3:22; 빌 3:9), 여기서 믿음의 대상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한 인격체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갈 2:20), 또는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 것”(갈 3:26)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그의 삶 전체를 온전히 그리스도께 맡기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나 바울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크리스천의 믿음의 주요한 특징을 이룹니다. 즉 크리스천의 믿음은, 어떤 사실이나 교리를 머릿속으로 수긍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에게 자신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 약속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크리스천의 믿음은 엄밀히 말하면 후자이기 때문에 그 차이가 무엇인지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어찌하여 아브라함에게 준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서 이루어졌다고 했을까요? 그 대답은 예수에게 있습니다. 예수야말로 믿음의 의미를 완전히 새롭게 만든 장본인이기 때문이죠.
바울과 히브리서 기자가 아브라함을 믿음의 인물의 모범으로 제시한 점에서 유대 사람들에게서 어떤 사람이 믿음의 인물로 받아들여졌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 외에도, 아벨, 에녹, 노아, 사라,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라합,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그리고 예언자들을 믿음의 인물들로 열거하고 있어요(히 11). 이들은 모두 이스라엘에서 존경받는 조상들입니다. 그들이 믿음으로 산 사람들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들의 면면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믿음의 인물을 보는 눈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가운데 민족을 위하여 큰 공을 세우거나 헌신한 영웅들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별처럼 빛나는 인물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믿음의 인물로 보는 것은 히브리서 기자의 관점만은 아니며, 당시에 일반화된 관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믿음이 좋다고 칭찬한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과는 너무나 다른 사람들입니다. 예수가 사람들의 믿음을 칭찬할 때 자주 사용한 전문 용어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표현이죠(마 9:22; 15:28; 막 5:34; 10:52; 눅 7:50; 8:48; 17:19; 18:42; 참조. 마 9:29). 이 칭찬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병마나 장애, 또는 세상 사람들의 멸시에 시달려서 비참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어디에도 영웅처럼 빛나는 모습은 없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귀신들린 딸을 구하기 위해서 예수에게 왔지만, “아이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매정한 말만 듣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굴하지 않고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하고 말했을 때 예수는 그 여인의 믿음이 크다고 했습니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 앓던 여인이 군중을 헤치고 예수에게로 가서 그의 옷에 손을 대었을 때, 눈먼 바디매오가 낫기를 간절히 소망했을 때, 어느 죄 많은 여인이 예수에게 와서 향유를 붓고 눈물을 흘렸을 때, 고침 받은 나병환자 열 사람 가운데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만이 예수에게 되돌아와서 감사를 드렸을 때, 예수는 그들의 믿음을 칭찬하면서 한결같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믿음에 대한 이보다 더 큰 칭찬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가 칭찬한 이 믿음은 바울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는 구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스스로는 자기의 병이나 장애, 그리고 희생자를 사로잡고 있는 귀신을 이길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가 병자들을 고쳐 주고 귀신을 내쫓아 주시며 장애 있는 사람들을 회복시켜 준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고 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가 어루만져 주기만 하면, 아니 예수의 손끝이나 옷자락만 닿아도 자기들의 병이 나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마지막 희망을 예수에게 걸고 온전히 자기 자신을 예수께 맡겼습니다. 이것을 예수는 믿음이라고 칭찬한 것입니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그들은 예수가 고쳐줄 것을 믿기만 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은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들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실낱 같은 희망이라도 붙들고 마지막까지 예수에게 손을 뻗었습니다. 때로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예수마저도 거절하는 말을 할 때도, 그들은 굴하지 않고 예수에게 반문을 하고, 소리를 지르며,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예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그들의 이런 적극적인 행동을 믿음이라고 격려해 준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지붕을 걷어 내고, 구멍을 뚫어서, 중풍병 환자를 달아 내렸을 때, 예수는 그들의 그런 적극적 행동을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막 2:5). 간질병 걸린 아이의 아버지에게 예수는 “믿는 사람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때 아이의 아버지는 큰소리로 “내가 믿습니다. 믿음 없는 나를 도와주십시오” 하였습니다(막 9:23). 믿는다고 하고서 바로 믿음 없다고 하니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이 말이야말로 그들의 믿음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그들의 포기하지 않는 믿음은 예수는 꼭 그들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바로 이 믿음을 예수는 크게 칭찬한 것입니다.
이로써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복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브라함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작은 사람들에게서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는 그들을 믿음의 인물들로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들을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들이는 바로 이런 예수의 사랑에서 믿음의 의미는 완전히 새롭게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믿음은, 평생 동안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 그 약속을 의심하지 않으면서 존경받을 만한 삶을 산 사람에게만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낮고 작은 사람들일지라도, 큰 미덕이나 공이 있기는커녕 병마와 장애와 시련 속에 시달리는 사람일지라도, 예수에게 가기만 하면 자기가 나을 수 있다는 믿음 하나로 어떤 장애물도 물리치고 예수에게 나오는 사람이 믿음 있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이후에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하는 상황에서, 이런 믿음을 좀 더 체계화하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런 믿음으로만 우리는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고, 죄를 용서받을 수 있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 믿음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고 더욱 분명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고상한 성품이나 기질을 갖추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실을 수긍하거나 교리를 믿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기만 하면 내 병이 나으리라 믿고 전력을 다해서 예수에게로 나갔던 그 병자들처럼, 예수에게 모든 희망을 걸고 자기의 온 존재를 예수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후대로 가면서 믿음이라는 단어는 이와는 좀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바울보다 훨씬 더 후대에 나온 목회서신에서는 믿음이 경건, 절제와 같은 신자의 덕목 가운데 하나로 나온다(딤전 1:14.19; 4:12; 6:11; 딤후 2:22; 3:10). 또 요한복음이나 요한일서 등에서는,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 또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는 가르침, 곧 교리를 믿는 것에 대한 언급도 나옵니다(요 20:31; 요일 5:1.5). 요한복음과 요한일서는 이단들이 나타나고 기독교 공동체가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쓰여졌기 때문에, 이런 분명한 신앙고백이 강조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는 그에게 나아온 병자들의 믿음을 칭찬하고 격려해 주었으며, 그들의 병을 고쳐주고 귀신을 쫓아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귀신이 쫓겨나가는 그 현장에서 이미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졌다고 선언했습니다(눅 11:20). 하나님 나라는 역사의 끝에 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그와 함께하는 동안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바로 이 기쁨, 이 구원, 이 승리를 미리 맛본 사람입니다. 그것을 선취(先取)라고 한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막 1:14),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눅 6:20),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왔다”(눅 11:20),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눅 17:21), 이런 힘 있는 선포로 어깨가 처져 있고 풀이 죽어 있는 작은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고 용기를 북돋워 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이렇게 선포한다고 해서 그들이 당장 아무 고생도 하지 않고 아무 불만이 없는 낙원에서 살게 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가난과 질병, 박해와 시련에 시달렸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런 시련은 그들을 좌절하게 하지 못합니다. 예수와 함께하는 동안 그들은, 자신들이 열등하거나 불운하거나 저주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며 하나님 나라의 주역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하고 난 다음에 그들만 이 땅에 남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고난 받은 예수는 부활하였으며 다시 온다고 믿었습니다. 그가 다시 오는 날에 온전한 구원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구원은 알 수 없는 것이거나 연기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를 믿는 가운데 구원을 미리 맛보았으며, 이미 승리를 선취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이미 승리를 선취하고서 사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아무런 문제도 겪지 않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재난을 당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대개 세상 사람들만큼 약삭빠르게 살거나 기회주의적으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손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자기 이익을 따라서 줄을 바꿔서고 배신하기도 하면서 때로 출세를 하기도 하는 세상 사람들을 보면서 믿음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에 시달릴 수도 있습니다. 소신과 지조를 지키면서 믿음으로 살기보다는 타협하면서 적당히 살아가는 것이 현명한 것이 아닌가 하고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이런 유혹을 거뜬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손해를 보는 것 같고 억울한 것 같아도 불안해하거나 초조해하지 않고 꿋꿋하게 자기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는,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하는 예수의 선포(요 16:33)에서 이미 승리를 선취하고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이미 이겼다는 이 선포야말로 복음의 핵심이요 바울이 애써 전하려고 하는 것의 진수입니다. 예수 믿고 산다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과 다른 ‘유별한 복’인 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는 예수의 선포를 믿고 나도 승리를 선취하며 산다면, 그는 진정으로 ‘믿는 사람’ 또는 ‘믿음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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