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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전13:8-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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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그날을 기다리며
고전 13:8-13
8절에서 바울은, 예언도 사라지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사라질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들은 모두 고린도교회의 열광적 신도들이 자신들의 신앙의 열심을 입증해주는 것으로 자랑하던 것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것들이, 온전한 것이 아닌 부분적인 것들이며(9절). 어린아이의 일 곧 유치한 신앙이라고 합니다(11절).
어린아이는 항상 자기중심적이어서, 부분적인 것을 일반화하는 특성을 갖고 있지요. 세상에서 자기 아버지가 제일 힘이 세며 어머니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소풍 가기 때문에 날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이런 어린아이의 생각을 극복하지만, 종교에서는 예외인 것 같습니다. 많은 성인들이 여전히 신을 부족신의 형태로 이해한다는 측면에서 말입니다. 구약성경은 이런 신앙을 뒷받침해주는 증빙전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앞세워 가나안으로 진군하는 성서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은 오직 유대인들을 위하여 이민족을 점령하시는 분으로 이해됩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그 본래의 맥락에서 벗어나서,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를 쟁탈하고, 강대국이 이민족을 진압하는 것을 정당화해주는 성서적 전거들로 악용되곤 하였습니다.
이러한 유치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진노하고 보복하는 존재로 그립니다. 노아의 홍수는 신화적인 이야기지만, 그들은 이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합니다. 그리하여 이 이야기에서 죄 많은 인간들을 싹 쓸어버리는 진노하는 신의 이미지를 얻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에서는 진노하여 온 도시를 유황불로 초토화하는 신의 이미지를 얻습니다. 그리하여 수십만이 사는 도시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수백만의 유대인들을 가스로 청소해버리는 그런 잔인한 행동들 저지른 장본인들 배후에는 크리스천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유치한 신앙의 절정은 병으로 인간을 징벌하는 신의 이미지입니다. 유럽에서 페스트가 창궐하여 유럽 인구의 절반 가까이를 죽게 만들었을 때, 당시 교회 신부들은 그것이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해석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그것은 페스트균에 의한 것이며 그 균을 옮기는 것은 쥐임이 밝혀져서 하나님의 진노나 징벌과는 상관없음이 밝혀졌지요.
티모씨 드와이트(Timothy Dwight)는 장로교 목사이며 1795년부터 1817년까지 예일대 총장을 지낸 저명한 종교지도자인데, 그는 당시 새롭게 발견된 천연두 백신 접종에 반대하면서 설교하기를, “만일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어떤 사람은 천연두로 인해 죽도록 예정하셨다면, 백신 접종이라는 꾀를 써서 그 예정을 회피하고 무효화시키는 것은 무서운 죄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천연두 백신을 맞아도 소용없을 거라는 뜻입니다.
벤저민 프랭클린이 피뢰침을 발명했을 때도 종교 지도자들은 ‘벼락이란 신이 악한 자에게 내리는 형벌’인데 인간이 그것을 인위적으로 막는다는 것은 불경하다며 반대했습니다.
바울은 10절에서“온전한 것이 올 때에 부분적인 것은 사라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1절에서는“내가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다”고 합니다. 우리가 거듭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이런 온전하고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가기 위함입니다.
성서 이야기 속의 하나님은 남성이며 막강한 전사의 이미지입니다. “만군의 주 하나님”이라는 성서의 표현은 “군대의 하나님”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은 뿌리 깊은 부족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으며, 하나님의 대외정책은 명백히 친유대적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이집트인들에게 엄청난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약탈하도록 이끌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과 계속되는 충돌에서도 그의 백성을 옹호했고요.
이와 같은 부족적인 뿌리를 갖고 있는 신관에서 생성된 기독교의 하나님은 기독교 역사에서도 여전히 부족적 권능을 행사했습니다. 이를테면, 312년에 로마제국을 장악하기 위한 밀리비안 다리의 전투에서 이 하나님은 콘스탄틴 황제를 도와 막센티우스를 쳐부수도록 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즉 그가 전투가 있기 바로 전날 밤에 하나님은 하늘에 십자가의 표지를 내걸었는데, 그 밑에는“이 표지로 정복하라”는 말이 새겨져 있었다는 거죠. 이 표지는 콘스탄틴 황제가 하나님의 선택된 자임을 알려주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결국은 전쟁에 승리한 콘스탄틴은 기독교를 313년에 공인하여 국가의 종교가 되게 하잖습니까?
스페인 무적함대가 1588년 영국으로 향하다가 폭풍을 만나 파괴되었을 때, 이 사건은 흔히 스페인의 가톨릭 신이 영국의 프로테스탄트 신에 의해 패배한 것으로 해석이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은 스페인 군대를 파멸시키기 위해 하늘에서 폭풍을 내려 보냄으로써, 영국의 역사는 성서에서 하나님이 사랑하신 백성의 지위를 차지한 것으로 해석되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 이해는 확고하며 보편적으로 믿어졌고, 기독교인들은 근대가 시작되기 전까지 1600여 년 동안 본질적으로 이런 신앙을 간직해 왔으며, 오늘날까지도 이런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우리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고려시대에 몽고군사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나섰다가 일본에 도착하기도 전에 거센 풍랑을 맞아 실패한 역사가 있습니다. 그때 일본사람들은 그것이 자기들의 신이 지켜준 것이고 그 바람을 ‘신풍’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 신을 믿는 자들이 천황에게 목숨까지 바치는 헌신을 끌어냈고, 가미가제특공대라는 지극히 종교적인 군인들을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일본에게 식민통치를 받던 시절에는 한국 사람도 그런 이야기를 믿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미신 같은 이야기를 믿을 사람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영국을 위해서 폭풍을 일으켜서 스페인 함대를 수장시켰다는 영국 사람들의 주장에 대해서 스페인 사람들은 터무니없고 유치하다고 느낄 것입니다. 혹은 일본 사람이나 영국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성숙한 사람이라면, 그런 신앙을 군국주의적인 것이고 유치한 것으로 여겨 믿지 않을 것입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 부분적인 것은 사라지며, 어른이 되면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게 된다는 것을 이런 역사적인 사실 앞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면 신앙은 어떻습니까?
구약성서는 이런 부족적인 신이나 민족적인 신을 옹호하기 위한 경전이 아닙니다. 이미 구약성서 안에서 이러한 하나님 이해에 대한 반성이 있고 그것을 극복하는 새로운 하나님 이해가 나왔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법궤만 갖고 있으면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여 백전백승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법궤를 빼앗기는 일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이 법궤를 대신 지켜주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지 않으실 수 있음을 그들은 뼈저리게 느껴야 했습니다. 마카비서에서는 적군이 쳐들어와도 안식일이기 때문에 무기를 들지 않아서 참패를 겪는 역사가 나옵니다. 안식일을 지키면 하나님이 대신 지켜줄 줄 알았으나 실제 역사는 반대였습니다. 그들은 비싼 대가를 치르고서 하나님은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을 위하여 대신 전쟁을 해주는 분이 아님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북왕국 이스라엘은 다윗왕조도 아니고 예루살렘 성전도 없으므로 망하지만 남왕국 유다만은 절대로 안 망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바빌로니아에 의해 성전이 파괴되고 왕의 눈이 뽑히고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가도 하나님은 그들 앞에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바빌론 유배지에서 뼈저리게 느껴야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부족신이 아닌 분이라는 것을 말이죠.
이제 부분적으로 타당한 하나님 상이 아니라 더 온전한 하나님 상을 찾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족장들을 쓰셨지만 이제는 이방왕 고레스를 쓰시는 분으로 이해됩니다. 이사야 45:1에서는 페르시아왕 고레스를 ‘마시아’(기름부어 세운 자)라고 불렀습니다. 그 이유는 유대민족이 고레스왕, 즉 율법도 모르고 야훼라는 이름도 모르는 사람의 생애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역사 속에서 성취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예언자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말씀의 선포를 위해 소명을 받은 때는, 에스라라의 영도 아래 전개된 유대 개혁운동이 이방인과 혼인한 자들과 혼혈아들을 축출하던 바로 그 때였습니다. 요나서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인위적으로 제한한 것에 대한 항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비슷한 주제가 룻기에서도 나옵니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포로기 이후 시대의 열렬한 애국자들이 다윗 왕을 진정한 유대인으로 옹립하고 그 왕위를 회복함으로써, 이스라엘이 그의 원수들을 다시금 지배하고자 하는 국민의 열망을 표현하던 때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생활 속에서는 인종차별별주의도 어느 정도 드러나 있었는데, 다윗을 자신들의 인종적 우월성을 보여주는 “최우수품”으로 선전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응하여, 룻기라는 작은 책의 저자는 아주 정겹고 사랑 소설 같은 재미난 이야기를 통하여 매우 중요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룻이라는 모범적인 젊은 모압여인은 유대인 남편이 죽어 과부가 되었지만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유대인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살면서 모범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그의 신실성은 보아스와 혼인함으로써 보상을 받게 됩니다. 유대인 보아스와 모압인 룻의 결합으로 태어난 아기의 이름은 오벳입니다. 그는 이새의 아버지가 되었고, 이새는 존경하는 다윗 왕의 아버지였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가장 위대한 왕이 8분의 1은 모압인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것은 이미 구약성서 안에서 부족신이나 인종차별주의는 이미 온전하지 못하고 유치한 단계의 신앙임을 깨닫고 더 온전하고 성숙한 신앙을 향하여 나아가는 신학의 순례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2절에서 바울은“지금은 우리가 거울 속에서 영상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마는, 그 때에는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밖에 알지 못하지마는,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고 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보려고 하고 알려고 하는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바울 같이 훌륭한 분도 하나님을 자기가 다 안다고 하지 않고, 거울 속 영상처럼 희미하게 본다 하고, 부분밖에 알지 못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이미 모든 것을 다 보고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굴고, 우리가 진리를 독점하고 있는 것처럼 타교단과 타종교에 대해서 배타적이 되는 것은 교만이요 독선입니다. 바울과 같이 자기가 아는 것을 일시적이요 부분적인 것임을 고백하는 솔직함과 겸손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순례자의 여정에 필요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여정에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는데 그것은 오늘 본문의 처음과 나중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8절에서 바울은 예언도 방언도 지식도 사라지지만“사랑은 없어지지 않습니다”고 하며, 13절에서는,“으뜸은 사랑이다”고 합니다. 결국 우리가 온전한 지식을 갖게 되는 비결도, 하나님을 희미하게 알지 않고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알 수 있는 비결도, 그것은 사랑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결론이요 유치하지 않은 성숙한 신앙의 비결이기도 합니다.
요한일서에서도,“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되는 것입니다”(요일 4:12)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런 깨달음을 우리에게 주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유대교는 다분히 부족적인 종교였고 바리새파와 율법학자들도 율법을 이런 식으로 이해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오시면서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은 할아버지의 모습이 아니라 아기 예수의 모습 또는 젊은 청년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전사의 모습이 아니라 사랑이 많으신 인자한 분 십자가에 달리신 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부활절 사건 이후에, 바울 사도는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계승해서, 우리 몸이 성령의 전이라고 하고 우리 몸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몸은 선택받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사람일 수 있었고, 성별된 제사장의 몸이 아닌 세리와 죄인의 몸일 수도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고,“그 날에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요 14:20)라고 하셨습니다. 저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은 바로 청년 예수 안에 현존하셨고, 이제 그 예수는 특별히 성별된 어느 백성이나 특권층에게가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우리 안에 임재하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가부장과 제왕 그리고 제국주의의 이미지는 사라지고, 사랑하는 형제자매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현존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보고, 보혜사 성령의 역사를 보는, 완전히 새로운 하나님 이해, 완전히 새로운 역사관이 출현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한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마주대고 보는 경지입니다. 우리 모두의 신앙과 신학의 여정 그리고 순례에, 바울이 말한‘그 날’, 하나님을 얼굴을 맞대고 보고 내가 하나님을 온전히 알고 충만하게 알게 되는 그 날이 속히 오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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