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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8: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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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물구나무를 서면
눅18:1-8
성서가 주요 주제로 다루는 문제는 ‘죄’입니다. ‘죄’는 모든 인간의 존재론적 밑바탕에 깊이 뿌리를 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당연합니다. 우리가 ‘죄’를 말 할 때 그것은 구원과 연관 지어서 생각하고 말합니다. 이 경우에 사죄 즉 죄의 용서가 모든 논의의 목표점이죠.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죄의 용서를 강조하는 자리에는 오로지 ‘죄인’의 운명이 관심의 초점(焦點)이 됩니다.
그런데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수직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만이 아니죠. 죄는 또한 인간과 인간 사이에 행하여집니다. 이러한 종류의 죄가 행해진 자리에는 죄를 범한 죄인과 그 죄의 피해자가 있기 마련이겠죠? 죄인은 가해자입니다. 피해자를 시야(視野)에서 완전히 배제한 채 오로지 가해자인 죄인과 그의 죄 용서를 목표로 삼는 것은 인간을 개체적 존재로 고립시키며 결국에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히게 만듭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신학이 전개하는 죄론(罪論)은 일방적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죄의 문제를 오로지 죄인의 입장에서 보고, 죄와 부정(不正)의 희생자들을 고려하지 못했습니다. 가해자만 말하고 피해자는 생각 밖으로 던져둔다는 말입니다.
지금껏 교회는 죄인과 관련된 신학 사상을 많이 개발했지만 죄의 희생자는 염두에 두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교회는 죄 문제의 주요한 한 측면을 간과한 것입니다. 교회는 죄의 희생자들이 당하는 고통을 외면했습니다. 이것은 성서의 양면성이나 통일성에 위배 됩니다. 지금 우리는 기독자의 관점 전환이 절실히 요청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개인적이나 사회적인 무슨 문제가 발생하면 우리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쌍방에 대해서 이해를 갖기 보다는 어느 한쪽으로 편이 되어 기울어집니다. 어쩌면 이런 사회 현상은 기독교의 ‘죄’에 대한 가해자적인 입장에 대한 이해와 가치가 진리처럼 고착되었기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신학도 신앙도 때때로 물구나무를 하고 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야 균형 잡힌 전체성의 신앙에 이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텍스트로 삼은 본문은 누가복음 18장 1-8절입니다.
문장의 구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도입(1절)/ 비유(2-5절)/ 적용을 위한 연결 고리(6절)/ 적용1(7-8절)/ 적용2(8절)입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인물은 셋이죠. 혼자 사는 여인, 재판관, 그 여인에게 해를 끼친 사람입니다. 혼자 사는 여인은 당시대의 사회적 약자의 전형입니다. 재판관은 부당하게 침해를 당한 사람의 권리를 되찾아 주는 기능을 행사하는 사람이고요. 어떤 여인이 재판관에게 그녀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고 있는 상황은 무엇이 문제가 되어 있는지를 이미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그녀의 마음에 맺힌 한(恨)을 치유 받기 위하여 심리 상담자나 정신과 의사를 찾아간 것이 아니라, 그녀가 침해당한 권리를 회복하기 위하여 재판관을 찾아간 것입니다. 이 여인은 자기의 권리를 침해한 가해자를 ‘송사하는 사람.안티디코스’(antidikos)이라고 부릅니다. 개역성경에 ‘원수’라고 번역한 것은 조금 무리입니다. 이 여인이 재판관에게 호소하는 말은 “저에게 억울한 일을 만들어준 사람이 있습니다.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였습니다. 가해자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여인은 5절, 7절, 8절에서도 되풀이 합니다.
그러면 이제 재판관은 공정한 판결을 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겠죠. 가해자의 입장을 취급하는 게 아니라 피해자의 입장에서 그리해야 합니다. 그러나 약자는 공정한 재판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비유 이야기에 등장하는 재판관과 같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재판관한테 미약한 여인의 억울한 사정이 공정하게 처리되기를 바랄 수 없습니다. 이 여인이 그러한 형편을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불리한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절망하지 아니하고 재판관에게 호소하기 시작했고, 당장 아무런 응답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낙망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졸라댔습니다. 재판관은 처음에는 여인의 호소를 들어주려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끈질긴 간청에 못 이겨 결국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었습니다.
자, 우리가 이 말씀을 들을 때 무엇을 말하려고 하신다고 느껴집니까? 먼저 이 말씀을 듣는 대상은 누구입니까?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예수의 비유에는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하나는 예수를 비난하고 비방하는 적대자들에게 던지는 공격과 질책성의 비유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제자들에게 주는 교훈과 격려성의 비유입니다. 여기에 비추어 본다면 이 ‘여인과 재판관에 관한 비유’는 누구에게 하시는 말씀일까요? 그렇습니다. 제자들을 가르치고 격려하기 위하여 말씀하신 비유임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가 가르치려고 한 것은 무엇이며 또는 격려하려고 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여인과 재판관 중에서 어느 쪽이 이 비유의 주인공이냐에 따라 달라지겠죠? 여인이 주인공이라면 여인의 행동을 제자들이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즉 이 여인처럼 하나님의 백성은 어떠한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절대로 절망하지 말고 역사의 최종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나 재판관을 주인공으로 본다면, 하나님은 끝내는 자기 백성들이 당한 억울한 일을 해결해 주시는 분이시라는 확신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람을 존중하지도 않는 재판관이라도 이렇게 할진대 하물며 하나님께서야 더욱 그렇게 하시지 않겠느냐고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짐작이 되죠? 좀 더 이해를 도와 드리겠습니다. 이 비유는 도입문 하나와 적용문 두 개가 붙어 있습니다. 도입문은 예수께서 무슨 취지로 이 비유를 말씀하셨는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먼저 도입문은 이것입니다.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고 되어 있어요. 즉 이 비유의 취지는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도록 제자들을 격려하는 것입니다.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요? ‘늘 기도하는 것’과 ‘낙심하지 않는 것’은 별개의 두 사항을 단순히 병렬한 것이 아닙니다. 두 개를 내용으로 하나의 초점에 모으는 데 쓰고 있습니다. “늘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에서는 ‘낙심하지 말라.’는 데 역점이 놓여 있습니다. ‘늘 기도한다’는 것은 낙심하지 않는 자세의 한 구체적 표현이며 낙심하지 않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기도 하다는 말이죠. 늘 기도하는 사람은 절대로 낙심하지 않습니다. 낙심하지 않는 사람은 늘 기도합니다. 만일 도입 문이 “낙심하지 말고 늘 기도하여라”라고 표현되었다면 ‘늘 기도하여라’에 역점이 놓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대다수의 주석서들이 “늘 기도하여 낙심하지 말아라”라는 표현을 “낙심하지 말고 늘 기도하여라”라는 뜻으로 뒤바꾸어 풀이해 놓고 있습니다. 만일 늘 기도하는 데 역점이 놓였다면 여인의 행위는 늘 기도하는 사람의 삶에 대한 하나의 모범으로 제시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틀린 해석입니다. 두 번째 적용문이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기도하는 사람을 찾아볼(또는: 기도 소리를 들어볼) 수 있겠느냐?”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다.
적용문은 비유의 의미를 현실에 응용하는 말이죠. 첫 번째 적용문은 하나님은 이러이러한 분이시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두 번째 적용문은 하나님의 백성이 믿음을 상실할지 모른다고 경고하는 것이고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밤낮으로 부르짖는, 택하신 백성의 권리를 찾아 주지 않으시고, 모른 체하고 오래 그들을 내버려두시겠느냐? 하나님께서는 얼른 그들의 권리를 찾아 주실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적용문입니다. 이 내용 어디에도 하나님은 이러이러한 분이시라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즉 하나님의 본성에 관한 정보 제공이 그 목표가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나 이미 하나님은 이러이러한 분이시라는 사실은 하나의 대전제로 제시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이러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절망해서는 안 된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절망해서는 안 된다”이걸 말하려는 것이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려 주려는 게 아닙니다. 두 번째 적용문이 그걸 다시 확인을 하는 겁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여기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뜻하죠. 기도 열심히 하는게 아니에요. 믿음은 하나님의 역사 운행에 대한 신뢰입니다. 하나님은 밤낮으로 부르짖는 자기의 백성을 오래 모른 체하지 아니하시고 얼른 그들의 권리를 찾아주시는 분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절망하여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지탱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하는 겁니다. 그것은 곧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절망하지 말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라는 거죠.
이 비유를 통하여 드러나는 것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하나님의 백성의 사회적 신분입니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무력한 피해자였죠. 여인이 바로 그 피해자예요. 피해자를 위한 말씀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억울한 일을 당하고 살아갑니다. 그들은 그들의 문제를 해결할 가망성은 이 세상 안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그래서 모든 희망을 오직 하나님께 둡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밤낮 부르짖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역사 운행을 신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역사를 바로 세우시고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시리라는 것을 믿고 어떠한 역경에서도 낙망하지 않습니다. 역사에 대한 종말적 희망은 역사의 점진적 발전에 근거한 순진한 낙관론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난관에 부닥치더라도 좌절을 거부하는 철저한 믿음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 개개인을 그의 사회적 관계에서 유리시킨 채 ‘죄 투시경’으로 ‘신체검사’를 실시하여 하늘나라로 보내거나 지옥으로 보내는 처사가 아니라, 인간관계에서 일어난 잘못을 바로잡는 일이며 역사를 새롭게 세우는 일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여인과 같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거꾸로 바라볼 때에 세상은 하나가 됩니다. 성서가 지니는 이런 통전 적 시야를 잃게 되면 그만 애꾸눈의 사람이 됩니다. 오늘 우리 사회를 양극화 사회라고 합니다. 그래서 대립과 반목과 갈등이 멈추지 않습니다. 딱히 문제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지 못합니다.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인 무슨 문제가 발생하면 우리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쌍방에 대해서 이해를 갖기 보다는 어느 한쪽으로 편이 되어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사람 중에 기독자들은 세상과 종교적 습관을 거꾸로 보는 시야가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생명의 강이 되어 흐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마음으로, 생각으로 세상이 생명으로 출렁이게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신학을 거꾸로 보고 세상을 뒤집어 살기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 지지 않은 ‘한 사람’이 됩니다. 그걸 하나님이 바라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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